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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보수의 특징은 잃을 것이 있는 가진 자라 할 수 있겠지? 이대로 있는 것에서, 변화는 그들에게 이로울 게 없는 불리한 환경이 조성될 뿐이야. 그런데, 가진 자만이 반드시 보수적이지는 않아. 이상하게도 상당수의 가지지 못한 자도 보수적이란 말이지. 진보적인 것이 상대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할 터인 소외된 자들의 상당수가 보수에 열광하고 맹신까지 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난한 보수주의자 들>
“일단 말이지, 그대가 세상을 살 만하다면 보수를 지향하는 게 맞는다고 봐. 환경이 바뀐다면 불편할 뿐 아니라 자칫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이 흔들릴 수 있으니까.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나의 이권을 맛본 상대방은 집요하게 추가 양보를 요구할 게 뻔할 테니까. 반대로, 그대가 가난하다면 보수보다는 진보적인 것이 유리하겠지? 이미, 이 체제에서는 모든 조건이 나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어 그렇지? 그러면 조건이 바뀌어서 나에게도, 더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가난하면서도 보수적인 인간들이 대중의 무리 중에는 생각보다는 너무나 많단 말이지. 이 계산적이지 못한 기이한 현상은 도대체 무엇이지?”
어떤 이는 이런 역설적인 현상을 이렇게 설명하기도 해.
“첫째, 그들은 항상 과거의 기억에 있는 거야. 한때 그들이 기득권을 가지고는 잘 나갈 때, 그때의 연장 상선에 지금도 그대로 있으며 현재의 형편은 자신의 일시적인 몰락으로 보는 거지. 자신은 언제나 기득권이고 늘 그 부류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지.
둘째는, 현재는 나락에 떨어져 있지만,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는 정체되어 있지 아니하고 반드시 도약할 거라 믿는 부류이지. 지금의 희미한 현상을 애써 증오할 뿐이야 곧 꿈과 희망의 나래를 펼 텐데, 냄새나고 지겹기 그지없는 가난을 옹호할 배려가 추호도 없는 것이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서 세상은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속속 증명되면서 자신을 도약할 수 없도록 옥죄고 있는데도 말이지.
"개천에서는 용이 나지 않아!"
셋째는 좆도 돌대가리인 경우이지. 아무 생각이 없어. 내 발등에 불이 훨훨 타도 그냥 만들어지는 대세에 따르는 거야. 본디 해바라기 기질 그대로인 노예근성에 절어 있는 상태야. 게 중에는 그 처지에서 좀 똑똑한 척하는 얼간이도 간혹 있는데 차라리 더 돌 (石)스러워. 씨발!”
*반동 선생께 보내는 편지 (가난한 보수주의-1)
대체로 칼막스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무계급, 평등, 공유를 주창하는 게 사회주의라 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이상주의로 이루기 위해서는 일당독재체제로 강력히 추진되어야만 한다는 방식을 취한 것이, 공산주의라 하면 되겠습니다.
공산주의 종주국이라는 소련은 무너진 지가 이미 오래고 중국도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상태입니다. 유이 有二하게 남아 있다면 북한과 쿠바 정도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상 理想이라 하는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공산국가가 독재를 고집한다면 사회주의는 그 이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프랑스가 사회주의국가였다면 이해되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독일 등 유럽에서 사회주의가 국가의 패권을 잡은 경우도 있고 집권은 못하더라도 정치적인 큰 영향력을 발휘하거나 일정 부분 사회주의 이념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사회주의국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마르크시즘 이념을 기초로 하는 공산국가 5개국입니다.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라오스)
비(非) 마르크시즘으로 헌법상의 국가가(방글라데시, 이집트, 인도, 리비아, 스리랑카, 시리아, 탄자니아) 있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국가(볼리비아, 니카라과, 베네수엘라)라 하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이런 부류를 빨갱이라며 경멸해 마지않습니다.
반면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기초로 하여 보이지 않는 손에 조정되는 시장의 경쟁체제를 기둥으로 삼은 경우가 자본주의라 하겠습니다.
아무리 자본주의라 하더라도 국가적으로 공유의 개념이 일정 부분 존재하게 마련인데, 가령 공기라던가 물, 토지와 같은 자연환경에서부터 철도, 병원 학교와 같은 사회적 환경까지요. 자본가들에게는 이조차도 이익 추구의 대상이니까 자본주의를 더욱더 심화시킨 것이 최근에 신자유주의라 하겠습니다.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미국이 패권을 잡고 자본의 식민지화를 꾀하는데 이런 것을, 제국주의라 하지요.
우리나라는 이미 미국의 자본적 식민지가 된 지 오래되었고 노무현 정권 시절에조차도 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하여 신자유주의를 모방하다가 양극화 현상에 크게 데이고는 노선조정을 시도했지요. 그러자 정권 길들이기에 혈안이 된 보수진영과 보수언론에 뭇매를 맞고는 정권도 뺏기게 되고 결국은 죽음으로까지 내몰렸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말할 것도 없이 신자유주의 강화에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자본주의라는 게 사익 私益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무한 경쟁이 조성되면서 생산성을 극대화하여 결국에는 국가가 부유해진다는 것이 모태이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냉정함도 인정이 되고 어느 정도의 부도덕도 당연시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는 기업가가 이익을 위해서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현상을 욕하는 것은 오히려 바보스럽다고 할 일일 겁니다.
