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신성한 예식을 통한 인간의 공동체
공자가 정확하게 인간적인 덕의 정수로서 꿰뚫어보았던 묘한 힘에 대해 알아 보려는 것이 지금부터의 과제이다. 결국 우리는 그 묘한 힘을 통하여 마침내 공자가 핵심으로 생각했던 인간의 존재적 거룩함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 공자의 가르침 속에 담겨져 있는 이 거룩함의 중심적 역할은, 그 가르침의 존재적 핵심을 우리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20세기인 (오늘날)에까지 크게 무시되어져 왔다.
특별히 분석에 필요한 것'여기서 제안된 것'은 현대적 철학적 이해를 이용하여 재해석하는 일이다. 사실 그러한 재해석은, 철학적.반성적 작업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그늘에 가려져 왔던 우리 자신 (서양)의 철학적 사유의 차원을 밝혀 줄 것이다.
<논어>, 적어도 좀더 논어다운 맛이 나는 <핵심>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철학적 통찰은, (당대) 그것과 대립하였던 제자백가의 이념들이 공자의 학설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곧 바로 은폐되어 버렸다. <논어>속의 주술적, 종교적 측면들에 대한 일정한 강조를 요구하는 이런 통찰은 일반적으로 현대에 들어와서 서양 학문의 영향을 받은 해석들에서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은 결코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논어> 독해의 주요한 흐름은 경험적, 인본주의적, 현대 지향적 가르침으로거나, 아니면 플라톤의 합리주의적 이론에 필적하는 또 다른 것(이상적 관념론)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사실 <논어>의 가르침은 <초자연적인 괴력>에 대한 미신 또는 진지한 믿음을 명백히 거부하는 주요한 첫걸음으로 자주 해석되어 왔다.
틀림없이 <논어>의 세계는 질적인 면에서 모세, 아이스퀼로스, 예수, 석가모니, 노자, 또는 우파니샤드 학자들의 세계와 상당히 다르다. 분명한 몇가지 면에서, 사실 <논어>는 인본주의자이며 동시에-여하튼 필요할 때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낼만큼 충분히 전통적이라는 의미의-전통주의자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공자는 말하였다. <백성들의 자기가 해야 할 일에 힘써라! 귀신은 거리를 두고 경외하라> 공자의 행동은 언제나 도리에 합당했으며, 그는 <괴이한 일이나, 억지 폭력으로 하는 일이나, 어지럽히는 일이나, (상식에 맞지 않는) 신기한 일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초월적,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노골적인 질문에는 <사람을 섬기는 일도 다 할 수 없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고 대답하였다.
<논어>의 중심 내용을 검토해 보면 주제나 핵심 개념들이 주로 인간의 본성, 도덕 행위, 인간 관계에 관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당장 알 수 있다. 그 점은 바로 항상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몇가지 주제, 말하자면 예, 인, 서, 충, 학, 악 및 가족적, 사회적 관계나 '군주, 부친 등등에 대한' 의무 등을 규정하는 각종의 개념들을 열거하면 충분하다.
