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환(李家煥,1742,영조18∼1801,순조1)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다. 자는 정조(廷藻)이고 호는 금대(錦帶) 또는 정헌(貞軒)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이용휴(李用休)의 아들이다. 1777년(정조1)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문신 제술에 장원했다. 1780년 비인현감, 이듬해 예조정랑, 1784년 생질 이승훈이 북경에서 서학을 들여오자 이벽(李蘗)과 논쟁하다가 도리어 천주교인이 되었다. 이듬해 병조참지, 1787년 정주목사, 1791년 신해박해에 교리연구를 중단하고,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서 천주교를 탄압하였고, 이듬해 대사간, 대사성, 개성유수, 1793년 형조참판, 1795년 주문모(周文謨)의 입국에 연루, 충주목사로 좌천되어 천주교인을 탄압하다가 파직되었다. 1797년 도총부 도총관, 한성판윤, 다시 천주교를 연구하여, 1801년(순조1) 이승훈, 권철신 등과 함께 신유박해에 옥사했다.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하였다.
탐라로 돌아가는 만덕을 보내며(送萬德還耽羅)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자인데 예순에도 얼굴은 마흔 살쯤 되어 보이네. 천금으로 쌀을 사서 백성을 구하고 배타고 바다 건너 궁궐에 조회했네. 오직 금강산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산은 동북쪽 안개 속에 있다네. 임금님께서 역마를 내려서 천리를 빛내며 강원도 관동으로 내려갔네. 높이 올라 멀리 보니 심안이 상쾌하고 표연히 손을 저어 바다 굽이로 돌아갔네. 탐라는 예부터 고씨 부씨 양씨인데 그녀는 오늘에야 서울에 올라와 보았네. 우레 같이 와서는 고니처럼 날아가 길이 고상한 모습으로 세상을 씻으리라. 인생에 이름 남기기가 이래야지, 여인이 궁궐을 생각하고 편안히 운수에 만족하리.
萬德瀛洲之奇女 六十顔如四十許 千金糴米救黔首 一航浮海朝紫禦 但願一見金剛山 山在東北烟霧間 至尊頷肯賜飛驛 千里光輝動江關 登高望遠壯心目 飄然揮手還海曲 耽羅遠自高夫良 女子今始觀上國 來如雷喧逝鵠擧 長留高風灑寰宇 人生立名有如此 女懷淸臺安足數 (大東詩選 卷7)
이 시는 1796년(정조20)에 지은 칠언고시다. <대동시선>에는 제목 뒤에 “만덕은 탐라의 과부인데 을묘년에 쌀을 사서 기근을 구휼했다. 임금이 하고 싶은 바를 물으니 말하길 하고 싶은 일은 없고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의녀로 이름을 올리고 역마를 내려주어 그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萬德 耽羅寡婦 乙卯糴米賑飢 自上問所欲 曰無所欲 欲見金剛山 遂錄名女醫 賜以驛遞 俾成其願)”라는 주가 붙어있다. <금대시문초(錦帶詩文鈔)>에도 이와 비슷한 서문이 있다.(李家煥, 錦帶詩文鈔 上. 萬德 耽羅寡婦 乙卯大饑 糴米賑飢 州牧以聞 至尊動色 問萬德所欲 萬德無所欲 欲見金剛山 遂錄名女醫 賜以驛遞 俾成其願 珍頒便蕃 道路輝光 以還其鄕. 嗟耽羅孤島 務在生殖 畜產之雌 亦禁渡海 况在于人 明眸皓齒 無千無萬 埋沒雲海 身遊上都 足踐名山 今有萬德 將地靈久蓄 一有發泄 亦宵旰一念 滲漉海外 匹婦與知 如鼓應桴 聊贈以言 義形于辭.) 이 시는 만덕을 소개하고 칭송하는 내용이다. 처음 두 줄은 모습과 행적의 소개다. 김만덕(金萬德,1739∼1812)은 관기 출신인데 장사로 큰 재물을 모았으며 을묘년(1795)에 흉년이 들자 재물을 털어 기민을 구제한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임금이 불러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 세 줄은 소원이다. 금강산 구경이 소원이라고 해서 임금이 역마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고, 금강산을 구경한 뒤에 제주로 돌아갔다고 했다. 마지막 석 줄은 행동과 칭송이다. 먼 섬에서 올라와 우레 같은 명성을 남기고 표연히 고향으로 내려갔으니 얼마나 깨끗하고 장하냐고 감탄하였다. 시에 서사(敍事)를 곁들였기에 보다 자유로운 고시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눈 온 뒤 맑음 (雪晴)
매양 수심 낀 산에 눈 내리더니 무슨 뜻으로 해가 숲에 솟았나. 옅은 검은 빛이 구름에 서렸더니 연한 푸름은 어린 풀의 마음이라. 까마귀와 솔개는 멋대로 날고 승냥이와 호랑이의 자취가 오로지 깊다. 홀로 원안의 집이 있어 고상한 정은 절로 고금에 같구나.