노동자는 현실을 비난만 할 일이 아니라 그런 노동 악법이 고쳐지도록 노력하고 그런 일을 하고자 하는 시민, 노동단체나 정치 세력에 힘을 보태야 하겠지요?
여당이건 야당이건 간에 자기들 세비 인상 시키는 일에는 일사불란하게 협조가 잘 됩니다.
지위가 높은 변호사는 자기들 이익 보호를 위해서 진입장벽을 쌓고 변호사협회를 만들었습니다. 대기업들은 어느 정권에게도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전국경영자 총연맹을 만들어서는 대권에도 관여하고 정치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압력을 가합니다. 그래서 노무현은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 가 버렸다.”라고 탄식을 하였지요.
그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인은 또 그들을 위한 단체를, 의사들은 그들의 연합을, 장성들은 성우회를, 경찰은 경우회를 만들었고 언론은 그 자체가 권력입니다. 조. 중. 동이 최대의 광고주인 삼성을 옹호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처사라 하겠지요.
이렇게 자본주의에서는 저마다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근본이고 이들을 두루두루 보수진영이라 일컫지요.
반대로,
자본도 권력도 쥐지 못한 기득권에서 멀어져 있는 이른바 비주류는 어떨까요?
그들도 나름대로는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당연히 말이지요.
그것이 노동단체, 농민단체, 진보 개혁정치권이지요. 약소하기는 하지만요.
그들은 굳어가는 이 형태의 구도를 바꾸려 합니다. 이미 기득권을 거머쥔 상대와 경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점이 많으므로 새로운 제도를 제시하고 보다 유리한 쪽으로 개혁하려고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경쟁이 기본인 자본주의 아래에서 말입니다.
이들이 진보진영입니다.
여기까지는 반동 선생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자~ 자본주의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결국은 국가의 부흥을 가져다주는 국부론이 기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동하면서 가난하기 짝이 없는 자 중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 數가 부자들이 조성한 터무니없이 비싸기 짝이 없는 집 한 채, 그 한 채만 겨우 소유한 채로 기득권 진입에 희망이 무망한 그런 상태의 기민 층이, 진보를 빨갱이라 욕하며 경멸하는 동시에 보수를 지지하고 박수 보내고 맹목적으로 추앙하는 이, 반 反 자본주의 행태를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득권이 무지하게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경우 말입니다.
저는,
이런 역설적 형태의 이들을 <가난한 보수주의>라 말하는데, 사실은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이지요.
부자는 보수, 가난한 이는 진보, 그것이 경우에 맞는 합당한 일컬음인 것이지요.
*반동 선생께 보내는 편지 (가난한 보수주의-2)
대체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이며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비민주, 독재체제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인 남한이, 대한 민주 공화국이면 공산체제인 북한도 조선 인민 민주 공화국, 즉 두 체제 모두가 권력의 주체로 국민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체제든 간에 국가의 정체성은 국민이 주인 되는 만고의 진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물 정도로 강화된 독재체제임에는 분명합니다.
남한에서도 그에 못지않았던 때가 분명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철권정치 18년 동안 무자비한 인권탄압은 미국의 온건파 카터 대통령의 미움을 그토록 사기도 했으며 끝날 것 같지 않던 유신 독재는 결국 자신의 수족에 의해 비극을 맞고야 말았습니다.
전두환은 그에 더 보태어 광주에서 대량 학살까지 저지르고 백담사에 유배되기도 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는 반성하지 않고 있습니다. 노태우는 지속한 암흑기를 틈타 수천억의 검은돈으로 비자금을 조성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김영삼의 문민정부를 기점으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여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를 거쳐 노무현의 참여정부에서 정점 高點을 찍고는 다시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내리막길로 내려선 실정입니다.
선생께서는 이점이 공감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일부는 부정하리라 봅니다만 그래도 참고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번은 회사 동료와 대화 중에 그분이 이런 말을 합디다.
“민주, 민주 하지만 너무 풀어 주니까 개판 된 거야. 박정희, 전두환 때가 잘한 거야. 삼청교육대, 막 보내야 하는 거야!”
나이 지긋한 그는 왜 민주주의를 불편해할까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늙은이가 손님들이 앞문으로 내리는 바람에 잠시나마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문을 오르면서 운전자에게 짜증을 내면서 호통을 칩니다.
“앞으로 내리는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당신은 운전수 자격이 없어!”
통제라, 그는 통제라는 표현을 써 가면서 민간버스를 군대 버스로 착각을 한 것일까요?
친절해야 하는 대중교통의 종사자가 손님을 통제한다는 이 어쭙잖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통제 속에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멀리서는 왕조시대를 거쳐서 또, 36년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고도 독재정권과 또 군사정권을 다 거치고서야 지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고 계속해서 학습되어 왔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기에 앞서 지배되어 오고 통제되는 현상이 오히려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은 믿게 된다. (괴벨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그런 것이지요. 반복되다 보면 그것이 일상화되어 벗어나면 불편한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나치의 히틀러도, 일제의 천황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그 수 手를 되풀이하여 써먹은 겁니다.
가난한 보수가 생성되고 있는 이유이지요?
