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눈으로 주님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모든 민족들 앞에 마련하신 구원을 보았나이다.’(루카 2,29)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 후 40일이 되는 오늘, 곧 2월 2일을 예수님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예수의 어머니 성모님께서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례를 지키기 위해 어린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오늘, 교회는 성전에 봉헌된 어린 예수님을 기억하며 특별히 자신의 삶을 봉헌한 모든 수도자들을 기억합니다. 이같은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은 모세의 규정에 따라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 메시아 예수님을 따라 우리 역시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제 1 독서의 말라키 예언서는 예언자를 통해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할 사자를 보내주실 것을 예고합니다. 예언자는 그 사자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은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말라 3,2ㄴ-3)
주님의 앞길을 닦을 계약의 사자는 마치 제련사가 뜨거운 불을 통해 철을 순수하게 만들어내듯, 또 염색공이 잿물을 통해 천을 하얗게 만들듯 주님을 맞이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롭게 준비시킬 것이라는 독서의 이 말씀은 봉헌의 의미와 함께 하느님을 맞이할 우리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비유적으로 잘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할 때 우리 모두는 오늘 독서의 말라키 예언자의 말처럼 아직은 정련이 덜 된 부족한 쇠와 같고 천에 색이 물들지 못해 옷감으로 사용되기에는 부족한 천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족하고 모자란 우리의 봉헌은 제련사의 불과 염색공의 잿물을 통해 보다 더 단단한 철이 되어야 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염색되어 어디에 사용해도 모자람이 없는 좋은 옷감이 되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 모든 작업을 가능토록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우리들을 위해 계약의 사자 메시아 예수님을 보내주실 것이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복음 말씀은 그 계약의 사자 메시아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봉헌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는 모습을 전합니다.
모세의 율법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의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라고 가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모든 이들이 하느님께 합당한 봉헌을 하도록 이끌어 줄 계약의 사자 메시아 예수님이 부모의 이끌림에 의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함으로서 모든 이의 봉헌을 가능토록 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는 이 봉헌은 오늘 독서의 말씀과 함께 우리로 하여금 봉헌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도록 합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사제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품 안에 안고 외치는 다음의 말은 그 의미가 깊고 새롭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약속, 곧 눈을 감기 전에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두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하루를 천년 같이 그 날을 고대하며 살아온 사제 시메온은 자신의 눈 앞에 놓인 아기를 보고 환희에 차올라 이 아기야말로 모든 이들을 위한 계시의 빛이며 영광이라 고백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사랑스러운 아기에 불과했던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자신을 봉헌함으로서 모든 이를 위한 계시의 빛이자 영광이 되었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할 때 우리가 얻게 될 그 모습을 예고합니다.
많은 이들이 봉헌을 이야기하며 희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원치 않지만 하느님이 하라고 하시니 마지못해 희생하는 마음으로 나의 것을 하느님께 내어놓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아니면 그렇게 해야 하느님께로부터 내가 원하는 다른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세속적 기대감에 봉헌을 가장한 희생을 마지못해 수행하는 것이 우리들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은 봉헌은 희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봉헌은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냉엄하신 하느님이 나에게 강제로 명령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봉헌은 기쁨이며 희망이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임을 오늘 말씀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오늘 독서의 말라키 예언자가 말하듯 우리는 봉헌을 통해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한 쇠가 되며, 우리는 봉헌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염색되어 존귀한 옷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려고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저 그런,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무른 철에 불과하며 어디에도 쓸 수 없는 볼품없는 천에 불과하다는 사실, 오늘 복음의 아기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서 세상 모든 이들을 비출 계시의 빛이자 모든 이들의 영광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여러분 역시 여러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려 노력해 보십시오. 하느님이 여러분을 세상의 가장 존귀한 그래서 모든 이들을 비추는 환한 빛이자 영광의 모습을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로서의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려는 의지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나의 것을 모두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도록 이끄는 가난한 마음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5년 한 해를 봉헌 생활의 해로 정하시고 모든 봉헌생활자들과 더불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권고하시면서 한국을 방문하여 수도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봉헌에 관한 소중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 길로 이끌기에 ‘어머니’입니다.”(2014.8.16. 한국 수도 공동체들과의 만남 중에)
여러분 모두가 오늘 주님 봉헌 축일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여러분의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함으로서 하느님이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주시는 모든 일들을 통해 여러분의 삶이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기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해 가난한 마음으로 이루시기를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비오니,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본기도 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