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당 임지호-두레 이숙희 '비빔밥 구로다'에 답하다
구로다 日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비빔밥이 한식 세계화의 대표선수로 적당한가요?"
산당(山堂) 가는 양평 가도(街道)는 멀었다. 두레 가는 길은 골목을 굽이쳐야 했다. 임지호와 이숙희의 삶이 그랬다. 불행이 운명에 화인(火印)처럼 찍힌 세월이다. 세상은 한식 세계화로 떠들썩하다. 그들은 "마음이 그릇이요, 천지(天地)가 밥"이라고 말할 뿐이다. 세상에서가장 맛있는 밥상은 가장 팔자 센 사람들이 만드는 모양이다. 한 일본인이 나섰다. 침묵하던 그들이 우리 밥상의 과거와 미래를 말한다.
신당 임지호 "비빔밥은 절차와 법도 뛰어넘은 자유"
"일식은 전부 줄이는 것… 한식은 하늘 감동시키는 자연"
생모는 지호의 아버지를 사랑했다. 어머니는 석 달 된 그를 아버지 품에 넘긴 날 사고로 사망했다. 본가(本家) 어머니는 그 몇해 전 외아들을 홍역으로 잃었다. 임지호(林�M鎬·55)가 집안의 대(代)를 잇게 된 사연이다.
소년은 어릴 때부터 집 밖을 떠돌았다. 어른들은 그걸 보고 수군댔다. "얼마나 구박이 심하면 저리도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할까" "새엄마가 박대한다며"…. 무심코 한 말들이 소년의 가슴에 돌팔매처럼 박혔다.
소년은 일본으로 밀항해 돈을 벌어보겠다는 야망을 품고 가출했다. 11살 때였다. 기차 훔쳐타고 도착한 부산에서 그는 며칠 만에 거지꼴이 됐다. 소년은 거기서 목포로, 다시 제주도로 흘러갔다.
몇끼 굶자 발걸음이 수제비집으로 향했다. 뜨끈한 국물이 뱃속으로 넘어가자 눈이 뒤집혔다. 두 번째 그릇을 비우고서야 '아차!' 싶었다. 식당 아줌마가 잠시 눈을 돌렸다. 소년은 냅다 밖으로 뛰었다.
거렁뱅이 소년은 돈은 벌긴커녕 아귀탕집 배달을 하게 됐다. 심부름하다 다시 부산으로 와 중국집 주방에 취직했다. 남도(南道)를 헤매다 고향 안동 땅을 다시 밟았다. 2년이 훌쩍 지났다.
■감각
임지호는 그림을 정리하고 있었다. 12일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끝난 '음식 4차원으로의 여행'전(展)에 내놓을 그림들이었다. 1주일 동안 그는 그림을 앞에 놓고 즉석 음식 퍼포먼스를 폈다.
'생명의 느낌' '영혼의 고통'…. 이런 주제의 개인전에 소설가 이외수(李外秀)가 엽서를 썼다. "이분을 부처의 뼈를 우려 사골탕을 끓이는 분이라고 남들에게 소개하길 서슴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욕 같은데….('요리로 한 소식을 했다는 뜻도 담고 있다'는 부분을 말하자) 아! 그럼 칭찬이네요."
―무슨 좋은 음식을 대접했길래.
"몇년 전 두세끼를 해줬습니다. 몸이 완전히 망가진 것 같길래. 그분 레시피는 보태고 비우고 하는 것이었어요. 겉으론 샥스핀 같은데 안에 많은 게 들어가 있습니다."
―요리사가 왜 그림은.
"3년쯤 됐어요. 음식 구상할 때 드로잉(drawing)을 했는데 음식과 그림이 똑같잖아요. 색상도, 디자인도."
―그림도 음식처럼 빨리 만듭니까.
"하룻밤에 150점 그린 적도 있어요. '불멸의 소나무'같은 건 6개월 걸렸고요, 이번에 출품한 '드뷔시'는 한 달 만에 완성했지요."
