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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상담 주제 탐색 - 부조리에 대한 성찰
이진오
‘부조리(不條理)’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면서도 낯선 말이다.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제도나 관행에 대해서 우리는 ‘부조리하다’고 말한다. 부정과 부패와 편법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관행이 된 상황을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 이라고 부른다. 논리적으로 모순되거나 이해하기 힘든 주장에 대해서는 ‘부조리하다’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소위 시대정신(Zeitgeist)의 하나로서 ‘부조리’에 대해서 들어봤거나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으로서의 ‘부조리’를 이야기할 때는 세계 1, 2차 대전을 전후하여 합리성에 반기를 들고 등장한 실존철학자들이 주창한 ‘부조리(absurd)’에 초점을 맞춰야한다.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제도나 관행 그리고 부정과 부패와 편법을 의미하는 ‘부조리’는 우리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논리적 모순은 부조리의 일종이긴 하지만 모순된 항들의 관계가 명백하기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정리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현대사회의 시대정신으로서의 ‘부조리’는 형식논리의 파악범위를 넘어서 비결정성과 애매성을 지닌 채 우리의 삶을 혼란과 진공상태에 빠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때의 ‘부조리’를 이 단어가 일상적인 의미로 쓰일 때와 구분하기 위해 ‘철학적 부조리’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르트르나 카뮈 등 현대 서양사상가들이 말하는 부조리는 우주에서 인간만의 특별한 존재위상과 내세를 강조하는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적 인간론이 와해됨으로써 발생한 혼란 속에서 부각된 것이다. 현실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인간에 주목하며 그의 본성을 규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전통 속에서 생활한 한국인에게는 사르트르나 카뮈 등 서양사상가들이 절규하듯 ‘부조리’ 문제를 고발하는 것에 공감하기 힘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문화와 동양문화를 단순하게 가르고, 한국인을 동양문화권에 국한 시킨 후 철학적 부조리 문제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타당할까? 아마 이런 이분법적 접근은 경직된 문화결정주의이며 혼성문화시대의 흐름에 대한 무지일 것이다. 불교와 유교의 전통이 내면화된 한국인이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 사상을 이해하고 따르기도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성을 때문이다. 이런 개방성은 타자에 의해 명료화된 내 안의 다양한 존재성격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철학적 부조리를 이해하고 사르트르와 카뮈, 베케트 등의 부조리극을 감상하며 공감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도 우리의 삶 안에 현대 서양사상가들이 지적한 세계와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잠복돼 있어서다. 과도한 경쟁과 물질적 욕망에 이끌려 현실문제에 매달리며 살아가는 한국인의 자살률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인의 의식 밑바닥에 ‘내가 무엇 때문에 살지’, ‘이렇게 꼭 살아야하나?’라는, 사르트르와 카뮈의 부조리의식을 이끌었던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허무주의와 죽음으로의 도피의식인 타나토스가 그 어느 문화권 사람들에게 보다 더 심각하게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은익된 채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철학적 부조리 의식의 실체를 실존철학자들의 부조리에 대한 논의를 사르트르와 카뮈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사상가들의 부조리에 대한 통찰은 무엇보다도 세계와 인간존재에 대한 비극적 관점에 근거를 둔 것이다. 염세주의는 그런 비극적 관점 중 하나다. ‘염세주의(pessimism)’라는 말은 ‘가장 안 좋은 상태’를 나타내는 라틴어 최상급 ‘pessimum'에서 유래한 것이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현명하게 살려면, 긍정적인 것만 봐서는 안 되고 가장 부정적인 모습을 직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의 뒤를 이어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를 최초로 철학적인 주제로 조명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죽음으로 끝나는 삶의 무의미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투쟁에 몰두하는 삶의 부조리성에 직면한 인간은 불안과 절망에 휩싸이게 될 수밖에 없다. 키르케고르 이전에 유럽사회는 죽음이 야기하는 삶의 무의미성과 부조리성 그리고 이에 따른 부정적인 세계관과 불안과 절망 등 부정적 감정을 기독교적 인본주의와 내세신앙으로 억제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계몽주의 운동으로 기독교는 그런 기능을 할 권위를 크게 상실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니체는 허무주의로 표현한다. 실체야 어쨌든 희망을 걸만한 불빛이 사라진 허무의 바다에 던져진 인간은 끝내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게 된다. 불안과 절망감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과 절망을 피하기 위해 군중 속에 함몰되어 스스로를 망각하며 살게 된다. 이로써 자신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군중이 원하는 타자의 삶을 사는 괴상한 일이 일상이 된다. 