자~
그러면 반동 선생께서 일면, 강한 보수 성향을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분석해 볼까요? 상당히 진부할 수도 있고 자존심도 상할 수 있으므로 원치 않는다면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대범한 자세로 어떤 의견이라도 받아들이신다면 하겠습니다.
*반동 선생께 보내는 편지 (가난한 보수주의-3)
꾀 규모가 있는 시민단체나 노동단체나 진보정당일지라도 모임에 가 보면 일반회원은 거의 보이지 않고 활동가나 교수들이 대부분인 게 그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의 현실이지요. 그래서 저쪽에서는 머리는 있어도 몸통이 없다고 비아냥거리고는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마지못해 뒤풀이 장소에까지 따라가다 보면 그들은 내가 버스 기사나 같은 저급한 노동자라는 데에 색다르게 보면서도 이어서 질타하듯이 매번 묻는, 질문이 이렇습니다.
“아니, 당신 같은 노동자들이 오히려 더 보수적인 것은 대체 무슨 이유요?”
가진 게 있고, 지킬 것이 있다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게 충분할 이유겠지만, 잃은 것이 없고 더 얻어야 하는 처지라면 진보 쪽 지지가 상대적으로 유리할진대 항상 선거에서 꽤 많은 표는 그 현상에 반대로 나오니 말이지요. 진보단체, 자신들은 서민, 노동자. 농민을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그 대상자들은 그렇지만 않다는 게 억울하고도 답답하게 생각할 만하겠습니다.
대체, 늬들은 왜? 보수적이지?
소스타인 베블런이라는 미국의 경제학자가 있지요.
그는 가난한 이들이 왜 보수적인가에 대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가격이 떨어지면 수요가 증가한다는 것이 기존의 경제법칙이지요?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오히려 값비싼 재화를 선호하는 경우가 있는데 인간의 과시욕과 모방본능이 이러한 현상을 유발합니다. 이것이 베블런 효과입니다.
유한계급이란 자본가 계급을 포함하여 생산적 노동을 하지 않고도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을 말합니다. 이들은 돈과 권력을 소유하여 굳이 세상이 변화하기를 원치 않지요. 그래서 기존의 제도와 생활양식을 선호하는 보수주의 경향이 강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요. 반대로 생산직에 종사하면서 가난한 하위계층은 현 제도와 생활양식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변화를 원하는 진보주의 성향을 갖게 될 거라는 게 일반적인 논리이겠지만 그렇게 안 되는 것이 당장의 일상과 생존만이라도 힘겹기 때문에 변화(진보)를 고민하고 번거롭고 분주해야 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보수 성향을 띄는 경우가 현실에서는 흔합니다. 노동자의 혁명을 예고했던 마르크스가 예상치 못한 부분이지요.
가장 진보적일 때라 할 이십 대 젊은이에게 닥친 문제는 엄청난 대학 등록금에, 비정규직 저임금에 부족한 일자리 등 일상의 생존에 힘겹게 버티고 있는 그들에게 진보 성향의 징조를 얼마나 나타낼까요? 그 미미한 결과가 목격되는 것이
베블런이 사회적 모순을 지적한 지 백 년이 지난 한국, 이 땅의 작금 현상입니다.
어떻습니까, 반동 선생의 생각은 여전하십니까?
가난한 자의 맹신적이기까지 한 보수 일변도.
나는 반동 선생께서 “전두환을 존경한다.”라는 말에는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전두환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것까지는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를 존경할 수 있는 선생의 심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가 되면 보수도 아니고 사이비 종교를 맹신하는 신자와 같은 부류의 수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는 같이할 수 없는, 70년 동안 독재정권을 심봉 心桻하는 북한 주민과 같은 수준에 정체되어 있다고 봅니다.
반동 선생은 용의주도하게 일거에 회사 내에서 노조를 결성했더랍니다. 나는 사실 좀 놀랬습니다. 정치적으로 수구 꼴똥이라 할 선생이 마치 지하의 레지스탕스처럼 조직적으로 민첩했기 때문에요. 그러고는 민주노동당 당원인 나에게 협력을 구했고 나는 거절했습니다. 선생은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를 비판했습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복수노조 중에 아직 결성되지 않은 한 노조를 선생은 무서울 정도로 비상하고 신속하게 결성을 했습니다. 그 진행 과정을 선생은 나를 포함한 회사 관리직 직원에게는 감쪽같이 숨겼습니다. 신생노조가 결성되자 사주 社主는 신 노조의 해체를 작당했고 신 노조의 회사의 부당행위를 발췌해서 저항하고 압박을 가했지요? 결국, 회사의 사장은 선생이 세운 노조를 인정했고 선생이 선생의 대리인으로 세운 자에게 위원장님!, 했습니다. 선생의 일당들은 한껏 으쓱거렸고 나에게도 새 노조에 가입하고 협조하라는 요구를 해 왔습니다. 나는 거절을 했고 민노당 당원이 어용노조에 몸담았다고 흉을 했습니다.
일단 나는 선생이 싫습니다.
