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온천행행과 신정비 건립이야기
김일환 (호서대 창의교양학부)
현재 온양관광호텔은 조선왕조시대 역대 국왕과 왕비를 비롯한 역대 왕실 가족들이 질병치료를 목적으로 즐겨 찾던 왕실온천지로 온천행궁, 곧 온궁(溫宮)이 있던 옛터이다. 조선왕조가 창건된 후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세종, 세조가 다녀갔고, 임진왜란이후에는 현종을 시작으로 숙종, 영조와 사도세자까지 역대 왕실가족들이 빈번히 찾아왔다. 이들이 머물던 온궁에는 국왕의 침전인 내정전 뿐 아니라 정무를 보던 외정전, 목욕하던 탕실을 비롯해 많은 건물들과 여러 부속시설들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현재 그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신정비와 비각, 영괴대(靈槐臺)만 남아 이곳이 왕실온천장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 중에 신정비는 세조가 국왕에 즉위한 후 1464년 3월 왕비 정희왕후와 함께 찾아온 첫 온행길에 행궁 안에 냉수가 나오는 신기한 우물을 발견하고 이를 ‘신정(神井)’이라 이름을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운 것으로 행궁터에서 남아 있는 역사유물로 가장 오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세조의 온행과 신정비 건립
세조는 생애동안 4차례나 온양온천을 찾아 왔다. 처음은 왕자인 진양대군(晉陽大君)시절이던 세종 22년(1440) 3월 2일 풍병을 앓던 어머니 소현왕후를 모시고 동생 안평대군과 함께 갑사(甲士) 1백 인의 호종을 받으며 온양온천을 찾아 와 22일을 머문 적이 있었다. 이때는 모친의 병수발이 목적이라 세조의 뚜렷한 자취를 보여주는 일화는 없다.
이후 정국이 급변하여 부왕인 세종이 훙서하고 동복형인 문종이 국왕이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 얼마 안가서 문종도 신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린 조카 단종이 국왕이 되자 권신이던 김종서, 황보인 등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란 이름의 정변을 일으켜 두 인물을 제거하고, 곧 조카 단종도 폐위시켜 권력을 찬탈하는데 성공하였다. 세조의 이런 무도한 권력탈취는 많은 조정신하들의 불만을 사서 사육신 등이 단종복위를 꾀했지만 발각되자 이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하고 가문을 멸족시켰다. 남은 사람은 노비를 만들고 재산은 몰수하였다.
이후 권력은 안정권에 접어들어 갔지만 세조는 질병에 시달리며 고생하였다. 그중 피부병으로 항상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세조는 온양온천에서 온천욕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동왕 9년 12월에 사위인 하성위 정현조 등을 보내 온양 행궁의 형편을 살피게 하였다. 이것은 이듬 해 봄에 온행을 하기 위해 사전 답사를 시킨 것이다. 온행을 앞 둔 세조 10년 1월에는 다시 감찰 민혜(閔憓)·김양봉(金良奉)을 온양에 보내어, 수령으로서 국왕의 순행(巡幸)을 빙자하여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자가 있는지를 살피게 하였다.