―밤을 8시간으로 잡으면 1시간에 20점인데 가능합니까.
"음식도 그림도 다 감각(感覺)입니다."
―그림이 팔립니까?
"지금까지 7~8점 팔았지요. 그 돈으로 학생들 장학금도 주고 작년 추석 때는 주변 81가구에 쌀도 보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올 6월 프랑스 행사의 '전초전'입니다."
―프랑스엔 왜?
"6월 5일 센강 유람선에서 그림 퍼포먼스를 하면서 음식을 만들고 다큐멘터리 촬영도 합니다. 7월에는 오스트리아 대통령궁의 초청을 받았고 영국에도 갑니다."
―한 방송에서 '방랑식객' 연작(連作)도 방영중이죠.
"작년에 1, 2편이 나갔습니다. 2월 7일에는 백두산(白頭山)에서 나는 걸로 음식 만드는 내용이 방영됩니다."
―백두산에서 뭘 가지고….
"낙엽이요, 우울증 치료에 최곱니다. 3년 전 낙엽으로 차를 끓여보니 효과가 좋더군요. 그거 마시면 확 풀려요."
―세상이 낙엽 천지인데, 특허라도 받지.
"자연과 같은 게 최고 보약입니다. 전 돈 벌 생각 없어요. 혼자만 공유해서 뭐해요."
- ▲ 임지호씨가 미술전시회 '음식, 사차원으로의 여행'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는“비빔밥을 양두구육이라고 하는 건 본질을 몰라서 하는말”이라고 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2년 만에 고향에 온 그는 다시 집을 나섰다. 타고난 역마살 때문이었다. 이번엔 서울로 갔다. 도마, 칼과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됐다. 곰탕집·일식집·로바다야키집·철판요리집·라면집 주방을 종횡했다.
사주(四柱)는 유전될까? 그는 큰아들(임윤현)도 자신을 닮았다고 했다. 초당대 요리학과를 나와 스물여덟에 아이 둘을 두고 요리하며 산다. 그는 아버지처럼 한식을 하다 지금은 이탈리아 요리를 하고 있다.
―왜 이탈리아 요리를.
"한식 하면 생활이 안 돼요. 월급이 적거든요. 재료비가 많이 들잖아요. 파스타나 피자는 마진이 크지요."
―아들도 가출하던가요.
"아주 어릴 때 가출했어요. 한번 붙잡아서 반 죽도록 두들겨 팼더니 다음부턴 안 하더군요, 히히."
―수십 군데 음식점을 돌아다녔으니 고생도 많이 했겠지요.
"일식집에선 주방장 하다 쫓겨났어요. 활어회는 생선을 썬 뒤 식초 한 방울 뿌리면 움직일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걸 못했어요. 주방 보조로 생선 써는 법부터 배웠지요."
―첫 음식점은 어디서.
"다대포 코오롱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함바집을 했습니다. 함바집 1년 하면 집 두 채를 산다는 말이 있지요. 전 빚만 8000만원 졌어요."
―솜씨가 없었나요.
"한 끼 값은 300원인데 재료비를 1000원씩 썼거든요. 전 소고기 수프도 한우를 사다 끓였어요. 남들은 토막 내 주는 고등어구이를 한 마리씩 줬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리곤.
"에버랜드에서 곰탕을 8개월 동안 끓이다 동료가 하던 통닭집을 인수했죠. 1주일 동안 닭을 한 마리도 못 팔았어요. 업종을 닭꼬치로 바꿔 대박 쳤는데 또 망했어요. 일수를 썼거든요. 그 뒤 한방삼계탕, 찻집, 고기뷔페를 하다 1983년 사우디아라비아로 갔지요."
―사우디는 왜?
"건설근로자 밥 해주러요. 다란에서 라팔바틴까지 1200㎞인데 중간에 근로자들이 쉬어가는 빌라가 있었습니다. 요정(料亭) 음식처럼 만들어줬지요."