우선 매사에 무섭도록 치밀한 성격이 싫고, 맹목적 극우 성향이 싫습니다. 어떻게 최 몽호를 뇌쇄시켜 수족으로 삼았는가 하는 그 용의주도함이 당신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는 빨갱이들의 공작에 버금간다는 데에 몸서리쳐집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소기업인 마을버스 회사 사주에게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초월적인 대기업, 삼성이나 신세계그룹 같은 것에는 종씨라는 이유로 또 그 종씨의 사돈이라는 관계로 경애해 마지않는 천박한 행태에는 구역질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선생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보수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미화시킨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수구이고 그것도 꼴똥스러워서 수구꼴통이라 칭함이 맞습니다. 이것이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없는 이유입니다.
*유한 계급론: 유한계급제도는 생존 수단에 해당하는 것 중에 많은 부분을 하층계급으로부터 박탈함으로써 그들의 소비를 줄이며 그 결과 이들의 힘을 소진 시켜 학습은 물론 새로운 사유 습성의 채택에 필요한 노력을 할 수 없는 지점까지 몰아감으로써 결국 보수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한다.
2004년 6월 18일 한나라당 최고위원 나경원은 일본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리는 자위대 발족 50주년 기념행사를 축하하기 위해서 참석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2011년 9월 21일 그랬던 사실을 완전히 발뺌한다.
나경원의 외할아버지는 정희영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에 악명 높은 일본 순사로 주로 독립군과 그 가족에 만행을 저지른 인물이다. 당시에 축적한 재산으로 정희영은 사위 나 채성에게 홍신학원을 설립게 하는데 나 채성은 서울, 경기지역에 6개 법인 17개 학교에 교장이나 이사, 또는 감사로 관여하면서 대표적인 사학비리의 주범으로 불리는 인물로 나경원의 부친이다.
나경원은 1963년 12월 6일생으로 나 채성의 4녀 중 장녀로 태어나 서울대 법과를 거쳐 대학원에서 국제법 전공을 하였으며 30세 나이인 1992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학교 동기인 김재호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게 된다. 17대, 18, 19대 국회의원이며 2011년에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에 올라 박원순과 경쟁을 하나 53.4%대 46.2%로 패배를 한다.
나 채성이 화곡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임 시에 그 학교는 교직원 인원을 15명을 21명으로 부풀려서 인건비를 빼 먹기도 했고 육성회비를 인건비로 6,000만 원을 지출시켰으나 실제로는 육성회 직원이 한 명도 없는 상태였으며 심지어는 청소용비 같은 곳에조차 조작하는 등 비리로는 종합백화점적이었다. 이런 사실이 국회 속기록에도 기록되는 사학비리로 악명이 높았다. 군 대령 출신인 그는 학교 운영도 군대식이었다. 80년대 전두환 정권 당시 학원의 두발 복장 자율화를 시행하였지만 화곡 중고등학교는 교복과 다름없는 사복에다 두발도 군인 정도의 2부 길이로 제한하고 교련 훈련도 혹독하여 구타 사건도 심심찮게 증언되었다. 학생들을 체육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노역에 동원하는 예도 극심했다는 당시 이 학교 출신 중에 천주교 수사가 된 사람의 증언이다. 학교 건축공사에 동원되어 벽돌을 지고 4층까지 오르기도 하고 축제나 연극제 같은 행사는 아예 없었다. 신학기에 학부모 면담 시에 선생들은 노골적으로 촌지를 요구하기도 한다. 나 채성의 부인이 화곡유치원의 원장이기도 하지만 교직원 대부분은 이 집안의 친인척으로 구성되었다. 극심하게 비정상적인 학교를 떠나서 검정고시를 보는 학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기 싫다 할 정도로 주변에는 양아치 학교로 회자되고 하였다. 나경원은 이 학교의 오래전부터 이사로 있다.
나경원은 선거를 치르는 도중에도 사흘 만에 건물을 취득할 정도로 부동산 투자에 재주가 뛰어났다. 한 건물을 2004년 4월 12일 판사인 남편과 공동명의로 매입했는데 불법 유흥주점 임대 논란을 일으켜 17억 원에 사서 30억에 팔면서 엄청난 시세차익을 챙겼다. 이러한 그녀의 의복이나 미용 소비 수준은 유명 연예인과 어깨를 견줄 만하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경원 의원은 한 여성 지도자 대회 모임에 연단에 서서 여교사를 분류해서 신붓감 순위를 매겨 여교사 비하하기도 하였다.
“1등 신붓감은 얼굴 예쁜 여자 선생님, 2등 신붓감은 못생긴 여선생님, 그다음은 이혼한 여교사 마지막은 애 달린 여교사다.”
나경원으로 봐서는 태생적 환경이나 성장환경이나 일상의 생활 여건이 학교 선생님쯤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으로 비견될 수도 있겠다. 그녀는 2011년 10월 17일 손석희의 시선 집중에 출연하여 2005년도 사립학교 개정법 당시에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재단을 국회 교과위에서 조사대상에서 빼달라고 정봉주 당시 야당 국회의원에게 청탁했다는 사실을 해명하기도 하였다. 이 방송에서 그녀는 손석희의 추궁이 계속되자 ‘아버지의 일일 뿐이다.’며 선을 그녀였지만 나경원 자신이 그 재단의 이사이었다.
