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가 제위에 있을때 포템킨이란 장군이 있었다. 여황제가 지방도시를 시찰하려하자 포템킨장군은 겉만 행복한 포템킨마을을 만들어 여황제에게 보여준다.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들으면 다 아는 이야기 '토끼와 개구리' 국민학교교과서에 나온 이야기다 얘기는 대충이렇다 토끼 무리가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약하니 살아서 무엇하냐하고 물에 빠져 죽자며 호 수로 간다갔더니 토끼들을 보고 물가에 살던 개구리떼가 물속으로 얼른 달아났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인간인가'란 책이 있다 유대계이탈리아인 작가 프리모 레비가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 수용 되어 노예의 삶을 살던 생생한 체험기를 다룬 작품이다. 인간을 죽이는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 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아무렇지도 않을까 아니 아프리카 피그미족이 유대인보다 무엇이 못할까 왜 가만히 있는 피그미족을 들 추는가 종로에서 빰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고 조금뒤에 이렇게쓰여 있다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나 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아우슈비츠에서 8,000명의 유대인이 살아남았다. 원기를 회복한 이들이 피그미족이 있는 곳으로 무기를 들고간다면 그들과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또 다른 나치가 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팔레스타인 땅에서 나치가 2차대전때 한것과 똑같은 짓을 아 랍사람들에게 하고 있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그리고 '신(예수)을 죽인 민족'은 제2회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에 겨우 폐지되었다. 중학 영어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인디언이 백인에게 맨해튼을 얼마에 팔았는데 그걸 지금까지의 이자 로 따져봤을때 인디언들은 수지 맞는 장사를 한 것이다. 만일 어느 대통령이 독도를 일본에 얼마를 주고 팔았고 몇 백년후 교과서에 그때까지의 이자를 계산해 봤 을때 그 대통령은 수지맞는 장사를 한 것이다 라는 내용이 있다면 그 교과서를 찢어버릴까 영어를 배울때 처럼 '아 인디언들이 그때 수지 맞는 장사를 했구나'하며 공감할까.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싹 치환해버리는게 강자의 섭리다.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었을까 백인이었을까 두부는 정말 회남왕 유안이 만들었을까 농민의 오랜 경험으로 만든것일까 나침반은 신라의 지남철이 원형일까 중국의 4대발명품일까 최익현선생은 정말 대마도에서 단식하다 돌아가셨을까 아닐까 음력과 양력을 만든 나라는 중국일까 이집트일까 늑대는 정말 양치기소년의 양을 공격한 적이 있을까 없을까 곤충과 동물은 정말 언어가 없을까 그들 나름대로의 언어가 있을까 맥주를 만든 나라는 독일일까 이집트일까 주사위는 이탈리아가 원산지일까 이집트가 원산지일까 상어는 정말 인간을 공격할까 안할까 상어에게 죽는 사람은 1년에 15명정도 사람에게 죽는 상어는 1년에 75만마리 청와대와 신라호텔선 아직도 샥스핀이 나온다. 공룡같이 스스로 멸종한 동물이 더 많을까 인간이 심심해서 멸종시킨 동물이 더 많을까 알파벳은 영국에서 만들었을까 이집트의 페니키아인이 만들었을까 미세먼지 제거의 일등공신은 나무일까 공기청정기일까 동남풍은 제갈공명의 파초선 덕분일까 양자강의 미꾸라지 덕분일까 일본천황은 정말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백제인의 후손일까 88고속도로에서 1년동안 깔려죽는 멸종위기종은 한두마리일까 수없이 많을까 피타고라스 법칙은 그리스일까 이집트일까 북인도일까 한자는 동이족인 유목민이 만든것일까 중국에서 만든것일까 한옥의 꽃담은 한국인이 만든것인까 외국인이 만든것일까 한글의 자모는 티벳에서 만들었을까 집현전에서 만들었을까 영화 '미이라1'에서 이모텝의 최면에 걸린 이집트인들을 영국인들이 자동차로 밀어버리고 가는 장면이 있다. 만일 일제시대 한반도 어느 곳에서 '신의 유물'이 발견되고 일본인 고고학팀이 신의 최면에 걸린 조선인 들을 자동차로 싹 밀고다닌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리고 우린 '미이라1'의 주인공편에서 영화를 본다. 