더 나아가서 <논어>의 이러한 현세 지향적, 실천적인 인본주의는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행위란 술수나, 행운이나, 신비적 주술이나 그 밖에 어떤 순전히 의타적인 권능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통하여 한층 더 심화되고 있다. 인간의 심성은 타고난 <본성> 성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근면한 학문과 실천적 연마의 질과 양에 따라서 심성을 <형성해 낼> 수 있다. 고상한 심성은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첫째는 어려움이다> <지식인의 책임은 무겁고, 그가 갈 길은 멀다. 인의 실천을 자기 소임으로 삼았으니, 또한 힘들지 않겠는가?> 공자의 걱정은 <덕을 닦지 못하고, 학문을 강의하지 못하고, 의로운 일을 알고도 몸소 그곳으로 가지 못하며, 좋지 못한 것을 개선하지 못할가> 하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은 자기의 할 일은 경이나 기적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충실하고 진실한 인간, 값진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 언제나 자신을 <갈고 닦고 쪼고 단련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모든 면은 <논어>의 반주술적인 외양을 보여주는 듯싶다. 여기서는 초월적인 신의 후광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적이고 분명히 세속적인 무미 건조한 도덕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논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묘한 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 주는 것 같은 언급들을 때때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신묘함>이라는 말은, 어떤 특정인이 예를 올리는 그의 몸짓이나 음송 등을 통하여 자기의 의지를 아무런 억지나 무리없이 올바르고 (자연스럽게) 움직여 나가는 힘을 말한다. 심묘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 즉 책략이나 꾀를 쓸 수 없다. 그는 강제적 억지나 물리력을 쓰지 않으며 공리성을 따지고 검증하여 책략이나 술수를 얻어 내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적절한 예에 맞는 배치나 배열을 해놓고 예에 맞는 적절한 몸짓과 말을 하면서 예식을 끝마치려고 할 뿐이다. 자기 스스로는 조금도 억지나 무리함 없이, 그의 행위를 자연스럽게 끝낸 셈이다. 시의를 적절하게 맞추는 공자의 말씀은 위에 언급한 방법에 핵심이 되는 근원적인 어떤 신비력을 강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아래의 인용문들에 나타난 한문 개념들은 모두 공자 사상에서 핵심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개념들은 근원적인 가치를 갖는 인간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나, 상태 및 모형들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필요로 하는 한, 이들 개념에 대해서는 이 책의 뒷부분에서 논의할 것이다'
인은 멀리 있는가? 우리가 원하면,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인을 좇을 것이다.
아무런 억지 없이 다스린 사람은 순임금이니, 그가 무엇을 했겠는가! 자신을 받드는 마음으로 남면(즉 통치자의 적절한 예)을 했을 뿐이로다. '즉 그 나라의 모든 일이 탈없이 순조로왔음'
그 자체 만져 볼 수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고 분명히 드러나지도 않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모든 일을 항상 무리 없이 훌륭하게 이루어 내는 것이 신묘한 부분이다.
올바로 처신하면, 다른 명령을 안해도, 일은 잘 되어 나간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굽히게 된다.
덕으로 다스림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은 자기 자리에 있으나 뭇 별이 그를 둘러싸고 도는 것과 같다.
이 인용문들에 대한 주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듀벤다크의 언급처럼, <위정>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신비적 의미>는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거나, <위령공>의 순임금의 예식을 드리는 모습은 <신묘한 힘이 최고에 달한 상태>라고 간단히 지적할 수 있다. 요컨대, 이런 부분들이란 <논어>에 남아 있는 순수한 <미신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논어> 주석가들은 공자를 보다더 <좋게 이해하려는 쪽으로>, 말하자면 우리들 (현대인들)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개념을 통하여 공자의 철학적 주장의 타당성을 최대로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들 주석가들의 이런 노력의 결과 <논어>에 있는 신비주의적 언급들은 축소될대로 축소되어 더 이상 원상을 읽어 내기 어렵게 되었다. 주문을 외우거나 예식을 올리는 몸짓을 통하여 정말 올바른 행동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진지한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우리 시대의 당연한 공리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공리의 일반적 수용에 중요한 예외가 현대의 <언어 분석> 철학이다. 그러나 이런 작업의 중요한 의미는 아직 전문적 철학의 세계 밖으로까지는 별로 진척되지 못하였다'