“BBK를 설립했다는 표현이 있는데, ‘내가 설립했다’라는 주어가 없다”라며 여당 대변인 시절에 이명박의 BBK 의혹을 부정하는 대변을 하였다. 이에, 유시민은 나경원 사용설명서라는 언급에서 교묘히 말 바꾸기를 잘하는 그녀의 말에는 꼭 주어를 확인하고 번복을 잘하는 태도를 빗대어 그녀의 공약 유통기한은 2년이라고 했다. 이후에도 "주어가 없다"라는 말은 정치권에서 각종 비리가 불거지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명언이 되었다.
<가난한 민주>
2012년 한겨레신문의 사회정책연구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기득권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를 조사하였다. 민주주의에서는 1인 1표를 행사함으로써 가진 자이거나 못 가진 자이거나 정치의 영역에 들어와서는 좀 더 평등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투표를 포기하거나 참여하더라도 오히려 보수를 지지하는 이 불합리한 현상은 왜 그럴까? 불특정 다수 800명을 대상으로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인 경제적 계층을 최상에서 빈곤까지 여섯 단계로 나눴다. 이를 다시, 상 중 하로 나누어서 주관적인 정치 성향을 물은 결과 보수 지지층이 상층에서 40.1%, 중층은 43.7%이며 하층이 41.9%로 빈곤층이 중상층보다 오히려 보수에 가깝다는 것이다. 2012년 4.11총선의 예로 집권, 새누리당 지지도가 상층이 44.6%, 하층이 46.2% 역시 하층이 더 보수정당 쪽이라는 것이다.
물론, 선거에서 가난한 사람은 진보정당이 뭘 할 수 있는지, 뭘 주는가? 투표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희망을 못 준다, 해서 이른바 계급 배반의 투표를 한다고는 한다. 하층을 대변하는 정당의 존재 문제에서 고리가 끊겼다고 봐야 할 것이다. 스웨덴과 같이 진보정당이 상대적인 득세를 하는 국가에서 범죄율이나 평등의 정도나 삶의 질이 높다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진보정당의 밀착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은 멀리 잡으면 조선 시대 이후에서 1997년 김대중이 대선에 승리할 때까지 줄곧 기득권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의 경우 10년간의 비주류 권력 점거가 있었으나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반전으로 그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할 정도로 기득권의 권력독점은 확고부동하다.
노무현은 그랬다.
“시골 장터로 가는 버스에서 이미 복잡한데 장 보러 가는 손님을 기사는 자꾸 태운다는 말이지? 그러면 혼잡한 버스 속에서 두 가지 반응이 나와. ‘아, 고마 태우소! 비좁아 죽겠구마.’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으로 쫌 디가시더! 같이 타고 가시더.’ 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자가 보수적인 성향이고 뒷사람이 진보적인 부류라고 보면 되지.”
진보는 타인의 아픔에 대한 감흥이 진하고 보수는 희박하다.
<언론 혁명>
2009년 6월 23일 한겨레신문의 인터넷 티브이의 뉴욕타임스에서 김어준은 첫 방송부터 노골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자신은 싫어한다는 말로 시작을 한다.
“저는 이명박 대통령이 싫습니다! 그러면 안 되나요? 안 될 이유가 없지요. 국민이 대통령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지요. 그건 죄가 아니죠. 저는, 싫습니다. 저는 앞으로 편파적인 방송을 할 겁니다. 다만, 그 편파에 이르는 과정은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넥타이는 왜 까만색이냐,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근데 어떤 사람은 그러더군요. 아예 삼 년 상을 치러라 치러! 비웃더군요. 그 말을 듣고 보니까 아, 그렇다. 삼 년 상을 치르면 되겠구나. 해서 저는 삼년상을 치르고 그 마음 그대로 다음 대선에 임할 생각입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방송은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등진 날로부터 꼭 한 달이 지난날에 개시됐다. 첫 방송은 연세대학의 황상민 심리학 교수가 출연하여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현 대통령을 견주어 비교하는 작금의 정치적인 현상을 국민적 심리상태로 풀어가는 이야기로 시작하였다.
“노무현 시절에는 술자리에서 안주가 필요 없었어요. 노무현을 씹으면 훌륭한 먹거리가 된 셈이거든요.”
“노무현, 본인도 그랬어요. 국민이 즐거우시면 그렇게 하시라고.”
황상민의 회상에 김어준이 맞장구를 친다.
“지금은 안줏거리가 없어서 안줏값이 더 들어요. 지금 대통령 흉보기에는 주위가 편치 않아요.”
“주위를 한 번 휙 둘러보게 되지요.”
“주위에서 또 눈치를 줘요. 재수 없는 얘기는 하지도 말라고.”
“우리도 이런 이야기 하다가 잡혀갈지도 몰라요.”
