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뉴요커’ 우디 앨런이 갑자기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2011년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를 발표하더니, 올해엔 ‘투 로마 위드 러브(To Rome with love)’를 내놓았습니다. 둘 다 무척 매력적인 영화인데, 심지어 우디 앨런표 영화라면 시큰둥해하던 저조차도 즐겁게 보았으니까요.
어떤 목적의식이나 뜨거운 주제의식을 일종의 '불필요한 구속'으로 규정하면서, 대도시 뉴욕을 살아가는 원자화된 예민한 지성들의 흐느적거리는 페이소스를 코믹하게 그려왔던 우디 앨런. 그 특유의 가벼운 댄디함과 도회적 세련미는 앨런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스노비즘에 물든 가벼운 여피족들에게까지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우디 앨런을 좋아하니까 내 취향도 꽤나 지적이야‘라는 근거 없는 착각까지 선사하면서. 그러나 사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때로 고통스럽습니다. 그 저변을 흐르는 뜻모를 강박적 답답함과 신경질적인 예민한 지성은 대도시의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삶‘ 그리고 ’작은 현실‘을 인식하도록 강요하니까요.
그런데 이처럼 예민하고 지성미 넘치는 감독이 갑자기 유럽으로 무대를 옮겨 두 편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뉴욕 땅에서 느껴졌던, 그 안개 자욱한 지성의 묘한 답답함이 사라지고 삶에 대한 유쾌한 긍정과 낙천적인 분위기가 한껏 넘쳐 흐릅니다. 마치 여행가는 기분으로 찍은 듯한 우디 앨런의 두 편의 유럽도시 영화 - <미드나잇 인 파리>와 <투 로마 위드 러브>를 소개합니다. 오늘은 먼저 로마로 떠납니다.
일단 출연배우들의 면면을 한번 살펴봅니다. 알렉 볼드윈, 앨렌 페이지, 로베르토 베니니, 페넬로페 크루즈 등으로 화려합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감독 본인인 우디 앨런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놀랄만한 특별출연자 한 명이 등장하여 대단한 열연을 펼치는데, 그건 조금 있다 공개하기로 하구요.
첫 장면은 로마 베네치아 광장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앞입니다. 흰 색 피아트 택시와 헌병경찰 카나비니에리의 검은 경찰차, 베스파 스쿠터 등을 타고 사거리를 요란하게 질주하는 로마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특히 화면의 색감이 너무나 인상적인데, 영화 내내 이런 톤을 유지합니다. 지금껏 로마를 다룬 수많은 영화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컬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첫 장면부터 가슴이 뜁니다!
(로마 베네치아 광장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앞, 영화의 첫 장면)
영화는 크게 네 개의 에피소드가 옴니버스식으로 엇갈려 진행됩니다.첫 번째 이야기. 관광객들은 좀처럼 가지 않는 곳이지만 로마의 숨은 매력포인트 중 하나인 트라스베레. 이곳에는 건축가 지망생 잭(제시 아이젠버그)이 여자친구와 동거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여친의 친구이자 배우지망생인 모니카(앨런 페이지)가 그 앞에 나타납니다. 다소 오버 액션의 과도한 지적 허영심을 보여주는 모니카는 그러나 그것마저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마성의 여인. 여자친구와 모니카 사이에서 갈등하는 잭 앞에 청년시절 이곳 로마에서 공부해 지금은 미국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된 존(알렉 볼드윈)이 나타나 멘토 역할을 해 줍니다. 공상과 현실을 오가며, 존과의 대화 그리고 모니카와의 아슬아슬한 더블데이트를 즐기는 잭. 잭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멘토와 멘티의 만남.
유명 건축가 존과 만난 잭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럼없이
그에게 묻고 해답을 찾고자 한다.)
(넘치는 지적 허영심과 마성의 매력을 지닌 여배우 지망생을 연기한 앨런 페이지. 우디 앨런은 그녀의 넘치는 매력을 프레임 속에 남김없이 담아내고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북동부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의 소도시 포르데노네에서 온 시골 신혼부부 이야기. 안토니오와 밀리는 막 결혼식을 올리고 지금 로마로 신혼여행을 왔습니다. 남편의 친척 어른이 호텔로 찾아온다는 말을 듣고 신부는 머리를 한번 더 매만지기 위해 미용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 길을 잃어버려 로마 한복판에서 졸지에 미아가 되지요. 그 와중에 남편은 엉뚱한 콜걸(페넬로페 크루즈)의 방문을 받고, 신부 밀리는 평소 동경하던 남자배우를 만나 그와 함께 호텔 방까지 들어갑니다. 어리숙한 신혼부부의 못 말리는 로마 모험기. 이들은 또 어떻게 될까요?