현대인의 기호에 전혀 맞지 않는 신묘함이나 경이의 뜻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희석될 수 있다. <논어>의 3-8장만이 가장 <논어다운> 부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내가 인용한 공자의 말씀은, 때때로 공자 정신에 어긋나는, 전술된 텍스트에 삽입된 구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신묘한 요소는 아주 완벽한 군주에게만 적용되는 극히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질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신묘함>에 대한 언급을 <불식하려는 해석>의 또 다른 가능성이란, 공자는 (시의 적절하게) 좋은 예를 제시하는 (주술식이 아닌) 다른 식의 친화력을 강조하고 극대화했다고 가정해 보는 일일 것이다. 요컨대, 이런 관점에 따른다면, <신묘한 힘>과 관련된 (<논어>의)
언급들을 우리는, (공자가 지리한) 산문적 진리를 운문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끝으로, 공자는 이런 문제에 수미 일관된 논리를 갖지 못하였거나, 아마도 그의 주장의 핵심은 주로 신비 적대적(antimagic)이었지만, 그는 뿌리깊게 박힌 전통적인 (즉 주술적, 미신적) 믿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주석들은 인간의 덕에 대한 주술적 차원의 가르침을 20세기 문명인이 수용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보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신묘함(magic)을 아예 해석해서 지워 버리거나, 또는 (공자를 2,500여 년 전의 인물로 생각한다면 그가 말하는) 신묘함이라는 것도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양해될 수 있는 실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말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분명한 의미 (즉 신묘함이 갖는 의미)를 우리들이 수용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면 나는 차라리 이 문제에 관하여는 우리 (현대인)들이 오히려 공자로부터 배울 수 있는 여지가 아직도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와 입장을 달리하는 여러 주석들과의 논쟁에 말려들기 보다는, 차라리 나는 지금부터 내가 보기에 순수하고 건전한 공자의 신묘한 인간에 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개진해 보고자 한다. 나의 해석이 모든 다른 해석을 배제할 만큼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공자와 같은 창조적 철학자가 자기가 말한 것의 모든 가능한 의미들을 정확하게 밝혔다거나 그의 여러 가능한 의미들 가운데 다른 의미들은 모두 사상하고 오직 하나의 의미만을 의식적으로 강조했으리라고 생각해야 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공자의 신묘한 가르침이 갖는 많은 의미 중에서, 아래의 우리의 논의에서 세련되게 다듬어질 하나의 의미가 신뢰할 만한 핵심적인 공자 사상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것이 제대로 평가되고 이해되지 못해 왔다고 나는 확신한다.
진실되고, 뚜렷한 인간적인 힘은 특징상 신묘한 바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공자는 일찍이 간파했으며, 그것에 대한 주의를 우리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이미 너무나 친숙하고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사실 공자의 과제였다고 하겠다. 이런 경우에 필요한 것은, 우리 인간 존재의 이런 <자명한>면을 새로운 각도와 올바른 방법으로 만나는 일이다. 이러한 친숙한 영역으로 통하는, 즉 우리에게 새롭고 계시적인 시각을 마련해 주는 그러한 새로운 길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공자가 찾았던 길은 바로 예라는 통로였다.
예를 익히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힘든 공을 들여야 한다. 예의 의미는 어원상 <거룩한 예식>(holy ritual), <신성스런 의식>과 가깝다. 공자 가르침의 특징은 예식을 올릴 때 쓰이는 말과 이미지들을 매개로 하여 그 안에서 인간 습속, 좀더 정확히 말해서, 인간 사회의 참된 전통과 합당한 관습을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과 예에 복종하는 의지가 바로 인간을 인간이게 할 수 있는 완전하고도 특유한 인간의 덕 또는 힘이라고 공자는 가르쳤다. 여기서 공자는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전통과 관습이라는 전체에 주목을 하게 하며, 또한 신성한 예식, 거룩한 의식의 형상 등을 통하여 이런 모든 것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게끔 한다.
'정신적으로' 고상한 사람은 조야한 인품을 사회적 형식인 예와 잘 융화시켜서 이 둘을 덕, 말하자면 인간의 가치를 뚜렷이 나타낼 수 있는 힘으로 전환시키는 연금술 (또는 도덕 연마)에 많은 공을 드린 사람을 말한다.
덕은 인간 상호간의 하나의 전형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들 속에서 실현된다.
이러한 전형들은 모든 예에 공통되는 일정한 일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전형이 되는) 행동들은 <인간에 대한 인간다움>, 즉 인간들 상호간의 성실성과 존중을 참되게 나타내 주는 모든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형적 행위들은 또한 특징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망인에 대한 애도, 결혼, 결투, 군사, 아버지, 아들 등등이 되는 인간적인 전형으로 세분화되어 문명된 행위를 구성하는 예식 진행의 절차를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여하간, 인간이란 어떤 우주적 또는 사회 법칙에 의해 규정된 상투적 행위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단순히 표준 규격화된 단위로만은 결코 간주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인간은 사회 계약에 (능동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자기 충족적이고 개별적인 (즉 원자적으로 완결되고 독립된) 인격체도 아닌 것이다.