每愁山倒雪 何意日生林 慘黑屯雲色 微靑小草心 烏鳶飛不定 豺虎跡全深 獨有袁安宅 高情自古今 (大東詩選 卷7)
이 시는 만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오언율시로 침(侵)운이다. 울적하고 불만에 찬 마음을 드러내었다. 수련은 날씨에 대한 심정이다. 매양 우중충하게 흐려서 눈을 뿌리더니 오늘은 웬 일로 날이 맑게 개어 숲에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느냐고 묻고 있다. 함련은 주변 경치다. 날이 개었다고 하지만 검은 구름이 더러 보이고 어린 풀이 연한 푸르름을 띠고 있다고 하여, 그 때의 정치적 상황이 그리 좋지 않지만 자신은 오직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뜻을 함축하게 하였다. 경련은 숲 속의 사정이다. 까마귀와 솔개는 멋대로 날고 승냥이와 호랑이는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다고 하여 정조 임금이 총애하는 신하를 천주학을 믿는다는 죄목으로 얽어 죽이려는 노론 벽파의 날뜀을 이렇게 객관화한 것으로 보인다. 음흉한 호랑이는 숨어있고 설치는 까마귀를 시켜 시파를 공격하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미련은 자신의 심정이다. 후한(後漢) 때, 원안(袁安)이 권신 두헌(竇憲)에 대하여 두려움 없이 비판하고 지조를 지켰던 고사를 끌어와서, 자신도 원안처럼 노론 벽파의 탄핵에 흔들림 없이 지조를 지키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연광정에서, 두 수 (練光亭 二首)
강가 정자에 사월이라 이미 꽃은 없는데 발 사이 훈풍에 제비가 비끼어 나네. 한 빛 푸른 물결은 푸른 풀에 이었고 누구네 집에 이별의 한이 있는지 알 수 없네.
단군 임금 사당에 세월이 많이 지나 옛 조천석에 슬픈 노래 번지네. 대동문 밖엔 긴 강물이 흐르는데 돌아오는 물결 없고 가는 물결만 보이네.
江樓四月已無花 簾幕薰風燕子斜 一色綠波連碧草 不知別恨在誰家 // 仁聖遺祠歲月多 朝天舊石足悲歌 大同門外長江水 不見迴波見逝波 (大東詩選 卷7)
이 시도 만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칠언절구로 각각 마(麻)운과 가(歌)운이다. <금대시문초>에는 첫 수 전구의 “록(綠)”이 “벽(碧)”으로, “초(草)”가 “초(艸)”로 되었다. 평양 대동강 가의 연광정에 올라 주변의 경치를 읊으면서 자신의 서글픈 심회를 표현하였다. 첫 수의 기구는 계절감이다. 사월이라 꽃은 이미 져서 꽃놀이의 철이 지나갔음을 말했다. 승구는 초여름의 훈풍이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제비도 벌레를 잡아 새끼를 기르느라 바쁘게 날아다닌다. 전구는 강물과 강둑의 풀이다. 대동강 물도 푸르고 강둑의 풀도 푸르다고 하여 물색과 풀색을 하나로 이어졌다고 했다. 결구는 이별의 정한이다. 자신은 지금 누구와 이별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정지상이 읊은 ‘님을 보내며(送人)’의 “비 갠 긴 강둑에 풀빛은 짙은데 님을 보내는 남포에서 슬픈 노래 부르네(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라는 심정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정지상이 읊은 정한을 생각하고서 하는 말이다. 둘째 수의 기구는 단군에 대한 회고다. 단군의 사당은 오래 되어서 퇴락한 모습이다. 승구는 조천석이다. 조천석은 단군이 기린마를 타고 조천석에서 하늘에 올라 인간의 일을 보고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바위다. 단군의 유적 위에 슬픈 노래가 번진다고 하여 단군 회고의 울적한 심정을 드러내었다. 전구는 대동강 물결이다. 평양성의 대동문 밖에 대동강이 흐른다고 하여 유구한 세월을 강물에다 빗대었다. 결구는 인생의 허망함이다. 강물이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듯이 인생도 한번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다는 일회성의 비극을 객관화 한 것이다. 원대한 포부를 이루지 못한 회한이 스며 있다고 하겠다.