학교다닐때 하도 많이 들었던 말중에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안바꾼다" 과연그럴까 그 말을 한 영국인 들앞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총을 들이대며 셰익스피어를 살려줄테니 인도를 포기하라고하면 포기할까 당 장 죽이라고 그럴것이다. 누가 그런다 햄릿은 돈벌려고 만든 작품일뿐이라고 (돈의 감성지수) 영국의 부는 인도란 시장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미국이 5.18때 전두환편을 든건 한국이란 시장을 놓치기 싫어서이며 스위스 네슬레사는 칠레란 시장을 놓치기 싫어 아옌데정권붕괴의 1등공신이된다. 예전에 끝난 베트남참전에 대해 아직도 양쪽에서 앙금이 있는 것 같다. 베트남은 프랑스식민지였다. 다시 말해 평화롭게 살던 베트남에 무기를 들고와 약탈하고 학살한다 그리 고 아직까지 사과안한다. 미군이 고전을 면치못해 한국에 참전을 요구한다. 그 댓가로 미국에서 많은 원조 받아 경제발전의 밑거 름이 된다. 이야기를 바꾸어 김구선생님의 독립군이 전라도를 회복하고 경상도와 충천도로 세력을 확장 할때 일본이 힘에 부치자 호주에 참전을 부탁해 호주군이 김구선생님의 독립군과 전라도땅에서 싸운다 면 바로 그 호주군의 역할을 베트남파병 용사들이 한 것이다. 그래서 진보쪽에서는 파월장병들을 욕한다. 이것보세요 당신이 신고 있는 신발, 옷, 타고 다니는 자동차 오늘 먹은 음식 이분들이 목숨 걸고 벌어온 돈 덕분에 당신이 배불리 먹고 그 힘으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거지 이 은혜도 모르는 후손들아 서독의 빌리 브란트총리가 비오는 날 폴란드의 유대인추모비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용 서를 빈다. 세계는 강동한다. 그건 집안잔치일뿐인데.. 폴란드엔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의 발원지인 오데르강 나이센강 유역을 반성의 뜻으로 뗴주고 프랑스엔 알자스로렌지방을 넘겨준다. 이곳에선 지금도 독일어를 쓴다. 그 큰 땅덩어리도 떼 준 나라에서 손기정선수가 받은 그리스투구는 안주려고 그렇게 난리를 쳤을까 경상 도땅이 더 클까 고려청자 1개가 더클까 백인들만의 잔치. 우리 헌법은 남독일 바이에른헌법을 기초로 한 것이며 영국은 세계최고의 교육선진국이며 프랑스는 문화대 국이다. 우리가 배울건 무궁무진하고 다양하지만 안건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자는 것이지 무조건 배척하 거나 무조건 찬양하는건 해롭다는게 이글의 핵심이다. 대항해시대부터 2차대전까지 유럽은 세계를 돌며 수없이 많은 악행을 저지른다 사과했는가 그리고 그런 장면에 세뇌된 우리는 독일을 보라고 일본도 본받으라고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다. 헤레로의 대추장 사무엘 마하레로가 1904년 궐기에 앞서 아프리카 민족무리의 지도자들에게 호소한다. "차라리 우리 함께 모여 죽자, 압박과 감옥과 온작 다른 방법을 통해 죽지는 말자 ...그 밖에 나의 소원은, 우리 약한 민족이 독일 사람들에게 맞서 일어서는 것임을 ... 여기서 알리는 바이다... 다른 것은 그 무엇 도 우리에게 소용이 없다." '독일인들은 검둥이들은 무조건 죽였다.' 로타르 폰 트로타장군은 1904년 명령을 내렸다. "헤레로 민족은 이제 이 나라를 떠나야한다 만일 헤레로 민족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무력을 동원하 여 그것을 강요할 것이다. 무기를 가졌든 안 가졌든 독일국경선 안에 있는 헤레로 민족은 누구든지 총격 을 받을 것이다." 서명 :강력한 황제의 장군, 폰 트로타"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하마카리에서 멀지 않은 물 엉덩이 근처에서 우리는 야영을 하였다 독일 병사 한 사람이 덤불숲에서 약 9개월쯤 되는 사내아이를 발견하였다. 아기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병사는 아기 를 우리가 있는 진영으로 데려왔다. 병사들은 원을 이루더니 마치 아기가 공인 것처럼 서로 던지고 받는 놀이를 하였다. 아기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상처를 입어서 점점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얼마 지나자 병사 들은 지쳤고 그러자 한 병사가 검을 총에 쪽으면서 자기가 아기를 받겠노라고 말했다. 아기는 포대기채 던져 졌고 아기가 떨어질 때 그가 총검으로 아기를 받겠노라고 말했다. 아기는 높이 던져졌고 아기가 떨어질 때 그가 총검으로 아기를 받았다. 