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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523호 | |
| 포덕 158년 |
10월 셋째주 화요시일 | |
발행처:천도교 동천교구 / 발행인:강병로 / 편집인: 배영진/ 주소:부산남구못골번영로105(대연동) /전화(051)628-1300 FAX : 624-0519 |
시 일 식 순
집례 : 중암 김대석 교화부장
▶ 청 수 봉 전
▶ 개 식 심 고
▶ 주 문 3 회 병 송
▶ 경 전 봉 독 -- 동경대전 ‘탄도유심급’ 외(83~89쪽) ---- 정현승 학생동덕(2)
▶ 천 덕 송 합 창 ---------제10장 흥비가(기1)(천덕송 24쪽, 1~2절)
▶ 설 교 ‘ 3·1운동과 의암성사’덕암 성강현 종학실장
▶ 천 덕 송 합 창 -------송가, 기뻐요(천덕송 78쪽, 반복)
▶ 폐 식 심 고
* 음악준비 : 김창훈 학생동덕(3)
시 일
덕암 성강현 종학실장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중간고사 기간 동안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오늘 얼굴을 보니 반갑습니다. 환절기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3학년의 수능이 한 달 정도 남았습니다. 심고를 드릴 때 늘 좋은 성적을 기원하는 내용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 의암성사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의암성사께서는 동학혁명의 실패 이후 관의 지목이 심해진 힘든 시기에 교단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도통을 전수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포덕38년(1897)년 4월 강원도 원주의 송골에서 체포되어 6월 2일 교수형으로 순도하십니다. 이런 험난한 시기를 맞아 성사께서는 교단의 책임자가 되셨습니다. 그때 나이가 37세였습니다. 당시 국내 사정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종이호랑이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이 팽팽한 가운데 광무개혁에 나섰으나 국력의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못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사께서는 동학혁명 이후 흩어진 교단의 재건과 두 선대 교조의 신원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성사께서는 일단 교단 조직을 체계화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박인호에게 춘암의 도호를 주고 「각세진경」과 「수수명실록」을 저술해 교조로써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교인들의 신앙심을 일깨웠습니다. 포덕41년(1900년) 이종훈의 집에서 입도문을 새로 제정하고 해월신사의 묘를 여주 천덕산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성사의 도통 승수에 불만을 품은 김연국을 설득하여 교단을 일원화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렇게 성사를 중심으로 하는 동학의 3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탄압이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성사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에 숨어 지내기보다는 외국으로 가서 지목도 피하고 세계정세도 파악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올리기로 작정합니다. 포덕42년(1901년) 벽두에 성사께서는 교단의 지도부를 불러 10년을 기한으로 일본과 미국 등을 돌아보고자 하는 외유 계획을 설명합니다. 성사의 외유는 그의 진취적인 측면을 잘 보여줍니다. 단순히 국내에서 지목을 피해 숨어 지내기보다는 지목이 미치지 않는 외국으로 나가 국제 정세를 살필 수 있는 이점까지 고려한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사의 발상은 후에 천도교로의 대고천하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해 3월 미국으로 외유하고자 일본으로 출발한 성사는 오사카에 도착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잠시 중국을 거쳐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이듬해인 포덕43년(1902년) 3월에 성사는 다시 도일해 나라에서 체류하였습니다. 포덕47년(1906년) 1월 귀국할 때까지 성사는 동학의 교조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이상헌, 이규와, 손시병 등의 가명을 썼습니다. 의암은 이곳에서 국제 정세를 관망하며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면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의암은 일본이 근대화되어 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보면서 먼저 국내의 교인을 근대화시키고 이를 통해 국민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진보회(進步會)를 조직케 하고 이용구에게 책임을 맡겼습니다. 성사께서는 포덕45년(1904년) 8월 30일을 기해 국내의 교도들로 하여금 흑의단발을 하고 정부의 개혁을 외치는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동학도로 구성된 진보회는 전국 360여 곳에 회소(會所)를 설치하고 20만 명이 일시에 개혁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요구에 정부에서는 당황하였으나 그 뿌리가 동학당이라는 것을 알고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용구는 진보회가 탄압을 받자 송병준과 윤시병의 제안을 받고 일진회를 만들어 친일노선을 채택해 교인들을 일본의 앞잡이로 전락합니다. 일진회는 동학도인들로 하여금 일본 군사철도 건설과 군수품 수송에 종사케 하여 친일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이용구와 일진회의 영향력을 커져갔습니다.