―사막에 그런 재료가 있습니까.
"수입하니 재료는 많아요. 전 '기능공들 잘 먹이려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일했습니다."
―열심히 하니 보답이 오던가요.
"100일간 하루 3000끼를 만드니 총(總)주방장으로 승진시켜주더군요. 부하가 45명이나 됐어요. 당시 우리 1인당 일년 GNP를 월급으로 받았어요."
―3000끼가 가능합니까?
"현대건설은 1만8000명이나 됐는데요. 3000끼는 약과죠."
■서광(曙光)
사우디에서 돌아온 그는 서린호텔에 들어갔다. 임지호는 첫 아내와 식당에서 만나 가난 때문에 갈라섰다. 지금 아내도 전남 영광에서 영산대와 성지고 학생에게 밥 보시(布施)하며 만났다.
음식점 자리는 동갑 아내(강정애)가 잡았다. 2000평 터를 본 아내는 "풍수가 좋아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이 주효했을까, 자꾸 비껴만 가던 돈과 명성이 들어왔다. 삶에 서광이 비쳤다.
―평생 요리하며 살기로 결심한 게 언젭니까.
"30대 때 '이번 생(生)은 남에게 밥 먹이며 살자'고 결심했어요. 요리사를 천하게 여겼는데 집안에선 셋째누님만 격려해줬어요."
―이번 생이라니, 다음에도 인간으로 태어날 자신이 있습니까.
"여자로 태어날 것 같아요. 사람은 꿈꾸는 대로 된다잖아요."
―10대 때부터 음식을 만들었는데 왜 결심은 늦게.
"술 마시고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요리사들이 많았어요. 어릴 때는 말술이었는데 지금은 소주잔에 맥주 따라 마십니다."
―정착한 뒤 방랑벽이 없어졌나요.
"전국에 장 보러 갔다가 그곳 할머니들 밥해주고 오고, 뭐 그렇게 삽니다."
―장 보다 왜 밥을 해줍니까.
"한곳에서만 재료를 사면 싫어합니다. 저는 쭉 돌면서 다 사요. 다 가져올 수 없으니 즉석에서 도마 깔고 음식 대접하지요."
―그 즈음부터 해외에도 알려졌지요.
"2003년과 2006년 뉴욕의 '코리안 푸드 페스티벌'에 초청받았습니다. 독일 건강박람회에도 갔고 한·아르헨티나, 한·베네수엘라 수교(修交) 기념식에도 초청받아 갔고요."
―식당 하면 그런 인연이 따라옵니까.
"우연히 들렀던 외교관들이 연락이 와서…. 그걸 다른 데서 보기도 하고요."
―음식 재료를 현지에서 구하는 걸로 유명하지요.
"샌프란시스코에 청화스님이 지은 삼보사가 있는데 한식을 만들어달라더군요. 전 재료를 현지에서 구해요. 그 사람들의 체온이 녹아 있잖아요. 캘리포니아 주목(州木)이 아메리카 삼나무인데 그 가지에 그곳 물로 밥 짓는 게 이치에 맞지요. 한식 세계화를 우리 것 가져다 먹이는 걸로 아는데 그럼 누가 좋아하겠어요."
―2006년 12월 미국 '푸드 아트'지(誌) 커버 모델로 등장했습니다.
"코리안 푸드 페스티벌 때 그 회사 오너가 요리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센트럴파크에서 풀 뽑고 열매 주워 디너를 해주니 입이 쩍 벌어졌지요. 경찰이 알면 붙잡혀갔겠지만."
―유명해지니 좋던가요.
"예전의 빚쟁이들만 줄줄이 찾아오더군요."
■산당의 한식
본인만의 영양식을 묻자 뜻밖의 답이 나왔다. "들기름에 조선간장, 매운 고춧가루 넣고 비벼 먹는 게 최고지요." 그럼 최고의 재료는? "엿기름이지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단맛이어서 품위가 있습니다."
