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청 긴 내용입니다. 읽다 지루하시면 다른 글을 읽어도 괜찮습니다.
도시재개발
바람이 멈추게 될 때 노의 존재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유의지로 살아 가는대는 그리 많은 법이 필요치 않다.
왜 이익집단의 요구에 따라 일방적으로 기득권만을 염두에 둔 법들이 이리도 많아졌는지
빈대를 잡기위해서 초가삼간을 태울만한 법들이 이제는 정비되어
국민 골고루 그 법의 상식 수준에서 보호받기를 바란다.
무수한 법들에서 일반 서민들에 대한 정부의 무 대안이
양극화 심화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니
정치력 부재로 연결 지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리라.
약자가 참아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 사회는 거리가 아주 먼 정의사회일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유사한 사례들로 선의의 피해자가 속출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외려 강행되는 개발은
상식적으로 정부가 나서서 규제하여야 마땅함에도
방관하고 오히려 더 부추기는 억울한 사회가 되었다.
공공의 안녕을 위해 불가피함이라면
피해의 범위를 납득할만한 수준으로 최소화 하려는 노력이라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용산참변이 대변하듯이 그 기억만 있을 뿐
오히려 그 용산참변이 판례가 되어 비상식적인 참변이
더욱 가속화되는 기막힌 현상이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직도 위정자들은 악법을 만든 자축의 여운을 즐기듯이
그 지역 피해 당사자들만의 싸움으로 방치하고
tv 뉴스 역시 안타깝고 또한 불안한 시청자들만 만들뿐이다.
결국 현장의 피눈물은 개발이란 명목에 속절없이
가진 자들의 주머니만 부풀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일련의 잘 짜 맞춘 쉬운 먹잇감이 사라진 후
그들의 배 고품의 다음 대상은 누가 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당신이 아니라서 얼마나 행복한가?
늘 자신의 일로 닥칠 때 그때에서야 후회할 뿐이다.
억울해도 법이 있으니 참으라고 하여,
비상식적인 사회임에도 묵묵히 땀 흘렸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이 맞닥뜨린 불합리한 상황에서야 그 법이 악법인 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현상에서 삶의 나락을 경험하게 됨을 얼마나 가슴아파할 것인가?
기성법조인들은 자신들의 밥줄이고 이미 젖어버린 탓이라 하더라도
법대, 고시원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젊은 법조인을 꿈꾸는 패기 넘치는 이들이 매년 생겨남에도
왜 이러한 악법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관연 누가 있어 이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늘 투표일에만 엎드리는 위정자들의 간사함을 모르지 않지만
하소연할 곳 없는 약자들의 비참함을 없게 하라고 뽑아준 위정자들이
사소한 당쟁에 목이 터져라 아우성치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억울해 피눈물 흘리는 주름 가득한 저들의 모습이 겹치는 이유는 뭔가?
가난한 이들만이 가난을 안다고 했던가?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놓은 사회 규제들은 그들을 더욱 공고히 할뿐
결코 이 사회의 가난을 치유할 수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가진 자신들이 이 사회에서 거들먹거리는 것은 당연하고
이 사회는 오로지 그들의 조정으로 만이 움직여진다는 생각과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들의 부를 유지시키는 개가 되기를 자처하는 어리석은 일부 서민들이
그들의 비정상적인 논리의 근거를 자청해서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알량한 개목거리를 얻어 걸기 위해서 말이다.
어쩌면 가난이라는 놈이 만든 자승자박의 굴레인 듯해서 씁쓸할 뿐이다.
정말 배고파본 이들은 그들의 배신과 같은 추태에도 막상 돌멩이 들기가 주저 스럽다.
굴레를 벗기 위해 당당히 그들과 맞서기 보다는 그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조금 추해보여도 짧게 살다 가야하는 삶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이기적 논리에 빠져버린 듯하다.
그래서인지 늦게 깨달은 자괴감과 겹쳐 외려 더 악랄해지기를 서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사회 구성원들의 상식을 망각한 사회는 겉과 달리 엄청난 속도로 썩기 마련이다.
사회 질서는 누가 만드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사회질서는 공무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경제인도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인들은 더더구나 아니다.
오직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식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상식이 혼란을 격는 다면 그 사회 질서의 붕괴는 시간문제다.
이 사회의 상식이 어느 순간부터 왜곡되고 있음을
곳곳에서 빈도 높게 접하게 된다.
