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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10년 전 제가 썼던 편지인데, 주소를 잘 찾지 못해 보내지 못하고 뒤에 들으니 작고하셨다고 해서 그냥 보관해놨던 편지 내용입니다. 그대로 복사해서 여기에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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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환 선생님 좌하,
2007. 5. 2
선생님, 멀리 이국 독일에서의 생활이 어떠하신지요? 저 불초 임택호 입니다. 안부인사 한 마디가 이렇게 지연된 데 대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뵈온 것이 1965년 3월 3일, 동국무선공업고등학교 1학년 4반 교실, 신입생 제4반을 맡으신 선생님께서 “아직 누가 누군지 잘 모르니까 반장과 부반장을 성적순으로 임명하겠다”고 전제하시고 반장에 제 이름을 , 그리고 부반장에 키가 큰(대) 이병선을 호명하시었습니다. 시골에서 생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고, 충청도 깡촌의 말투와 촌티가 더덕더덕했던 제가 선생님과의 인연이 맺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41년 2개월 전입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선생님, 뵙고싶었습니다
1996.1월 어느 날, 졸업 31주년 기념 동기 신년회 행사에 연락이 닿는 은사님들을 초청했었는 데 김보원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 해서 선생님의 안후를 여쭸더니 선생님은 독일로 이민을 가셨는데 얼마 전 한번 나오셨을 때 만났다면서 저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때 주소를 받아 옮겼는 데 그 후 어디에 그 주소를 써놨는 지 기억이 나질 않아 백방으로 기억을 더듬었지만 생각이 나질 않다가 상당시간이 지난 뒤에야 당시 나눠준 동기생수첩 맨 뒷면 공란에 기입한 것을 발견하고 아드님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선생님의 주소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없는 전화번호”라는 멘트만 들렸었습니다.
결국 일단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는 당시만 해도 펜으로 썼는데 수정을 해야겠어서 접어놓았다가 또 바쁜 일상에 묻혀 그만 또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물론 성의부족임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차일피일 하다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간 흘러간 세월이 하도 길다보니 선생님의 지난 세월도 여쭙고 싶고, 제 지나온 역사도 브리핑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요즘 건강하시겠지요? 어떻게 소일하고 계신지요? 사모님께서도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1965.3.2일, 논산 제2훈련소에 입소하여 6주간의 신병기초훈련을 마치고 대전에 있는 육군통신학교로 옮겨 다시 6주간의 무선통신병 기초훈련을 받은 뒤 그 곳에 자충되었었습니다. 그 통신학교 6주 교육기간 중 부친상을 당했지요. 당시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에 무성의한 상관을 만나 검열중이라는 이유로 부친사망 전보를 받고도 뒤늦게 알려주고, 그러고도 휴가조치를 내려주지 않아 명색이 맏아들이었고, 입대하던 날 간신히 벽에 등을 기댄채 제 하직의 절을 받으시던 제 아버지 발인은 커녕 3우제가 끝난 날 밤에 이런 저런 교통편으로 도착했었답니다.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도 이제 세월의 약으로 흔적없이 치유되긴 했지만 참으로 아쉬운 세월이었습니다. 또 그 곳에서 일등병 시절, 간부후보생 시험에 응시하려고 군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다가 보안부대 사병 한 놈이 돈뜯으려고 농간하는 바람에 멋도 모르고 시험도 못 치른 채 고혈압이라는 황당한 사유로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저 말고도 도종석이라는 동기와 함께 말입니다.
그 통신학교에서 병장이 되고서야 첫 휴가를 얻어 고향엘 다녀왔더니 휴가중에 주특기차출로 전출명령이 나 있었습니다. 본인에게는 통보도 해주지 않은 채…..
결국 귀대한 뒤 더플백을 들쳐메고 시외버스를 타고 용산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 마자 사복헌병의 검문에 걸려 헌병대에 가서 도망병취급을 받고 억지조서에 지장을 찍고 서울에 있는 모 부대에 전입됐다가, 나중에 맹호부대 파월로 인해 새로 생긴 향토사단 보충요원으로 차출되어 충남 조치원으로 전속되었지요. 그 곳에서 얼마간 근무하다가 의무복무기간 + 3년 수학기간(장학금 수혜기간)을 합한 5년 반이라는 세월이 너무 장구하게 생각되어 다시 간부후보생 시험에 응시하고, 다시 도미교육에도 응시했습니다.