아기 몸에 총검이 꽂혔다 아기는 몇 분 만에 죽었다. 1998년 독일 대통령 로만 헤르초크가 1990년부터 독립한 나미비아에 국민으로 방문했을 때, 헤레로족과 나마족에 대한 민족 살해를 근거로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보상하라는 요구를 받고서 이렇게 말했 다. "독일 식민지 정부와 헤레로 민족 사이의 대립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 만 헤레로족에 대한 재정적 보상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80년대 히로히토일본천황이 버킹엄궁을 방문할때 히로히토가 탄 마차 양쪽에 서 있던 군중이 한 손에 흰 장갑을 끼고 전쟁배상을 하라며 장갑낀 손을 든 채 등을 돌린다. 대영박물관은 영국인들이 세계를 돌며 도굴하고 학살하며 빼앗아온 남의나라 유물들이 전시된 곳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장물창고다 절대 안돌려준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찬양한다 르브르박물관과 함께.. 스리랑카 타밀 반군도, 르완다사태도,중동폭탄테러도 모두 영국인이 뿌린 분란인데 관심도 없다. 그리고 007에선 아랍인이 항상 악역을 맡는다. 그리고 우린 알게모르게 자연스럽게 그것이 진실인 줄 알고 어릴때부터 맹신하게 된다. 아일랜드인이 이런 말을 했다. "왜 대영제국에는 해지는 날이 없는 것일까?" "신은 해가 진 후의 영국인이 하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야" 대영제국이 만일 일본이라면 인도를,아랍을 아프리카를 남아메리카를 그리고 조선을 차지하고 해가 지지 않는 대일본제국이라면 우린 기분이 어떨까 대일본박물관에 세계곳곳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면 그래도 감탄하며 찬양의 목소리가 나올까 프랑스는 칠레에 베트남노동자를 이주시키고 전쟁이 끝나자 자기들만 쏙 달아났다. 일본은 사할린에 조선의 노동자들을 이주시키고 전쟁이 끝나자 자기들만 쏙 달아났다. 그리고 우린 프랑스를 문화민족으로 칭송하고 베트남인들을 무시하고 깔본다. 사할린이민 1세들은 90년에 춘천 안보리의 사랑의 집에 모셔왔다. 북한에서 수령이 지나가면 울면서 박수를 치는 국민들의 모습 진심어린 것 같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우 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쯧쯧,어릴때부터 얼마나 세뇌교육을 받았으면.." 나는 어릴때 서부영화를 보면서 인디언이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질 때마다 박수를 쳤다. 서부영화중 미기병대를 따라다니던 기병대모자를 쓰고 인디언복장을 한 기병대소속 인디언정찰대가 가 끔 등장한다. 누굴까 이들은 기병대 밑에서 정찰보고를 하며 가끔씩 인디언부족을 습격해 부족들과 싸운다 인디언끼리 오랑캐는 누굴까 몽골,거란,영화회족,진나라,조나라,티벳,운남성,은나라,신장(돌궐),오키나와(류큐),일 본,조선,아이누,여진- 여기까지가 중국이 생각하는 오랑캐이고 여기서 조선이 빠지면 조선이 생각하는 오랑캐이다 인디언정찰대, 조선, 소중화사상 중국이 오랑캐라 생각하는 거란과 중국이 오랑캐라고 생각하는 고려가 싸운전투가 귀주대첩이다. 인디언 정찰대와 인디언부족이 싸우던싸움. 미기병대는 인디언정찰대가 몇 명이 죽건관심없다 인디언정찰대만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뿐이다 소중화 사상에 물든 조선의 사대부들. 중국이 동쪽오랑캐라고 생각하는 여진족과 중국이 동쪽오랑캐라고 생각하는 조선이 싸운 병자호란,정묘 호란 이이제이. 조선사회구조의 판을 짠 사대부들의 발상 우리는 작은 중국이다인 소중화주의 인디언정찰대. 읍루는 북해도의 아이누족의 조상 유럽어족. 우리나라에도 그 뿌리가 조금은 남아 있다 마운틴 뫼산 멧돼지 대가야 사람들이 건너가 야마토국을 세우고 야마토 사람들이 건너가 류큐왕국 지금의 오키나와를 세우고 조선 길들이기를 하려고 이성계의 아버지는 이자춘이 아니라 고려의 간신 이인임이라 그들의 실록에 적 어놔 그것을 고쳐달라고 청하는 주청사를 200년 가까이 보내고 그들이 보낸 사신을 칙사라 칭하여 임금 과 동급으로 대접하고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한 후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할 낌새를 류큐상인들에게 전 해들은 명나라는 그제야 이인임이 아닌 이자춘이 이성계의 부친이라 고쳐주고 조선의 환심을 사고 그것 도 모르는 조선은 좋아하고 손놓고 있다 동이족인 일본이 동이족인 조선과 싸우는 임진왜란을 자초하고 조선은 전쟁터가 명나라는 구경하는 처지가 된다. 누가 그런다 일본은 여몽연합군을 제외하면 맥아더만이 일본을 침략한 유일한 나라라고 그건 니 생각이 고 동북지방 북해도인 무쓰지방 위쪽은 모두 아이누족의 땅이었다 일본인들에겐 이들이 오랑캐였고 무수 한 침략을 받는다. 