인간의 조야한 충동이 예에 의해 도야됨으로써 인간은 진정한 인간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는 인간적 충동의 완성, 즉 충동의 문명적 표현이지, 결코 형식주의적인 비인간화가 아니다. 예는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를 생동적으로 살려 내기 위한 인간 고유의 형식인 것이다.
공자 이전에는 다만 <거룩한 예식>, <신성스런 의식>이라는 그저 일상적인 의미였던 것을 바로 인간 고유의 자기 계시적인 이미지로서, 말하자면 전통과 관습을 배워 익힌 인간 고유의 존재적 측면으로 바라 볼 수 있게 한 것은 공자의 훌륭하고도 창조적인 통찰력 덕분이라고 하겠다.
능숙하게 익힌 의식을 몸소 행하면서, 각자는 전형적 행위에 따라 해내야만 되는 것으로 상정되는 바로 그 행위를 하게 된다. 나의 몸짓은-우리들 중에 아무도 억지를 쓰거나 밀어 부치거나 요구하거나 힘으로 해결을 보려고 했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조작>해 내려고 하지 않았지만-저절로 상대방의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우리의 몸짓은 그때그때 적절하게 아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참여자들의 몸짓과 어울리는 것이다. 모두가 <예에 숙달되어> 있다면, 적절한 예식의 맥락 속에서-사실 글자 그대로-예에 맞는 몸짓을 해내면 될 뿐인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일어날 뿐인 것>이다.
순임금이 무엇을 하였는가? <자기를 받드는 마음으로 남을 대했을 뿐이로다!> 우리는 다음에서 신성한 예의 이런 자기 계발적인 이미지가 강조하는 행위의 분명한 특징들을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억지 없이 자연스럽다는 말을 <기계적> 또는 <자동적>이라는 뜻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예식을 올리는 행위가 만약 자동적, 기계적이라면, 공자가 누차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 예식은 빈약하고 공허하며 죽은 것이다. 그 속에는 혼이 없다. 에식의 참된 <모습>에는 일종의 자연스런 자발성이 있다. 예식을 올리는 개개인들의 진지하고 성실하게 몸과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에, 예식에는 생명력이 있다. 정말 진짜 예식이 되게 하려면 누구나 <제사에 몸소 참여>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제사를 전혀 드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를 잘못 집행하는 두 가지 사례가 있는 것이다. 숙련된 세련미 부족으로 예식이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진행되거나, 예식이 겉으로 보아서는 매끄럽지만 진지한 목적 의식과 실천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어딘가 기계적이며 맥이 빠져 보이는 경우이다. 아름답고 생명력 있는 에식은 숙련된 예식의 세련미와 혼용하는 집행인의 <현장성>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이상적 융합이 바로 신성한 예식이라는 의미의 진정한 예인 것이다.
공자는 (한편) 예를 실행하는 군주와 (다른 한편 오직) 명령, 협박, 규율, 처벌과 폭력으로 자기 목적만을 추구하려는 군주를 특정적이고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다.
(외부적, 타율적) 강제력은 명명백백하지만, 예 안에 생동하는 막연하고 '신묘한' 힘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분명하지도 않다. 경건하고 근엄한 마음가짐을 하고 서로 자유스럽게 협동하는 가운데 예는 살아 움직인다. 신성한 의식의 완성은 예술적이며 동시에 정신적인 것이다.