의침(義砧,1746,영조22∼1796,정조20)은 조선 후기의 승려다. 자는 자의(子宜)이고 호는 인악(仁岳)이며 속성은 이씨(李氏)로 일명 의첨(義沾)이라고도 한다. 경북 달성 출신으로 어려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문장을 지었다. 18세에 비슬산 용연사(龍淵寺)에서 벽봉(碧峯)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금강경>과 <능엄경>을 배우고, 23세에 상언(尙彦)에게서 <화엄경>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을 배웠다. 유교경전에도 통하여 유생들에게 주역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나아가, 오로지 참선에만 열중하였다. 1790년(정조14) 수원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할 때 불상의 개안식(開眼式)을 주재하고 복장문(腹藏文)을 지었는데, 정조가 그 문장을 칭찬하였다. 저서로 <화엄사기(華嚴私記)>와 <인악집(仁岳集)>이 있다.
우연히 읊음 (偶吟)
생각 끝에 작은 티끌도 허락지 않는데 겨우 생각을 건너다가 문득 참을 잃었네. 서쪽에서 온 뜻의 실마리를 알아야지 꽃 지고 새 우는 온 산의 봄을 알리.
心頭不許到纖塵 纔涉思惟便失眞 要識西來端的意 落花啼鳥滿山春 (大東詩選 卷11)
이 시는 선적(禪的) 깨우침을 표현한 칠언절구로 진(眞)운이다. 승려가 선정(禪定)에 들어 사색하는 과정을 비유를 통해 보여준다. 기구는 승려의 사색이다. 선승이 선정에 들면 생각 끝에 작은 잡념이라도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승려의 마음 닦는 자세라고 하였다. 승구는 자신의 생각 과정이다. 겨우 생각의 실마리를 잡아서 생각의 여울을 건너가다가 그만 참을 잃었다고 했다. 사유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도달하려 했던 상태를 아마 참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전구는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이다. 달마(達磨, Bodhidharma,?∼528)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禪)에 통달하였는데, 520년경 중국에 들어와 숭산(崇山) 소림사에서 면벽좌선 한 후 사람의 마음은 본디 청정하다는 이치를 깨닫고 이 선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하여, 당시의 중국 불교와는 다른 중국 선종(禪宗)을 창시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의 실마리란 선종의 근본 의미를 깨우쳐야 한다는 말이다. 결구는 선정을 통한 깨우침의 세계다. 그리하면 꽃 지고 새 울어 온 산에 봄이 가고 있음을 고요한 마음으로 음미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유득공(柳得恭,1749,영조25∼1807년,순조7)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자는 혜보(惠甫) 또는 혜풍(惠風)이고 호는 영재(泠齋) 가상루(歌商樓) 고운당(古芸堂) 등이며 본관은 문화(文化)로 조부가 서자인 서얼출신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숙부 유련(柳璉)에게 시를 배웠으며,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과 교유하며 개성, 평양, 공주 등을 유람하였다. 1774년(영조50) 생원이 되고, 1776년 유련이 연행길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의 시를 가져가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의 서문을 받아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내었다. 1779년(정조3)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고, 1784년 상의원 별제, 이듬해 제천 현감, 1786년 포천 현감, 양근 군수를 거쳐, 1790년 진하부사 서호수(徐浩修)의 종사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 학자 기균(紀畇), 반정균, 이정원(李鼎元) 등과 시로 교유했다. 1793년 광흥창 주부, 제용감 판관, 사도시 주부를 지내고, 1794년 가평군수, 1796년 풍천부사,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801년(순조1) 책봉사은사 조상진(趙尙鎭)을 따라 주자서(朱子書)의 좋은 판본을 구하러 중국에 다녀왔다. 조선후기 한시사가(漢詩四家)로 꼽힌다.
서경잡절 (西京雜絶)
백마로 주나라 찾은 지 천년이 지났는데 양복의 누선은 아직 섬에 있구나. 대동강은 밤낮으로 넘실넘실 흐르고 우거진 풀빛이 수심 겹게 하네.