낡은 청바지에 빛바랜 셔츠에 검은색 넥타이를 맨 김어준의, 형편없는 시설의 방송을 누가 보겠나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의 죽음 이후 광우병 촛불집회까지 잠잠해지자 연예인 출신 유인촌을 문체부 장관으로 해서 언론을 왜곡시키는 데 성공을 거둔 것이다. 대중은 기존언론을 외면했고 현실을 실감한 김어준은 팟캐스트 방송, “나꼼수”로 더 나가서, 길 잃은 국민의 눈과 귀를 붙잡았다. 기존 방송이 정권의 휘하에 들고 4대강 사업이나 자원외교, 방위산업 등을 선전하는 나팔수로 변절하여 가면서 언론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깊어만 갔다. 그러나 몇몇 선각자들은 활로를 찾아냈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1인 방송의 획기적인 방법으로 대중의 열화와 같은 반응을 이끌었다. 그 선두에 김어준, 주진우, 정봉주, 김용민이 참여한 “김어준의 나꼼수” 방송이었다. 첫 방송은 2012년 4월 27일에 게시되었는데 당시 서태지와 이지아의 이혼 소식을 이명박의 BBK 사건의 의혹을 덮기 위한 정보당국의 공작이 의심된다는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개인방송, 나꼼수는 점차 청취율을 높여 방송을 듣는 이가 조선, 중앙, 동아의 이른바 조. 중. 동 신문 3사의 구독자 합의 열 배에까지 이르기에 이르게 된다. 국영방송인 케이비에스나 민영방송인 엠비씨도 노조가 약화되고 정권의 부역자들이 방송체계를 농단함으로써 시청자들은 차라리 에스비에스 민영방송이 국영방송인 듯하다고 할 정도로, 주류는 대체방송체제가 되고 기존의 전통방송이 오히려 비주류 방송이 되는 격상이 뒤바뀌게 된 것이 이 시대의 현상이다. 이후로 팟캐스트 방송은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내용으로 우후죽순으로 발전하여 한국이 이 부분에서 세계 최고의 나라로 인정을 받는다. 정권이 언론을 압박할수록 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방법으로 진실의 싹이 자라서 세상을 정화시키는 촉매제가 된 셈이다. 언론 혁명이었다.
“예전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모두 넉넉지 않던 시절에 학교 운동장에서는 달리기 시합이 진행 중이었는데 뛰는 선수는 열 명이고 상품은 공책 여섯 권, 이였어. 등수가 가려지면 일등에게는 공책 세 권을 이등에게 두 권, 삼등에게 공책 한 권이 주어졌지. 나머지 일곱 명은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야겠지? 그랬는데 세월이 흘러 모두 살림살이가 좀 더 넉넉해지고 학교 육성회도 형편이 좋아져서 열 명이 뛰는 시합에 상품은 스무 권으로 늘어났단 말이지.”
전처럼 공책을 배분하자면 일등에게 공책 열 권, 이등에게는 일곱 권을, 삼등에게 역시 세 권을 분배하면 될 것이고 나머지 일곱은 역시 빈손일 것이다.
“근데, 말이야. 사실은 이 달리기 시합에는 이변이 없으면 일, 이 삼등이 늘 정해져 있던 셈이야. 일등 하는 녀석은 일제 때부터 부유한 집안의 자식으로 튼실한 체력에 날렵한 운동복을 갖추고 바닥에 못이 박혀 있는 전문가가 쓰는 신발을 신고 시합에 나서거든? 일 등할 수밖에 없어. 주로 이등 하는 아이도 아버지가 전쟁 통에 군대에서 출세한 군인의 아들로 탄탄한 장딴지에 역시 훌륭한 운동화를 착용했지. 그리고 삼 등 하는 놈은 나라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잽싸게 세상을 헤매는 장사꾼인 제 아버지 덕택에 운동화와 운동복은 아직 못 가져도 잘 먹기 시작한 집안의 아이로 신체적인 조건이 나머지 누구보다도 우월한 경우이지. 그런 반면에 나머지 등외의 인간들은 그냥 개털이야. 그저 민중의 아들이고 서민들의 자식들이지. 못 먹어서 빌빌거리고 배곯아서 뛰는 것조차가 힘들어. 그나마 질척거리는 고무신도 신지 못하는 변방의 자식들도 있어서 매번 맨발로 뛸 수밖에 없는, 늘 꼴찌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경주를 몇 번이고 반복해 본들 자신의 처지가 달라질 희망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야.”
공책이 여섯 권이든 열 권이고 스무 권이고, 그 이상이고 간에 등외에는 단 한 권의 상품을 차지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그럴 때 한 등외의 녀석이 나와서 외쳤다.
“이 건 너무 불공정하다. 왜 매번 일 이 삼등만 상품을 차지해야 하지?” 하면서, 스무 권의 상품을 일단 각 한 권씩 열 명 모두에게 주자! 그리고 나머지 열권은 일등에게 다섯 권 이등에게 세 권을 삼등에게 두 권을 주도록 하자! 일등은 총 6권, 이등은 4권, 삼등은 3권 그리고 등외는 1권, 말이지. 그러면 빈손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는 동시에 경쟁의 원칙도 지켜져서 시합의 의미도 그대로 유지 되는 것이다. 어떠냐. 그러질 않겠어? 어때? 자네 입장에서는 과거처럼 역시 등 내에 선수에게만 상품을 분배하는 방법과 참가한 선수들 모두에게 참가 賞으로 절반은 나누는 두 방법 중에 전자, 또는 후자 중에 어떤 것이 좋다고 생각해?”
스무 권으로 늘어났음에도 상품을 일, 이 삼등만 나눈다면 그것을 승자 독식체제라 하겠다. 스무 권 중의 열권의 정도는 열 명 모두에게 일 차로 골고루 나눈다면 어느 정도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매번 일 이 삼등만 상품을 싹쓸이한다면 시합이 계속될수록 세 사람, 그들은 더더욱 상품이 쌓이는 대신에 나머지 일곱은 여전히 빈손이라, 상대적인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심화 되겠지? 이걸 요샛말로 신자유주의라 해. 그러나 나머지 일곱에게도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 주는 것은, 합리적인 경쟁체제를 유지하는 건전한 자본주의라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떠한가?”
