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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목사 인물 탐구 - 예수님 닮은 성자
– 기독교 헤럴드 신문
인물탐구 / 20세기의 성자, 五放 최흥종 목사 (1)
http://www.cherald.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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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목사 인물 탐구 – 예수님 닮은 한국의 성자
(성탄특집 ; 2018.12. 23일 주일 아침7시 40분 SBS 방송참고)
“양 옷 입은 이리 같은 목회자에게는 고개 숙이지 말라”
-거의 생명력을 잃어가는 대형교회들의 타락의 실상 속에
우리에게 던지는 살아있는 신앙 선배님의 교훈!!
1) 생명으로부터 자유
2) 성욕으로 부터의 자유
3) 물질적 욕망으로 부터의 자유
4) 관직과 명예욕으로부터의 자유
5) 종교로 부터의 자유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1966) 목사와 그의 양아들 ‘맨발의 성자’ 이현필의 삶!!
1) 식욕 2) 물욕 3) 명예욕 4) 색욕 5) 혈육욕을 ... 5가지를 끊은 성자
http://cafe.daum.net/kozanp/J7zE/304
“양 옷 입은 이리 같은 목회자에게는 고개 숙이지 말라”
전라남도 광주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도시이다. 1970년대 광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금남로에 있는 광주중앙교회(9층)였다. 옛부터 광주에는 교회가 많았고 광주시 양림동에는 선교사 마을과 기독병원, 수피아여중고, 숭일중고등학교, 호남신학대학, 그리고 같은 이름의 수많은 양림교회가 한동네 한거리에 존재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에는 수년 전에 만들어진 오방로도 있다.
필자는 광주(光州)를 ‘빛고을 성지’라 부르고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이 배출한 20세기의 성자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오방 최흥종 목사와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두 분을 말하고 싶다. 감리교회사학자 이덕주도 오방선생을 <무등산 자락의 성자>로 정의하였다. 그런데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1966) 목사와 그의 양아들 ‘맨발의 성자’ 이현필은 모두 광주와 인연이 깊은 분들이다. 특히 이현필 선생은 광주 출신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그가 세운 동광원이 아직도 광주에 명맥을 잇고 있으며, 개신교수도공동체 동광원의 수도자 대부분이 광주호남출신이었다. 두 분 모두 제도교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함으로써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광주출신 최초의 교인이자, 최초의 장로이자, 최초의 목사였던 최흥종 목사는 호를 오방(五放)이라고 하였다. 오방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오방은 다섯 가지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으로, 첫째 가사로부터의 해방, 둘째 사회로부터 해방, 셋째 경제로부터 해방, 넷째 정치로부터 해방, 다섯째 종교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그것이다. 즉 혈육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을 받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속박 받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이 없이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다섯 가지의 생활신조를 말함이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평양신학교 출신의 장로교 목사였고, 광주의 대표적 교회인 광주중앙교회 초대당회장이자 3대 당회장으로 담임하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도 역임한 분이다.
그러나 가정·사회·경제·정치에 매이지 않고, 더 나아가서 기성 교회의 제도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나 자신만의 관계에 충실함으로써 어지러웠던 시대에 등불이 되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하였다.
광주중앙교회에서 은퇴 한 후 최흥종 목사는 신앙인으로서의 양심을 팔아버리는 기성교회와 교회지도자들에게 “너희 회칠한 무덤들아, 너희들은 죽었다”,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죽었다. 회개하라”는 내용의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교단으로부터 제명되지는 않았지만, 오갈 데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 하나 마음 터놓고 속 시원히 이야기할 상대도 많지 않았다.