朝周白馬已千秋 楊僕樓船尙有洲 浿水湯湯流日夜 蓒芊草色使人愁 (大東詩選 卷7)
이 시는 1773년(영조49) 봄에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과 평양을 유람하면서 지은 칠언절구로 우(尤)운이다. <영재집(泠齋集)>에는 <서경잡절> 15수 중 첫째 수로 실렸고, 전구의 “야(夜)”가 “석(夕)”으로, 결구의 “천초(芊草)”가 “우초(芋艸)”로 되었다. 서경의 역사를 돌아보고 지금의 풍경을 노래하였다. 기구는 기자(箕子)의 행적이다.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가 주나라를 찾아 은허를 보며 탄식하고 맥수가(麥秀歌: 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를 불렀다는 고사를 들어, 평양의 역사가 유구함을 말한 것이다. 승구는 한사군의 회고다. 양복(楊僕)은 한나라 무제 때의 누선장군으로 조선을 정벌하여 한사군을 설치했던 사람인데 그 자취가 낙랑의 옛터인 평양에 남아있다고 했다. 전구는 대동강물이다. 오랜 역사를 품고 대동강은 예나 지금이나 넘실넘실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고 하여 유구한 역사를 암시했다. 결구는 강변의 풀빛이다. 대동강변의 우거진 풀빛은 해마다 푸르러지는데 지나간 역사의 자취와 인걸은 간 곳이 없으니 수심겹다고 하였다.
송경잡절 (松京雜絶)
자하동 골짜기엔 풀들만 우거졌으니 나란히 말 달리던 궁녀는 보이지 않네. 예가 바로 신왕(辛王)이 행락하던 곳이니 지금도 제비는 쌍쌍이 나는구나.
紫霞洞裏草菲菲 不見官姬迸馬歸 爲是辛王行樂地 至今猶有燕雙飛 (大東詩選 卷7)
이 시는 1773년에 지은 송경잡절 9수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1790년(정조14) 이후에 지은 ‘이십일도 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의 고려 개성부 조에 여덟째 수로 실린 칠언절구 미(微)운이다. <영재집>에는 기구의 “초비비(草菲菲)”가 “초비비(艸霏霏)”로, 승구의 “병(迸)”이 “병(並)”으로 되었다. 개성을 유람하고 고려의 도읍지의 쓸쓸한 자취를 표현한 것이다. 기구는 자하동 골짜기다. 개성 송악산 기슭의 자하동을 찾아가 보니 옛날의 흔적은 간곳없고 골짜기에 풀만 우거졌다고 하여, 고려의 도읍지였던 송도의 퇴락을 한탄한 것이다. 승구는 시인의 아쉬움이다. 자하동 골짜기에서 임금과 궁녀가 나란히 말 달리던 모습을 상상했다가 그 흔적도 볼 수 없음을 아쉬워한 것이다. 전구는 회고다. 고려 말의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는 설에 따라 신씨의 왕이라 하고 자하동이 우왕이 즐기던 곳이라고 하였다. 결구는 지금의 모습이다. 4백년이 지난 지금의 송도 자하동에는 우왕과 궁녀가 나란히 말 달리던 자취는 상상하기도 어렵고, 제비들이 그들의 혼령인양 쌍을 지어 날고 있다고 했다.
백제의 옛 도읍 (百濟古都)
노래하던 누각과 춤추던 궁전은 강을 향했고 반월성 가에는 달그림자 졌네. 붉은 담요 차가워 잠이 오지 않는데 임금의 사랑은 자온대에 있었네.
歌樓舞殿向江開 半月城頭月影來 紅㲮㲪寒眠不得 君王愛在自溫臺 (大東詩選 卷7)
이 시도 ‘이십일도 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중 ‘백제 부여현(百濟 扶餘縣)’ 조의 네 수 중에서 첫째 수로 회(灰)운이다. 백제의 고도인 부여를 둘러보고 그 감회를 촉물흥감(觸物興感)의 수법으로 드러내었다. 기구는 누각과 궁전이다. 부여의 궁전은 백마강을 향하여 자리 잡았는데, 높다란 누각에서는 노래를 불렀고 널따란 궁전에서는 춤을 추었다고 하여 백제 말기의 향락적 분위기를 암시했다. 승구는 반월성이다. 부소산성과 금강을 따라 세워진 부여 나성은 달그림자에 어려 있다고 하여, 어슴푸레한 분위기 속에 무너진 옛 성을 제시하여 망국의 쓸쓸함을 더하게 하였다. 전구는 자신의 상황이다. 시인은 부여를 방문하여 객사에서 자면서 담요가 두텁지 않아 추위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현실적인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 회고의 계기를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결구는 백제 임금의 사랑이다. 백제의 임금은 부여의 왕성인 자온대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포근한 단잠에 빠지지 않았느냐고 하여, 자신이 추위에 떨고 있음과 대비시켰다. 그러면서 백제 임금의 행락적 태도를 꼬집었다.
