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몽당연필/ 박희정
내 살이 다 닳아서 없어질 그 때까지
시간이 문드러져 여백을 채울 때까지
뻥 뚫린 심장의 말을
전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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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마음이 어둡고 깜깜할 때/ 조기호
별처럼
반짝거리고 싶다고?
그래,
밤하늘이 없다면
별이 뜰 수 없겠지
지금
니 마음이
밤하늘처럼
어둡고 깜깜하다면
이제
곧 별이 뜰 시간이 되었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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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의 생애/ 류광열
발소리 숨겨가며 대지를 밟은 봄비
옹이 박힌 한파가 온몸으로 행패 부리면
씨앗을 매단 기둥에 공포를 조각한다
낙엽 속 시련이 오돌오돌 한기 들 때
이어 온 봄비 덕에 물 만난 고기처럼
누명을 벗어 던지자 생명들 요동친다
소임을 끝낸 후엔 이름도 지워졌다
그래도 즐겁다, 창공의 우듬지 용기
출생의 기억을 안고 태를 묻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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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 나팔꽃/ 정순영
강아지풀 빈 마당 가로지른 빨랫줄
바지랑대 차고 오른 실 같은 나팔꽃
하늘 끝 닿으려는가
화살 같은 날선 마음
날마다 걷는 길 나 홀로 외로운 길
외길은 허공 길 앗차, 하면 추락이다
걸어온 지난 시간들
벼랑길이 전부였네
춤추는 곡예사 외줄 타는 삐에로
뿌리칠 수 없었네 건너야 할 나의 강
흐르는 강물은 푸르다네
쉬지 않고 흐르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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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호>
파토스의 그림자/ 김형순
애타는 눈망울로 바라본 팽목항은
아직도 높은 물결 소용돌이가 되어
떠도는 영혼을 위해 흘리는 바다 눈물만
설렘을 안고 떠난 노랑나비는 펄럭이는데
불러도 대답 없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세월호 기억의 벽에 부치지 못한 글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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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잠자리/ 설재훈
가을의 문턱인
입추를 지날 쯤엔
천둥벌거숭이가
창공을 휘젓는다
가을은
황금 벌판을
놀이터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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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의 전율/ 오종희
병사들 총구에 매달린 꽃방울
칼날 같은 전율에도 피어나는 전우애
타당탕 아우성 소리 세상 끝이 꿈틀댄다
매화는 새 생명 일으키는 신호탄
만물이 잠들어 조용한 저 벌판에
폭죽이 터지는 소리 귓가에 번진 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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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허정(涵虛亭)*/ 이문평
비 갠 뒤
멱을 감는 저 달은
항아의 나신
씻는 듯 끼얹는 듯
강물소리 감미롭다
젖어서
흠뻑 홀려라
허허로움 뜨거워지게
*함허정: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에 있는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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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물감 풀린 날/ 이소영
목 놓아 울음 울던 북풍 한설 밀어내고
뽀송한 하늬바람 실눈 뜨는 버들가지
빨갛게 맴돌던 사연
하늘빛을 잉태한다
웅크린 꽃망울이 만삭으로 벙그러져
연분홍 풍경 위로 바람의 몸짓들이
허공에 풀어헤치고
들불처럼 번져간다
활기찬 지천에다 봄꽃 미소 풀어놓고
연둣빛 손가락들 내밀히 날개 펼 때
대지에 흐르던 침묵
꽃잎으로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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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와의 전쟁/ 정인규
애애앵 B29가 어둠 속을 하강한다
손바닥 넓게 펴서 양 뺨 다리 때려봐도
어느새 모기란 놈은 저쪽서 공격 개시
피리 촛대를 불고 어느 집에 당도하니
험한 곳도 많고 많아 제 뺨 제가 치고
제 다리 제가 치면서 욕 퍼붓고 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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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님 유턴합시다/ 김금수