거룩한 예식 지체를 검토했으므로, 우리는 이제 좀더 일상 생활 측면에 눈을 돌려야 하겠다. 이것이 사실 바로 공자가 우리에게 실천하기를 바라는 측면이며, 이것이 그의 인간관의 바탕인 것이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아는 상대반을 만나면, 미소지으며, 그에게로 걸어가서, 그와 악수를 한다. 보라! 어떤 명령, 책략, 폭력, 특수한 꾀나 도구를 쓰지 않았고, 내 쪽에서 상대방을 그렇게 하게끔 아무언 힘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내 쪽으로 그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우리가 악수하는 것은 단순히 결코 내가 상대방의 손을 또는 상대방이 내 손을 위, 아래로 끌어 잡아 당기는 것(즉 강제적 폭력)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완전히 서로 한마음으로 협조하여야 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이렇게 (서로서로 한마음으로) 협조하는 <예식> 행위의 미묘함과 놀라운 복잡성에 주목하지 못한다. 그러나 누가 교본을 통해서 이런 예식을 배워야만 할 경우라든가, 아니면 악수하는 풍속을 모르는 이방인의 경우라면, 이런 미묘함과 복잡성이 아주 분명하게 눈에 띄게 될 것이다.
<예식>이 자체 안에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적어도 최소한도라 할지라도, 각각 서로 (예의 진행 과정에 실제) <몸소 참여해야만 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보통 주목하고 있지 못하다. 공자의 말씀대로, (예식을 행할 때는) 상호간의 깊은 신뢰와 존중이 항상 일반적,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호간의 존중은 존경의 마음을 서로 마음속으로 느끼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자신이 (마음속으로만) 인지하고 있을 경우, 우리는 훨씬 더 멍청하게 정신을 빼앗기거나, 또는 그런 자신을 의식하면서 아마도 상당히 어색하게 보이게 될 수 밖에 없다. 분명히 (상대방과 악수하는) 이런 우리의 작은 <예식>이라도 그 모습이 상당히 어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한 사람이 자신의 손을 너무나 선급하게 빨리 빼어 들고는 허공에 빈손을 어색하게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예가 아니다. 진정한 상호 존중은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존경이 마음을 의식적으로 감지하거나,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 대한 존경에 초점을 (의도적으로) 맞추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는 그저 올바른 <생활>, 말하자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행위를 하는 중에 충분히 표현되는 것이다. 마치 공중 곡예사가, 적어도 목전의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속임수가 있다 해도,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완전한 신뢰를 '의식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고' 몸소 가져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수를 하는 우리도 (공중 곡예만큼 위험 부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에 아무런 의미도 전달되지 않는, 생동감 없는 형식으로 우리는 아주 어색하게 손을 더듬고 흔들 뿐인 것이다.
악수나 인사를 잘하기 위해서 상호간의 인격 존중과 신뢰가 꼭 필요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지만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때로는 악수를 통해 상대방 태도의 깊이를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예식을 드리는> 몸짓은 그 예식의 의미를 각별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예식의 몸짓에는 인간 관계의 깊이가 드러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상대방의 옛 은사라고 한다면, 길에서 만난 그 상대망(옛날 학생)에게 걸어가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그 학생이 먼저 확실하게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악수를 하면서, 그것이 분명 따뜻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 학생은 어떤 묘한 여운을 남길 수도 있다. (말하자면) 내 쪽에서는 아마도 그 학생의 어깨를 얼싸 안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학생은 내 등을 살짝 두드리는 일 (반갑다는 표식) 따위는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몸짓을 가지고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든지, 뉘앙스를 준다든지, 자상하면서도 의미 있는 여러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묘한 감정을 다양하게 나타낼 수 있음을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다. 이런 미묘한 변화들과 그 규칙을 묘사하자면, 우리는 곧 <논어> 10장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10장에서 말하는 예식을 올리는 요령은 현대의 미국인 독자들의 눈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주 고풍스러운 전통주의의 정수로 비쳐질 것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인간 개개인의)
사회 활동은 문명 사회 안에서도-힘을 들이거나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고도 적절한 구도속에서 적합한 예식의 몸짓을 자연스럽게 해 나감으로써-서로 협조적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런 예식의 힘은 첫째로 배워 익힘에 달려 있다고 공자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통한 무리 없는 자연스런 힘은, 우리들이 보통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또한 물리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내가 지금 연구실에서 강의실로 책을 한 권 가지고 와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신묘한 방법이 없는 한, 나는 글자 그대로 다음 과정을 밟아야 한다. 몸소 연구실까지 걸어가서, 문을 열고, 내 근육을 움직여 책을 집어 들고 물리적으로 그것을 다시 강의실로 가지고 와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묘법이 있을 수 있다. 즉 자신의 소망을 예식에 적합하게 나타냄으로써, 자신이 몸소 (물리적인)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소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강의실에 있는 한 학생에게 정중하게, 즉 에식에 적절하게, 눈길을 주고 단지 책을 나에게 가져 오라는 내 소망을 절도 있고 품위에 맞는 '예식적인'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내 소망을 이렇게 예식에 적절하게 나타내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학생에게 폭력을 쓰거나, 위협을 주거나, 술책을 써야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몸소 실제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없다. 내가 소망했던 대로, 거의 아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도 그 책은 내 손에 있게 된다. 이런 점이 바로 인간 고유의 일처리 방식인 것이다.
