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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과 갑오개혁 -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
한정주 한국사천자문
(급백순서 온이집순)
급진개화파의 김옥균·박영효·서광범이요, 온건개화파의 김홍집·어윤중·김윤식이다.
急(급할 급) 伯(맏 백) 純(순수할 순) 敍(차례 서)
穩(편안할 온) 以(써 이) 執(잡을 집) 洵(참으로 순)
앞서 임오군란을 분기점으로 하여 개화파 사람들이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먼저 급진 개화파는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의 최대 장애물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정책과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외척 권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민씨 외척 세력도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반면 온건 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명성황후의 외척 권력과 타협하여 점진적으로 개화와 근대화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급진개화파가 기존의 정치권력을 타도해야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보고, 온건개화파는 기존의 정치권력과 타협해야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추진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개화파 내부의 입장과 노선의 차이는, 임오군란 이후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이 민씨 외척 세력의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에 의해 끌려가는 상황이 벌어지자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진행되고 맙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참여한 급진개화파의 주역들은 한때나마 민씨 외척 권력과의 평화적 관계를 모색하면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김옥균과 홍영식은 민씨 외척 권력의 실력자인 민영익 문하의 '8학사(八學士)'라고까지 불리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민씨 외척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청나라에 더욱 크게 의존하게 되고, 이에 따라 개화파들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게 됩니다. 정치적 위기상황에 몰린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들은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군사의 절반이 철수하고 일본이 자신들을 지원하겠다고 접근해 오자 마침내 정변(政變)을 일으켜 민씨 외척 권력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정변을 준비하고 계획한 김옥균 등 핵심 인사들은 일본의 힘을 이용해 청나라의 정치적 개입과 간섭을 막고, 자신들의 개혁 구상과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인적·재정적 지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일본의 침략 의도와 야욕을 과소평가했다는 과오는 부인할 수 없지만, 당시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그들의 '친일(?) 행각'은 훗날 자신들의 안위와 권력 및 부귀영화를 지키기 위해 일본의 조선 침략에 협조하거나 앞장선 친일파들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10월 17일 오후 6시경,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장에서 마침내 민씨 외척 권력을 무너뜨리는 정변(政變)을 일으키게 됩니다. 고종(高宗)을 찾아가 수구 사대당과 민씨 외척 세력의 핵심 인물들을 불러들인 다음, 차례차례 제거한 급진개화파는 18일과 19일 새로운 정부와 함께 개화 및 근대화 구상을 담은 14개조의 개혁 요강을 발표하며 기세를 올립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새로운 정부의 주요 요직에 골고루 포진했습니다. 홍영식이 좌의정, 김옥균이 호조참판, 박영효가 전후영사 겸 좌포장, 서광범이 좌우영사 겸 우포장 및 외무독판대리, 박영교가 도승지, 그리고 당시 18세의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정령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급진개화파가 세운 새 정부는 즉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자신들이 심혈을 기울여 구상한 정책을 14개의 개혁 요강에 담아 발표했습니다. 이 개혁 요강에는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 문벌 타파 및 인민평등권 제정, 호조(戶曹)로의 국가재정 통합, 경찰제 실시, 행정기구 개편 등 조선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앞당기기 위한 각종 조치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특히 급진개화파는 개혁 요강의 시행을 발판 삼아 장차 조선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전환시키려는 계획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급진개화파들의 '화려한 꿈'은 불과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8월 19일 급진개화파 정부가 14개의 개혁 요강을 발표한 후 불과 6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오후 3시경, 청나라 군사 1,500여 명이 창덕궁에 대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당시 정변의 주역인 홍영식·박영교 등은 현장에서 참살당하고, 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청나라의 군사 개입으로 정변을 일으킨 지 3일 만에 종말을 고한 급진개화파의 개혁 모델과 노선은 이후 우리 역사의 현장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박규수의 문하에 모여 조선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꿈꾼 젊은 개혁 그룹들 중 온건 개화파에 속한 인물들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참고로 이번 문장의 '急伯純敍(급백순서)'는 김옥균·박영효·서광범의 자(字), 즉 본 이름 이외에 따로 부르는 이름인 '백온(伯溫)·자순(子純)·서구(敍九)'에서 취한 말입니다.