처음에 이러한 사실을 모르다가 이용구의 만행을 알게된 의암성사는 동학의 친일행각은 있을 수 없다고 이용구를 설득하였으나 이용구는 스승인 성사의 말도 듣지 않고 오히려 의암성사를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이라고 비난합니다. 포덕46년(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이라는 망국조약이 전격적으로 맺어지고 이용구는 이 을사늑약을 찬양하고 다니자 성사께서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사께서는 1905년 12월 1일 교단의 명칭을 즉각적으로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칭하는 대고천하를 하였습니다. 천도교란 명칭의 유래는 동경대전의 ‘道雖天道 學卽東學’에서 따온 것이며 교(敎)자만 의암이 종교란 뜻에서 붙였습니다.
성사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덕47년(1906년) 1월 5일 급히 귀국합니다. 귀국하자마자 교단 조직을 체계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월 16일에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천도교중앙총부를 서울의 다동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해월신사께서 만들었던 육임제를 부활하고 5관제라는 신앙의 절차를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전국에 72개 대교구를 설치하여 지방조직을 정비하였습니다. 이렇게 귀국 후 천도교의 조직과 교세 재건에 힘쓰며 성사는 마지막까지 이용구 일파까지도 회유시키려고 하였으나 듣지 않자 9월 17일 이용구 일파 62명을 출교 처분시켜 교단의 선명성을 확립시켰습니다.
그러나 교단의 정상화는 쉽지 많은 않았습니다. 일제를 등에 업은 이용구 일파는 시천교를 만들어 천도교를 압박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도주로 임명되었던 김연국을 회유하여 데려갑니다. 성사께서는 박인호를 다시 대도주로 임명하여 교단 조식을 수습하고 대대적인 교세 확장에 나섰습니다. 성사께서는 직접 관서와 호남 지방을 순회하고 중앙에 교리강습소를 설치해 준총자제(俊聰子弟)를 선발해 교리강습을 받게 하여 지역의 교역자로 활용하였습니다. 이어서 포덕51년(1910년) 8월 15일에는 천도교회월보를 발간하여 교세 확장과 교인들의 교육에 활용하였습니다. 이해 9월에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보성중학·소학교를 인수하여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사업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일제가 국권을 강탈당한 상황에서 의암성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교단을 더욱 단단히 만들었습니다. 성사께서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오직 교회의 조직을 강화하고 정신적으로 무장된 독립투사를 양성하여 후일을 대비하는데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건립한 것이 우이동의 봉황각입니다. 성사께서 직접 지도한 교단의 지도자급 483명이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교회 사업에 몰두하면서 은연중에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던 성사께서는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유럽의 신생국가를 위한 민족자결주의가 논의되자 이를 독립을 위한 기회로 삼고 독립운동을 구체화하기 시작합니다. 성사께서는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의 교단 간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구상하고 민족대표를 선정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천도교는 성사를 중심으로 체제가 정립된 조직이여서 3‧1운동의 준비도 잡음이 일어나지 않고 치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성사께서는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수시로 회합하여 독립운동의 방법을 논의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민족대표의 선정과 독립운동의 확산 방향 그리고 거사 이후의 교회 유지 등에 관한 의견 등도 논의되었습니다. 3·1운동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던 최린은 3‧1운동의 과정에서 성사께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자서전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의암성사께서는 3‧1운동에 천도교의 모든 역량을 활용해서 준비하고 실행하였습니다. 만약 의암성사와 천도교가 아니었으면 우리 역사에 빛나는 3·1독립운동이 성공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입니다. 봉황각을 건립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투사를 양성하고, 천도교중앙대교당 건립의 명목으로 독립운동의 자금도 확보하였습니다. 실질적으로는 권동진, 오세창, 최린을 통해 민족대표의 선정과 대중화 일원화의 독립운동의 방법을 협의하여 당시 각계각층에서 산발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독립의 열기를 한데 모아 독립운동을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3‧1운동 성공의 내면에는 의암성사와 천도교의 역할이 컸습니다.