가을날 이서구에게 주다 (秋日贈李薑山)
낙척한 세상살이 세월은 빠르고 높은 곳 올라서 읊으니 어찌 재주를 말하랴. 대장부는 앞에 닥친 일이 가소로우니 오늘 어찌 오른 손에 잔을 잡지 않으리. 원헌이 노래함은 병이 아니었고 동방삭의 이어진 구절이 어찌 곤궁함이겠나. 두 시인이 가을날 창 아래 마주앉으니 서리 소식 쓸쓸하여 흰 기러기 날아오네.
落拓塵間歲月催 登高能賦豈云才 男兒可笑前頭事 今日胡無右手盃 原憲行歌非病也 東方聯句幾窮哉 兩詩人對秋窓下 霜信蕭蕭白雁來 (大東詩選 卷7)
이 시도 1790년(정조14) 이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칠언율시로 회(灰)운이다. <영재집>에는 제목이 ‘가을에 시 여섯 수를 지어 이서구에게 화답하다(秋詩六首和薑山)’로 되었고, 여섯 수 중 다섯째 수다. 사대부 친구인 이서구에게 자신의 심중을 드러내어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말했다. 재능은 있지만 서얼출신이라는 신분제약으로 마음껏 포부를 펼치지 못한 강개함이 묻어 있다. 이덕무는 <청비록(淸脾錄)>에서 이 시를 인용하고, “영재의 글은 처녀처럼 섬약하다. 시에도 애절함이 있는데 가슴속에 아마 북받치는 것이 있어 그럴 것이다.(泠齋文弱如處子 而詩有時哀切 其胷中 或有觸激而然歟)”라고 했다. 수련은 낙척함과 재능이다. 이서구가 공명을 계륵(鷄肋)같이 여겼다지만 그것은 사대부의 호탕함이고, 비슷한 재능을 지녔음에도 낙척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세월은 빠르고 재주를 썩힘이 더욱 북받쳤을 것이다. 그런 심정을 반어로 말했다. 함련은 강개(慷慨)한 심정이다. 자신 앞에 닥친 모든 일들이 불만족스럽고 그러니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고 비통하게 내뱉었다. 경련은 곤궁함에 대한 고사다. 공자의 제자 원헌이 몹시 가난하여 그 노래가 애절했고, 한나라 무제 때의 익살꾼이요 부국강병을 주장했던 동방삭(東方朔)이 곤궁했지만 그 때문에 노래나 문장을 지은 게 아니라고 하였다. 미련은 가을날의 쓸쓸한 정감이다. 강개한 마음도 추스르고 이서구와 창 앞에 마주앉아 흰 기러기가 날아오는 가을 하늘을 바라본다고 하여, 낮은 벼슬로 전전한 자신의 처지에서 나온 쓸쓸한 심회를 싸늘해지는 계절감에다 투사했다.
박제가(朴齊家,1750,영조26∼1805,순조5)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자는 재선(在先) 또는 수기(修其)이고 호는 초정(楚亭) 또는 정유(貞蕤)이며 본관은 밀양으로 승지 박평(朴坪)의 서자다.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과 교유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 그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의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알려졌다. 1778년(정조2)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과 교유하였다. 돌아와 <북학의(北學議)>를 써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1779년 검서관이 되어 13년간 근무하였다. 1786년 왕명으로 <구폐책(救弊策)>을 올려 신분차별 타파와 상공업 장려, 국민생활 향상을 위한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다. 1790년 진하사 황인점(黃仁點)을 따라 연경에 다녀왔다. 1793년 부여현감으로 비속한 문체에 대한 자송문(自訟文)을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장원, 오위장이 되었다. 영평 현령을 지내고, 1801년(순조1) 사은사 윤행임을 따라 중국에 다녀와, 윤가기(尹可基)의 흉서 사건에 그와 사돈관계라는 이유로 종성에 유배, 1805년 풀려났다.
문수문을 넘어 (踰文殊門)
짐을 꾸려 멀리 구름 속으로 드니 굽이굽이 험한 길을 모두 올라야 하네. 해 지니 현도국에 연기 일고 가을바람 부는데 나그네 철위산에 있네. 선방은 서리 내린 나무에 가려 있고 화각소리는 멀리 물굽이에서 나네. 때가 맑고 하늘 험한 게 기쁘니 성곽은 조각구름 사이에 높이 기댔구나.