피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 운명적으로 던져졌던 인간이 자신마저 기만하는 가면으로 그 부조리한 상황에 적응하면서 또 다른 부조리에 빠지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부조리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회중심의 대중적인 신앙이 아니라 각자가 신 앞에 서서 자신의 삶을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스스로 구원하는 개인중심 신앙인 단독자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과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여 부조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런 시도는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설득력을 얻기가 쉽지 않다.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우주가 새로 열리는 충격을 받았다는 니체는 염세주의를 허무주의로 심화시킨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주장은 기독교 신앙에 의해 유지되던 모든 가치관과 도덕과 인간관이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는 선언이자 허무주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선언이다. 니체에 따르면 세상에는 원래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다. 인간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선과 악을 절대적인 것 인양 구별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이 허상을 진리처럼 여기며 살아야하는 이런 상황이 니체가 주목한 삶의 부조리성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벗어나야한다. 이제 인간은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 왔던 것이 틀릴 수 있고, 지금까지 틀렸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옳은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한다. 부조리를 부조리로 인식하는 자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 위에서도 춤출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길이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고 규정하고, 이런 인생에서 해탈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니체는 모든 인생이 고통이라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해탈을 거부한다. 해탈은 자신의 한번뿐인 삶에 주인으로 서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는 반복되는 일상과 죽음과 같은 고통을 포함한 피할 수 없는 모든 필연적인 일들을 운명으로 인정하고 사랑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운명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삶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하고 싶은 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할 때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니체의 이 역설적 해결책 속에는 상식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부조리성이 존재한다. 이때의 부조리성은 주어진 부조리성을 의지적으로 헤쳐 나가려는 인간의 적극적 대응이다. 이런 대응을 통해 인간은 운명에 의해 규정된 자기 자신을 초월한 자가 되고, 부조리성은 부정적인 성격을 초월하게 된다. 니체가 시도한 이런 대응 방식을 나중에 카뮈는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스 신화』에서 부조리에 맞서 휴머니즘이 나아가야할 유일한 길로 제시한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가 파악한 철학적 부조리를 소설과 수필 등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시대적인 화두로 만든 이들은 양차세계대전으로 인류가 삶의 비극성과 냉혹함을 절감한 후 등장한 사르트르와 카뮈다. 사르트르는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을 통해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와 같은 사물 그 자체를 직시할 때에 발견된 그 우연한 사실성 그것이 부조리이며, 그런 때에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어느 지방 도시에 사는 젊은 역사학자인 로캉탱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전까지 로캉탱은 18세기에 살았던 롤르봉 후작이라는 무명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전기를 쓰는 데 몰두하고 있었는데, 객관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자신의 작업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그는 공원에 있는 마로니에의 나무뿌리에 주목하며 구토를 느낀다. 로캉탱은 평소에 일정한 규칙성과 확실한 존재 이유를 추구하며 살았다. 그러던 그가 본 나무뿌리는 누군가에 그것을 “뿌리”라고 부르는 것과 무관하게 그리고 누군가 그 뿌리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리고 그 어떤 쓰임새나 목적과 무관하게 우연히 지금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 인간이 그것에 부여한 모든 명칭들을 괄호 친 채 사물 그 자체로서만 볼 때는 인간이 만든 모든 어휘와 본질규정에서 빗겨난 채 “괴상하고 무질서한 덩어리”로서만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부여해온 허망한 의미를 단숨에 벗어던지고 그것이 그 자체로 지금 여기 이렇게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보던 인간에게는 매우 낯설고 섬뜩한 것이다.