―한식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방법이 잘못됐어요. 한국 재료를 그 사람들에게 먹이면 받아들이겠어요? 현지 재료를 우리 식으로 만들어야지요."
―우리 방법이란 뭘까요.
"우리 음식에는 조상의 지혜가 숨어 있지요. 생식(生食)·화식(火食)·발효식품으로 구분되잖아요. 해삼(海蔘)을 외국에선 '바다오이(Sea cucumber)'라고 부릅니다. 본질과 외형의 차이지요."
―한식이 너무 비쌉니다.
"춘하추동(春夏秋冬)이 다 들어가니까요. 그 안에 만물의 운행질서가 담겨 있고 그게 교육도 되고."
―음식이 많이 남아 낭비도 되고 '재활용' 논란을 낳기도 합니다.
"양을 줄이는 대신 다양성을 담으면 되지요. 다만 10~20년 내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산당의 책을 보면 한의사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공격적이거나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 단 것을 좋아합니다. 건강하면 신 게 당기고요. 무쇠처럼 단단한 성품의 소유자는 쓴 걸 좋아합니다. 40년 경험이에요."
―구로다란 일본인이 비빔밥을 양두구육이라고 했는데.
"본질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우린 예부터 음식도 집에도 모든 게 다 들어갑니다. 나물·야채·뿌리처럼 사계절이 조화를 이룹니다. 그걸 개니 양이니 하다니. 더구나 제사에서 비롯된 비빔밥엔 조상을 기리는 마음도 있어요."
―한정식이 한식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는데.
"한정식은 절차와 법도입니다. 비빔밥은 그걸 뛰어넘은 자유고요. 뭐가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할 순 없어요."
―일식과 한식의 차이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일식은 전부 줄이는 겁니다. 국화꽃 같다고나 할까. 한식은 하늘을 감동시키는 자연입니다."
―인터넷을 보니 산당에 대한 불평이 꽤 되더군요.
"음식점에 오는 분들은 편히 쉴 권리가 있습니다. 그걸 방해받으면 곤란하지요. 전 웃으면서 더러운 방석 내놓진 않습니다."
- ▲ 홍어찜·들깨탕·파전·장아찌…. 두레 주인은“사진촬영을 할 줄 알았으면 더 많이 준비할 수 있었는데”라고 했다. 느닷없이 막걸리 한잔 하고 싶은 욕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밀려왔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두레 이숙희 "한식 세계화는 우리 문화까지 파는 것"
"스시도 생선 맛일 뿐 다른 맛은 없잖아요"
아버지는 부호(富豪)였다. 평생을 머슴 등에 업혀 땅을 안 밟고 다녔다. 돈은 마물(魔物)이다. 마음먹은 것을 눈앞에 대령시킨다. 그 위력 앞에 은밀한(密) 곳에 햇볕(陽) 쬐는 것 같은 일이 밀양 땅에서 벌어졌다.
이뤄져선 안 될 사랑이었다. 요란한 연애가 금세 세상에 알려질 것 같았지만 모두가 입 닫고 귀를 닫았다. 기자들의 붓방아도 멈췄다. 돈의 힘이었다. 이숙희(李淑姬·51)는 그 사랑이 잉태한 두 딸 가운데 맏이였다.
소녀가 사연을 알 리 없었다. 그는 산으로 들로 꽃을 쫓아다녔다. 춤추고 판소리를 했다. 열흘 붉은 꽃 없다(花無十日紅)고 했다. 여고 시절 그 많던 아버지의 돈이 바닥났다. 생모(生母)는 한식점 '영락관'을 차렸다.
숙희는 밀성여고 졸업 후 '메들리 극단'에 들어갔다. 21살 때 어머니가 요절했다. 그는 '출판사에 취직시켜주겠다'는 친척 말만 듣고 동생과 함께 서울로 왔다. 주머니에 든 돈이 달랑 100원뿐이었다. 세상은 냉혹했다.
