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열선루(列仙樓)
전남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 904-24
보성 열선루(列仙樓)는 400여 년 전 조선수군 존치를 위해 이순신 장군이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장계를 작성한 장소로 보성읍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당시 군사지휘소 역할을 했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을 폐하고 육군으로 합류하라고 명을 내렸으나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라고 장계(狀啓)를 쓴 곳으로 2017년에 복원하였다. 이때 보성군은 모두 75억 원을 들여 본래 자리가 아닌 신흥동산 일대에 열선루 중건과 연못조성, 야간경관 조명설치, 읍성 둘레길을 조성했다. 팔작지붕으로 정면 5간, 옆면 4간의 건물이다.
열선루 조감도
1597년 8월 15일 열선루에서 선조가 보낸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에게서 "조선 수군이 미약하니 육군에 의탁해 싸우도록 해라"라는 수군 폐지 내용이 적힌 유지를 받았다. 이순신 장군은 그러나 '상유십이' 장계를 올리고 사흘 후인 8월 18일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 군영구미에서 바다로 나가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8월 20일경 이순신 장군을 추격하던 왜구가 보성읍성을 공격해 열선루와 성내 관아가 불탔다.
그 후 1610년 보성군수 이직(李稷)이 열선정(列仙亭)으로 고쳐 중건했으나, 1871년 간행된 호남읍지에는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상유십이장계공원에 놓여있는 주춧돌과 초석 등 20여 점이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列仙樓‘ 현판
현판에 행서체(行書體)로 열선루라고 쓰여졌다.
여수 흥국사 충무공 친필 '拱北樓' 탁본
공북루
ж
상유십이장계공원
전남 보성군 보성읍 주봉리 308-7
今臣戰船尙有十二(금신전선상유십이)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출사력거전즉유가위야)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전선수과 미신불사즉 불감모아의)
신(臣)에게는 전선 열 두 척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워야만 오히려 막아낼 수 있습니다.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령한 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저들이 감히 업수이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1597년 8월 15일 보성(寶城) 열선루(列仙樓)에서 적은 병력으로 적을 대항하기 어려우니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편입해 싸우라는 선조 임금이 내린 밀지를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을 통해 받아보고 조정에 올린 장계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9권 부록 1에 조카 이분(李芬)이 쓴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행록(行錄)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보성에서 9박10일 일기
연월일 | 내 용 |
1597년 8월 9일 | 맑다. 저녁에 보성 조양항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곡식은 출입문을 봉인한 그대로 있었다. 군관 네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고 군관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란 가고 없었다. |
1597년 8월 10일 |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의 집에서 머물렀다. 흥양현감 배홍림도 같이 머물렀다. |
1597년 8월 11일 | 맑다. 아침에 박곡 양산항의 집으로 옮겼다. 이 집 주인도 바다로 피란해 갔고 곡식은 가득 쌓여 있었다. 늦게 송희림과 최대성이 보러왔다. |
1597년 8월 12일 | 맑다. 아침에 장계 초고를 작성하였다. 늦게 거제만호, 발포만호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 편에 경상우수사 배설이 머물고 있는 소식을 들었다. 보성군수가 왔다. |
1597년 8월 13일 | 맑다. 거제현령 안위, 발포만호 소계남이 인사하고 돌아갔다. 우후 이몽구가 전령을 받고 들어왔다. 하동현감 신진이 와서 전쟁 상황을 전했다. |
1597년 8월 14일 | 맑다. 아침에 여러곳으로 보낼 장계 일곱 통을 봉하여 윤선각 편에 보냈다. 저녁에 어사 임몽정과 만나기 위해서 보성군으로 갔다. 밤에 큰 비가 쏟아졌다. 열선루에서 잤다. |
1597년 8월 15일 | 비오다 오후에 맑게 개었다. 열선루에 나가 기다리니 신진관 박천봉이 임금의 유지(명령지)를 가지고 왔다. 8월 7일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영의정은 경기지방 순행중이라 한다. 곧바로 장계를 만들었다. 보성 군기(무기)를 점고하여 네 마리 말에 나누어 실었다. 과음하여 잠들기 어려웠다. |
1597년 8월 16일 | 맑다. 신진관 박천봉이 돌아가는 편에 나주목사 배응경과 어사 임몽정에게 답장을 보냈다. 활장이 지이, 태귀생이 보러왔다. 선의와 대남도 들어왔다 김희방, 김붕만도 뒤따라 왔다. |
1597년 8월 17일 | 맑다. 이른 새벽 출발하여 백사정(벽교리, 명교마을)에서 말을 쉬고 군영구미(전일리 군학마을)로 가니 경내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
1597년 8월 18일 | 맑다. 늦은 아침 군영구미 바다로 출정하였다.열선루가 이곳에 있어야하나 복원과정에서 500m 떨어진 곳에 현재 세워졌다. |
[출처] 이순신 ‘신에게 12척의 배가 있다‘ 어디서 썼을까|작성자 낭만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