이해부터 세조는 온양온천을 세 차례 연속해서 찾아왔다. 처음 1464년에는 왕비인 정희왕후를 동행하여 왔고, 1465년, 1468년에는 왕비와 세자인 예종, 많은 종친들을 데리고 왔다. 국왕이 되고 시작한 첫 온행은 특이한 행차 모습을 보여주었다. 온양에 오기까지 경기도와 현 충청북도 일대를 순행(巡幸)한 것이다. 세조 10년(1464) 2월 18일 서울을 출발하여 광주(廣州) 문현산에 이르러 사냥을 하였다. 19일 죽산 연방(蓮坊)에 머물고 20일 진천(鎭川) 광석(廣石)에 도착하는데 도경계를 넘어왔기에 충청도 관찰사 신영손이 어가를 맞이하였다. 용천산에서 호종하는 병사들을 시켜 사냥몰이를 하며 세조는 언덕에 올라 구경하였다. 21일에는 길상산의 사장(射場)과 청주 초수(椒水)에 도착하고 22일에는 토령에서 사냥을 한 후 어가는 천변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23일에는 청주에 도착하여 노인들에게 주육을 하사하는 경로연을 베풀고 오랫동안 유숙하다가 26일 저녁 회인현에 도착하고 27일에는 보은현(報恩縣) 동평(東平)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屛風松)에 머물렀다. 28일에는 속리사(俗離寺)와 복천사(福泉寺)에 행행하여 승려 신미(信眉)를 만나고 시주를 하였다. 29일에 문의현에 머물고 30일에는 전의현을 지나 3월1일에 드디어 목적지 온양에 도착한 것이다. 무려 13일에 걸쳐 경기도와 충북일대를 순행한 것은 속리사와 복천사를 방문키 위한 것이 큰 이유였지만 그 보다 민정을 살피고 지방민을 위무하는 정치적인 목적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온양온천에 도착한 세조는 4일 만에 특이한 이벤트를 만든다. 3월5일 행궁 뜰에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옛 우물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물이 흘러나와 우물을 파게하니 차가운 샘물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물의 근원이 깊고 맑아 세조가 ‘주필신정(駐蹕神井)’이라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이러한 사실은 세조의 성덕을 칭찬하는 신이(神異)한 자연현상으로 둔갑하여 영의정 신숙주 등이 전문(箋文)을 올려 칭하(稱賀)하며
"임금의 수레가 멀리서 오시어 잠시 탕반(湯盤)의 욕정(浴井)에 머무르니, 천휴(天休)가 성하게 이르러 후온(后媼)의 상서를 나타내었으므로, 경사로움이 천지에 넘치고, 기쁨이 조야(朝野)에 비등(沸騰)합니다. ...신(臣) 등이 외람되게도 천박한 자질로 창성(昌盛)한 시기를 만나 뼈에 사무치는 살갗에 젖는 천재(千載)에 만나기 어려운 일을 목도(目睹)하였으므로, 쇠를 녹이고 돌을 깎아서 만세(萬世)에 전할 글을 새깁니다."
라고 하면서 이 놀라운 자연현상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기를 결정하였다. 비문은 함께 호종했던 서하군(西河君)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總府都總管) 임원준(任元濬)이 짓고 상호군 이숙감(李淑瑊)이 글을 썼다. 이렇게 신정비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신정비는 작은 규모에 비각도 없이 세워졌다. 『세조실록』을 보면 우물 축조는 내시(內侍) 이존명(李存命)을 시켜 하였다. 하지만 이존명이 축조를 잘못하여 파직당한 사례가 있었다.
이후 세조는 왕비 정희왕후와 함께 두 번 더 온행을 하였다. 그러나 점점 병이 깊어진 세조는 1468년 3월 마지막 온행한 후에 6개월 뒤 9월 8일에 훙서하였다. 조의 사후에 예종이 국왕으로 즉위한 후 5년 뒤인 예종 1년((1469)에는 일시적으로 신정비가 철거된 적이 있었다. 당시 중국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조선인 화자(火者)출신 최안(崔安)이 근친하기 위해 고향 음성을 방문하고 온양온천에서 목욕하기로 예정하자 그의 눈을 피하기 위해 신정비를 일시 철거했던 것이다.
3. 정희왕후의 마지막 온행과 신정비의 음기(陰記)
국왕의 할머니인 대왕대비가 된 정희왕후(1418.12.12.~1483.3.30.) 윤씨는 1418년(태종 18) 부친의 임지인 홍천군아(郡衙)에서 태어났다. 11세인 1428년(세종 10)에 한 살 위의 어린 세조와 결혼했다. 처음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책봉되었다가 이후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이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금슬리 돈독했고 1452년(단종 즉위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는 거사 때 모의가 새어나가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정희왕후가 갑옷을 들어 입혀 용병(用兵)을 결행케 할 정도로 강단을 소유한 여성이었다.
세조의 사후에 정치적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예종이 즉위한 지 불과 1년 3개월 만에 사거하자 정희왕후는 예종의 죽은 맏아들 덕종의 2자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을 국왕으로 지명하였다. 바로 어린 국왕인 성종이 등극한 것이다. 성종의 즉위는 예종이 죽은 바로 그날 이루어졌다. 이는 조종조(祖宗朝)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어렸고, 또 성종에게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있었는데도 바로 그 날 즉위한 것은 정희왕후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성종이 즉위할 때의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정희왕후가 7년 동안이나 섭정으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후 국정을 성종에게 넘겨주었지만 왕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 정희왕후가 가진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세조가 훙서하던 1468년부터 신병이 깊어 오랫동안 ‘적취(積聚)’ 증상으로 고생하였다. 이것은 묵은 체증(滯症)으로 속이 더부룩한 증상인데 아마 위암이었던 듯하다. 나중에는 점점 병이 깊어져 사용할 약조차 마땅치 않았다한다.