남과 악수하는 것이나 남에게 일을 대신시키는 일 같은 것은 매우 비근한 예라고 한다면, 도의 정신은 아주 심원한 예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예식을 올리는)
복잡하지만 또한 친근한 몸짓들이 바로 인간 관계를 유지시키는 가장 인간적인 특징이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관계가 -말하자면 이리저리 쫓기거나, 위협을 당하거나, 힘의 압제를 받거나, 조종을 받는 동물 또는 인간 이하의 존재들과 같은-물리적인 (대상적) 사물들간의 관계가 아닐 때,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어느 것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예의 이미지에 의해 이런 <예식>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개명한 인간들 상호간의 일상적인 접촉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강조하고 매우 세련되게 다듬어 놓은 것들이 바로 의심없이 신성한 예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언어는 오직 행위에 대하여 말할 때나 또는 행위를 간접적으로 유도하는 데 쓰여질 뿐이라는 관념이 서구 현대인의 생각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당대의 <언어> 분석 철학은 예식을 올리는 도중에 하는 말이란 어떤 행위에 대한 보고이거나 또는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보다는 얼마만큼 그 자체가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실제 행위인가를 밝혀 왔다. 작고한 오스틴 교수는 이런 현상의 보편적 실재성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한 사람중의 하나이며, 그는 자신의 분석에서 이런 언어적 실재성을 <수행적 언사>라고 명명하였다. 우리들이 하는 말 중에는 사실 법적 증서에서 <효력을 갖는> 조항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무수한 수행적 언사들이 있다. 이런 언사들은 말이기는 하지만, 어떤 행위에 대하여 보고하거나 어떤 행위를 (우회적으로) 유도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들은 행위 그 자체를 바로 수행시키는 것이다.
<나는 내 시게를 내 동생에게 줄 것을 유언한다>라는 언사를 적절하게 말로 표현했거나 글로 쓴 것은 내가 이미 행동한 것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이런 유증 자체의 실행인 것이다. 결혼식에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승낙하는 내심의 정신적 행위에 대한 보고가 아니다. 그것은 결혼 계약의 한쪽 몫을 완결 짓는 행위 자체인 것이다. <나는 약속한다>라는 말은 조금 전에 내가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에 대한 보고가 아니며, 그 외의 다른 어떤 사실에 대한 정보 제공 또한 결코 아니다. 그 말을 한 것은 그 자체 약속에 대한 실행일 뿐이다. 말을 통해서 그리고 이런 말들이 한부분을 이루고 있는 예식을 통해서 우리는-<마음에서 예에 따라 행하는> 사람의 경우처럼-어떤 책략들이나 강제성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더욱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자신을 규제하는 것이다. 예에 힘을 쓰는 사람은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나, 물리력만을 행사하는 사람은 결코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공자는 진실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관례를 몸으로만 익히고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면, 또는 적절한 구도를 갖추지 않고 말만 했거나 관례의 효력만을 바랐다면, 또는 예식이 충실하게 수행되지 못했다면, 또는 예식을 올리는 사람이 적절히 권위를 가진 그런 사람 '즉 <권위의 행사>-다시 말해 예식')이 아니었다면, 예의 효력은 없는 것이다.