예전 같았으면 몰랐을 법한데, 정보화가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돈이면 다인 듯 세상을 아래로 보는 꼴불견들이 폭력을 유발하지만
그들 편에 선 법이 있어 오히려 더 잔혹한 세상이다.
이익에는 개짓는 소리도, 타인의 피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세상
굴림하려 타인의 노력을 가로채고 자신의 아픔만 아픔이라 소리치는 세상
자신이 먹지 안으면 엎어버리고 관련 없으면 참견하지 말라는 세상
그래서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체 이웃의 상처만 지켜보며
무작정 관리비용이 더 축나는 성금만 내는 세상
그래서 이 순간 그나마 자신을 피해간 것만으로도 안도해 하며
언제간 자신의 울부짖음에 남들 역시 자신들이 아님을 안도해 할 것을 간과한 체
한숨만 짓고 있는 서민들을 비추는 이 순간의 이 사회를 비추고 있는
저 무정한 거울들이 서글픈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상에서 왜 사는 것일까?
고민조차도 호사라 생각하는 바삐 사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늘 고단하고 어렵게 사는 것일까?
방법이야, 이 정보사회 곳곳에서 알려고만 하면 모를 정보가 어디 있으랴!
용기도 가난 앞에서 버틸 바 못되는 것인데, 그들은 여전히 고단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산다.
아마도 식구 눈에 피눈물 내는 것이 두려울 것도 같고
주어진 순함과 착함으로 늘 그리 살아왔기에
남들을 기만하지 못하고 스스로 고단히 살아가는 것일까?
그런데 한 번 하기가 힘들지, 두 번 세 번은 일도 아니라는 것은
어쩌면 가진 자들만의 비밀이겠는가?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것들을 그들인들 왜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가진 자들이 저버린 제 자신과의 약속을
그들은 고단하지만 지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함께 사는 세상에서 어찌 남이라고 멀게만 대할 것인가?
남을 업신여기면 나도 당하는 이치를 모르는 이가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이들이
더 잘 살아가고 있고 그들이 오히려 더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다시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누가 더 어리석은 것일까?
늘 서민으로 살아가며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는데
왜 자꾸만 더 많은 손해를 강요받는 것일까?
그로인한 모든 다툼은 기득권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통해서
교묘히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게 하여 더욱 억울하게 만들어버린다.
상식은 오간데 없고 오직 법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늘 약자였고 또한 항상 약자여야만 하는가보다.
법 다툼이 혹여나 상식을 벗어날까봐 판사를 두었을 법한데
판사 역시 법을 잘 외워 된 바에야 뭐가 달라질까 싶다.
검사와 변호사의 다툼은 법이 우선이라 하여도
그럼에도 판사를 두어 검사와 변호사의 법 다툼에 상식의 여지를 두어
좀 더 납득 가능한 상식이 통하는 법적용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 판사의 역할이라 여기고 싶다.
어떤 시대와 사회에서도 법보다 상식이 앞서야 함에도
이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 어제 오늘일이 아니기에
오늘날의 부조리와 부패가 적패청산이라는 숙제를 만들게 되었고
그 숙제의 기회는 언제나 지금 이순간이 적기인 것은 분명한데
다람쥐도 아닌데 늘 방법론에 걸려 본질을 잃어버리는 위정자들을 언제쯤 쳇바퀴에서 꺼낼 것인가?
그래서 더욱 기고만장한 가진 자들은 그들의 돈과 그들의 생각이
이 사회를 돌리고 그 수고는 당연히 자신들의 몫이라 스스로 좋은 사람들이라 착각하게 한다.
그들의 착각이 깊어질수록 서민들의 눈에 더 많은 눈물이 고이는 것을 외면한다.
쪽팔리게 왜 눈물이 나는 것인지 그냥 하늘을 올려보며 눈물을 감출뿐인데
괜한 원망이 하늘에 닿는다.
어쩌면 세상은 더 사악해질 수밖엔 없는가 보다.
착하고 순한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몇몇 사악한자들을 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정부조차도 서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민주주의라 우기며 서민들의 희생을 오히려 강요하기까지 한다.
아마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런가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단념하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것을 안도해하고 타인의 고통을 모르는 척 살게 된 것 같다.
그러다 혹 자신이면 외로이 처절한 피눈물을 흘리며 피 터진 스스로를 보면서 후회할 뿐이다.
역설적으로 사악한 이들이 많으면
얼핏 상호 견제에 따른 반대급부로 오히려 더 안정 사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사는 동안 언제 터질지 모르는 늘 불안 불안한 삶이 될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억척스러운 확률로 굳이 따진다면
주변에 착한 사람의 비율만큼 불안한 삶은 줄어들 수는 있을 것 같다.