'穩以執洵(온이집순)'은 온건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홍집(金弘集)의 호(號)인 이정학재(以政學齋) 그리고 어윤중(魚允中)과 김윤식(金允植)의 자(字)인 성집(聖執)과 순경(洵卿)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급진개화파가 일본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하여 근대적인 국가체제는 물론이고 유학의 사상과 문화 및 제도까지 혁신하고자 한 반면 온건개화파는 왕조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과 문명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온건개화파의 주장은 일종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으로, 당시 청나라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근대화정책인 '양무운동(洋務運動)'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온건개화파가 구상한 근대화와 부국강병책은 김홍집이 1880년 일본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책인 『이언(易言)』과 그 맥락을 같이 했습니다. 이 책은 청나라의 정관응(鄭觀應)이라는 사람이 쓴 것인데,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과 제도는 그대로 지켜나가면서 서양의 선진 문물 및 과학기술을 도입해 부국강병을 이룩하자는 내용을 요지로 하고 있습니다. 김홍집은 이 책에 따라 조선이 부국강병을 이루려면 반드시 서양의 제도를 배우고 과학기술을 우선 익혀야 한다고 주장하며, 조정 관리들에게 이 책을 널리 퍼뜨렸다고 합니다.
여하튼 급진개화파가 추진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청나라의 내정간섭과 민씨 외척 세력의 득세는 더욱 심해집니다. 이 때문에 조선의 방방곡곡에서 민란(民亂)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1894년 삼남 지방의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는데, 바로 '동학농민운동'입니다. 갑신정변이 '위로부터의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했다면, 동학농민운동은 '아래로부터의 자주적 근대화'를 모색한 역사적 실험 무대였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농민봉기를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둘러싼 본격적인 패권 전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궁궐을 포위하고 민씨 외척 권력을 내쫓는 한편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화파의 내각을 구성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조선의 정치개혁을 단행합니다. 일본의 무력을 통해 수립된 온건개화파 정부는 권력 및 행정기구 개편은 물론 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합니다. 당시 김홍집이 이끄는 온건개화파의 개혁 작업은 모두 2차에 걸쳐 시행되었습니다.
1894년 갑오년에 시행되었다고 해서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고도 불리는 근대화 정책은, 500여 년 동안 지속되어온 조선의 제도 및 문화를 대대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때 국가행정의 최고기관이 의정부에서 내각으로 바뀌고, 관리 임용에 있어서 문무(文武)·반상(班常)의 차별이 폐지되었습니다. 또한 지방 관리들이 사법권과 군사권을 갖지 못하는 근대적 관료체제가 들어서고, 최초로 사법제도를 행정기구에서 분리 독립시켜 재판소를 설치하고 재판제도를 수립했습니다.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봉건적인 신분 및 계급 질서를 폐지하고, 인신매매를 금지하며, 죄인의 고문과 연좌제를 폐지하는 등 근대적 평등권과 인권 사상이 국가 권력 차원에서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일본의 간섭에 의해 시행되었기 때문에 훗날 일본이 조선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침략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강요된 개혁이어서 당시 지식인이나 백성들로부터 크게 반발을 샀습니다. 이렇듯 일본의 간섭과 강요 속에서 진행된 온건개화파의 개혁정책은 외세의 침략으로 왜곡되고 굴절될 수밖에 없는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의 일그러진 자화상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가 굴절되고 일그러졌던 만큼 온건개화파 사람들의 정치적 행보와 삶의 궤적 역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갑오개혁이 일어난 지 1년 후인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합니다. 이때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高宗)은 김홍집을 비롯한 다섯 사람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체포하거나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일본과 온건개화파에 대해 분노의 감정을 품고 있던 유생(儒生)과 백성들에 의해 결국 김홍집은 경복궁 광화문에서, 어윤중은 고향 보은으로 피신하던 길에 용인 땅에서 살해당하고 맙니다. 김윤식 역시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명성황후 시해 음모를 방관했다는 혐의를 쓰고 제주도에 유배되지만, 10년이 지나 풀려납니다.
