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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몸의 기호와 심미감
김창희(시인)
날을 세우는 것들의 처음은 무딘 형상으로부터이다. 무딘 날들이 서서히 제 몸을 벼리면서 칼날이거나 낫날로 변해가는 동안, 세상의 시간과 공간은 그의 몸을 닦아내는 물길이었을 것이다. 벌건 녹물을 닦아내고 씻기면서 서슬 푸른 날들을 기다리게 하는 깊은 겨울밤이었을 것이다.
강영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녹색비단구렁이』는 그 표제에서조차 비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은밀함은 마치 몸이 몸을 통과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해서, 잘 벼려진 감각의 날로 쓴 시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편 곳곳에 살아 있는 언어의 날들은 시인의 말에서처럼 꽃이기도 하고 독이기도 해서 그 파장의 깊이를 섣불리 발설하기가 자못 조심스럽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시적 상관물 속으로 확대경이 되어 들어앉은 것 같은 섬세한 감각의 촉수가 느껴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1. 기호가 되어버린 몸
강영은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감각적 자아의 존재를 드러내는 몸에 대한 성찰이다. 성큼 다가가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몸속에 흐르는 뜨거운 혈류를 드러내지 않으면 다가오기를 허락하지 않는 몸과 몸의 교감을 다룬 시편들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몸을 기호화함으로써 그 내재적 감각들을 더욱 명징한 이미지로 되살려 내는 시인의 발랄한 시적 변주라 하겠다.
어머니. 천둥번개 치고 비 오는 날이면 비 냄새에 칭칭 감겨 있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고 싶어요 모과나무 가지에 매달린 모과열매처럼 시퍼렇게 독 오른 모가지를 공중에 매달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신부가 되어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몸의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가 건너야 할 몸 밖의 세상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에요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의 징검다리뿐이에요 내 몸에 똬리 튼 슬픔을 불러내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연두에서 암록까지 간극을 알 수 없는 초록에 눈이 부셔 밤이면 독니에 찔려 죽는 꿈만 벌떡벌떡 일어나요
어머니, 녹색비단구렁이 새끼를 부화하는 세상이란 정말이지 음모일 뿐이에요 희망에 희망을 덧칠하는 초록의 음모에서 나를 구해주세요 제발 내 몸의 비단 옷을 벗겨주세요 꼬리에서 머리까지 훌러덩 벗어던지고 도도히 흐르는 검은 강, 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한 줄기 물길이고 싶어요
―「녹색비단구렁이」 전문
시집의 표제작인 「녹색비단구렁이」는 심미안적인 시적 화자가 갈망하는 몸의 기호이다, 화자는 ‘녹색비단구렁이’가 되어 천둥치고 비 오는 날이면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꿈틀댄다. 시퍼렇게 독 오른 모가지를 공중에 매달고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치열함은 시적 화자가 삶을 점철해나가는 존재방식으로서, 눈부신 햇빛 속 구름 없는 세상을 건너야 하는 화자의 두려움과 대응하게 된다. 간극을 알 수 없는 초록에 눈이 부셔 독니에 찔려죽는 꿈을 꾼다는 시적 화자는 원초적 생명인 어머니를 청자로 불러와 희망을 덧칠하는 초록의 음모에서 구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면서 몸의 비단옷을 벗어버리고 도도히 흐르는 검은 강, 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한 줄기 물길로 다시 태어날 것을 소망한다. 평론가 유성호가 말하듯 ‘미美 ’와 ‘추醜 ’의 속성을 한 몸으로 결속하면서, 시인이 꿈꾸는 새로운 존재론적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몸을 기호로 하여 씌어진 여러 시편들 중 「허공 모텔」에서는 “바늘귀를 단 가시거미 한 마리,/ 모텔 한 채 짓고 있다. 그물침대 걸어놓은 저, 모텔에/ 세 들고 싶다 // 장수하늘소 같은 사내 하나 끌어 들여/ 내 깊은 잠 풀어놓고 싶다 // 그 사내 걸어온 길 칭칭 동여맨다면 // 그 사내, 쓰고 온 모자 벗어버리고/ 신고 온 신발도 벗어던져/ 돌아갈 길 아주 잃어버린다면/ 사내 닮은 어여쁜 죽음 하나 낳을 수 있으리”라고 한다. 이 시편에서 화자는 존재의 공간을 허공에 설정해놓고 장수하늘소 같은 사내를 끌어들여 깊은 잠을 풀어놓고 싶다고 소망한다. 돌아갈 길 잃어버리도록 사내와 합일하기를 꿈꾸며 그 꿈의 결실로 어여쁜 죽음 하나를 낳고 싶다는 욕망을 고백한다.
