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고민 없이 총칼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능히 ‘끝판왕’을 처치할 수 있는 게임도 있다. 그깟 대사 한 줄 못 읽는 게 대수랴. 게임에서 언어는 때때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품고 게임이 흘러가는지 알 수 있다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게이머가 게임을 즐겨야 하는 명분이며, 총칼을 휘두르는 목적이다. 게임 한글화 작업은 그래서 중요하다.
“단순한 번역이 전부가 아닙니다. 원문을 우리말로 재창조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강식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코리아(SCEK) 소프트웨어본부 북미타이틀 담당자는 게임 한글화 작업에서 중요한 점이 ‘재창조’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번역’은 과연 ‘반역’일까.
재창조 능력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재창조는 영어 원문 단어가 가진 미묘한 뉘앙스나 문장 구조가 우리말과 달라 생기는 장벽을 해결하는 수단이다. 우리말로 완벽하게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게임을 번역할 때는 글자가 표시되는 공간에 제약을 받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말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재창조에 해당한다.
“팀 버튼 감독이 만든 영화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한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산타클로즈(Santaclaws)’ 캐릭터 이름을 우리말로 ‘칼날손’으로 번역해 놨습니다. 소리와 뜻, 의미를 잘 캐치하는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게임은 아니지만, 주강식 담당자는 어렸을 적 본 영화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좋은 번역의 예로 설명했다. 산타클로즈의 이름은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Santaclaus)와 손톱을 뜻하는 클로(Claw)를 엮은 말이다. 우리말로는 표현이 어렵다. 단어의 소리와 의미를 이해한 칼날손이라는 이름으로 재창조됐다.
산타클로즈와 칼날손 사이에 얼마간 틈이 벌어지긴 했지만, 번역가는 이 틈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다. 게임 현지화 작업이 단순히 번역에 머무르지 않는 까닭이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로 만들어진 게임에 우리나라의 문화와 우리말을 입히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우리말로 도저히 옮길 수 없는 경우도 이런 경우다. 주강식 담당자는 최근 작업을 끝마친 PS 비타용 게임 타이틀 ‘이스케이프 플랜’을 문장을 떠올렸다.
“게임 자체는 어두운 장소에 사로잡힌 죄수가 탈출을 하는 내용이지만, 감동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돼 있습니다. 제일 처음 게임을 켜면, ‘A touching adventure’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부연 설명을 할 수도 없고, 우리말로 옮기기도 어려운 부분이죠.”
언뜻 보면, ‘감동적인 모험(touching adventure)’이라는 평범한 문장 같지만, 사실 PS 비타의 터치 조작 기능을 염두에 둔 중의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옮기기 어려운 부분은 원문을 그대로 이용한다.
우리말의 독특한 특징도 게임 언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주의해야 한다. 존댓말이 대표적이다. 각각의 캐릭터가 게임 속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나 하는 점이 관건이다. 캐릭터의 나이가 어리다고 무조건 모두에게 존댓말을 쓸 수도 없다. 게임의 이야기와 분위기, 캐릭터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캐릭터가 다양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작업 과정도 생긴다. ‘이 캐릭터는 누가 담당해야 한다’라는 암묵적 약속이 오간다. 무뚝뚝하고 말수 적은 캐릭터를 실제로 무뚝뚝한 담당자가 담당하는 식이다. 한 명이 모두 번역을 맡으면, 게임 속 모든 캐릭터의 어투가 똑같아질 수 있는데, 이때는 여럿이 함께 작업을 하는 것도 질을 높이는 방법이다. 게임 현지화 전문가는 게이머인 동시에 게임 속 캐릭터가 된다.
주강식 담당자는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SCEK에서 게임 현지화 작업을 하기 전 평소 취미는 게임이었다. 전공과 취미를 잘 살린 진로결정인 셈이다. 하지만 취미가 일이 됐다. 게임마저도 지루해지지 않을까. 게임 개발업체를 통해 텍스트만 받아보는 것이 첫 과정이다. 텍스트를 번역하고, 게임 시스템에 실제로 입력하기 전에 감수하는 과정을 거친다.
게임에 언어를 올린 후엔 품질관리팀에서 게임을 직접 플레이한다. 오탈자나 기타 오류를 잡는 과정이다.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게임 개발업체와 협의를 거치는 과정도 빼놓을 수 없다. 단순한 번역보다는 감수와 개발, 게임 업체와 연락 등 작업이 전반에 걸쳐 있다. 번역가라기보다는 프로듀서에 가깝다.
행여 게임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현지화하는 과정에서 원작을 해치는 경우도 있을까. 최대한 원작에 가까운 게임을 즐기고 싶은 게 게임 마니아의 공통된 의견일 테니까.
예를 들어 캐릭터가 손가락이 4개인 게임이 있었는데, 어떤 나라에서는 손가락이 5 개여야 한다며, 원판을 수정한 사례가 있다. 상대방 캐릭터를 먹으면서 강해지는 캐릭터는 어떤 나라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먹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빠지기도 했다.
“어느 나라에나 게임 기관에서 갖고 있는 규칙이 있습니다. 현지화 과정에서 원하는 등급을 얻어 통과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일반적인 일이죠. 하지만, 가능한 한 원판을 그대로 갖고 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합니다.”
주강식 담당자는 “게임 현지화 작업은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는 작업 같다”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고마운 작업이다. 우리말로 게임을 즐기고 싶은 게이머에게 번역은 반역이 아닌 재창조다. 게임 속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자 한 땀 한 땀 게임 현지화 담당자의 고민이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