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불좌상 小考(최성은).pdf
강순형 “용선대 석불은 다른 데서 온 것”
강순형 가야문화재연 소장, ‘반박’ 기고
불신과 연화대좌의 일습성 여부도 의문
글쓴이 : 이학종
좌대의 명문(銘文)에만 근거해, 보물 제295호로 지정된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의 제작연대가 기존학설인 9세기가 아니라 통일신라 초기인 722년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한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의 견해는 신빙성이 높지 않으며,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소장은 <법보신문>에 기명연재 중인 ‘강순형의 숨어있는 성보문화재를 찾아’에 기고한 글(8월 26일자)을 통해 ‘명문 내용만 가지고 연대를 주장하는 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강 소장은 이 기고에서 먼저 용선대 불상이 앉은 현재의 자리가 본래 자리가 아니었음을 1970년 초의 사진자료를 통해 밝히고, 따라서 불상이 관룡사 쪽을 향한 동향(東向)이니, 마을 쪽을 향했느니 하는 논란은 그 근거가 없다는 점을 확인시켰다.
강 소장은 더구나, 지금의 자리에서 뒤쪽으로 물러난 이전의 자리 또한, 매우 부실한 봉안 상태로 보아 누가 봐도 본래의 자리가 아니라는 새로운 사실을 역시 사진자료를 통해 입증했다.
강 소장에 따르면, 1973년 11월에 용선대 석불상은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으며, 뒤쪽의 이전 자리에는 1966년에 또 다른 곳에서 용선대로 석불상이 옮겨져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해, 현재의 자리는 본래부터 용선대 불상용으로 조성되어 봉안된 본자리가 아니며, 용선대 석불상이 아예 다른 곳에서 옮겨온 불상이라면, 그동안 9세기로 보아온 불신(佛身)과 이번에 발견된 722년의 명문이 새겨진 연화대좌의 온전한 일습(一襲·한벌) 여부와, 연대추정에 재삼 신중을 기할 기본요건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강 소장은 또 현재의 용선대 석불상은 불신과 대좌의 석질 색깔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따라서 앞쪽에 함께 놓인 석등하대와 그 연화문과의 연대비교 고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강 소장은 이어 “관룡사 약사전 안에 봉안된 같은 형식의 석조불좌상 역시 좌대 중대석에 772년의 명문이 새겨져 있음에도, 아무도 통일신라 초기불상으로 보지 않고 그대로 고려불로 추정하고 있다”며 “용선대 석불상에서는 불신과 좌대의 일습성을 아무런 이의 없이 인정하면서, 관룡사 약사전 석불상에 대해서는 불신과 대좌가 서로 다른, 한 일습이 아니라는 추정을 견지하고 있는 것은 일관성이 없고, 따라서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강 소장은 “오히려 용선대 불상을 772년대로 보는 것은 어떤가 하는 의견을 내 놓는다”며 “문제는 용선대 불상이 본래 어디 있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온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며, 그 원위치를 찾아내야 제대로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 소장은 또 “석가모니 수인인 항마촉지인의 왼손모습과 다른, 왼손을 앞으로 내민 모양이 단순히 잘못 새기거나 받아들인 조각솜씨가 아니라 관룡사 약사전의 같은 형식 석불상을 명문에 미륵이라 한 점, 경주 남산 용장사 미륵상 등에서 볼 때 미륵상 수인의 한 특징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문화재위원이자 불교미술사 전공인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는 지난 7월 11일 현지 조사를 통해 명문을 확인하고, “현지 조사결과 명문은 세 줄에 걸쳐 '開元十../月卄日(?)../成內..'이라는 글자로 잠정 판독됐고, 조사단이 제공한 사진으로 정밀 판독을 시도한 한국서예사 전공 손환일 박사는 '開元十../月卄五../成明..'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고 밝힌바 있다. 또한 “나머지 글자는 마모가 심해 전체적인 맥락을 잡기는 힘들지만 ‘개원 10년(722년)..월 25일에 (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으로 풀이 된다”며 “개원(開元)은 당나라 현종 때의 연호로 개원 10년은 서기 722년”이라고 밝힌 바 있다.
최 교수는 당시 “그동안 이 불상은 막연히 통일신라시대 불상 정도로만 알려졌고, 일부 불교미술사학자는 양식적인 특성에 주목해 9세기 무렵 작품이라고 주장해왔으나, (명문 확인을 통해) 이 불상은 8세기 전반 석불 중 좌상으로는 제작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 된다”고 평가했었다.
8세기 전반 통일신라시대 석불로 명문을 통해 조성 연대가 알려진 사례는 입상인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719년)과 같은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720년)이 있다. 8세기 중ㆍ후반 작품으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석불은 석굴암 본존불 좌상과 석남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766년), 김천 갈항사지 석불좌상(758년 무렵)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강순형 소장의 사진을 포함한 탄탄한 자료에 근거한 반박으로 최성은 교수의 관룡사 용선대 석조불상의 연화좌대 명문 확인을 통해 제작연대 확인 발표는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다음은 강순형 소장의 법보신문 관련기고문 전문.