특히 최흥종 목사는 기성 교회보다는 평신도들에게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는 현재를 꾸짖기 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은 목회자들에게 고개 숙이지 말고 평신도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앞날을 준비하도록 당부하였던 것이다. 최흥종 목사는 1952년 빌링겐 대회(Willingen synod) 이후 새롭게 등장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보다 20여 년 앞서서 평신도 신학을 부르짖는 선구자였다.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를 부르짖었다. 교회의 희망을 일신상의 영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정절을 팔아버린 거짓 목사보다는 순결한 평신도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오방 최흥종(崔興琮) 목사는 일찍이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유진 벨(배유지) 목사의 사택(광주시 양림동)에서 드린 최초의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을 계기로, 배유지 목사가 세운 최초의 호남지역교회인 광주제일교회(광주북문안교회) 초대장로를 역임하였다. 현재 광주의 대표적인 교회인 광주서현교회(예장합동), 광주제일교회(예장통합), 광주중앙교회(예장합동), 광주양림교회(합동,통합,기장)는 모두 광주제일교회에서 갈라진 것이어서 현재도 광주시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두 최흥종 목사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는 개종 초기부터 복음의 영적인 거듭남의 기능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이것을 교회와 교인의 사회적 사명으로 연결시키면서 평생을 살았고, 광주의 전통 있는 교회들은 바로 이런 지도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100년의 호남지역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배유지 목사는 1868년 미국 켄터키주에서 출생하여 1895년 4월 4일 한국에 처음 입국하였고, 미국 남 장로교 소속 초대 선교사로 전라도 지역에 파송되어 목포와 전주를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하다 1925년 광주에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선교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선교사의 4대에 걸친 헌신적인 호남선교활동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지금도 유진벨재단을 통해서 북한지원운동을 하고 있다.
최흥종 목사가 3·1만세운동으로 인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광주북문밖교회 (현 광주중앙교회)에 다시 부임하여 목회에 전념할 때인 1920년 8월 29일에 YMCA 광주지부를 설립하게 되었고, 1924년 최흥종 목사가 제4대 회장을 맡을 때 비로소 서울 중앙 YMCA 의 인준을 받아 지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21년부터는 광주북문밖교회를 중심으로 광주 최초의 유치원을 운영하기도 하였고, 여성들을 위한 야학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 광주 YWCA의 창립을 도왔다. 또한 1921년 최흥종 목사는 일본산 마약을 퇴치하기 위하여 모루히네 방독회를 광주 YMCA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최장일 기자
인물탐구 / 20세기의 성자, 五放 최흥종 목사 (2)
일제강점기 흩어진 동포 보살피려 서시베리아 선교사 자청
최흥종 목사는 일제강점으로 흩어진 동포들을 보살피기 위한 서시베리아 선교사를 자청했다. 1922년 11월에서 1923년까지 9월까지 봉사하였으며, 1927년 1월에 또다시 서시베리아 선교사로 떠났다. 그러나 변화된 시베리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감옥에 수감되는 등 4개월 만에 강제로 귀국하기도 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종교탄압 정책에 따라 ‘케·페·우’에 수금되어 40여 일 간 고생하다가 강제 퇴거조치를 당하여 4월 3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광주제중원(광주기독병원 전신) 간호부장으로 재직하기 시작한 서서평 여선교사(Elizabeth J. Shepping, 1923년부터 초대-10대 조선간호부협회 회장 / 1934년 사망)와 함께 광주천 다리 밑과 사직공원 뒤켠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던 걸인들과 빈민들을 위하여 전라남도 도지사 및 행정당국에 적극적으로 건의해 1932년에 경양방죽 제방 밑에 움막설치를 허락 받았다. 최흥종 목사 본인도 1935년 3월 〈사망통지서〉를 발송한 이후에는 이들과 함께 잠시 기거하였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나환자들의 아버지이기도 하였다. 1909년 광주에서 시작한 나환자 보호시설은 최흥종 목사가 제공한 1천여 평의 땅에 45인 수용시설로 출발하였으나, 1924년에는 5백6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나환자공제회가 1932년에 최흥종 목사에게 호소하자 그는 곧 서울종로 YMCA 중앙회관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나환자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하여 70여 명의 목회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나환자 근절협회를 조직하였다. 초대회장은 윤치호, 그리고 총무는 최흥종 목사가 맡았다.