암튼, 촛불시위를 격어면서 아직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들을 한다.
정의를 위해서는 쉽게 떨쳐 일어나면서
사회 질서가 곪아가는 것을 방관한다면 배에서 노가 썩고 있는 것을 방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의기라는 돛만 있어도 사회는 어느 정도 유지해 나아갈 수 있겠지만
바람이 멈추게 될 때 노의 존재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사회에는 매너리즘에 빠진 공무원들이 넘쳐나는 것 같다.
먼저 고발하는 자가 피해자가 되는 세상이다.
법을 모르면 영문도 모르고 피의자가 되어 버린다.
경찰들의 비호에 숨은 사악한 자들의 몽둥이질에 맞고
또 그들의 시녀인 경찰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
늘 힘없는 자들만 피터지다 흐지부지 시간만 보내고 끝내 외면당하고 잊혀지는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도 그 정부가 말하는 적패는 정치적 수준에서 맴돌다
또 다른 정부의 새로운 적패의 빌미를 제공하는 소모적인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제발 바람이 불고 있을 때 연을 날려야 멀리 오래 날릴 수 있지 않겠는가?
대의를 위해 꼭 필요한 희생이라 한다면 감수할 수 있다.
다만 그 희생이 상식선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배려가 될 것이 때문이다.
그 배려와 희생을 착각하는 자들이 공인들이라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한나라에 연금이 몇 가지인지 그것을 지켜내고 있는 그들은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그들은 특권의식에 젖어 특권을 내려놓는 것을 희생이라 생각하며 배려를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다.
적패를 정쟁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고 온전히 그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적패들을 먼저 혹은 병행하여 청산할 의지와 추진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 수많은 비합리적 적패에 오히려 짓눌린 행정부의 겉치레로
애당초 제대로 보호되고 있지 않는 서민들의 고단한 눈물을
언제까지 하늘에 그 원망을 돌리며 살아가게 할 것인가?
이러한 비상식적 사회가 지속되면 순한 자들이 외려
그들 주변에 사악한자들을 유발하는 원인 제공자들로 호도되어
명예훼손의 오명까지 감수해야 할 지경으로 내몰리는 파국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상식을 바로 세우려 하지 않고 적패를 논한다면
어차피 정치적인 술수란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이 국가를 지탱하는 동력원 서민들을 울리는 수많은 부조리들과
비합리적인 정책과 규제들을 하루바삐 바로잡지 않으면
결국 정권교체기마다 적패정쟁정치로 이어져 공멸의 길만 열게 될 것이다.
엊그제 “염력”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재건축, 재개발, 이 두 단어 차이에 벌어지는 황당한 결과는 우리 사회의 공공연한 어젠다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악법을 만들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천당과 지옥을 경험하게 한 자칭 전지전능한 그 작자가 누군지 궁금하다.
그리고 또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러한 악법도 법이라고
마치 국경을 사이에 둔 한마을 두 국가와 다르지 않는
이 규제인지 법인지를 강행하는 행정부는 그 누구를 위한 행정부인지 기가 막힌다.
이러한 정책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자는 이유 불문하고 비상식적 폐륜아가 분명할 것이다.
하나를 위해서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는
그 어떤 경우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박종철이라는 사람을 열사라 일컫고 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얼간이들조차도 함께 박종철이란 사람을
열사라며 다니는 현실이 부끄럽다.
만약 도시정비 차원에서 부득불 강행해야 할 경우라 한다면
그 원론적 측면에서는 도시계획수립 등과 결부되어 국가 행정부는 절대 무관치 않는 상황으로
국가는 스스로 제삼자로 자처하여 분쟁 당사자에서 빠질 수 없다.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 사회 분쟁꺼리를 양산하고 또한 확산시키는
그림자조정자의 역할을 하는 행정부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악랄할 정도로 강압적 국가권력을 남용하여 강제철거 강행을 지켜보았고
일부 국민들은 직접 그 불행을 경험했고 지금도 곳곳에서 경험하고 있다.
강행하려는 자들은 법이 그렇다며 우격다짐으로 나오고
관련 공공기관들 역시 제 삼자로 자처하여 중재 의무마저 외면하고
경찰들은 먼저 고발하는 자들의 말만 듣고, 하소연하는 피해자들을
업무방해죄로 피의자 신문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애당초 손대지 않고 코풀려는 듯 희생을 강요해서라도 강행하기 위한
행정부의 교묘한 술수가 만들어낸 악의적 규제가 아니라 할 어떠한 변명꺼리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스스로도 악법임을 인정하면서 사회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필요악이라 공공연히 떠들어대고 있다.