나무뿌리를 보고 통찰한 이러한 사실은 그대로 로캉탱 자신의 존재에도 적용이 된다. 그가 누구의 설계에 의해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그의 탄생이 무슨 가치가 있는 등 확인할 수 없는 이런 초월적 규정들이 맞는지 틀린지와 무관하게 확실한 사실은 그가 우연히 이 우주 한가운데 그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해변에서 발견된 조약돌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물수제비뜨기를 하기 위한 도구로의 돌도 아니며, 돌이라는 본질을 나타내는 어휘나 존재 이유와 무관하게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본질을 규정하기 전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에 로캉탱이라는 인물도, 물수제비뜨기를 하기 위한 돌도 그 자체로서는 모두 아무런 존재 이유나 목적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공연(空然)한 존재일 뿐이다. 이 냉혹한 현실은 인간이 신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그런 인간을 둘러싼 햇빛이며 나무며 물 등 모든 것도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믿었던 자에게는 낯설고 충격적이며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로 드러난다. 그러자 로캉탱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허공 속에 둥둥 떠다니는 듯하고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는다. 기존에 알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가는듯한 심한 현기증과 구토증이 그를 덮친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때 로캉탱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공원도 도시도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것들을 분명히 알게 되면 속이 울렁거리고 모든 것이 가물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구토가 치민다.” 이런 인식이 과연 실제로 구토증을 유발할지는 의문이다. 로캉탱의 ‘구토’는 자신을 지탱하던 관념이 와해되며 낯선 사막 같은 세상에 던져진 자가 느끼는 혼란과 불안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으로 봐야할 것이다. 로캉탱처럼 구토증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서 철학적 부조리성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우연히 던져진 무의미하고 목적 없는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표류하기만 하는가? 사르트르는 오히려 세계의 우연성과 존재의 부조리성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어떤 선험적 본질이나 삶의 목적에도 구속되지 않는 로캉탱은 자유로운 존재다. 존재라는 것은 본디 허무하고 반복적인 것이다. 인간은 존재의 허무와 권태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다. 로캉탱은 존재가 가져다주는 공연함에 분노하면서도 여기저기 되는대로 널려있는 존재들 속에서 본능적으로 느끼는 메스꺼움을 ‘정상적’인 것이라 여기게 된다. 이제 그는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것이며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그것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 즉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 희망은 존재의 무상함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것을 끌어안는 데서 시작된다. 인간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규정된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로운 자이고, 그래서 자신이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존재이다. 로캉탱은 과학혁명이후 와해된 존재에 대한 초월적인 규정들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새로운 본질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의식을 갖추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란 본질적인 관념이고 제1의 진리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는 또 "삶의 끝이 결국 죽음이라면 인생은 부조리한 것이다. 하지만 비록 인간의 삶이 부조리한 것이라 해도, 난 계속해서 '오직' 인간이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난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생각하는 능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내 이성을 사용해 끊임없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적이지 못한' 신의 구원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며, 미래나 영원에 대해 희망이나 기대를 갖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의 삶에 충실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육체적 고통과 인간관계의 균열은 생명(Leben)과 삶(Leben)을 지탱해주는 힘이 소진된다는 징후이며, 그 징후가 최종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죽음이다. 고통과 불안이 비극이듯이 그것의 최종적 결과인 죽음을 우리는 비극의 절정으로 볼 수 있다. 비극작품의 주인공이 황금빛 찬란한 시기를 보내다 나락으로 떨어질 때 그 운명의 비극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행복한 시간이 있었더라도 그 결말이 생애의 모든 노력과 성취를 끝장내는 죽음이라면, 그 인생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비극이라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한 순간의 사건이 생애의 전 과정을 성공과 실패, 가치와 무가치로 결정짓지는 안는다는 입장을 견지하거나 현세의 고통을 내세에 보상받는다는 신앙을 갖지 않는 자에게 "삶의 끝이 결국 죽음이라면 인생은 부조리한 것이다“는 카뮈의 주장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부조리를 직시하며 그것에 맞서서 자신의 삶을 지키려 하지 않고, 부조리를 보지 못하고 휩쓸려가며 습관적으로 삶을 이어간다. 