의암성사께서는 일경에 체포되어서도 끝까지 독립을 추구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사께서는 일제의 고문에 반신마비, 전신마비 등 숱한 고통을 당하다 끝내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표덕63년(1922년) 5월 19일 순도하셨습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의암성사께 독립운동 최고의 훈격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진취적인 기상으로 천도교의 발전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암성사와 같이 우리 민족을 빛낼 인재로 성장할 것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계명(四誡命)
1. 번복지심(飜覆之心) 두게 되면 이는 역시 역리자(逆理者)요,
2. 물욕교폐(物慾交蔽) 되게 되면 이는 역시 비루자(鄙陋者)요,
3. 헛말로 유인(誘引)하면 이는 역시 혹세자(惑世者)요,
4. 안으로 불량(不良)하고 겉으로 꾸며내면 이는 역시 기천자(欺天者)라.
임사실천 십개조(臨事實踐 十個條)
1. 윤리를 밝히라. 2. 신의를 지키라. 3. 업무에 부지런 하라. 4.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정하라. 5. 빈궁한 사람을 서로 생각하라. | 6. 남녀를 엄하게 분별하라. 7. 예법을 중히 여기라. 8. 연원을 바르게 하라. 9. 진리를 익히고 연구하라. 10. 어지럽고 복잡한 것을 금하라. |
☞ 흥신포연원간담회 실시(10/15) : 지난 10월 15일(일) 오후 2시 대남교구에서 흥신포 연원간담회가 열렸다. 대남교구와 동천교구 교역자들이 참가한 이날 연원간담회에서는 11월 18일 실시되는 이연회 야외시일식 개최를 비롯하여 교계 현안문제를 논의하였다. 우리교구에서는 성강현 흥신포연원회 직접도훈과 강병로 교구장께서 참석하였다.
☞ 성강현 종학실장 국제학술대회 참가(10/20~23) : 일본의 에이메대학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한국 일본근대학회 주최)에 성강현 종학실장이 참가하여 「동학혁명군 진압 일본군부대의 편성과 활동」의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 제10회 한국정신문화유적지 탐방 실시(11/11~12) : 본교 특색 프로그램인 한국정신문화유적지 탐방이 11월 11일(토)과 12일(일) 이틀에 걸쳐 실시될 예정이다.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하는 한국정신문화유적지 탐방은 본교 ‘한국정신문화탐구부’와 ‘역사인’(역사동아리) 중심으로 4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하며, 충청도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탐방할 예정이다(구체적인 일정과 내용은 추후 공고 예정)
☞ 예솔 정숙례 동덕 서예 초대전 개최(10/7~15) : 지난 10월 7일~15일까지 문화회관에서 예솔 정숙례 동덕의 서예 초대전이 개최되었다. 예솔 정숙례 동덕은 박인준 전 교구장의 사모님으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퇴임하였다. 우리교구에서는 10월 15일(일) 강병로 교구장과 성강현 종학실장께서 참석하여 서예 초대전 개최를 축하하였다.
■ 다음 화요시일 안내 ■
집 례 | 경전봉독 | 천덕송 합창 | 설 교 | |
봉독자 | 내용 | |||
기암 신원기 교무부장 | 이서준 학생동덕(1) | 동경대전 ‘우음’ 외(90~97쪽) | 제11장 흥비가(기2)(천덕송 26쪽, 1~2절) | 노암 강병로 교구장 |
송가, 동학혁명군 추모가(천덕송 79쪽, 1~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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