이 후에 다시 광주에 내려와 걸인을 위한 운동으로 발전하여, 나환자 근절협회 사건으로 대면한 적이 있었던 우가키(宇垣) 총독이 초도순시 차 1932년 광주를 방문였을 때, 최흥종 목사는 전라남도 도청에 있는 총독을 면회하여 경양방죽 제방 밑에 이들을 위한 움막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냈을 뿐만 아니라 건축비용까지 받아내기도 했다. 최흥종 목사는 광주중앙교회 담임목사를 은퇴한 후 아예 걸인생활로 나서는 바람에 한국의 디오게네스로 불리기도 하였고, 광주중앙교회 신자들로부터는 원로목사님의 추태로 보여지기도 했다. 이 생활에서 그는 한국의 성 프란시스코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의 대부가 되었고, 최목사는 이현필과 부자 간의 의를 맺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1944년 5월 20일 지금의 전남대학교의과대학의 전신인 광주의학전문학교를 세우는데 노구를 끌고 앞장서기도 했고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위원장을 맡기도 했지만, 결코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48년 3월에, 최흥종 목사는 광주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광주 기독병원의 카딩톤 원장, 동광원의 이현필 선생과 함께 광주의 결핵퇴치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카딩톤 원장은 이현필 선생이 이끄는 고아원 동광원의 전속 의사로 광주시 사회과 및 보건과에 등록함으로써 지속적인 허가를 얻어낼 수 있도록 협력하였으며, 이현필 선생은 휘하의 여자 수도자들에게 동광원과 무등원(사회복지법인 소화자매원 전신)에서 고아들과 환우들의 식사 및 살림을 맡아서 헌신하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최흥종 목사는 86세로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무등산에 천막을 치고 기거하면서 헬라어 원어로 성경을 읽고 순 한문으로 된 도덕경을 읽으며 100일 금식기도에 들어갔었다. 최흥종 목사는 이때 아예 유언장을 발송한 이래로 금식을 선포하고 식사를 일체 중지하였다. 이에 최흥종 목사를 따르는 제자들인 광주 YMCA의 이영생·이문환·조아라 장로 등은 지게꾼을 앞세우고 무등산을 올라가 최흥종 목사를 장남 최득은의 안집으로 모셨다.
그리고 이 사이에 유언장의 내용과 일치되게 전국교회의 교직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을 발송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목회자들로부터, 특히 전라도 지역의 목회자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샀다. 그리하여 1966년 2월 28일을 기하여 절필하였으나 제자들을 불러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금식을 시작한 날로부터 1백일째 되는 1966년 5월 14일 오후 2시 10분에 하늘나라로 가셨으며 5월 18일 전라남도사회장으로 광주공원에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전라남도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른 사람은 아직까지 최흥종 목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한다. 시민들은 최흥종 목사를 보내는 슬픔을 나누기 위하여 모여들었으며, 학생들, 부랑자들, 나환자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고, 하관식이 끝난 무덤에서는 해가 져물어도 도대체 그치지 않는 300여명 나환자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울리었다고 한다. 그는 죽어서도 거지와 나환자들로부터 “아부지! 아부지!”라 불리는 나환자, 걸인의 실질적인 아버지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선교의 거장이자 지역사회의 거물로서, 무등산에 뼈를 묻고서 아직도 광주를 지키고 있는 커다란 빛이다. 이것이 광주가 빛고을이라 불리우게 된 배경이다. 하나님은 오방이라는 큰 영혼을 통하여 호남광주지역의 선교사역을 이루게 하셨다.
한마디로 오방 최흥종 목사는 이웃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 목자였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나라 사랑을 하나로 보고, 이것을 교회를 포함한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천의 방법은 버림과 자유로움이었다. 그는 다섯 가지를 버림으로써 자유함을 누렸으나 이 자유로움은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예속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다섯 가지로부터의 자유로움은 그리스도에게 매이기 위한 벗어남이었다. 최장일 신학전문기자
인물탐구 / 20세기의 성자, 五放 최흥종 목사 (3)
소록도, 애향원 등 한센병환자들의 아버지
1966년 5월 18일 최초이자 마지막 전남사회장으로 치러진 오방 최흥종 목사 장례식에는 광주 인근 걸인들과 무등산에서 온 결핵환자, 여수와 나주에서 올라 온 한센병 환자들이 몰려와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며 오열하였다고 한다. 오방 최흥종(崔興琮 1880~1966)은 1880년 광주시 불로동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그는 '망치'란 이름으로 장터와 뒷골목을 주름잡던 주먹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를 가슴에 품고 한센병ㆍ결핵 환자들과 걸인의 아버지가 된 사연이 있다.