요컨대 예식의 몸짓과 말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도덕적인 구속력은 예식 행위와는 별개로 유리되거나 추상화 될 수 없다. 우리가 예식에서 쓰고자 하는 것은 겉으로 현란하게 보이는 힘이 아니다. 그것은 예식의 (즉 예식을 올리는 현장 그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힘이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노예에 대한 관습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면, 나는 나의 종을 다른 누구에게 유증하는 예식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 내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나는 2달러를 놓고 내기를 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훌륭한 변호사라 해도, 지정된 법정에서 지정된 의식의 절차와 권위를 빌리지 않고 다만)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어떤 범죄에 대한 <유죄> 혐의를 법적으로 변호할 수 없다. 이와같이 예의 힘은 예가 충분히 존중되지 않고서는 발휘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점 또한 공자가 늘상 되풀이해서 하신 말이다. <세 귀족이 (천자의 예인) 옹 음악으로 예식을 끝내다니! '예에 따르면, 옹의 음악을 쓸 신분이 아닌')이 세 귀족의 사당에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 되는 것인가?>
지금 우리로서는 우리들의 언어나 예식속에 명백히 알수 있는 수행적 공식 언표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또한 그만큼 분명하진 그러나 자못 중요한 수행적 공식 언표들, 예를 들면 자신의 소원, 애호, 선택을 표현하는 언표들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 물건을 선택한다>는 말은 자신이 나중에 그 물건을 받아 보고, 그것은 참 뜻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식의 이의 제기를 배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절한 상황에서 그런 언명을 한 것은 이미 일어난 어떤 일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함에 따른 (앞으로) <수행해야할> 단계로의 이행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언어가 갖는 <예식 수행상>의 상관 관계에 대한 이런 연구의 결론은, 오스틴 교수의 추론에 따르면, 자못 역설적이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모든 언명들은 본질적인 면에서 수행적이라는 결론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 결론은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는 '과거에는 실용주의적인 철학 경향들의 기본 주제였으나' 지금은 현대 분석 철학의 상투어라는 점과 우리는 어떠어떠한 일들, 즉 상당히 중요하고 매우 다양한 일들을 한다는 낱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일로 충분하다.
실제로 아런 새로운 철학적 통찰의 중심적인 교훈은 언어에 대한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예식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우리 방식대로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은-바로 예식이 인간 존재의 실체를 이루는-그런 인간 존재 영역이 얼마나 광대한 것인가이다. 각종 약속, 합의 사항, 실수의 해명, 변명, 찬사, 협약-이런 등등의 일들이 예식들이다. 이것들이 예식이 아닐 때는, 이들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예식을 매체로 하여 우리에게 고유한 인간 생활이 유지되는 것이다. 예식 활동은 따라서 그 어느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제일 우선적인 일이다.