遙遙行李入雲閒 鳥道縈紆摠是攀 落日烟生懸度國 秋風客在鐵圍山 禪房掩映霜千樹 畫角蒼茫水一灣 且喜時淸空險阻 女城高倚片雲間 (貞蕤閣初集)
이 시는 1771년(영조47) 즈음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칠언율시로 산(刪)운이다. <대동시선>에는 제목이 ‘북한산 문수사에서(北漢文殊寺)’로 되었고, 함련을 제외하고는 시가 약간 다르다.(大東詩選 卷7. 北漢山文殊寺. 天光漏處乍窺關 鳥道縈廻摠是拚 落日烟生懸度國 秋風客在鐵圍山 形如倒甕三峯坼 鳴似衝牙一水還 初到寺前頻顧影 紅明衣袂入楓間.) 북한산 문수사에 올라 주변 경치를 읊었다. 이덕무는 <청비록(淸脾錄)>에서 “그의 시는 웅대한 곳은 기상이 장렬하고 섬세한 곳은 아름답고도 미묘하다.(李德懋, 靑莊館全書, 淸脾錄, 朴齊家. 其爲詩 大處磊落 纖處娟妙.)”라고 평했다. 수련은 문수사로 오르는 길이다. 구름 속으로 솟아 있는 험한 길을 굽이굽이 올라갈 것을 걱정하는 태도가 드러나 있다. 함련은 멀리 상상한 풍경이다. 북한산 보현봉 아래에 있는 문수사에 올라서 주변을 둘러보니 서역에 있다는 현도국에서 이는 연기가 보이고 먼 땅에 솟아있다는 철위산에 오른 듯하다고 했다. 그의 장렬한 기상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경련은 시청각을 대비시킨 대구다. 선방 풍경과 멀리서 들리는 뿔피리 소리를 조응시켜서 선방의 고요함을 강조했다. 미련은 날씨다. 날은 맑지만 바람이 세게 부는지 문수사 뒤편의 북한산 성곽도 조각구름에 휩싸인다고 했다. 이덕무도 박제가의 잘 된 시구절로 이 시의 함련을 인용해 두었다.
백운대에서 (白雲臺)
땅과 물은 여기에서 섬세함을 다투어서 하늘이 덮은 곳은 실과 같네. 뜬 구름 같은 인생 좁쌀처럼 작으니 앉아서 천지개벽할 때를 생각하네.
地水俱纖競是涯 圓蒼所覆界如絲 浮生不啻微如粟 坐念山枯石爛時 (大東詩選 卷7)
이 시도 1771년(영조47)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칠언절구로 지(支)운이다. <정유각집(貞蕤閣集)>에는 제목이 ‘백운대 꼭대기에 올라(登白雲臺絶頂)’로 되었고, 세 수 중 둘째 수다. 전구의 “시(啻)”가 “시(翅)”로, “여(如)”가 “어(於)”로 되었다. 이 시는 그의 또 다른 측면인 “섬세한 곳은 아름답고도 미묘하다(纖處娟妙)”는 말에 어울릴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울분이 응축되어 있기도 하다. 기구는 백운대 꼭대기다. 크지 않은 바위 하나이니 땅과 물이 섬세함을 다툰 곳이라고 한 것이다. 승구는 과장된 비유다. 백운대 꼭대기가 실 끝만 하게 하늘에 덮여 있다고 했다. 북한산의 가장 높은 곳인 백운대 정상이니 뾰족하게 하늘에 닿은 부분이라 좀 과장을 했다. 전구는 인생관이다. 인생의 부질없음을 불교적 시각으로 뜬 구름 같다면서, 이 또한 좁쌀처럼 작다고 했다. 서얼이라 차별받는 현실에 대한 비관이 이러한 인생관을 갖게 했을 것이다. 결구는 자포자기한 심정이다. 현실에서는 뜻을 펼 수 없으니 차라리 산이 마르고 돌이 녹아버리는 지구의 종말이라도 와서 천지개벽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연암에게 드림 (寄燕嵓)
영락하여 때때로 술 미치광이라 부르니 세상 어디에 밭갈 땅이 있을까. 젊었을 때 문득 뗏목 탈 뜻 품으니 풍년에도 오히려 벽곡 방도 구하네. 차라리 경륜을 시정에 펼지언정 과거로 문장 인정 안 받겠네. 포의로 자주 어린애들 놀림감 되지만 오늘의 벌열은 맹광에게 부끄럽네.