강순형의 사찰문화재 답사-그 절에 숨은 성보를 찾아
(91) 관룡사 ⑱ - 龍船臺 돌부처 얼굴
보살·부처상은 보는 곳角度에 따라 다르다, (또) 달리 보인다. 사람도 그렇다-뒤ㅅ태 보고 놀란 여성! 앞에서 보곤 더 놀라듯^^. 보살·부처상은 얼굴이 더욱 그러하다. 앞에서 보는 거랑, 옆으로 가며 보는 데 따라 점점 달리 들어오는 것이다.
이, 용선대 부처도 마찬가지. 보다시피, 앞얼굴은 푸근넉넉[厚德]-느긋흐뭇하고, 옆얼굴은 아주 딴판-다르다! 단단똘똘하다. 굳이, 한 마디로 하면 자비롭다와 지혜롭다, 할까. 이거이, (참)부처모습[佛相]인지 모른다. 당근! 이렇게, 한 얼굴에 두 모습 새겨내는 것도 예사 솜씨가 아닌, 뛰어난 이라야 되고.
이리 잘 새긴 부처는 절 왼쪽 위, 뭉친 바위더미로 이루어진 龍船臺라는 앞이 탁 트인, 멀리 내려다보는 높고 멋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요즘, 이 부처가 입에 오르내린다.
절 쪽인 동쪽을 보고 있느니, 동지 때의 정동을 보고 있느니 아니, 본디는 골짝 터진 마을 쪽을 보고 있었느니로 말 많으나, 지금 놓인(1973.11∼12) 곳은 제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바라보는 곳[方向]이 東이니 뭐니도 아예 말 안 된다.
그전엔, 보다시피(1970∼72) 3m도 더 뒤인 딴 바위에 놓여있었다. 물론, 방향도 다른! 게다가, 보이듯이 이 자리도 반도 못되게-넘 어설피 걸쳐진 꼴이어 또한 본자리가 아니다. 곧, 더 다른 곳서 또 옮겨온(1966) 것이다.
더불어, 지난달 중순 초에 8모난 가운데받침[中臺]의, 앞에서 오른쪽으로 3째얼굴[面] 이마쪽에 새겨진 3줄의 글월[銘文]을 기자가 알렸다.
開元十(?年)…/月卄五(日)…/成內(也?)…로 보이고, 첫줄이 12간지 있는 적어도 7자가 되며, 끝줄 成內는 이루었다=만들었다[造成]는 吏讀로 불상·범종·사리그릇…들에 늘 나오는 낱말!
문제는, 이러한 부처가 개원10(722, 성덕왕 21)해쯤 것이라 할 때, 전문가 모두가 여태 9세기로 봐오던-부처상뿐만 아니라, (돌)빛깔도 아예 다른 받침이자 연꽃무늬임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더구나, 절 마당 약사전에 있는-이를 보고 베꼈다는 같은 꼴[形式] 돌부처는, 또한 가운데받침에 772(혜공왕 8)해의 글이 새겨져 있음에도 고려부처로 보고 있어 잣대가 이랬다저랬다니…
오히려, 약사전의 받침(772)이 연꽃무늬를 비롯, 용선대 부처와 맞고 있다-곧, 용선대 부처는 차라리 750해 너머[以後]의 8세기로 보는 건 어떤지^^! 함께 한 석등 밑받침[下臺] 연꽃무늬와 경주 남산 용장사 太賢스님의 (돌)미륵부처·삼릉곡 (돌)약사부처들과도 대보고 하여.
용선대의 글씨가 몹씨도! 가늘고 얕게 새겨져 있는데다, 갈항사 동탑에서 보듯-758해에 새겼다 하나 내용은 훨 더 늦은 781해 때니 참으로, 적는 글이야말로 가장 믿을 수도 또, 아주 못 믿을 바이기도 한 것이라.
아직은- 본자리도 찾아야하고 제짝인지… 여러모로 살펴봐야 할, 쉬이 가볍게[白眼視]가 아니라 진득하니 눈 불킬[靑眼視], 이참에 되려 중점작품 되니 더 반갑기만!
더하여, 왼손을 내민-앞으로 내밀어 보이는 이러한 부처는 약사전 부처의 명문 ‘成內 弥勒’이 밝히듯 미륵부처의 또한 모습으로서 눈길 잡는 것!이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
기사등록 : 09-08-25 08:11 ▣ 이학종 urubella@naver.com
* 저는 2007년 12월 창녕 답사를 마지막으로 14년 동안 해오던 문화재 해설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용선대 부처님 앞에서의 해설이 마지막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지금도 눈감으면 용선대에서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가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오십여섯의 젊은 나이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