먼저 도미교육 합격통보가 내려와서 1967.2월 경북 영천 소재 행정학교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12주간 영어교육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아시다시피 영어교육시간이 주 1~2시간에 불과했기에 잘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던 덕분으로 1등으로 졸업했는 데 졸업을 1주일 앞두고 간부후보생 합격통보를 받아 졸업과 동시에 부대에 복귀하여 전출신고를 하고 전남 광주에 있는 상무대(육군보병학교)에 입교했습니다.
그 곳에서 42주간 장교후보생 교육을 마치고 다시 대전 육군통신학교로 옮겨 통신병과 교육 12주를 마친 뒤 1968.3.9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통신학교 교관요원으로 자충되어 소위 시절을 보냈습니다. 중위가 된 뒤 다시 장교 도미교육과정에 응시하여 1970년 봄 서울 국방부 뒷편의 종합행정학교 어학부에서 다시 12주동안 장교군사영어반을 마쳤습니다. 거기서도 3개 반46명 중 1등으로 졸업한 뒤 춘천으로 발령되어 대기기간 근무를 하다가 도미파견명령을 받고 서울에 와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출국 3일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육본 담당관의 행정착오로 출국날짜를 1개월 잘못 알아 미국 방공학교로부터 “미입교로 인한 입교취소”통보를 받는 상황을 경험했답니다. 결국 6개월짜리 교육은 물건너가고, 다시 춘천으로 복귀하여 근무하다가 나머지 미국 육군통신학교 3개월과정의 입교명령을 다시 받아 재차 육본에 올라와 수속을 밟은 뒤 1971.2.17 출국하여 뉴저지 주에서 만 3개월 생활하다가 5.17일 귀국하여 다시 대전 육군통신학교에 전속되어 다시 교관생활을 했습니다.
그 곳에서 1973년 전후방교류로 최전방 3사단에 전속되어 근무하고, 1년 여만에 다시 경기도 용인에 파월의 댓가로 새로 창설된 제3야전군사령부 유선중대장으로 보직되어 2년 여 임기를 마쳤고, 이어 참모부장교로 근무한 뒤 소령에 진급하여 어린 나이에 전주에 있는 향토사단 통신참모/통신지원대장으로 발령되어 근무했답니다.
그 곳에서 지휘관임기를 마친 뒤 다시 1980. 3월 의정부에 있는 한/미 연합야전군사령부 통신참모부 계획장교로 보직되어 근무하다가 육군대학 정규과정에 응시하여 합격한 뒤 다시 필리핀지휘참모대학 시험이 있기에 응시(육군대학 정규과정 졸업자 내지 합격자만이 응시 가능했기 때문에 마침 기회가 좋았었지요.)하여 육군과 공군이 며년 1명씩 교대로 가기 때문에 육군으로서는 2년마다 한 명씩 기회가 오는 데 다행히 제게 그 기회가 주어져서 1981.1-12월까지 1년간 필리핀 마닐라에 가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가족을 동반할 수 있도록 규정이 적용되었는지라 제 가족을 대동하고 갔지만 당시 임신중이던 제 처가 입덧이 매우 심해서 2개월간 살다가 집사람은 귀국하고 저 혼자 지냈습니다.
그 곳에서 교육이 거의 끝나갈 즈음 중령진급 발표가 나왔는데 제 이름이 포함되어 12월 귀국한 뒤 용산에 있는 한미연합군사령부에 보직되었습니다. 그러나 진급되면 1년 안팎으로 대대장으로 발령되기 때문에 연합사에서 원래 3년간 근무하게 돼 있었지만 10개월 만에 떠나야 했지요. 과천에 있는 육군통신사령부(현재는 국군통신사령부) 예하 제50통신대대장으로 내정되었습니다. 육군지휘통제통신망의 근간인 육군에서 예하 주요 사령부간 회선을 제공하는 마이크로웨이브통신망과 기타 서울/경기지역 유선 및 무선비상통신망을 책임지는 부대로 파견지도 많고 병력으로나 장비면으로 가장 큰 통신대대였습니다.
잠시의 여유도 없는 대대장직을 25개월여 마치고 의정부에 새로 창설된 제7군단사령부라는 곳으로 전속됐습니다. 일반 출신 군단장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분이셨는데 육본 인사운영감실에 부탁하여 자력을 검토하여 선발해서 요구한 관계로 제 의사에 관계없이 가게 됐었습니다.