그들의 세력이 수그러들고 일본에 흡수된 근대 어느날 소학교 조회시간에 어느 소녀가 아이누소년에게 다가와 살며시 손을 잡아보고 가는 것이다 그 소년은 예쁜 여자아이가 자기손을 잡았다고 좋아했는데 나 중에 알고보니 소녀가 그 소년의 손을 잡은 진짜 이유는 과연 아이누족에게도 피가 흐를까 궁금해서였다 고 한다. 다른 예글 들어보자 1019년 3월 27일 50여척에 여진족들이 쓰시마를 들이친다. 아무리 보아도 이들 무리는 울릉도를 들이친 무리들이 울릉도에서 거하다가 쓰시마까지 내려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에 일본인들은 적의 정체를 도대체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고려말로 '만이'를 뜻하고 '도이의 적'이라 불렀다. 여진족은 살인과 방화를 거듭하면서 은광산을 소각하고 이윽고 남쪽의 이키를 공략한다 배 한 척에 평균 60여 명이 탔으며 총병력 3,000여 명의 대군이었다. 여진족은 이키에서도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으며 곡물 을 배에 싣고 민가를 불지른다. 남자 44명,승려168명,여자59명,아이들29명이 이키에서 살해된 것으로 전 해진다 또한 포로로 여자239명이 끌려갔다 조그마한 섬에서의 이만한 수치는 피해가 극심했음을 뜻한다. 쓰시마와 이키에서 태운 포로를 이끌고 여진족은 4월7일에 규슈북부의 지쿠젠쿠니,시마군등을 내습한다. 4월8일에는 하카다.내만의 노코노시마를 공략하며 마쓰우라를 습격하고 쓰시마를 거쳐서 되돌아간다. 불과 16일이란 짧은 시간에 이같이 가공할 피해를 남긴 여진족들은 어떻게 규슈까지 치고 들어갔을까 우 연일 수가 없다. 이는 그들이 울릉도란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 당시 여진족의 항해수준을 웅변해준다. 그럼 우린 어떨까 당시 조정의 대다수는 관리를 파견하고 섬을 장악하여 토공을 거두어 들이자고 한 반면 에 공조판서 황희는 이에 극구 반대한다. 황희는 섬사람의 쇄환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국왕도 이에 동조한 다. 우리가 명재상으로 알고 있는 황희는 이처럼 섬을 포기하는 반해양적 입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공도 정책을 수정하여 사람을 살게해야한다는 강원도 관찰사 유계문 같은 이의 탁견이 제출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계문은 품계하기를 "무릉도가 비옥하므로 백성을 모집하여 섬을 채우고 만호,수 령을 두면 장기적으로 좋지않을까하였다. 자신의 뜻이 거부되지만 유계문은 이듬해에 다시금 개척을 건의한다. 울릉도가 무인도가 된지 오래되어 만약 왜가 점거하면 장래의 근심거리가 될지 모르니 울릉도에 차라리 현을 설치하자고 풍계하였으니 이는 적극적 개척과 방어를 주장한 탁견이었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조정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공도정책이 구사되던 시기는 유럽에서 한창 대항해시대가 준비되던 때였으니, 섬을 비우겠다는 조선의 정책과 대양으로 나아가는 유럽을 필두로 한 세계사적 흐름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세종 20년 (1438)에 본격적인 공도정책이 시작된다. 도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킨 후 공식적으로는 1884년까지 450여년간 울릉도를 빈 섬으로 내버려두게 되는 결과가 빚어진다. 거부감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접촉하는 두 그룹사이에 눈에 뜨일 정도의 차이점이 존재해야 한다. 두나라만 보자 베네치아.네덜란드 가진 힘을 충분히 활용한 베네치아는 천년의 영화를 누렸고 대항해시 대의 해양대국이 된 네덜란드의 공통점은 인구가 적었고 제도가 잘 정비되었으며 종교에 관대했고 중소 기업육성에 매진했으며 숙련공을 우대했다. 그럼 조선과 일본은 어떨까 일본이 도자기기술을 접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을 통해서였다. 임진왜란 동안 일본의 다이묘 (영주)들은 조선의 도공들을 붙잡으려고 혈안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의 도자기와 식기 제작 기술은 분청사기 는 고사하고 조선에서 흔한 막사발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조선 도공들 이 일본에 끌려갔고, 그 바람에 조선의 도자기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수십년이 지난 광해군 시대에도 궁중 연례에 쓸 청화백자 항아리가 없어서 전국에 수배할 정도였다니, 당시의 피해가 어 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에서 도공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즉 실명으로 작업할 수 없었다. 