암튼 행정부는 득만 챙기고 실은 서민들의 몫이 되어 피눈물을 흘리게 함이
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대한 적패임에도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는지 알지 못할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tv 뉴스를 보면서 안타까워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아니라 다행이라 여길 따름이다.
일부에서는 왜 멍청하게 미리미리 알아보고 빠져나오지 않았는가! 비아냥거리는 이도 없지 않다.
그런데 일반서민들 중에 몇 명이나 아니 몇%나 지역개발계획을 꼼꼼히 찾아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까?
오히려 국가 행정부 차원에서 계획이 서면 해당 주민들에게
주기적으로 통지문을 통해 알려야 할 의무가 있고
해당 거주지 이주신고 시 지역정보를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이를 그전에는 행한바 없다고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 여기는 뻔뻔함이 만들어낸 불통임에도
시민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민원처리의 수준을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막상 닥친 이들은 악법이 만들어 놓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오래도록 살아온 터전을 상실하는 아픔과
막막한 미래를 동시에 마주한 참담함으로 잠인들 제대로 오겠는가?
그 스트레스에 대한 국가의 책임있는 배려는 있는가?
그들의 요구사항에서 이 기회를 엄청난 부의 축적 수단으로 삼고자 한 것일까?
단지 현실을 반영한 이해수준의 재산권을 보장받고자 하는 간절함일 따름이다.
그러나 악법을 내세워 절차를 지연시키고 알권리를 교묘히 방해하여
정당한 이의절차를 지연 혹은 사전 봉쇄시키며
결과적으로 부당한 처우를 감수하도록 유도함에 따라
유관기관 및 공무원들에 대하여 심심한 유감을 가지게 된
당사자들의 심기는 누가 위로해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상실한 재산상의 불이익은 누구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인가?
그들의 시비에 가장 핵심은 제삼자로 분류되는 감정평가단이다.
참으로 이상한 점이 제삼자로 분류된 그들이 분쟁의 핵심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제삼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시시가의 105%, 107% 수준의 지가를 산출해 낸다.
어떤 경우도 예외가 아닌듯하다. 과연 이렇게 제시한 근거가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길을 사이에 둔 건너편은 공시시가의 200%를 호가하는데
또한 현 부지에 대해 공시시가의 160% 수준으로 분양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특히 건물 층수는 무시하고 부지면적에 대한 보상으로 축소하고
자신들은 그 부지에 고층아파트를 올려 적게는 15배 많게는 20배 차액이 발생함에도
이를 감정서에 전혀 반영하지 않는 의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얼토당토 않는 감정서를 내면서도 오히려 그들은 ‘잘 봐줬다’ 는 말을 한다.
법이 그렇다한다. 이말은 뭘 의미하는가?
이는 당연히 국가주도의 국가의 묵인 하에 강행되어 지는 것이라는 소리다.
무엇보다 예정된 도시계획이라면 현실을 반영한 감정평가가 이루어 저야 마땅함에도
어떤 악마의 법이 보호하고 있어 공시시가의 105%, 107%의 감정서를 난발하여
곳곳에서 피해자들의 통곡소리를 만들어내고 정부는 이를 방관하는 것인가?
십분 양보해서 길 건너 공시시가의 200%는 차지하고서라도
분양가에 준하는 감정가라도 나오는 것이 어찌 보면 타당하지 않는가?
내 땅을 아직 판다고 도장도 찍지 않았는데 공시시가의 105%만 받고 나가게 하고
자신들은 공공연히 160%에 분양권을 팔고 있는 상황임에도
국가 행정부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법이 그러하니 그렇게 한다는 빌미를 제공하여
외려 더 파렴치한으로 변하게 하고 있다.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행정부는 어느 나라 국민의 행정부인가?
공공연히 정치인들은 깡패라 하더니 하는 짓마다 재산세 같은 자릿세,
양도세나 증여세 같은 통행세까지 거두고 알자배기 땅은 알 박기 하듯
도시계획 명분하에 개발을 제한해 두고 있다고
누구나 함부로 말하도록 오히려 유도하는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분양을 받지 않고 나가는 사람들은 그때부터
불이익을 당해도 마땅하단 말인가?