落魄時時號酒狂 人間何處耦耕堂 少年却抱乘桴志 豊歲還求辟穀方 寧以經綸爲市井 莫將科擧認文章 白頭屢被兒童笑 閥閱如今媿孟光 (貞蕤閣初集)
이 시는 1778년(정조2) 연행하기 이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칠언율시로 양(陽)운이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이 스승으로 모셨던 박지원의 풍모를 그린 것이다. 수련은 생활 형편이다. 영락하여 술 마실 돈도 없지만 누가 술을 사면 취하도록 마셔 술 미치광이라 지탄을 받고, 생계를 유지할 땅 마지기도 없다고 그 형편을 말했다. 함련은 초월적 지향이다. 당시 현실에서는 뜻을 펼 수 없으니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넌다면 나를 따를 사람은 자로일 것이다.(子曰 道不行 乘桴 浮于海 從我者 其由與)”라고 말한 공자처럼 뗏목을 탈 뜻을 품었고, 풍년이 들어 양식 걱정이 없어도 곡식을 먹지 않고 신선이 될 방도를 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불우하고 어려운 현실을 떠나고 싶어 했다는 말이다. 경련은 재능이다. 출중한 재능을 지녔지만 조정에서 알아주지 않으니 차라리 시정에서 자신의 경륜을 펼지언정 과거시험에 매달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미련은 어렵지만 떳떳한 삶의 자세다. 벼슬이 없는 선비로 어린애들에게까지 놀림을 받지만, 권세가들은 후한 때 양홍(梁鴻)의 아내로 부도(婦道)를 지켰던 맹광같이 올곧은 박지원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회포를 쓰다 (書懷)
공명을 원치 않고 신선도 원치 않아 살아오다 후회되는 건 젊음을 잃은 것. 주판 놓다 치움은 왕융의 비루함 때문이고 집터 묻다 그제야 허사의 어짊 알았네. 본전과 이자는 장날 가져오고 올벼와 늦벼가 가을 논에 이었네. 다른 해에 바닷가에 집을 지어 대나무 천 그루에 달빛에 배 띄웠으면.
不願功名不願仙 治生端悔失靑年 執籌休怪王戎鄙 問舍方知許汜賢 子母靑錢通亥市 弟兄紅稻接秋田 他年置屋滄海上 脩竹千竿月一船 (大東詩選 卷7)
이 시는 1778년(정조2) 이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칠언율시로 선(先)운이다. <정유각집>에는 제목이 ‘이수당의 저녁 생각(夷樹堂夕思)’으로 되었고 두 수 중 둘째 수다. 미련 하구의 “해(海)”가 “강(江)”으로 되었다. 이덕무는 <청비록>에 이 시를 인용하고 “이 선비가 안목이 매우 좁기는 하나, 또한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此措大眼孔甚小 然亦不易辨)”라고 평했다. 전원에서 자연을 즐기며 살기를 바라는 그의 작은 소망을 그렇게 평했다고 하겠다. 수련은 소망과 아쉬움이다. 공명을 달성하거나 신선이 되어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전원생활을 즐기고자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감을 아쉬워하였다. 함련은 고사 인용이다. 진나라 사도(司徒)였던 왕융이 욕심이 많아서 많은 전답의 회계를 맞추고 오얏 씨에 송곳질을 한 일과, 삼국시대 위나라 허사가 나라 일보다 농토와 집터에 관심을 두었던 일을 인용하고 왕융은 비루하고 허사는 어질다고 했다. 자신의 처지에 국사에 관심을 두어봤자 소용없으므로 차라리 허사의 개인적 계책이 어질다고 한 것이다. 이를 두고 이덕무는 안목이 매우 좁다고 평한 것이리라. 경련은 유족함의 소망이다. 시장에서는 본전과 이자가 들어오고 들판에는 벼들이 익어가는 부가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련은 전원지향이다. 넉넉한 살림에 운치 있는 전원생활을 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그의 내면적 욕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신분차별을 타파하고 상공업을 장려하며 국민생활을 향상하기 위한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윤행임(尹行恁,1762,영조38∼1801,순조1)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초명은 행임(行任)이고 자는 성보(聖甫)이며 호는 석재(碩齋)이고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윤집(尹集)의 후손이다. 1782년(정조6)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검열, 주서, 초계문신, 규장각 대교가 되었다. 1784년 설서, 1788년 시파(時派)로서 벽파(僻派)의 탄핵을 받아 성환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고양군수, 과천 현감, 규장각 직각, 동부승지, 1790년 광주 부윤, 이듬해 양주목사, 1792년 대사간, 이조참의, 이듬해 비변사 부제조가 되었으나, 벽파의 공격으로 고양에 유배되었다. 1794년 정리사(整理使), 이듬해 돈녕도정, 1798년 모친상을 당했다. 1800년(순조 즉위) 도승지, 이조참판, 제학을 거쳐, 이조판서, 이듬해(순조1) 양관 대제학, 예조판서, 서학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전라감사가 되었다가, 신지도에 유배되어 윤가기(尹可基)의 흉서 사건으로 참형 당했다.