그 곳에서 임기를 마치고 다시 용인에 있는 상급사령부인 제3야전군사령부 통신전차참모부로 전속되어 근무한 뒤 다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로 가서 대령진급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대대장 시절 뇌물을 지극히 탐하던 지휘관에게 불경죄(부하를 구하려다가 제 건의가 수용되지 않아 제가 전역하겠다고 말한 사건으로)를 범하여 기록카드에 ‘질이 나쁜 놈’으로 낙인찍혀 다른 좋은 자력에도 불구하고 낙선된 것이 면담결과 확인되었지요. 결국 한 해만 더 고생하면 틀림없다는 약속을 받은 뒤 얼마 안 있어 중앙정보부 고위직에 계신 분 한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가 중대장 할 때 대대장으로 모셨던 분이 육사출신이 중용될 때라 청와대를 거쳐 중앙정보부(현 안기부)에 계셨던 겁니다. 결국 전역지원을 제출하고 명예전역(원에 의한 임기 종료 전 전역)을 했습니다.
1990.3.31부로 26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4.2일부로 이문동으로 출근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기틀이 모두 잡힌 시절이라 정규직원 채용은 불가능했고, 새로 제정된 전문직공무원법에 의거 어학전문요원으로 계약직으로 채용된 것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10년 2개월간 근무하다가 1999년 김대중의 대통령당선 후 모든 공무원의 수를 10% 감축하라는 상부 지시에 따라 전혀 뜻밖의 감원대상에 포함된 것입니다. 일반직(정규직)공무원은 임기가 있는지라 자를 수가 없지만 계약직은 매년 형식적으로나마 재계약의 형식을 거쳐야 하는 데 재계약만 체결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잘리는 제도였기 때문에 악 소리도 못하고 나온 거지요.
그 때 마침 친구의 소개로 고등학교 8년 후배(야간반)가 사장으로 있는 한 벤쳐기업에 상무로 취직을 했습니다. 국정원 임기도 채 못 채운 채 미리 와 달라고 해서 갔었지요. 그런데 김대중정부 들어서서 IMF 구제금융조치가 시행되면서 정부에서 벤쳐기업 육성이라는 취지로 정부 돈을 마구 부어서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수많은 벤쳐기업들의 재무구조는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 빛잔치에 다름아니었습니다.
연금이라도 제대로 받으면서 살려면 그 곳에서 길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청해서 서명했던 연대보증에서 풀어달라고 부탁한 뒤 구조조정을 주도하여 그 속에 저를 포함시켜서 남보기에 흉하지 않게 퇴사했습니다. 그 후 옛날 육본에서 근무할 때 친절히 도와줬던 사람이 자기 회사에 오라기에 가서 무역업을 잠시 도와주다가 하루 종일 컴퓨터(전 세계 해외 바이어 발굴하여 E-메일 보내고 받아 처리하는 업무가 주 업무였기에)를 대하니 퇴근할 때 사물이 모두 2중으로 보이더군요. 어렵게 퇴사하였습니다.
다음 직장은 고등학교 7년 후배가 경영하는 조그마한 정보통신공사업체였습니다. 명색은 전무. 정확히 1년간 근무하다가 나왔는 데 그 회사도 제가 나오고 1개월 만에 도산하고 말았습니다. 사장이 욕심에 부도수표를 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나이도 있고하니 노후에 대비해서 아예 복덕방이나 해 보겠다고 마음먹고 고시 수준이라는 공인중개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강남의 한 전문학원에 입학했지요. 그것도 최소한 1년은 공부해야 하는 데 학원등록 직전에 원서를 내놨던 주한미군 상대 택시업체인 소위 ‘아리랑택시’에서 연락이 와서 인터뷰를 받았는 데 택시운전을 하려고 지원했는데 인터뷰하던 사장이 관리를 하지 않겠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택시회사의 말단관리자로 취직해서 당장 출근해달라기에 다음 날부터 학원 끊고 용산 8군 안으로 출근했습니다. 그러나 보수가 형편없는데다 일은 고달퍼서 1년 여 버티다가 사직을 신청했습니다. 마침 군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가 대구의 어느 중장비정비업체에 들어가서 주한미군 차량정비 용역을 수주했는 데 저더러 서울경기지역 책임자를 맡아달라고 1년 전부터 청해왔었는 데 당시 택시회사에 들어올 때 ‘인생 마지막 직장으로 알고 근무하기로’ 약속하고 입사한 지 얼마 안됐던 터라 회사에 미안해서 사양했었는데 1년간 근무했지만 너무 고단하고(주 6일 꼬박 근무에 새벽 출근 등) 보수도 적은데다 비젼도 없고 해서 사직을 한 뒤, 당초 초빙을 받았던 자리는 모두 충원이 됐는지라 기 충원된 사이트 중 관리상 문제가 있는 미니 사이즈 팀의 관리자를 교체하는 형식으로 자리를 옮겨 들어왔습니다.