「능소화」는 보다 직접적이다. “엄마가 내 몸 속에/ 얼마나 많은 꽃씨를 숨겨놓으셨는지/ 보세요, 저리도 많은 발가락과 손가락들을/ …중략… / 낭창낭창 휘감기는 붉은 뱀들이/ 절정으로, 꼭대기로 치닫고 있잖아요?/ 폭염에 술 취한 딸처럼/ 주홍빛 얼굴을/ 울컥울컥 게우고 있잖아요? // 그게 나라구요, 나였다구요 // 그러니 습한 문 열고 나 장마 지게/ 꽃다운 나답게 꽃답게/ 툭, 툭, 모가지를 떨굴 때까지” 허공을 향해 온몸이 매달려 치달아 오르는 능소화의 모습은 뜨거운 욕망을 무수한 꽃송이로 터트리는 또 하나의 숨겨진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꽃답게 나답게 살고 싶은 몸의 구체적인 인식론적 술회이다.
위의 시편들과는 달리 몸 밖의 몸을 통해 화자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시편도 있다. 「사막장미」에서 보면 “사막은 그녀 몸속에 뿌리내린 태양의 즙을 끌어올려”, “지평선 끝까지 벌겋게 물들이는 그녀를 탐하다가/눈동자가 멀기도 한다는데요”라고 하거나 「물로 지은 옷」에서 “그 투명한 바다의 몸이 독을 내뿜었던 적 있다/ 벌겋게 독 오른 그날,/ 바다는 내게 옷 입는 법을 가르쳤다”, “파고가 높을수록/ 함부로 벗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던/ 옷은 내게 바다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소비되는 봄」의 “섹시한 몸매가 상품이 되는 시대/ 저것 봐, 목련나무 위 그녀의 스커트가 활짝, 화-알짝,/ 들어 올려지고 있어/ 날아갈 듯 희디흰 스커트 속 불쑥 드러난”에서와 같은 아찔한 봄의 촉감, 또는 「왜목마을을 지나며」에서의 “가슴께의 봉긋한 섬들이 젖무덤처럼/ 아늑하게 보였던 것인데/ 그녀가 젖을 물리는 국화도와 장고항 사이,/ 항아리처럼 부푼 그녀의 몸이 지고 있었다”처럼 화자의 몸으로 대변되던 주체적 몸의 기억들을 타자화된 대상의 내면 속으로 전이시킨다. 강영은 시인의 심미감이 효과적으로 형상화되는 순간들이다.