현실에서 현상은 상위권을 차지하는 부류들은 승자독식의 방법 그것이, 자본주의의 본류라 말하며 분배의 정의를 주장하면 좌파 경제, 공산주의로 매도한다.
“당연하겠지? 내가 뛰기만 하면 상위권인데 뭣 하러 누구 좋아하라고 상품 일부나마 골고루 분배하자고 하겠어. 그냥 더 많이 가지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고 그 본능을 충실히 보장해 주는 체제가 자본주의라 주장하고 싶은 게지. 그런데 이 시점에서 지랄 같은 경우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건, 늘 등외의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상위권의 억지를 그대로 지지한다는 사실이야. 자기에게는 부자의 아버지도 없고 잘 뛰게 하는 운동화도, 운동복도 없이 못 먹어서 가늘어진 힘없는 다리로 맨발까지 뛰어야만 해서 늘 등외는 물론, 꼴찌를 면하기조차도 버거운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상품은 저들이 다 가지는 게 맞는 것이라는 거야. 할 뿐 아니라, 나눠 달라고 아우성치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부류를 오히려 공격한다는 말이지. 이해가 돼?”
민주화에 맞서는 수구들 무리의 앞장에는 늘 늙고 가난한 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형상을 보게 된다. 그들의 초췌하지만 극악하고 무지한 행동에 답답함을 너머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의 이익 추구에 부조하고 그들에게 예속되자고 투표를 하는가 하면, 서민이 서민 정책을 반대하고 특권층 정책을 호위하는 이 희한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따져서 생각해 보자면 한 세 가지의 경우라고 생각해. 첫째는 자기는 기득권의 부류에 속한다고 착각하는 경우이지. 지금은 궁핍하기 그지없으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지금은 자신이 일시적으로 나락에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하고 스스로 자위하거나, 또는 노력하면 자신도 그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것이지. 달리기에서 일, 이 삼 등은 이룰 수 있는 목표임을 자부하고 그 동질성에서 오는 희망을 가지고 공경과 추앙을 하는 것이지. 두 번째 경우는 좇도 모르는 인간들이야. 이런 인간들은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가리가 나빠서 학업을 제대로 따라가지도 못하는 부류인데, 평생을 그대로 돌대가리로 사는 인간이야. 더불어서 목소리 큰 놈에게는 그냥 휘둘리고 잘 속아 넘어가기도 하고 누구에게 조정 당하기 좋은 인품을 갖춘 상태이기는 해도 그래도 제대로 교육하면 어렵지만, 눈을 뜰 수는 있겠지. 그러나 가장 악질적인 경우가 노예근성을 지닌 기회주의자야. 일제 때 친일파가 바로 그런 거야. 지금까지 친일의 뿌리가 굳건하게 이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확실한 기득권을 여전히 유지해 왔단 말이지. 그런가 하면 이들의 영광을 흠모하면서 추앙하는 떨거지들이 군락을 이루면서 자신의 처지에 있는 동류들을 천시하고 공격도 서슴지 않아. 고무신 정도나 그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여 맨발로 시합에 임하는 주제에 일, 이 삼등만 응원하고 등외의 선수들을 괄시하는 현상이야. 덧붙여서 언급하고 싶은 게 방관자야. 늘 비겁한 심성으로 뒷줄에서 눈치만 보는데 이런 인간들 들으라고 법정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 (침묵해야 할 때 분노하는 것은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고, 분노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용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저항해야 할 때 침묵을 하면 굴종은 습관이 된다) 그러셨지.”
과거 헐벗고 살 때, 가난에 탈출하고자 집안에서는 여러 형제 중에 장자나 아니면 능력 있고 가능성이 큰, 단 한 명만 공부시키고 여력을 모아 집중을 하였다. 혜택을 입은 그 형제는 마침내 성공하여 나머지의 여전히 부족한 형제를 돌보를 돌보며 부모 대신에 가장 노릇을 하였다. 그런 형태가 개발독재 시대에 국가가 대기업을 총력 지원했던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런데 성공한 한 형제인 그가 저만을 영 후를 차지하고 저를 위해 희생을 감수한 나머지 형제를 성공을 이룬 후에는 외면한다면 어떨까? 배신과 갈등으로 콩가루 집안이 되겠지. 국가도 마찬가지야. 땔감이 부족한 경우에는 윗목을 막아서 일단은 아랫목이라도 데울 수는 있어. 하지만 사정이 나아지면 온 방이 훈훈해지도록 구들장도 손보고 굴뚝도 고치고 그래야지 아랫목은 뜨거운 정도가 아니라 탈 정도로 화력을 싹쓸이하는데도 모른 척하거나 오히려 그것에 협력하는 세력이 있다면 콩가루 국가로 몰아가자는 이야기지. 권력이 잡은 자가 그러하기보다도 변방에서 헐벗고 있는 인간들이 기득권 논리에 휘말려 앞장서서 생지랄을 떠는 그런 경우가 솔직히 나는 더 미워! 여기까지가 오칠닥의 솔직한 생각이야.”