오방 최흥종은 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광주 양림리(지금의 양림동, 탐진 최씨 집성촌)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던 유진 벨(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와 오웬(Clement C. Owenㆍ한국명 오원)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1904년, 목포에서 활동하던 포사이드(Wiley H. Forsythe) 선교사가 급성 폐렴으로 죽어가는 오웬 선교사를 치료하기 위해 광주로 올라오는데, 유진 벨 선교사의 부탁으로 광주외곽 효천까지 마중을 나갔었다. 효천에서 포사이드를 만나 광주로 돌아오는 도중 피와 고름으로 얼룩진 누더기 옷을 입고 추위에 떨고 있는 한센병 환자(문둥병자, 나병환자)를 만났는데, 포사이드 선교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환자를 자기가 타고오던 말에 태우고 자신의 털외투마저 벗어 입힌 채 광주까지 걸어오게 되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 최흥종은 큰 충격을 받았었고, 그 일생 동안 신앙의 나침반이 되었다. 같은 민족이었던 사람들도 혹시라도 자기가 감염될까봐 돌맹이 던지고 멸시하던 한센병 환자를 마치 자식처럼 대해 주는 것을 보고 “아, 그래 저것이 바로 예수교의 힘, 바로 예수의 사랑이다. 예수를 믿으려면 저 의사분처럼 믿어야 될 것이야” 라는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포사이드 선교사와의 만남은 평생 그를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한평생을 헌신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생업을 위해 일시 전남 경무청에 순검으로 취직했다가 그만 둔 뒤 1907년 창설 된 제중원(지금의 광주기독병원)에서 나환자 돕는 일에 매진하였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오웬 선교사의 장례식을 보고 다시 목포로 돌아갔고, 그가 구해준 한센병 여인도 얼마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양림동 선교사가 문둥병자를 데려다 치료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양림동은 밀려드는 한센병 환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최흥종은 봉선리에 있는 자신의 땅 1,000평을 기증하여 나환자 진료소를 설립하였다.
1912년, 광주시 효천면 봉선리에 한국 최초의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이 개원하게 된 배경인 것이다. 포사이드 선교사와의 숙명적 만남을 통해 가슴이 뜨거운 교인이 된 최흥종은 1912년 광주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예장통합) 초대 장로가 되고, 1917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예장합동) 설립 담임전도사로 부임하여 목회자가 되지만, 광주나병원 일에 더욱 열심이었다. 당시 광주나병원을 방문했던 '기독신보' 기자는 "병원을 주관하는 의사는 윌슨(Robert M. Wilson)씨요, 조선 형제로 이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시키는 이는 최장로 흥종씨다"고 쓸 정도였다. 광주나병원은 이후 환자가 늘어나면서 '봉선리 채소밭에서 난 채소에 문둥이 균이 붙어 있다'는 소문이 돌게 되고, 거센 항의를 받는다. 1926년 광주나병원이 여수 애양원으로 병원이 옮겨진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었다.
