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禁峙(우금치) / 동학시민혁명의 발상지이자 혈전지
* 공은 금이 訛音化 된 것으로 우금이 우공으로, 치는 고개로 우공고개가 됨
1.고개의 전설
* 우는 소, 금은 금지, 치는 큰 험한 고개.
* 조선시대, 충남 공주시 이인면과 탄천면, 계룡면에 사는 소장수가 공주시장에 소를 팔러 가던 중, 산적(소도둑)이 나타나 소를 탈취하여, 자기소라 하면서, 시장에 파는 사건이 비일 비재하자, 소 주인이 송사를 하게 되었다.
* 이 때 공주관아 판관이 두사람에게 소죽을 쑤어 가져와 소앞에 주라 했다.
* 소가 가는 쪽을 본 판사는 이 소죽을 먹는이가 소주인이라 판결하고 산적을 처벌하였다.
* 그러나 이후 산적들은 소를 내다 팔지 않고 탈취해 가니,
* 관아에서는 이 고개를 이용 소를 파는 것을 금지시키게 된 동기로, 우금치라 했다.
2. 동학란 / 우리나라 최초 시민혁명의 발상지.
* 서기 1894년(고종31년, 청나라 덕종 광서제 20년, 일제 명치 27년)
* 이해 1차 10.23~25일, 2차 11.08~11일 두차례 걸쳐, 혁명 지도자 전봉준과 손병희는 농민군이라 칭하는 5만명을 이끌고 牛禁峙(우공고개)에서 조선군 3,200명과 일제 정예부대 2,000명의 합 5200명의 조일연합군과 대치 전투가 아닌 학살에 가까운 전투가 벌어 졌다.
* 일본군은 미국제 최신 개틀링 기관총과 스나이더 소총, 자기가 개발한 무라타 소총을 중무장 하였으며, 혁명군은 죽창과 활, 임진란 때 쓰던 조총같은 화승총과 용기가 전부였다.
* 조선군은 동학군을 유인하고 일본군은 난사 살육하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결과는 칼로 무 치듯 처참한 죽임을 당해 전멸, 겨우 500명 만이 살아 남았다.
* 살아 남은 자는 이웃 누구와도 싸움에 관하여 잡혀 죽을가봐 이야기 아니 하니 알려진 진상이 없으나 가전된 사실은 있으니, 시체는 개처럼 땅에 묻고, 묻기 부족하니 금강에 내다 버렸다한다.
* 송장배미 ~ 송장은 위 혁명에 학살 된 혁명군이요, 배미는 논 배미 즉, 모를 심는 바닥을 지칭하니, 여기에 시체를 묻어 이런 이름의 지명이 생겼다. 고개너머 이인면 쪽엔 아직도 시체가 즐비하나 이를 거두는 이가 없다니 나라의 존재가 무색하다 아니 할 수 없다.
3. 朝鮮國 贈 嘉善大夫 行 通政大夫 折衝將軍 迎日 鄭公 諱 涑鉉.
* 필자의 증조이며,판결사공파 21세조 洙鉉의 동생인, 涑鉉은 어는 날 7살 위인 형 洙鉉과 점심을 하고 있는데, 파리가 날아들자 파리채로 쳐 파리를 잡았다. 파리가 밥상에 붙어 있어 보기 싫은 형이 왜 안치우냐 하니, 다른 파리가 이를 보고 오지 못하게 본보기로 놔 두었다 하니, 형이 웃으면서 이를 치웠다.
* 병과에 입문하여 일생동안 무관으로 있으면서 우금치 전투에서 현장을 지켜보았고 조선 구한말 무관의 최고 절충장군에 이르고, 광무 10년 4월 16일 문관만이 증직을 받을 수 있는 종 2품의 가선대부에 올랐으나, 얼마 후 한일합방으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1919년 기미 3.1운동나던해 78세로 돌아가셨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가 자기들 입맛에 맞게 저술 하였으니 이 시대의 역사는 그 기록이 바른 것이 없다.
* 아버지는 1799년 기미년에 출생하고, 아들은 2갑인 120년 후 1919년에 돌아 가시니 시기가 묘하고 아이니컬 하다.
* 필자의 직계 고조 諱 堣 할아버지는 큰 아들 注鉉과 위 증조 2아들을 낳고 3아들이 생겼으니 기뻐서 선산 선묘 동쪽에 아름드리 나무를 베다가 병오년 1846년 선산 선묘의 종친 제사봉사를 위해 관리사를 두었으나 후손이 살림집으로 사용하다 1970년 타인이 매수 집 목재는 상인에게 팔려가고, 지금 이터엔 길상사가 자리하고 있다. 필자도 여기에 20년간 살았다.
* 묘는 필자의 직계 16세조 대구(達城) 徐氏와 아들 17세조 夏敬가의 墓園 충남 공주시 이인면 달산리 산 9-3에 자리하고 있다.
* 위 21세 속현의 증조가 또한 정조와 순조때 조선시대 무관의 꽃 절충장군을 하셨다.

1. 관리사 터.

2. 칙명

3 하경가 묘원 / 달산리 산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