신해년 봄에 궁궐에 절하고 귀로에 풍계 북쪽 기슭에 올랐다 (辛亥春拜宮 歸路登楓溪北麓)
하늘에 빛나는 해가 산을 휘감고 꽃나무는 상서로운 아지랑이로 기쁘게 맞이하네. 기쁨을 다투는 두 동이 술이 바다와 같아서 화기를 빚어오니 만방이 하나라네.
中天赫日繞山龍 花木欣迎瑞靄中 爭喜朋尊春似海 釀來和氣萬方同 (大東詩選 卷7)
이 시는 1791년(정조15)에 인왕산 기슭 풍계 세심대에서 지은 칠언절구로 동(東)운이다. <석재고(碩齋稿)>에는 제목이 ‘세심대에서 운을 이어(洗心臺 賡韻)’로 되었다. 세심대는 경복궁 신무문에서 서쪽으로 나와 인왕산 기슭 초입 선희궁 뒤쪽에 있었다. 현재는 청운초등학교와 국립 서울 맹학교 사이에 위치하는 곳이다. 봄날 궁궐에서 물러나와 벗들과 세심대에 올라 궁궐 주변과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기구는 세심대에서 보는 햇빛이다. 중천에서 빛나는 햇빛이 꿈틀거리는 산들을 내리 비추고 있다. 임금의 성덕이 산천과 인걸을 포용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승구는 꽃나무와 아지랑이다. 세심대 주변의 봄꽃과 봄날 아지랑이가 그들을 환영한다고 하여, 봄볕 같은 임금의 은혜 속에 벗들이 모임을 가졌음을 말했다. 전구는 준비된 술이다. 벗들과 기쁘게 마시는 두 동이 술이 바다와 같다고 했다. 임금이 내린 술이 마치 바다와 같다고 하여, 임금의 은총을 뜻하게 했다. 결구는 술에 취함이다. 술에 취해 만방이 하나로 동화되듯이, 술로 신하와 백성들이 화기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했다. 주변 묘사를 임금의 덕과 연결시켜 규장각 각신의 면모를 잘 드러내었다.
다시 세심대에 올라, 지난봄에 지은 시로 총관 이민보의 시에 화운케 하다 (復登洗心臺 用昨春詩令和摠管李敏輔詩)
그윽한 북쪽 성벽 기슭에 삼청동의 지경도 시끄럽지 않은데 늦은 봄 임금님을 모시니 느린 해는 이름난 동산을 비추네. 땅과 밝은 때가 만나니 산도 마땅히 임금님께서 납심을 두려워하리. 머리에 꽃 꽂은 선비들에게 은혜로운 술이 길거리 술통에 출렁거리네.
窈窕北城麓 三淸境不喧 晩春陪御仗 遅日在名園 地與明時遇 山當竦處尊 簪花多吉士 恩露漾衢樽 (大東詩選 卷7)
이 시는 1792년(정조17)에 다시 세심대에 올라 지은 오언율시로 원(元)운이다. <석재고>에는 제목이 ‘세심대에서 운을 이어, 계축년에(洗心臺 賡韻 癸丑)’로 된 두 수 중 첫 수로 실렸다. 이 시는 세심대에서 정조 임금을 모시고 어사화를 꽂은 급제자를 축하하면서 어명에 따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조의 명으로 이름과 호를 바꿀 만큼 각별한 총애를 입었다. 그래서 이 시도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잘 드러난다. 수련은 세심대에서 바라본 궁궐 북쪽의 분위기다. 북악산 성벽 아래 삼청동 지경은 그윽하고 조용하다고 했다. 함련은 세심대 주변이다. 늦은 봄 임금님을 모시고 세심대에 오르니 햇살도 이름 있는 세심대 주변을 비춘다고 하여 임금이 행차한 곳을 묘사했다. 경련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다. 성군을 만나 이 땅 위에 밝은 날이 왔으니 산천도 임금님의 행차를 공경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임금에 대한 그의 극진한 충성심을 드러냈다. 미련은 새로 뽑힌 선비들에게 주는 임금의 은총이다. 어사화를 머리에 꽂은 선비들에게 임금이 내린 술이 술통에 넘친다고 하여, 급제자들에 대한 임금의 기대와 은총을 술로 객관화 하였다. [출처] 이가환, 의침, 유득공, 박제가, 윤행임의 한시|작성자 jaseo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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