그는 1910년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강제합병에 참여해 자작의 작위를 받지만, 훗날 3·1운동 때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문서를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박탈당합니다. 조선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꿈꾸었지만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힘과 영향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온건개화파의 행보와 운명은 -그 개혁모델과 노선의 차이와는 무관하게- 급진개화파의 비극적 행보나 운명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던 셈입니다.
21 巴素賑貸 恤衆艱苦 파소진대 휼중간고
을파소의 진대법은, 백성들의 괴로움과 고통을 구휼했다.
巴(꼬리 파) 素(본디 소) 賑(구휼할 진) 貸(빌릴 대)
恤(불쌍할 휼) 衆(무리 중) 艱(어려울 간) 苦(쓸 고)
22 大陸談德 海上保皐 대륙담덕 해상보고
대륙의 광개토대왕이요, 해상의 장보고이다.
大(큰 대) 陸(뭍 륙) 談(말씀 담) 德(덕 덕)
海(바다 해) 上(윗 상) 保(지킬 보) 皐(언덕 고)
23 長壽石碑 麥巡拓境 장수석비 맥순척경
장수왕의 중원고구려비요, 진흥왕의 순수척경비이다.
長(길 장) 壽(목숨 수) 石(돌 석) 碑(비석 비)
麥(보리 맥) 巡(돌아볼 순) 拓(넓힐 척) 境(지경 경)
24 乙支黜隋 萬春破唐 을지출수 만춘파당
을지문덕은 수나라를 물리치고, 양만춘은 당나라를 깨뜨렸다.
乙(새 을) 支(지탱할 지) 黜(내칠 출) 隋(수나라 수)
萬(일만 만) 春(봄 춘) 破(깨뜨릴 파) 唐(당나라 당)
25 寧隆農本 證初牛耕 영륭농본 증초우경
백제 무령왕 융(隆)은 농업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고, 신라 지증왕은 최초로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
寧(편안할 녕) 隆(높을 륭) 農(농사 농) 本(근본 본)
證(증거 증) 初(처음 초) 牛(소 우) 耕(밭갈 경)
26 璋溫軒丈 善岡賢妻 장온헌장 선강현처
무왕과 온달은 늠름한 대장부이고, 선화공주와 평강공주는 현명한 아내이다.
璋(홀 장) 溫(따뜻할 온) 軒(집 헌) 丈(어른 장)
善(착할 선) 岡(산등성이 강) 賢(어질 현) 妻(아내 처)
27 邑薯志謠 旨兜妹耆 읍서지요 지도매기
정읍사·서동요·풍요(양지사석가)와, 구지가·도솔가·제망매가·찬기파랑가이다.
邑(고을 읍) 薯(감자 서) 志(뜻 지) 謡(노래 요)
旨(맛있을 지) 兜(투구 도) 妹(누이 매) 耆(늙은이 기)
28 由拔刀刺 階當奮勵 유발도자 계당분려
유유는 칼을 뽑아 찔렀고, 계백은 마땅히 힘써 용기를 다했다
由(말미암을 유) 拔(뽑을 발) 刀(칼 도) 刺(찌를 자)
階(섬돌 계) 當(마땅 당) 奮(떨칠 분) 勵(힘쓸 려)
29 琛受黑齒 劍牟岑舜 침수흑치 검모잠순
도침·지수신·흑치상지요, 검모잠과 안순(안승)이다. (백제,고구려 부활 꿈)
琛(보배 침) 受(받을 수) 黑(검을 흑) 齒(이 치)
劍(칼 검) 牟(성 모) 岑(봉우리 잠) 舜(순임금 순)
30 曼聖女主 九塔讓位 만성여주 구탑양위
선덕여왕은 황룡사 9층탑을 세웠고, 진성여왕은 임금의 자리를 어진 사람에게 물려주었다.