1932년, 오방 최흥종 목사는 김병로, 송진우,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한 후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다 죽어가는 나환자들의 치료와 생계문제를 위한 대책을 조선총독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이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 오방과 함께 한세병 환자들이 처음 광주를 출발할 때는 150명 정도였던 것이 소문을 듣고 전국 환자들이 따라 나서면서 열하루 만에 서울에 도착할 때에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총독부까지 쳐들어간 최흥종 목사는 우가끼(宇垣) 총독과 면담하여 소록도를 나병환자 수용시설로 할 것을 약속받았다. 날씨가 따뜻한 전남 고흥군 해안가에 있는 소록도는 천혜의 섬으로 당시에는 일본군 휴양소로 활용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총독으로부터 한센병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갱생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환자 광화문 행진'이었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나환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 정착되자 1935년 서울 세브란스 병원의 친구에게 부탁해 거세를 하고는 아호를 오방(五放)이라 정하고, 주위 지인에게 자신의 사망통지서를 돌렸다. 오방이란 '다섯가지를 놓아 버린다'는 의미로 집착을 떨어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가 놓아버린 다섯 가지란 집안의 일, 사회적 체면,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종파적 활동을 말한다. 그리고 무등산 증심사 골짜기에 들어가 오방정(五放亭)에 은거한다. 최장일 기자
인물탐구 / 20세기의 성자, 五放 최흥종 목사 (4)
오방 최흥종 목사와 맨발의 성자 이현필
20세기의 성자, 한국기독교의 큰 영혼 오방 최흥종 목사는 동광원의 창시자인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을 친아들처럼 사랑하고 아끼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동광원 식구들이 가족적인 삶을 거부하는 독신주의는 결코 반대했다. 동광원(東光園)의 사회활동은 지금도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에 위치한 소화자매원으로 이어지다가 점차 사회복지법인 소화정신요양원, 사회복지법인 소화천사의 집, 예수의 소화수녀원으로 분리되어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소화자매원은 개신교 수도공동체로 1956년 6월 교파를 초월하여 복음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미소함을 본받는 삶을 실천하도록 강렬한 충동과 이끄심을 받은 자매들이 모여 살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현필 선생의 후계자 김준호 선생이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생을 살고픈 마음으로 다리 밑 거지천막에서 그들을 형제 삼아 함께 살면서 점점 작음의 영성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성녀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을 읽게 되면서 성 프란치스코와 공통된 작음의 영성을 발견하여 작음의 신비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작은 영혼들 즉 자매들이 모여들었고, 함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광주시 북구 화암동에 ‘무등원'을 마련하여 결핵으로 죽어가는 환우들을 친형제·자매처럼 돌보는 삶을 살게 됐다.
1970년에는 차츰 가톨릭 신앙 안에서 봉사활동을 하고자 하는 자매들이 모여 들면서 1976년경 소화자매원은 내외적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자매들은 성탄 자선모금을 하러 성당 문을 두드리게 됐다. 마침 그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셨던 조철현 비오 신부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여 자선을 하게 된 사연을 듣게 됐다. 조비오 신부는 모금을 하러 온 그 자매들에게 “수녀원에 갈 맘이 있느냐"며 넌지시 수녀원 입회를 권유하시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가족들을 버릴 수는 없다”며 조용히 거절했다.
그 모습에 감명을 받은 조비오 신부는 그들 안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을 따라 저절로 그 공동체에 찾아가고픈 충동을 느끼게 됐다. 그후 직접 그 공동체를 방문한 조신부는 ‘작음의 영성'을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부터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였던 자매들은 가톨릭으로 점차 개종을 하고 영세를 받아 성사생활로 신망애를 키우며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어 갔다. 드디어 1981년 개신교 수도공동체 무등원이 소화자매원으로 개명되었고, 원내에 성당도 설립되었다. 그 후 대부분의 초기 수도자가 70세의 노령에 이르고, 젊은 수도자의 발길이 끊기면서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천주교 신부인 조비오 신부(현재 소화자매원 이사장)의 헌신과 배려로 천주교 수녀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당시 윤공희 광주대주교는 섬김과 나눔의 생활을 통하여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히 봉사하고 가난과 겸손으로 꾸준히 기도 생활을 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 후, 마침내 1999년 1월 18일 “예수의 소화수녀회” 창설을 허락하여 회헌과 회칙을 인준해 주었다. 그래서 천주교 수녀들을 새로 받아서 노년의 동광원 수녀들이 생의 마지막 봉사를 하고 있다. 그곳에 가보면 가족에게 버림받은 수백명의 불치병 환자들이 따뜻한 사랑으로 수십년 째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이런 나눔의 실천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인가? 80년 5월을 핏빛으로 물들인 빛고을 광주가 바로 이런 곳이다.