1483년 정희왕후는 마지막으로 온천욕을 통해 질병치료를 희망하여 두 며느리인 덕종비 소혜 왕후(昭惠王后) 한씨와 예종비인 안순 왕후(安順王后) 한씨를 대동하고 신병치료차 온양온천을 찾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세조와 함께 온행한 지 15년만이고, 처음 온행을 한 지 19년만이었다.
그녀가 온양행궁을 다시 찾았을 때 남편 세조와의 추억이 아로새겨진 신정(神井)은 그대로 있었지만 석각(石刻)은 마멸되어 있었다. 이를 보고 정희왕후는 옛일을 회상하며 현재를 생각하니 슬픔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고, 이에 내수(內需)의 재물을 내어 재원으로 하여 석수장이를 불러 마모된 비문을 중각(重刻)케 하였다. 이 일은 동행한 월산대군(月山大君)·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하성 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주관(主管)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때마침 동행한 임원준(任元濬)을 시켜 신정비의 후면에 음기(陰記)로 새기도록 하였다. 그녀가 마지막 온천행에서 신정비(神井碑)의 후면에 남편과의 추억을 담은 음기(陰記)를 새겨 넣음으로서 19년 만에 비문의 형태는 완성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병이 깊었던 그녀는 온천욕을 하며 병을 치료하던 중에 3월 30일 온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온양행궁에서 대왕대비가 별세함에 따라 국상을 치루는 후속절차가 대단히 어렵고 복잡해져 많은 논란이 있었다.
3. 신정비의 비각건립과 변천
이후 신정비는 온궁을 지키는 수호신같이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온궁이 불타고 파괴될 때도 신정비는 굳건히 제 자리를 지켰다. 임란이후 오랫동안 온궁은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임란이 끝나고 60여년이 지난 현종1년(1601) 남구만이 두풍으로 고생하던 모친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온천을 찾았을 때 온궁은 폐허가 되어 무너지고 했어도 신정비는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건립된 지 137년이 넘어 글씨를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비문이 마모되어 있었다.
현종6년에 온궁이 복구되자 신정비는 온천행궁내의 어도(御道)에 위치하여 역대 국왕들이 온행할 때 마다 반드시 만나는 유물로 남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풍파에 시달려 온양주민들이 볼 때 항상 안타까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1710년(숙종36) 윤7월 8일에 온양 유림이던 유학(幼學) 강대(姜玳)가 비각이 없어 풍파에 마모되는 신정비를 보호하지 못하니 지역민들의 원망이 크다고 하며 비각 건립을 건의하였다. 그러자 마침내 이듬해 2월 5일 비각건립이 왕명으로 결정되었다. 실로 247년 만에 비각이 세워져 신정비를 보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온양온천은 가장 먼저 일제의 침탈을 당한 장소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기도 전인 1904년에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 상인들이 불량배를 동원하여 소위 ‘운현궁기지’를 매입했다는 핑계를 대며 온양행궁을 강제로 탈취하였다. 이들은 온궁을 개조하여 일본식 온천영업장을 만들고 경부선 철도로 타고 천안에서 찾아오는 온천객을 대상으로 온천 목욕업을 개시하였다. 이때도 신정비는 그 자리를 지키며 역사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1922년 사철(私鐵)인 경남철도(京南鐵道)가 천안에서 예산까지 철도를 부설하고 온양온천주식회사를 인수하여 대규모로 ‘신정관(神井館)’이라는 명칭의 온천호텔을 새로 지었다. 바로 신정비에서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이때 일본인들은 신정비를 호텔 서쪽 외곽으로 이건하게 되면서 신정비는 처음으로 제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해방된 후 신정관이 6.25사변 때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1955년 경 근대식 온양철도호텔로 다시 지어질 때 다시 한 번 위치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정비는 현재까지 건립된 후 556년간 온양온천을 굳건히 지키며 아산의 역사를 지켜본 가장 오랜 역사유물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