간혹 삶의 부조리성을 충격적으로 통찰한 자들은 그로 인한 혼란과 절망을 견디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다. 따라서 이런 이들이 감행한 자살은 삶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고발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그렇다면 왜 어떤 이들은 부조리의 체험으로 인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걸까? 부조리의 성격에 대해 좀 더 살펴보아야만, 자살에 이르게 하는 부조리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살과 관련해서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멜로드라마에서처럼 하나의 고백이다. 그것은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삶 자체는 종교나 윤리 등 인간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실제로는 갖지 못 하면서 그저 습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반드시 살아야할 심각한 이유가 없다는 점과 그런데도 법석을 떨며 사는 일상이 어처구니없어 보일 때 습관에 의해 이끌려가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낯선 것으로 느껴진다. 습관에 의해 반복되는 비주체적인 삶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끼며, 삶에 대한 권태와 모욕감과 수렁에 빠진듯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살에 이르게 하는 부조리의 감정이다.
이처럼 살아야할 아무런 이유나 의미도 없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절망적 상황을 카뮈는 ‘시지프의 형벌’에 비유한다. 그 형벌은 높은 바위산 위로 거대한 바위를 계곡으로부터 밀어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시지프가 온 힘을 다해 밀어 정상에 올린 바위는 제 무게로 인해 다시 반대편 계곡으로 굴러 떨어져 버리게 되어 있다. 이때 노동은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시지프는 추락을 예견하면서도 다시 그 돌을 밀어 올려야한 한다. 추락의 순간 즉 그간의 분투가 무가 되어버리는 죽음과 같은 허무의 순간을 반복해서 겪게 하는 것이 형벌의 주목적이다. 고군분투하던 삶이 결국에 가서 맞게 될 무의미성과 허무를 통찰한 자는 절망과 혼란 속에서 부조리의 감정에 휩싸여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 카뮈에 따르면 이런 ‘부조리의 사막’에 던져진 인간은 무력함에 빠져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그것이 지닌 유일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이 세계는 엄청난 비합리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단 한번 만이라도 ‘분명하게 알겠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구원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열망뿐인 사람들은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고 모두가 혼돈이며, 인간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스스로의 명증성과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벽에 대한 명확한 인식뿐임을 공언한다.”
그런데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삶 자체만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도 마찬가지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만져볼 수 있는 세계가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나의 모든 지식은 여기서 멈춘다. 그밖의 것은 조작이다.” “내 것인 이 마음 자체조차 나에게 영원히 정의될 수 없는 것으로 머물 것이다.” 내가 나의 마음에 대해 확실하게 규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 영원히 나는 나 자신에 게 이방인일 것이다. 심리학에 있어서든 논리학에 있어서든, 여러 가지 진리들은 있으나 유일한 진리는 없다.” 카뮈는 나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자연적 풍경들에 대해서도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것에 대한 나의 직접적 체험뿐이지, 그것들의 존재이유와 목적, 방식 등을 탐구한 자연과학적 지식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 나무들이 있다. 나는 그 꺼칠꺼칠한 촉감이나 물기를 알고 있으며 그 맛을 느낀다. 여기 이 풀잎과 별들의 냄새, 밤, 마음이 느긋해지는 저녁나절들, 내가 이토록 저력과 힘을 실감하는 터인 이 세계의 존재를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상의 모든 지식은, 이 세계가 나의 것이라고 확신시켜줄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이렇듯 나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쳐줄 것 같던 과학은 가설로 끝나고, 저 명증성은 비유 속으로 가라앉고 저 불확실성은 예술작품으로 낙착되어버린다.“ 따라서 인간은 과학을 통하여 제반 현상들을 파악하고 열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론적 차원에 머물고 구체성과 친숙함을 지닌 나의 체험이 되지 못한다. 자연 속의 사물들이 나에게 낯선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부조리한 삶의 현실 밑바탕에는 있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낯설음이다. 이때 우리는 한동안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사막에 던져진 느낌을 갖게 된다. 이것은 또 다른 차원의 부조리의 감정이다.