친척은 자매를 눈이 펑펑 쏟아지는 거리로 내쫓았다. 어느 날 동생이 라면 먹고 연탄광에서 목욕하다 쓰러졌다. 급체였다. 폭우 쏟아지던 날이었다. 구멍 뚫린 판잣집 천장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둘은 껴안고 밤을 새웠다.
■가장(家長)
가난은 낭만적인 소녀를 현실적인 가장으로 만들었다. 그의 꿈은 한가지뿐이었다. "반드시 돈을 벌어 동생과 함께 비 안 맞고 살 수 있는 전셋집을 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거리에서 정신없이 일했다.
1988년 인사동에서 두레가 문을 열었다. 이 밥집은 서울시가 지정한 '자랑스러운 한국음식점'이 됐다. 2005년에는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이 선정한 '아시아 24개 도시 중 기억해야 할 음식점' 중 한 곳에 뽑히기도 했다.
―처음엔 카페를 했지요.
"대학로 '시래'라고 '깊은 산골에 흐르는 차가운 물'이라는 뜻입니다. 전통 찻집이었는데 3년쯤 하다 토털 패션 스토어를 열었지요."
―토털 패션 스토어면 양품점(洋品店)?
"남대문, 동대문에서 옷 떼다 다시 디자인하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게 되지요. 신발, 액세서리, 단추도 팔았고요. 그것도 한 3년 했습니다."
―그 뒤 두레를 연 거지요, 1988년에.
"제가 장사를 꽤 잘했는데 상인들이 꽤 거칠어요. 부대끼니 간(肝)이 나빠지더군요. 두레는 선배가 하던 청국장 집이었습니다. '힘들어 못 하겠다'길래 멋모르고 인수했지요."
―생모의 피를 이어받은 거네요.
"어릴 적부터 '한정식집을 멋지게 하고 싶다'는 말을 하긴 했어요. 친구들은 '미쳤다'고 했지만요. 인수할 때는 40평짜리 허름한 초가집이었어요. 지금은 100평이 넘습니다."
―메뉴는.
"처음엔 청국장·장국밥·파전·홍어찜·두부김치·낙지볶음만 만들었어요. 저와 주방식구 합해 6명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니 한식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어떻게 눈을 떴다는 겁니까.
"한식의 기본은 밑반찬입니다. 밑반찬이 맛있으려면 간장, 된장, 고추장, 물, 소금이 중요해요. 다 보약(補藥)들이지요. 처음엔 주방장에게 이끌려 다녔는데 안 되겠다 싶어 유명한 선생님에게 배웠습니다."
―간장, 된장, 고추장은 알겠는데 소금은 왜?
"김치에 소금을 잘못 넣으면 써서 먹을 수 없어요. 소금을 찾아 전국을 다녔어요. 곰소항도 가보고 강화도도 가보고. 전 소금을 창고에 쌓아놓고 5년, 10년씩 묵힙니다. 간수를 빼려고요. 얼마 전 경기도 이천에 소금 창고 지으려 땅도 사놨어요. 5000평 정도."
―두레에는 장아찌 종류가 참 많더군요.
"마·건두부·멸치·말린무·다시마·오이·전복·송이장아찌…. 전통적인 것도 있고 새로 만든 것도 있어요. 명품 김치도 만들어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판매했어요. 금방 철수했지만."
―외면당했나요.
"한국인들은 냉면은 1만원 줘도 군소리 안 합니다. 한정식은 2만원만 돼도 비싸다고 해요. 내용을 알면 그런 소릴 할 수 없는데도요. 마 장아찌만 해도 마에 천일염, 다시마 달인 물, 표고버섯이 들어갑니다. 참기름 직접 짜면 얼만지 아세요? 사이다병만한 양이 2만원입니다. 지금은 추석·설 같은 명절에만 판매합니다."
―지금도 춤이나 판소릴 합니까.