그게 현재 근무중인 수원시 소재 공군비행장 내 미군 미사일부대 트럭정비팀 관리자 자리입니다. 용역업체들이 다 그렇지만 월급은 정말 지나칠 정도로 적습니다만 지금 저희들의 연령에 급여의 다소를 가릴 형편도 아니고, 근무여건은 상대적으로 좋기에 기꺼이 일하고 있습니다. 주 5일 근무에, 한국 공휴일과 미국 공휴일 모두 쉽니다. 시간외근무도 없구요. 연금을 받고있는지라 조금 보태는 셈이지요.
제 가정적으로는, 좀 늦게 서른한 살 12월에 함흥에서 1.4후퇴 때 피란나온 피란민의 딸로 서울에서 살아온 여자와 혼인해서 딸 셋을 낳고 포기했다가 뒤 늦게 9년만에 들어선 늦둥이를 낳아 1남을 보탰습니다. 그 녀석이 지금 고3이랍니다.
제가 2학년 1학기 때 제 아버지께서 작고하셨기에 정상적으로 취업을 한다해도 모두 어렵던 시절에 어린 동생들이 줄줄이 딸린 장남이 어린 나이에 군에 입대하다보니 돈도 못 벌고 형편이 많이 어려웠었지요. 임관마저 앞에 말씀드린대로 나쁜 군인의 농간에 속아 몇년 늦어져서 그 고통은 가중되었었지요.
임관 후에는 몇 푼 안되던 당시 초급장교의 월급을 하숙비를 제하고 나서 거의 고향집에 송금했고, 어려운 가운데 제 바로 밑 동생이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고 끝으로 두 남동생은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유학했지요. 대학까지 마쳤습니다. 그 중 하나는 서울공대를 나와 기술고시를 거쳐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답니다.
제 아이들은 아직 한 명도 출가를 못한 상태구요. 저희들 동기생들의 연령대가 62~63살이다보니 이제 직장에 남아있는 경우가 드믄 나이가 되었지요. 저는 돈 복은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고 저축은 생각도 못했지만 어렵게어렵게 재형저축이라도 타서 투자랍시고 한 것들마저 번번히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능력도 없어서 그렇겠지만 재운도 타고나질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묘하게 피해가더군요.
그러나 요즘 세상에 다들 그렇듯이 굶을 염려는 해결됐으니 이제는 건강에 신경쓰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최면을 걸면서 가능한 한 즐거운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나온 40여년간 제 변화를 소개해 올리다보니 단편소설 수준이 되었습니다. 읽어주시느라 눈이 피로하셨을 것 같군요.
선생님, 표현은 많이 하지 않으셨지만 제게 각별한 제자사랑을 베풀어주셨던 선생님을 지금도 가끔씩 회고해본답니다. 1학년4반에 이어 3학년 3반 때 다시 저희들의 담임을 맡아주셨을 때 제게 후배의 가정교사 자리를 마련해주시려고 주선해주셨던 일, 물론 그 후배어머님이 저를 부르진 않아 성사는 안됐지만 선생님의 따스한 애정은 평생 품고 삽니다. 그런 선생님께 철없던 시절 군대생활에 쫓겨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저는 선생님께 은혜를 모르는 나쁜 제자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선생님, 그립습니다. 부디 다음에 한국에 귀국하시면 꼭 뵙고싶습니다.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011-9258-5592, 02-537-5592) 그리고 선생님 독일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시면 전화를 드려서 음성을 듣고싶습니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7.5.11(금)
한국 수원에서
불초 임택호 올립니다.
첫댓글 !!!
택호 친구!
참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걸었네 그려!
그래도 노후에 건강한 모습으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한영환 선생님은 나도 존경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2, 3학년 담인선생님의 성함은 기억 안나도 한영환 선생님은 기억에 생생하다네.
그런데 직장을 그렇게 많이 변경한다는 것 정말 대단하다. 불굴의 투지에 찬사를 보냅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겁고 보람된 여생을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친구가 자랑스럽습니다.
택호!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