그렇다면 카뮈 자신도 자살이라는 방식을 사막에 던져진 부조리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로 본 것일까? 카뮈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한다. “인생이 살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그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이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하기에 아무 데도 쓸모없는 진리이다.” 즉 자살은 문제가 되는 상황을 죽음으로써 소멸시키는 것일 뿐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카뮈는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우연히 우주에 던져진 삶이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삶에는 아무런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뮈는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을 ‘위대한 의식의 순간’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삶의 무의성을 깨닫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이용해 부조리에 저항하는 깨어있는 인간은 신과 같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존재를 전제하는 초월적 존재 이유나 의미에 기대는 자가 아니다. 그는 삶의 부조리성과 내 지식의 한계를 벗어나 존재하는 자연의 낯설음과 혼란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삶을 견디는 자이다. 부조리를 깨달은 자는 거짓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제공하던 모든 형이상학적 신념체계를 해체시키고, 그 신념체계에 의해 유지되던 죄의식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가치관 등 모든 억압적인 장치들을 제거한다. 사막의 밤을 견디며 걷는 자유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는 인생이 죽음으로 끝난다고 해서 즉 삶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그런 삶을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하는 능력을 발휘하며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종교가 제시하는 사후세계에 대해 기대하지 않으며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한 자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 인간(l'homme absurde)'은 이렇게 '부조리를 의식하며 거기에 맞서서 살아가는 인간'을 뜻하는 것이지 그 자신이 '부조리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부조리를 인식하며 반항하는 방식은 인간이 만든 거짓들을 해체하여 사막과 같은 삶은 견디는 적극성과 용기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거짓을 유발한 삶의 부조리성과 자연의 불확실성 자체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견디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식은 카뮈가 비판했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지 않고 초월하는 형이상학적인 방식처럼 결국은 그저 심리적 위안만을 주는 염세적인 세계관이 아닐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결코 부조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로지 일상의 번잡함에 몰두하며 부조리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일상의 권태를 자살로 끝내거나, 쳇바퀴 안의 다람쥐가 포기하지 않고 쳇바퀴를 돌리듯 탈출구 없는 반항만 할 수밖에 없는 존재란 말인가? 부조리에 대한 철학적 통찰은 염세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와 카뮈가 제시한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은 사상사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이 시도한 실존철학적인 해결책은 흔히 말하듯 실존철학 특유의 감상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 반응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오히려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던 신의 존재가 부정되고 과학적 세계관이 지배하게 된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고, 그 세계 속에서 가능한 인간다운 삶을 모색하였다. 실존주의 사상가 중 키르케고르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맹신을 비판하며 개인적 신앙에로 다시 회귀하였지만, 사르트르나 카뮈 등 대다수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시작된 과학혁명 후 와해된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주목한다.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자연과학적으로 볼 때 이 세계는 무의미, 무목적, 무가치를 특징으로 한다고 선언한다. 기독교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유지되던 인간중심주의가 해체되자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목적도 가치도 의미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이런 허무주의적이고 비극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신이 죽은 시대에 인간이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명분을 탐색한 것이다. 다른 한편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개인주의 시대의 삶의 방식에도 주목하였다. 즉 그들은 후손에 의해 종이 보존되는 방식으로는 개인의 종말을 보상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개인중심적인 사고방식이 허무주의와 비극적 인생관을 강화시킨다는 점을 통찰하고 해결책을 탐색한 것이다. 실존사상가들은 이런 탐색들은 부조리한 시대를 외면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개인이 최대한 인간의 품격을 유지하며 견뎌낼 수 있는 방식을 제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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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학기 '원격'으로 진행하게 된 <철학상담주제심화연구>의 강의원고 중 일부입니다.
감사합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윤휘종(미래의 철학상담치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