언어가 뿌리를 박고 있는 사회 관습 속에서의 언어 행위와 무관하게 추상화되어 이해되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인습적인 언어 행위 또한 자신을 규정하고 동시에 그 자체도 한부분을 이루고 있는 언어와 고립되어 이해될 수 없다. (만약 누구와 약속을 한다면) 그 약속이란 순전히 물리적인 동작일 수만은 없다. 예식적 상관 관계, 주변의 환경적 요소와 각자의 역활 등과 전혀 관계없이, 오직 말만으로는 약속이 성립될 수 없다. (순전히 물리적으로만 계량되는) 말과 동작이란 구체적인 예식 행위로부터 (일탈된) 추상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근육 동작 기술에 숙달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말을 또한 올바르게 (즉 예의 적절하게) 사용해야만 한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식에 맞는) 올바른 언어 사용은 (물리적) 몸동작과 마찬가지로 효율적인 행위를 구성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고 올바른 언어는 단순히 유용한 첨가물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예식을 실행시키는 핵심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공자의 유명한 정명론이 단순히 낱말-묘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라거나 전통을 가르치려는 관심에서 나온 공자의 현학적인 노력의 표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또한 <실체>론-또는 플라톤의 이데아, 혹은 그와 유사한 신유학적 개념-을 읽어야 할 어떤 이유를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논어>는 그런 원리에 대한 어떤 암시도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대적 철학 원리를 고전의 가르침에서 읽어내는 일에 매우 조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글자나 정신 면에서 <논어> 원전은 인간을 예식적 존재로 보는 우리 자신들의 최근년에 등장한 관점을 지지하며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식의 작용과 연관하여 공자는 단순히 현저하게 인간적인 성격을 또한 제시하고 있다. 끝으로 우리는 이제 공자가 신성한 예식을 형성화하여 인간 존재의 모든 측면을 통합하고 그것을 구석구석까지 주입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그 사실을 밝히는 것에 우리 분석의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아마도 현대의 서구인이라면, <몸으로 비워 익힌 관습과 언어를 이지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일>을 말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이지적 실천은 (서구적) 시속에 맞는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고리(한계)를 가지게 된다. 사실 현대 분석 철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즉 가치 중립적, 과학적으로) 말을 하여 상식을 지키며 (그 이상의 언급은) 삼가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럽게 해서는 공자의 중추적 이미지가 성취했던 그런 것을 얻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거룩한 예를 인간 존재의 비유로 형상화시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존재 속의 신성한 차원에 눈을 돌리게 된다. 거룩한 예가 그 거룩함의 절정에 달해서는 여러가지 차원을 갖게 된다. 예는 사회적 형식의 조화와 아름다움, 인간 상호 관계의 내재적이고 궁극적인 존엄성만을 강하게 나타내어 주는 것만은 아니다. 예식은 또한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 타인과 함께 예 안에서 (무리와 충돌 없이) 자유스럽게 공동 참여(활동)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내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함축되는 도덕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좀더 나아가 말하자면, 예식을 따라 하는 행위는 타인(또는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방)에게도 완전히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식은 공개적이고, 공동 참여적이며, (따라서 누구에게나) 명백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식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비밀스럽고, 요령 부득이하고 정도에서 벗어난 것이거나, 아니면 독재적 폭력에 의한 강제성을 띤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자기와 같은 타인(상대방)들과 함께 어울려 이러한 예식에 아름답고 근엄한 공개적인 참여릎 통하여 인간은 자기 인격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완전한 공동 생활-그리스도교의 형제애와 유사한 유교적 대비-은 신성존경과 불가분한 한 부분이라는 주요한 면모, 다시 말해 예수 가르침의 중추적 계율과 맞먹는 유사성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좁은 근원적 의미에서 신성한 예식은 인간의 현세 ㅅ활 밖에 있는 정신적 존재(혼령)들을 전적으로 신비스럽게 위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공자는, 당연한 추론이지만, 우리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였다. 정신은 더 이상 예식에 의해 감응을 받은 외재적 존재가 아니다. 정신은 예식 안에서 표현되며 그 안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다. 인간의 현세 영역에서 다른 초월적 세계로 관심의 방향을 전환시키지 않고서, (인간은 누구나 공개적으로 거룩한 예식을 올림으로써) 그 거룩함의 내용을 참된 인간 존재의 차원으로 표현하며 (동시에 그 참된 인간 존재의 차원에 몸소) 참여한다는 양방면에서 바로 공개적인 거룩한 예식은 (인간 존재의)
중추적 상징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명백히 거룩한 예는 이렇게 도를 인간 문명 속에, 보다 포괄적이고 이상적이며 전면적인 예식의 조화를 통하여, 완전하게 체현해 내는 찬란한 중심점이 되는 것이다. 인간 생활은 그 전체면에 있어서 마침내 하나의 광대하고, 자발적이며 거룩한 예, 즉 (신성스런 예식에 공동 참여를 통하여 사람들과 사람들이 서로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융합해 나가는) 인간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궁극적인 관심>이었다. (원자적으로 각기 고립되고 자기 완결적인) 개개 인간들의 삶 자체보다 더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이 바로 이 점이라고 공자께서는 거듭거듭 말씀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