(로마 테르미니역에 도착한 행복한 신혼부부 안토니오와 밀라.
그러나 그들은 곧 로마에서 인생 최대의 모험과 위기를 겪게 된다.)
(영화는 무척이나 자연스런 전개를 보여주면서도
매 장면이 스냅사진처럼 아름답고 인상적이어서 놀랍기만하다.
길을 물어보고 있는 밀라의 모습)
한편 미국에서 온 여행객 헤일리는 꽃미남 이태리 청년 미켈란젤로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양가 상견례를 준비하게 되고, 뉴욕에서 헤일리의 부모가 로마로 옵니다. 아버지 제리(우디 앨런)는 왕년에 클래식 공연과 음반을 기획하던 노련한 기획자. 그는 우연히 사돈인 잔카를로(테너 파비오 아르밀리아토)의 목소리가 너무나 힘있고 아름다운 걸 보고는 그에게 오페라 데뷔를 제안합니다. 제리의 말이 싫지 않은 잔카를로, 그러나 다른 가족들은 괜한 사람 흔들어댄다며 마뜩찮아 합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잔카를로는 대중 앞에서는 부끄러워 노래를 하지 못하고, 오직 샤워부스 안에서 물을 맞아가며 노래를 해야만 아름다운 목소리가 나옵니다. 기어이 잔카를로를 데뷔시켜 그에게 오페라 <팔리아치>를 부르게 하겠다는 제리의 꿈은 과연 이뤄질까요?
(그야말로 깜짝출연! 이탈리아의 명테너 파비오 아르밀리아토가 숫기 부족으로 샤워부스 안에서만 노래하는 잔카를로로 출연했다. 평소 오페라 매니아로 유명한 우디 앨런의 감각이 빛나는 에피소드이다.)
(돌체앤가바나도 카메오로 등장한다. 실제로도 열렬한 오페라팬인 도메니코 돌체[우]와 스테파노 가바나[좌]가 극중 잔카를로가 공연하는 오페라하우스에 앉아 있다.)
(샤워부스 속의 오페라 아리아. 조르다노의 오페라 <페도라> 중
‘금지된 사랑 Amor ti vieta')
평범한 가정, 평범한 회사,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레오폴도 피사넬로(로베르토 베니니).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슈퍼스타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됩니다. 레오폴도가 먹는 파스타, 레오폴도가 다니는 회사, 그가 먹는 군것질 등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TV와 신문은 그에 관한 뉴스로 도배가 됩니다. 기쁨도 잠시. 유명인의 삶에 질려버린 레오폴도가 운전기사에게 하소연 합니다. “도대체 제가 왜 유명한 거죠?”, “유명하니까 유명한거죠” 레오폴도는 유명인으로서의 힘겨운 삶에서 탈출하여 그가 즐기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엥? 제가 그렇게 유명인이에요?” 하루 아침에 벼락스타가 된 로마시민
레오폴도를 능청스레 연기한 이탈리아의 대배우 로베르토 베니니)
(벼락스타가 된 소시민을 연기한 로베르토 베니니의 페이소스 넘치는
코믹연기는 이 영화의 놓칠 수 없는 매력 중 하나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스페인 광장에서 펼쳐지는 취주악단의 연주 장면입니다. 이탈리아의 유명 칸초네 ‘볼라레’를 느긋한 리듬에 실어 들려주고 있지요. ‘우리 삶은 늘 축제와도 같다’는 지중해적인 낙관론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투 로마 위드 러브> 트레일러 영상)
지금껏 수많은 미국인 감독이 로마를 배경으로 혹은 로마를 소재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우디 앨런처럼 이토록 로마를 아름답고 인상적으로 담아낸 감독은 아마 제 기억에 없었습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로마의 휴일>은 달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명백히 ‘판타지’입니다. 마치 작렬하는 태양 속에 금방이라도 녹아버리는 달콤한 젤라토와도 같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 영화는 다릅니다. 로마라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축제라는 믿음으로, 진정 이 도시에 대한 깊은 애정이 화면 속에 묻어나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본다면 일생에 한번쯤은 꼭 로마를 찾아보고픈 마음이 생기게 하는 영화, <투 로마 위드 러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잭과 존의 만남 장면에서 은은한 아코디언 반주로 흐르던 칸초네 한 곡을 소개합니다. ‘아리베데르치 로마 Arrivederci Roma’, 안녕 로마!입니다. 테너 비토리오 그리골로가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