도대체 대한민국 어떤 토지 거래에도 있을 수 없는
공시시가의 105% 107%를 도출해낼 수 있는 천재들은 누가 배출한 사람들인가?
어떤 근거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 산출근거는 공개하여 깡패들의 착취교본에 실어야 할 것 같다.
이런 감정서를 남발하는 행위를 일벌백계하지 않고 있는 관리감독기관은
또 어떤 변명꺼리를 가지고 있어 이리 태연할 수 있는지
그 변명 역시 교본에 싫어 두고두고 가르쳐야할 것이다.
길만 건너면 두 배인데 그리고 지금 분양금은 공시시가의 한 배반을 넘겨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가 감정에 아무리 과거, 미래를 더 많이 반영하였다 해도
바로 눈앞의 현실을 외면한 감정서의 유효성이 존중되어
공공연히 시청 공무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지상권을 생각한다면 삼척동자라 해도 분양 금액으로 책정한 가치 그 이상은
보장받아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자신들의 땅위에 고층아파트를 세워 올려 벌어들이는 이익을
고스란히 환산한다면 그 금액 역시 좀과장하면 세발에 피에도 미치지 못할 금액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차별을 일삼는 집단의 편에서 약자를 외면하고 있는 행정부는
이에 대한 충분한 해명을 반드시 해야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 수십 년을 공방꺼리가 되어오고 있음에도 법을 앞세워 행정을 하는 행정부가
법의 불합리함을 방치하는 것은 중대한 업무 해태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나 몰라라 하는 행정부도 이처럼 터무니없이
서민들의 피눈물을 자아내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터무니없는 지가를 산출해낸 감정사들을
버젓이 재고용하는 작태에 대하여서도 그 숨은 의미가 매우 궁금해진다.
그들이 산정한 지가는 길 건너편보다 대략 95% 차이가 나고
현 분양가보다 55%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상식적이라면 지금 분양가 수준 이상은 보장을 받아야 마땅할 것인데
감정평가단이 제시한 그 금액에 대한 차액을 자신들이 책임질 것인가?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자격증 뒤에 숨어서 자행하는 비상식적 적패를
우리는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자격증을 발급한 국가의 책임이며 현 정부의 무능으로 통할 중대한 적패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의 재개발지역에서 세 곳의 감정평가사를 세워
지금까지 짜고 치는 고스톱에 희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근자에 들어 그러려니 하는 힘없는 서민들이 늘어 이런 불합리함이
마치 정당함을 얻은 듯 기고만장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어쩌면 부분적으로 이미 되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의 하소연을 귀 등으로 조차도 들으려 하지 않는 공무원들이 많은가 보다.
무엇보다 괘심한 것은 약자 시민들 편에 있어야 할
관할 시청이하 담당 공무원들이 이러한 일련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없단다.
주민의 제산권의 심대한 침해 상황에 대하여 행정 관공서 공무원들이 상관없다니!
정작 시민들의 제산에 세금을 강제하여 연명해 온 이들이
정작 날강도 같은 폐륜적인 작자가 만들어 놓은 법의 뒷전에 숨어서
편먹기 게임이라도 하듯이 납득 불가능한 철저한 적패 속으로 시민들만 몰아넣고
어느 행정공무원하나 나서서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우리 같은 말단들이 힘이 있나 법이 그런데” 하며
외려 시누이 행세에 여념이 없다.
스스로도 악법이라고 인정하는 담당공무원들 그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는데
그들의 건의가 곧 상식을 만들어 낼 수 있음에도 작은 수고조차 꺼려 바꾸지 않고
막상 피해자가 하소연하면 그들은 악법의 뒤로 급히 돌아 숨어 같은 목소리를 내며
성가신 민원인으로 외려 짜증을 내는 것은 그들의 완전한 직무태만이 분명하다.
이러한 공무원들의 태만으로 시민들이 피해를 본다면 이는 국가의 책임이다.
국가가 그 책임을 회피한 것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사회전반에 산재하는 터라 외려 적반하장의 객기로
그들이 더 의기양양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위임받은 이들은 외면하지 말아야 함에도 외면하기 일 수 다.
공무원이면서도 자신들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공무원이 뭔가? 왜 공무원이 되었는가?
편한 직업을 찾지 왜 공무원이 되어서 당연한 공무처리를 성가셔하는 것인가?
뒤 늦게라도 그 일이 싫고 남들 노는 것만큼 놀고 싶다면
공무원 하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공무원은 특권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국민들의 편리를 돌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마땅히 돌봐야 하는 국민들을 자신들의 사소한 일로도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민원인 때문이 아닌
자신들이 가진 특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중히 돌아봐야 할 것 같다.