"가야금은 18년 배웠고 판소리는 안숙선, 조통달 선생과 그 제자들께 익혔습니다. 요즘도 2시간씩 연습해요. 한식이 곧 풍류(風流)잖아요."
- ▲ 인사동의 한식당 두레를 22년째 운영 중인 이숙희씨는“정통 비빔밥에 소우주(小宇宙)가 담겨 있다”고 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한때 유행한 일본 만화를 보면 요리의 달인이 스승에게 배우고 경쟁자를 꺾는 내용들이 나온다. 무협지(武俠誌)식의 스토리 전개다. 그걸 본 독자들은 군소리 없이 일식을 찬양하고 지갑을 꺼내든다. 의식화다.
그렇다면 한식은? 이숙희는 이야기 도중 두툼한 노트 한권을 꺼내왔다. 누렇게 변한 페이지 사이로 빽빽한 볼펜 자국이 있다. 20년 넘게 한국 요리의 숨은 장인(匠人)들을 찾아 익힌 레시피들이다.
―장아찌는 누구에게.
"양영숙 선생님이라고 전라도에서 유명한 분입니다. 1주일에 3회씩, 1년 넘게 공부했습니다."
―한식 하면 유명한 게 개성(開城)음식이지요.
"8년 전 '개성 할머니'라는 분을 알게 됐어요. 대갓집 마나님이셨어요. 80대인데도 개성편수·보쌈김치·개성갱단·주악 같은 음식을 잘 만드는 분입니다. 개성음식은 정통 한식과는 약간 달라요."
―뭐가 다릅니까.
"개성이 국제도시다 보니 퓨전화됐더군요. 관광공사 요리협회에선 정과(正果)도 배웠고요, 유명한 절을 돌며 사찰(寺刹)음식도 익혔어요. 떡 박물관장님껜 5년 넘게 떡도 배웠고요. 한식은 배우려면 끝이 없어요."
―퓨전은 한식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옛것만 한식이고 현대식은 퓨전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있어요. 그건 고춧가루가 안 들어가면 한식이 아니라는 것과 같아요. 먹는 법, 배열을 달리해 어필할 수 있다면 그리해야지요."
―음식 맛은 전라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경상도는 맛없고 전라도 음식은 맛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단정지을 순 없어요. 전라도는 재료가 풍부하니 음식이 발전했지요."
―경상도도 땅은 넓잖습니까.
"'혀가 맛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말이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유림(儒林)이 세잖아요. 영남의 많은 종가(宗家)집 음식 맛을 보면 다릅니다. 기품 있고 맛도 있지요. 요즘 웰빙 분위기에 맞지요."
―그렇게 배운 음식은 누가 평가합니까.
"손님들이 테스터지요. 음식을 익히면 바로 시험하거든요. 음식 맛을 보다 '이런 요리도 있다는데…'라는 소릴 들으면 수소문해 배우고요. 김호건 선생이라고 출판디자인 하는 분이 단골인데 요리책을 400권 가까이 주셨어요. 제가 요리책이 굉장히 많습니다."
―남자와 여자 중 누구 입맛이 더 정확할까요.
"남자 같은데. 입맛이 살아있고 맛의 감각이 뛰어난 것 같더군요."
―좋은 손님만 있진 않겠지요.
"한 달 만에 와 '밥값을 전부 돌려달라'는 분도 있어요. 나중에 구청에 신고까지 했어요. 이런 기막힌 일들이 가끔 생겨요. 양식당에 가서도 그럴까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음식 재활용은 혹시?
"남은 음식 보면 가슴이 미어져요. 처음엔 드실 정도만 드려요. 더 달라면 더 드리고요. 요즘은 양은 적지만 다양하게 밑반찬을 놓는 새 식판을 생각하고도 있습니다."
■한식 세계화
두레는 인사동에서 22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숙희는 '노포(老鋪)'라는 말에 손사래를 쳤다. "많이 없어졌지만 훨씬 오래된 가게들이 많아요. 선천(宣川)·은정·이모집 같은 곳들, 그 외에도 많을 겁니다."