그러나 개신교 수도단체 무등원이 기독교계의 옹졸함으로 말미암아 한국기독교의 유일한 수도원으로 남아있을 여지를 마련해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오방 최흥종 목사를 이어서 그들을 품어낼 수 있는 한국교계의 목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1991년도에 장수와 무등산에 있는 동광원의 수련원에서 몇주간 머무르며 동광원 지도자 김준호 선생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은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젊은 지도자를 찾는 그들에게 이미 가정을 꾸린 필자는 그 어떤 결단도 할 수 없었고, 그 후로는 가끔 들려서 안부나 묻는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무등산에서 요양중인 김준호 선생을 만나러 들렸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생사를 헤매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김준호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소화재매원이 완전히 카톨릭의 정식 수녀원으로 자리잡게 되어 고령의 수녀들이 여생을 보내는데 큰 어려움이 없게 된 것은 김준호 선생과 조비오 신부가 남긴 유산이었다. 최장일 신학전문기자
인물탐구 / 20세기의 성자, 五放 최흥종 목사 (5)
함석헌 선생의 멘토 오방 최흥종 목사
해방후 귀국한 김구선생은 오방정에 있는 최흥종 목사를 찾아 일주일을 함께 머물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구선생이 남기고 간 휘호가 성자의 본색을 감추고 중생과 함께 한다는 뜻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이었다. 무등산 중봉으로 올라가는 중턱의 샘터 초막에 은거하던 최흥종 목사를 찾은 함석헌도 그를 '무등산의 은자(隱者)'라 불렀는데, 함석헌이 광주에 내려올 때면 반드시 무등산에 올라 오방 최흥종 목사에게 문안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함석헌은 유영모선생의 제자이긴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오방 선생을 진정한 스승으로 모셨던 것이다. 물론 21살이나 많은 오방선생을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무등산 초막을 찾을 때면 저 멀리서부터 “형님~~, 형님~~ 석헌이 왔습니다.”하고 큰소리로 외치었고, 이 고함소리를 듣고 초막 밖으로 나오는 오방의 모습이 보이면 함석헌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흙바닥에 무릎 꿇고 큰 절을 올렸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1970년대 함석헌이 어려움을 당해 스승인 유영모 선생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는 아마도 오방선생이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었을 터이다. 필자는 당시에 오방이 살아있었더라면 곤란에 처한 함석헌을 보듬어줄 수 있었을 것이고, 그 품에서 함석헌은 당대 최고의 선비이자 이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함석헌 선생을 본 것이 1985년 여름 동국대 교정에서 학생들 수십명을 앉혀놓고 하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강연하던 모습이었다. 당시 외롭게 고군분투하던 백발노인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해방이후 이승만이 오방정을 찾아와서 간청하는 바람에 전남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미군정 도정 고문 등을 잠시 맡기도 했지만, 그의 관심은 여전히 걸인과 환자들에 있었다. 증심사 계곡에 빈민 자활촌인 삼애원(三愛園), 나주 삼포에 음성 나환자 자활촌인 호혜원(互惠園)을 만든 것도 그때였다. 당시는 한센병과 마찬가지로 결핵도 사회의 기피대상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마저 포기한 결핵환자들을 위해 무등산 골짜기(지금의 신양파크호텔 밑)에 송등원(松燈園)과 원효사 아래 공터에 무등원(無等園)이라는 움막 요양소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최흥종 목사는 자신도 무등원 안에 '복음당(福音堂)'이란 토담집을 짓고 결핵환자들과 함께하였다. 무등산 성자로 불린 최흥종 목사의 장례식에 광주 인근 걸인들과 무등산에서 온 결핵환자, 여수와 나주에서 올라 온 한센병 환자들이 몰려와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며 오열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오방 최흥종 목사의 감동적인 삶은 2000년대 들어서 뮤지컬과 연극으로 만들어졌고, 소설가 문순태는 '성자의 지팡이'라는 소설을 써 그를 우리 시대 마지막 성자로 기리기도 했다. 몇 년 전에는 '오방 최흥종'이라는 만화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2009년 광주광역시는 남구 방림1동 주민센터에서 봉선2동 무등아파트단지 입구까지의 도로를 '오방로'라고 지정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최장일 신학전문기자
인물탐구 / 20세기의 성자, 五放 최흥종 목사 (6)
오방정신으로 성찰하는 한국기독교
지금까지 살펴본 오방 최흥종 목사의 정신을 통해서 현재 한국기독교를 성찰하는 것이 인물탐구시리즈의 목적이기도하다. 광주 YMCA에서 2012년에 ‘오방학교’를 운영했는데, 김경재 교수(한국신학대학교 명예교수)가 ‘우리시대 그리스도인의 성찰과 사명’이라는 주제로 한국기독교를 성찰하고 그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거기서 그는 오늘의 한국기독교가 지닌 근본문제를 ‘오방의 정신’에서 성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치명적인 ‘5가지 대죄’로 압축하였다.