말 못하고 눈물만 흘릴 수밖엔 없는 순하고 착함을
더 이상 짓밟고 자신들의 편리만 혹은 이익만 추구하고자하는 자들을
더 이상 좌시하지 말아야할 의무를 행정부는 지금이라도 기억해 내야할 것이다.
악법이라고 하면서 바꾸려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서서 그 악법을 지킬 것을 강요하는 이들은 공무원의 자격이 없음도 당연하다.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고
국민의 의무를 다한 사람들이 왜 잘못된 법과 관리 소홀로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가?
그것이 이 나라를 위한 길인가?
합법을 가장한 비상식적 만행으로 수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함에도
제대로 반항하지 못한 체 피눈물만 흘리게 하는 악법들은
이제는 상식에 맞고, 누구나 인정하는 합리적 수준의 보상과 처리절차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수정 보완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바램과는 달리 여전히 가슴 답답한 국가, 사회가 되어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선후를 따진다면 국민의 삶이 가장 먼저다.
모두가 안정된 삶을 보장받아야 할 것이다.
희생이 불가피해도 이해가능한 수준의 대안을 통해
희생이 아닌 배려를 이끌어 내야 서로 웃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어느 한쪽의 희생을 강요한 행복은 작은 틈, 실금을 만들어 내고 있는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간첩을 잡기도 중하지만 이런 비상식적 활동으로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적패들을 청산해야 할 것이다.
과거 시절의 적패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과거를 비판하는 꼴이 얼마나 가소로울 것인가?
영화 ‘염력’을 보고 이렇게 길 다면 긴 감정을 실어보았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본 감상을 적어보면
사회부조리 고발을 하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냉정하게 보면
염력이란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the war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the war에서는 그래픽의 가능성을 보았지만 염력에서는 그런 것조차도 없었다.
얼핏 알 것 같으면서도 왜 저런 각본을 써야 했는지, 암튼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안타깝기만 했다.
코믹도 아니고 사회 고발도 약하고, 그렇다고 뭐 딱히 유치한 피아노줄 수준으로
sf 영화로 주목받기도 한참 부족한 것 같은데 말이다.
주제로 봐서는 속에 숨은 진실을 제대로 녹여내지도 못한 것 같다.
오락성 없는 소재에 염력을 도입해 용산참사를 오히려 해프닝 수준으로 실추시킨 듯했다.
최근 들어 본 한국영화 중에서 본전 생각나게 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사회 구조적 모순을 어설픈 연기력으로 표현해 내려 시도한 무모함이 당혹스러워진다.
영화가 끝난 후 그냥 허탈함뿐이었다.
현실에서는 못했지만 좀 더 짜임새 있게 구성하여
영화에서라도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염력을 도입한 마당에
사회적패를 시원하게 응징하는 모습이라도 조금 리얼하게 보여줬다면
오늘날 늘 밥이 되어 온 순하고 착해서 바보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이
엷게라도 웃음지우며 영화관을 나올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영화는 생뚱맞게 마지막을 통해서 넘어진 놈의 머리를 밟아버리려는 듯
시답지 않는 영화조차에서도 늘 서민들은 어떤 좋은 재주가 있어도
고작 맥주 나르는 것으로 밖엔 사용할 수 없는
자승자박의 굴레를 벗지 못한다는 비아냥을 심어놓았다.
그래서 얼핏 이 국가의 행정부 역시 재개발 재건축이라는 극단적이고 이중적인 법을 통해
영화 염력을 만든 감독처럼 사회 부조리와 비합리적인 상식들이 횡행함을 방관하면서도
그 당사자인 피해자들의 목을 물고 눈물 흘리는 드라큘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했다.
바꿀 수 있음에도 뭘 기다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지루함 속에
서민들의 노고만 가중될 뿐임을 그들도 알 것인데 왜 바꾸려하지 않는지 ........
어즈버 시간마저도 가진 자들 편에 있음이랴.....
단순한 삶이 뭐가 중한가?
알아주는 이 있어
세상 온 보람인데
그런 이들 욕보임은 막장이라!
사는 내내 그들 때메 사는데
사소히 저버리면 어쩔까?
자식도 그들로 살 것인데
저버리고 업신여겨
자식인들 온전하랴?
수고라 해도 얼마나 산다고
그러다 보니
늘 참고 사는 것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