曼(길게 끌 만) 聖(성인 성) 女(계집 녀) 主(임금 주)
九(아홉 구) 塔(탑 탑) 讓(사양할 양) 位(자리 위)
31 賜帶尊像 恩寺息笛 사대존상 은사식적
천사옥대와 장륙존상이요, 감은사와 만파식적이다.
賜(줄 사) 帶(띠 대) 尊(높을 존) 像(모양 상)
恩(은혜 은) 寺(절 사) 息(쉴 식) 笛(피리 적)
32 祚榮弓裔 自稱後句 조영궁예 자칭후구
대조영과 궁예는, 스스로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일컬었다.
祚(복 조) 榮(영화 영) 弓(활 궁) 裔(후손 예)
自(스스로 자) 稱(일컬을 칭) 後(뒤 후) 句(글귀 구)
33 藝欽秀代 渤擴疆域 예흠수대 발확강역
무왕(大武藝)과 문왕(大欽茂)과 선왕(大仁秀)시대에, 발해는 영토를 넓혔다.
藝(재주 예) 欽(공경할 흠) 秀(빼어날 수) 代(대신할 대)
渤(바다 이름 발) 擴(넓힐 확) 疆(지경 강) 域(지경 역)
34 慧超五竺 矩堂見聞 혜초오축 구당견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구당 유길준의 서유견문록이 있다.
慧(슬기로울 혜) 超(뛰어넘을 초) 五(다섯 오) 竺(나라 이름 축)
矩(모날 구) 堂(집 당) 見(볼 견) 聞(들을 문)
35 元曉華嚴 知訥曺溪 원효화엄 지눌조계
원효의 화엄사상과, 지눌의 조계종이다.
元(으뜸 원) 曉(새벽 효) 華(빛날 화) 嚴(엄할 엄)
知(알 지) 訥(말 더듬거릴 눌) 曹(무리 조) 溪(시내 계)
36 新羅俊才 致遠承祐 신라준재 치원승우
신라의 뛰어난 선비는, 최치원과 최승우이다.
新(새 신) 羅(벌릴 라) 俊(준걸 준) 才(재주 재)
致(이를 치) 遠(멀 원) 承(이을 승) 祐(도울 우)
37 敎去禪來 佛界激變 교거선래 불계격변
교종의 시대가 가고 선종의 시대가 오면서, 불교계는 격렬한 변화를 겪었다.
敎(가르칠 교) 去(갈 거) 禪(선 선) 來(올 래)
佛(부처 불) 界(지경 계) 激(격할 격) 變(변할 변)
38 王建甄萱 天下爭覇 왕건견훤 천하쟁패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천하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王(임금 왕) 建(세울 건) 甄(질그릇 견) 萱(원추리 훤)
天(하늘 천) 下(아래 하) 爭(다툴 쟁) 覇(으뜸 패)
39 凝非屈危 功崇卜裵 응비굴위 공숭복배
최응은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했고, 공신은 신숭겸·복지겸·배현경이다.
凝(엉길 응) 非(아닐 비) 屈(굽힐 굴) 危(위태할 위)
功(공 공) 崇(높을 숭) 卜(점 복) 裵(성 배)
40 奴婢按檢 科擧施行 노비안검 과거시행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했다.
奴(종 노) 婢(계집종 비) 按(누를 안) 檢(검사할 검)
科(과목 과) 擧(들 거) 施(베풀 시) 行(다닐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