① 공교회 사유화(公敎會 私有化) 대죄
② 거듭남 없는 명예욕 탐익 대죄
③ 맘몬숭배, 성장신화 숭배대죄
④ 정치이념과 정치권력에 결탁대죄
⑤ 동굴의 우상화에 빠진 대죄
첫째로 오방 최흥종 목사는 일체의 혈연적, 혈육적, 사적 자아확장의 죄에서 해방되어 정결하고 공공성에 투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기독교의 첫 번째 죄는 교회의 사유화라고 했다. 김경재 교수는 구체적으로 성직세습, 성직매매, 개교회 중심주의, 개교단 중심주의가 바로 교회 사유화의 증거라고 했다. 또한 그는 한국교회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죄’(막11:17)를 범하고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한국기독교의 대형교회들은 ‘야누스적’인 양면얼굴을 지닌다고 했다. 그 대형교회들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초창기 한국기독교 선구자들이 이뤄놓은 ‘위대한 신앙유산들’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다고 규정하고, 지금은 자기희생적인 순수한 ‘아가페사랑’을 느낄 수 없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오방 최흥종 목사는 일체의 사회적 관계에서 양반체면, 자기위장, 품위유지를 버리고 명예직에 연연하지않고 초연(超然)하고 초탈(超脫)한 삶을 살았다. 오방의 영성에서 보면, 우리시대 한국기독교의 둘째 대죄는 ‘거듭남 없는 명예욕 탐익대죄’에 빠져있다고 하였다. 김경재 교수는 우리시대 기독교인들이 종교생활 한다는 신앙인으로서 ‘통과의례’가 없고 너무 쉽게 세례의식이 남발되어 ‘짝퉁 기독교인’을 양산해 냈다고 통렬히 비판한다. 더욱 심각한 근본문제는 적어도 목사나 장로직 신분으로 교회를 섬긴다는 지도자들에게 출가자 정신도 없고, 중생경험도 없고, 경건을 위장하면서서 끈질긴 명예욕과 자기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경건한 무신론자들’이 되어간다는 점을 지적했다.