2. 해체된 언어의 미학
강영은 시인의 시편에서 보여주는 선명한 감각에는 언어의 이미지를 넘어서고자 하는 자아 탐색의 시편들도 있다. 이는 언어의 행간을 넘나들며 시의 길을 찾아가는 구도자적인 모습일 때도 있고 언어 이전의 소리로 발설되는 음의 의미 찾기 모험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쓴다와 쓰다 사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밤골아저씨의/ 낫 같은 ㄴ이 있다/ 그 낫은/ 길이 잘 든 손을 갖고 있어서 // 아저씨가 까놓은 알밤들은/ 울퉁불퉁/ 반발이 심했지만/ 맛이 좋았다 // 잠 안 오는 밤 // 쓰다와 쓴다 사이,/ 낫 놓고 니은자는 더 더욱 모르는 아저씨의 / 낫,/ 종결형 어미가 시퍼렇게 달려든다/ 날카로운 날에 손을 베인다 // 잘 벼려진 낫날이/ 붉은 혀가 삼킨 밤 껍데기를 헤집어/ 꿀꿀이 바구미를 토해낸다// 밤새도록 밤을 파먹은/ 벌레시인이다
―「벌레시인」 전문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밤골아저씨의 낫 같은 ㄴ이 있다”는 기존의 언어에 대한 의미 뒤집기이다. 낫의 모습이 기역 같으나 니은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면서 시의 의미망을 촘촘하게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잘 벼려진 낫날이/ 붉은 혀가 삼킨 밤 껍데기를 헤집어/ 꿀꿀이 바구미를 토해낸다 // 밤새도록 밤을 파먹은/ 벌레시인이다”에서는 벼려진 날 속으로 뛰어드는 시적 화자의 고단한 시 쓰기의 행보가 드러난다. 밤새도록 시의 밤을 파먹으며 시의 행간을 누비는 벌레시인의 길에는 늘 벼려진 낫날이 그의 궤적을 쫓고 있을 것이다.
강남역 지하도를 지나가는데/ 외국인 남녀가 껴안은 채 속삭이고 있다/ 쥬떼?아니 쥬뗌므/ 쥬뗌프/ …중략… 서로 다른 말꼬리를 잡고보니/ ㅁ,ㅂ,ㅃ,ㅍ,다/ ㅁ,ㅂ,ㅃ,ㅍ는 문창살을 빠져나가는/ 육면체의 공기방울/ 묵은 바람끼 터트리는 입술소리다/ …중략…/ 풀입 입술을 조율하기도 했던 그 소리는/ 내가 맨 처음 입맞춤한/ 엄마, 압빠, 맘마, 젖내 나는 소리/ 자라면서 날마다 입 맞춘/ 바압―밥 소리다
―「두 입술이 내는 소리」 부분
외국인 남녀의 속삭이는 대화소리를 들으면서 화자는 모국어의 입술소리에서 젖내나는 언어의 근원을 발견해 낸다. “내가 맨 처음 입맞춤한 젖내 나는 소리”는 엄마, 아빠, 맘마이다. 그것은 사랑의 언어인 동시에 자라면서는 생명을 키우는 언어로 진화하는, 날마다 입 맞추게 되는 밥의 소리이다. 외국인 남녀가 속삭이던 소리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뜻의 발음과 우리 아기들이 처음 배우게 되는 원초적인 언어의 발음을 두 입술소리로 절묘하게 조합하여 온전한 사랑의 언어로 승화시킨 점이 경이롭다.
3. 서정적 자아의 뒤꼍
강영은 시인은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으며 2000년도에 계간 『미네르바』를 통하여 문단에 나왔다. 제1시집 『스스로 우는 꽃잎』과 제2시집『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가 있다.
제1시집에 수록된 강영은 시의 주된 오브제는 자연의 정갈한 풍경이었으며, 일상과 가까운 그 자연의 여백 속에 자신을 투영시켜 보는 것이었다. 모든 시적 대상을 거울로 삼아 그 속에서 자신을 성찰해나가는 서정시가 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제2시집 『나는 구름에 넘어진 적이 있다』에 오면 자연과 시인의 거리가 훨씬 좁혀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대상물은 시인과 밀착되어 그 호흡이 빨라진다. 강영은 시에서 감각적 이미지가 살아나는 것은 제2시집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개밥바라기 별이 뜨면/ 내 생의 종아리가 단단해진다/ 식지 않는 기다림이/ 바글바글 끓으며 부풀어 오르는/ 된장 뚝배기의 저녁/ 안락할미새처럼 어린 것들을 부르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지상의 모든 저녁을 지나는 / 저, 생의 종아리들/ 식탁다리거나 밥상다리거나/ 따뜻하고 둥근 저녁에 이를 때까지/ 한결같이 무엇을 받쳐 들고 있다”(「저녁의 노래」 부분)처럼 저녁별을 바라보며 저녁밥을 짓는, 식지 않는 기다림을 받치고 있는 생의 종아리들은 단단해진다고 화자는 말한다. 그것은 식탁다리이거나 밥상다리 같이 지상의 모든 저녁을 지나며 무엇을 떠받치고 있는 것들이 단단해져야 하는 이유이다.