주자학을 숭상하던 조선시 대에 도공들은 천민 신분에 불과했으며,왕실이나 관에서 요구하는 물량을 대느라 허리가 휘는 수탈의 대 상이었다. 더욱이 16세기에 이르면, 관청 수공업자들에 대한 지방 관리와 양반들의 수탈은 더욱 심해졌 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도공을 비롯한 수공업자들은 태업으로 관리들의 수탈에 반발하 게 된다 [중종실록] 32년 4월 계유조에는 "각 부문의 장공인들이 일을 태업하는 것이 하나의 습성으로 되 었으며, 일부 관리들이 그들에게 일에 흥을 내게끔 갖은 방법을 다해도 그에 응하지 않고 그그 버릇을 고 치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관리들이 수공업자들의 태업에 대해 "수공업자들이 더는 나라 일에 힘을 넣게 할 수 없다"고 한탄하는 내용도 나온다. 그리고 수공업자들이 도망치는 현상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관영 사기제조장인 사옹원에 속한 사기장들의 도피 현상이 심했다. 사옹원의 노동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대전속록] 공전공장조 에는, "사옹원의 사기장으로서 도망했다가 적발되면 장형 100개를 가한 다음 제자리에 되돌리는 한편, 그 를 비호해준 자에게도 장형 100개를 가하고 도현 3년에 처하는 가혹한 방법을 법적으로 규정했다"는 내용 이 나온다 텔레비젼을 보면 도예가들이 가마에서 꺼낸 그릇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부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과 거에는 그릇이 기대에 못 미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나온 경우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 질 좋은 도자 기를 만들수록 도공들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으니. 조선시대에는 못난 그릇뿐 아니라 잘난 그릇도 슾픈 운 명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스스로 노력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그에 대한 적절한 일센티브도 없었던 사람들이 조선의 도공들이었다. 그런데 억지로 끌려간 일본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하를 거쳐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던 무렵이었다. 다이묘들은 차문화와 함꼐 도기의 미학에 심취해 있 었을 뿐만 아니라, 도자기 산업이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도공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도공들은 다이묘(지방영주) 밑에서 실명으로 자신만의 도자기를 빚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란 본래 이름을 남기 고 싶어하는 존재이다. 그런 인간 본성에 유인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일본에는 마련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 결과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아리타등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한 조선 도공들은 민족혼을 담은 백자와 청자 그리고 일본의 수요를 반영한 작품들을 쏟아 내었다. 현재 일본에 전하는 야마구치 현의 하기야키,가고시마 현의 사쓰마야키, 기타큐슈의 다카토리산을 경계 로 한 지쿠젠의 다카토리야키와 부젠의 아가노야키 등은 모두 조선 도공들과 그 후손들이 구워낸 유명한 도자기이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세대를 이어 내려가며 자신들의 창의성을 한껏 발휘해 온 것이 다. "1636년 조선통신사가 귀국하는 길에, 통역관 강우성은 포로로 잡혀온 동포들에게 유시문을 보이며 사가 현의 카라츠에서 귀국을 호소했지만, 신고하려 나오는 자가 없고, 카라츠의 고려마을에서 도자기 굽기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는 공허함을 느끼기도 했다." 변화하는 세상에 걸맞은 올바른 제도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공동체는 비운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역사적 사실을 이제는 알때도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