셋째, 오방 최흥종 목사는 나병환자를 돌보고, 결핵환자 치료병원을 세우고, 거지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였던 지도자이다. 김경재 교수가 말하는 한국기독교의 세 번째 대죄는 치열하게 복음전도하고 교회를 성장시켰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맘몬숭배자가 되고 무한경쟁과 성장신화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버린 것이다. 즉 우리시대 기독교는 노골적인 맘몬숭배, 물질숭배, 크기와 속도 숭배자가 되어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교회가 위세부리고 공격적이며 점령하는 ‘십자군적 영성’을 청산하고 비우고 낮아지고 섬기는 ‘십자가의 영성’에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 이 땅에 복음을 전해주었던 의료선교사들, 그리고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 김약연, 최흥종, 이상재, 김용기, 함석헌, 김재준, 한경직, 장기려등 청빈하고 겸허했던 지도자들처럼 ‘화광동진’의 영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넷째, 최흥종 목사에게서 ‘정치에 방기’하겠다는 진정한 뜻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탈정치화, 비정치화, 몰정치화등 결국 정치적 아나키스트가 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정치를 초월한 ‘영원한 하나님의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선언이라고 했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제한받는 인간 정치학의 정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태초부터 행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정치에만 참여하겠다는 선언이라고 했다. 이어서 김경재 교수는 지난 50년동안 이땅의 70%를 차지하는 보수적 기독교는 ‘정교분리’를 주장하고, 교회는 ‘영혼구원’에만 전념한다고 말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가장 노골적으로 ‘땅의 정치, 땅의 나라’에 정치적으로 충견처럼 복무하였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다섯째, 오방 최흥종의 영성은 하나님을 마음의 깊은 지성소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요4:24), 삶의 한복판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믿음이다. 즉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라는 종교동굴에 갇히지 말자는 것이다. 김경재 교수는 오늘날 한국기독교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우상화’에 빠져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그 이름을 욕되게 하는 대죄를 지적했다. 우상화의 사례가운데 하나는 수천억짜리 화려한 교회건물을 지어놓고 하나님이 다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공과 번영이라는 현대판 ‘우상화’에 빠져 값싼 복음을 양산하는 한국교회는 이제 윤리적 부패와 퇴행이라는 부메랑을 맞아 양적 성장 자체에서도 제동이 걸리고 있다. 기독교윤리학자 윤성헌 목사는 세속화된 맘모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기독교의 현실을 “끝이 없고 날개 없는 추락”이라고 정의하고, 청년들이 점차적으로 사라져가고 유년, 초등 주일학교가 없어지는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제2종교개혁과 같은 한국교회의 회개운동에 희망이 있다고 했다.
최장일 신학전문기자
목사 최흥종(崔興琮, 1880년 5월 4일~1966년 5월 14일)에 대해서 고경태 목사의 소회
1. 최흥종은 목사이다. 목사는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고 확장시킨다. 최흥종은 오방으로 잘알려져, "오방 최흥종"이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그러나 우리는 "목사 최흥종"을 부각시키고 싶다. 최흥종은 광주 최초의 장로였고 목사였다.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사역하고 광주 무등산에서 소천된 그리스도인이고 목사이다.
2. 최흥종은 1904년 12월 25일에 선교사들을 만났고, 세례를 받았고, 장로가 되었고,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기도 했고, 석방되자마자 북문밖교회(현재 광주중앙교회)를 독립해서 개척했다.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 2회 선교 활동을 했고, 소련이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동포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면서 사역의 동력을 상실했다. 모슬포 교회에서 사역하셨다. 그리고 한센인들을 돌보는 사역을 진행했다. 당시 선교사인 서서평, 윌슨 선교사들과 동역했다.
3. 최흥종은 1920년경 사역했는데, 당시 우리 교회에는 성경과 기도만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최흥종은 성경의 핵심 사상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정확하게 실천했다. 이러한 사례는 칼빈에게서 나타났다. 칼빈은 제네바, 한 도시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효과적으로 구성한 최초의 사역자이다. 칼빈은 1,000년의 기독교 자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었지만, 최흥종은 성경과 기도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회 질서를 구현했다. 가장 약한 이웃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일으켜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했다. 그리스도인은 풍부한 자료와 성경과 기도로 진행해도 동일한 방향으로 유사한 현상을 발생시킨다.
4. 목사 최흥종이 후기에 만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유력한 신비주의 활동가였다. 이현필 선생, 함석헌, 김준호 선생 등이다. 그래서 신비주의자 로 이해하려고 하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장로교 목사이지만 신비주의자들과 교류하며 가르침을 준 사역자로 이해할 것을 제언한다.
5. 최흥종은 1935년 오방을 선언하면서, 오방 최흥종이 되었다. 1935년은 일제가 신사참배 강요의 마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때이다. 장로교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면서 결국 1938년에 신사참배를 총회에서 결의했다. 최흥종은 신사참배 거부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필자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거부표현, 한상동 목사의 신사참배거부를 조직적으로 운동함, 박형룡 박사의 망명 그리고 최흥종의 자기부인을 제언한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대표)
[출처] <한국에서 신학하기> 목사 최흥종|작성자 고경태
http://www.cherald.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945
http://blog.naver.com/ktyhbgj/221339621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