강영은 시인의 제3시집의 시편들은 경험적 자아의 예리한 감각들이, 언어의 파고를 넘나들며 생생한 존재론적 욕망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 가운데 많은 시편들이 깊은 서정성을 배제하지 못하고 있음은 그의 시가 가진 천성적인 따스한 연민의 속성 때문이라 하겠다.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 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뒷담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눈꽃 피어내는 대나무처럼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오래 남는 눈」 부분
제주 해협보다 더 거센 파랑의 세월로/ 주름진 치마폭을 벌린 그녀는/ 자주빛 꽃송이가 붉은 열매가 되기까지/ 떠나는 것도 떠나보내는 것도/ 다만 길이 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는 듯/ 탯줄 끝으로 열매 하나 툭, 떨구고 있다
―「먼나무」 부분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의 저편, 잔설처럼 남아 있는 사춘기 시절의 그 싱싱하고 아릿한 울림의 시편 「오래 남는 눈」과 누구에게나 생의 그리움이 되는 어머니에 대한 시편 「먼나무」는 보편적인 서정시의 운율과 잔잔하고 애틋한 사랑의 심경을 담고 있다.
한 시인의 시를 서정적, 감각적, 사실적으로 잘라서 분류할 필요는 없지만 필자는 시인의 특성을 더욱 강조하자는 의도로 짐짓 갈래를 지어봤다. 그 결과 강영은의 시에 내재한 서정성은, 자연을 통한 나르시시즘적인 성찰을 거쳐 경험적 자아를 형성하면서 감각적 존재 방식을 추구해 나갔다. 그의 시가 독자의 몸을 베일 듯 예리한 감각으로 파고드는 것은 서정적 연민을 기조로 하여 씌어졌기 때문이다.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시력을 가진 시인으로서 이처럼 부지런히 허물을 벗고 새로운 시의 행로를 개척해나가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그의 시 한 편 한 편이 무게를 나눌 수 없을 만큼 알뜰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시편마다 시인이 벼려놓은 언어의 날들이 선명하게 시의 획을 긋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 겹의 비밀로 이루어진 몸이 있다/ 겹겹이 덮인 내력으로 지탱되는 몸 // 흙보다 더욱 캄캄한 시간으로/ 제 안을 감싸는 무덤처럼 // 지상의 모든 길들 돌아와/ 하얀 어둠의 옷 하나씩 벗을 때마다 // 더욱 작고 단단해지는/ 그, 눈부신 부재의 중심에서 // 나는 더 이상/ 만져지지 않는 옷으로 남는다
―「양파론」 전문
강영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녹색비단구렁이』의 맨 마지막 시편인 「양파론」이다. 마치 시인의 자화상을 보는 듯한 시이다. 그가 몇 겹의 베일을 벗을 것인지 어떻게 지상의 길을 돌아와 더욱 작고 단단해진 몸으로 독자의 마음을 파고 들 것인지, 그를 지켜 볼 준비가 끝난 독자의 한 사람인 필자는 앞으로도 강영은 시인의 겹겹이 덮인 시의 내력들이 늘 비밀한 모습을 드러내며 신선한 시의 밭을 일구어 주길 기대한다. 그가 벼린 언어의 날들이 스쳐간 서늘한 몸 위로 시집 『녹색비단 구렁이』 그 마지막 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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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 선생님, 만나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저두요. 먼길 달려가서인가? 계절이 아름다워서인가? 아니 그보다는 한 마음 닿는 이들을 만난 기쁨이 더 컸습니다. 즐거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