<빨간 명찰에 팔각 모帽>
“마이 커따.”
맹곤이가 더기에게 종종 쓰는 말이다.
“씨발 놈이! 아직도 지가 공군 헌병 하사로 아는 갑제?”
“꺼떡하면 마이 커따, 마이 컸다 한다.”
“대가리에 똥만 차 가지고, 한구석에 겨우 남은 게 군대 찌끄래기라, 아무나 지 쫄병으로 알고 대장 노릇 할라꼬 하는 기다.”
맹곤이를 대할 때마다 불쾌감을 겪는 더기의 하소연에 칠닥이가 발끈했다.
녀석은 1978년쯤 어느 초겨울에, 칠닥이를 동행 삼아 까치 소리사의 배려로, 영주역 인근에 있는 사창가인 열매 시장에서 여자 맛을 짧게 본 며칠 후 대전에 있는 공군 교육대에 입소했다. 그리고 육 개월의 훈련 끝에 공군헌병 하사로 임관하였다. 사 년 육 개월 동안의 군대 생활에서 경찰관의 노릇을 하였다. 성남비행장과 같은 군사시설이나 대방동의 공군본부와 같은 곳에서다. 맹곤이는 제대를 하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공군헌병 하사였다. 오 년 가까이 군대에서 밴 습관은 사회에 나와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동료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상석을 차지하려 하고 가르치거나 지시하려 하는가 하면 자리가 끝나고도 공짜 대접을 받으려 하는 못된 버릇을 그대로 젖어 있는 것이다. 또래나 동료도 군대에서의 졸병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맹곤이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적이 있는 동네 친구들은 녀석의 인품을 가진 그대로 인식하고 있다.
“저누마, 저거 좀 덜떨어진 놈 아이었나?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있나 뭐 잘하는 운동이 있었나, 그렇다고 인간적으로 호감이 가기를 하나 안 그렇더나? 겨우 좀 뛰어난 점이 있다면 지지바들 꽁무니 따라 댕기는 거, 밖에 더 있더나? 아 새끼가 연애 감정은 일찌가이 발현하여 이 지지바 저지지바 댈꼬 다닐 때나 약간 부럽기는 하더라. 그거 외에는 나는 저누마가 친구들 앞에서 목에 힘을 줄 위인은 못 된다고 본다. 그런 저 인간이 군대를 제대하고부터는 태곳적부터 지가 우리들에 대장인 양 하는 꼬라지를 보면 차라리 신기하단 말이다. 그러고 보면 군대라는 사회가 참말로 희한한 동네이다. 한 구십 년대 이야긴데 내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살 땐데 애들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악대의 연주 소리가 나는 쪽의 거리를 지나고 있는데 빨간 명찰에 팔각모를 쓰고 줄 선 군복에 반짝거리는 군화까지 일체 갖춘 인간이 오토바이를 세우고 간섭을 하더란 말이지. 씨발, 어쭙잖게 늙은 가짜 군인이 웬 간섭이야 했는데 그 인간이 간단히 교통질서라는 걸 훈계하더니 급하게 뛰어가는 곳이, 바로 옆에 있는 대우전자의 지역대리점 개점 행사였어. 그 동네 행사에 동원된 빨간 명찰은 꾀 여럿이었는데 교통정리를 하는 놈도 있고 구경꾼의 질서를 잡는 놈도 있고 양복 입은 번듯한 놈에게는 경례하고 그러더라고? 참 의아하더군. 용맹하기로는 육. 해 공군 망라를 해서 최고라는 군대, 그 군대를 퇴역한 인간들이 왜 개인 사업체의 개점 행사에 동원되어 저 바보 행동을 하는지 말이지.”
우리나라에 라면이 출시된 지가 꽤 된 칠십 년대 초 이규대는 중학교 이 학년 생이다. 덩치가 큰 녀석의 작은 소망에는 측은지심이 들 정도이었다.
“나는 말이제, 소원이 있다면 라면 하나를 온전히 내 혼자서 다 먹어보는 거데이.”
“니는 라면 한 개도 못 머건나?”
“그래, 우리 엄마는 라면을 사 오면 라면보다도 훨씬 많은 국수를 넣어서 낄이기 때문에 라면 맛이 국수 맛에 묻혀서 희미해진 그 요상한 맛을 진짜배기로 함 머꼬 싶단 말이다.”
아련했던 그런 가난하고도 순박했던 규대가 군대를 입대하고는 완전히 변했다. 공수부대 마크가 부착된 군복을 입은 그는 술기운이 가득한 몸짓으로 자신의 폭력성을 과시하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동네를 배회하였다. 규대의 온갖 서러움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포효하는 모습에 칠닥이는 섬뜩함을 느꼈다.
군대라는 조직은 무섭게 사람들을 엮어서 인간 자체를 변화시켜 놓았다. 그리고 칠닥이는 살아가면서 군대 문화에 중독된 여럿의 얼치기를 만나게 된다. 21세기가 시작되고도 한참이 지난 시기에 광화문 광장에서는 태극기와 더불어 성조기에 이스라엘 기 旗까지 더 얹어서 흔들어대며 과거로의 회귀를 외치는 옛날의 군인들이 운집하여 북한산의 역사적인 개혁에 맞서고 있다.
17쪽, 2455매.
(현대사- 나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