―한식 세계화 정책은 어떤가요.
"외국엔 50년, 100년 넘는 음식점이 많아요. 우리는 설렁탕집 빼고 몇곳이나 될까요. 전 세제(稅制)에 문제가 있다고 봐요. 세금 정확히 내면 부가가치세라도 낮춰줘야지요. 그래야 한식 하는 프라이드가 생길 게 아니겠어요? 후손에게 권할 수 있고. 저희도 얼마 전부터 적자가 나요."
―왜요?
"공무원들에게 5000원짜리만 먹으라고 한 분 있죠? 1만원짜리 먹여 신바람나게 일하면 되지 '얼마만큼만 먹으라'는 소린 왜 합니까. 공산주의도 아니고."
―5000원짜리로는 한식 세계화가 안 됩니까?
"말레이시아 여행 중 클럽 메드에 묵었어요. 관광객이 600명쯤 됐는데 한식을 보니 창피해 얼굴을 못 들겠더군요. 정부가 한식 세계화에 관심 있으면 정선된 인력을 외국에 보내 가르쳐야지요."
―태권도 사범처럼 주방장을?
"주방장뿐 아니라 예절 선생님, 전통문화 가르치는 선생님도 보내면 얼마나 한식의 수준이 높아지겠어요."
―밥예절에 전통문화까지?
"전 접시도, 그릇도 작가들 것만 씁니다. 한식 세계화는 음식뿐 아니라 우리 문화까지 파는 겁니다."
―왜 국내 호텔에서 한식당들이 사라지고 있을까요.
"비싸고 맛이 없잖아요. 호텔 주방장들은 대개 획일적입니다. 비빔밥을 3만원에 팔면 누가 먹겠어요. 그럴 가치가 있다면 그 이상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뭡니까.
"비싸게 받으려면 내용이 충실해야죠. 시내 유명 호텔에서 '15일 정도 교육을 시켜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어요. 거절했습니다, 이용만 당하는 것 같아서."
―외국에 알려진 우리 음식점들 보면 뭔가 '작업'한 거 아니냐는 오해를 받습니다만.
"미국대사관에서 절 '아시아 파워 우먼'으로 추천한 것도 몰랐어요. 가수 최백호씨가 알려준 적이 있어요. 'TV에 두레가 남대문시장·비원과 함께 음식점으론 유일하게 베스트 10'에 선정됐고요. 전 그 프로그램을 아직도 못 봤습니다."
―한식은 불고기·갈비·비빔밥 정도만 알려졌는데.
"전(煎)에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화전(花煎) 같은 건 전략상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테이크아웃도 할 수 있고 롤처럼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런 걸 놔두고 떡볶이에 100억원씩이나 지급하다니…."
―구로다 산케이지국장이 비빔밥 파동을 일으켰는데.
"스시도 생선 맛일 뿐인지 감칠맛이나 양념 맛은 없잖아요. 화식(和食)코스 요리도 겉보기엔 봄날 벚꽃처럼 화사하지만 먹어보면 그 맛이 그 맛이잖아요."
―비빔밥이 '양아치 음식'인가요?
"그분이 어떤 비빔밥을 먹었는지 궁금하네요. 요즘 비빔밥은 고추장이 재료의 맛을 가리고 있긴 해요. 정통 비빔밥엔 소우주(小宇宙)가 담겨 있습니다. 정월에 담그는 장(醬)부터 계절 나물이 다 들어가잖아요. 한식 대표가 한정식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엔 동의합니다."
- ▲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서울지국장은 “비빔밥을 논한 것은 한식 세계화의 대표 선수로 적당한 것이냐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 폄하는 아니었다”고 했다. / 채승우 기자
첫댓글 언제 임지호선생 음식 먹으러 가지 안을라요 ?
길따라 맛기행 번개한번 치세요. 먹으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