지금 이 길을 간다면
유턴할 수 있을까요
다시 고향
내 창고로 갈 거다
손님,
절대 역주행은 할 수 없는
일방통행입니다
나는 돌아올 줄 알고
창고 열쇠도 두고 왔다네
요금
많이 줄 터이니
되돌아갑시다
나의 집, 창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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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사월초파일/ 박준수
천년고찰 백양사 산문(山門)에 드니
푸른 신록 그늘 아래 계곡물 소리
구름 대중 아득히 밀려드네
잔칫집 마당에 형형색색 내걸린 연등
범종은 깊은 산 고요를 깨우고
주지 스님 설법에
향기로운 미소와 꽃 같은 얼굴
대웅전 부처님께 큰절 올리고
탑돌이 돌다 문득 돌아보니
여기가 극락 세상인가
어여쁜 마음들이 회향(廻向)하는 시방
어머니, 아버지 환생하신 듯
연꽃처럼 환히 웃고 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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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호>
적·2/ 문수영
잠자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너
잔잔하던 호수 긴 물결무늬 일어난다
시간이 화장을 하듯 고요함에서 탈피한다
낯선 곳 바라보며 앙가슴 쓸어내린다
반추하는 사이로 계절은 가고 오고
잡풀만 무성한 자리 지문으로 지운다
너는 내게서 나온 피할 수 없는 그림자
열린 문으로 들어와 틈새로 나갔지만
대문은 항상 열려있다 신의 각본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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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신비· 1/ 최미선
우주의 어느 별에서
숨으로 다가온
하나의 작은 점
빛으로 스며들어
세상에 터뜨린 울음
탄생의 기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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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시꽃/ 전숙
베틀이 덜커덩덜커덩 울 때마다
오일장에 한 필씩 모시꽃이 피었습니다
모시꽃 팔러 간 서방님은 기생방에 주저앉았습니다
해는 지고,
봉숭아꽃처럼 귓불은 달아오르고
보름달은 왜 떠서 베틀은 또 이리 잘 보이는지
시어머니는 툇마루에서 닦달하고,
모시올은 끊겨서 버럭질이고
가시울타리 같은 태모시를 명주실처럼 달래느라
이빨에는 길이 뚫려 이골이 났습니다
움푹 파인 달의 허벅지
모시올 비비꼴 때마다 허벅지에는 피눈물이 고여서
한 밤 지나면 봉숭아꽃물처럼 발갛게 번졌습니다
손톱에 물들면 새댁처럼 고운 꽃물이
허벅지에 물들어 세모시처럼 서럽습니다
달은 멀어 그리운데
밤바람은 홑창을 흔들어 꾸벅잠마저 깨웁니다
오늘밤도 덜커덩덜커덩 모시는 피어나고
서방님은 기생방에서 모시꽃을 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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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김종상
하늘은거인이 아닐까
한없이 커다란 사람
눈을 뜨면 낮이 되고
눈을 감으면 밤이지
숨을 쉬면 바람이고
기침을 하면 태풍이지
얼굴을 찡그리면
날씨가 흐리고
눈물을 흘리면
비가 되어 내리는
하늘은 우리가 모르는
큰 거인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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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전여전/ 정금숙
예초기의 소리에 풀잎들 깨어나
갈퀴 사이 삐져나온 띠풀의 이삭들
정성껏 몸단장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산밭에 들깨를 털어내는 시누이
젊은 날 어머니의 모습이 어리어
하회탈 같은 웃음이 산국잎에 번진다
야무지게 동여맨 수건에서 익어가는
한 무더기 들깨가 가을볕에 고소하다
시누이 등 뒤 어머님 향기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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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는 아침/ 김정
동쪽 산이 이른 아침에
'꼬끼요 꼬옥' 알을 깐다
누런 황금 해의 알을
해의 알껍데기에서
뽀송뽀송 싹이 돋아난다
바늘 같은 금침의 싹이
늦잠에 곯아떨어진 세상 향해
해침을 쿡쿡 찌른다
눈먼 구석구석 금빛이
활짝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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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뭐니?/ 정병도
문해교실에서
영어 인사를 배운 할아버지
학교에서 돌아온 손주에게
'굿모닝' 했다.
- 할아버지,
그건 아침에 하는 인사말이다/
이튿날,
아침 준비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할아버지가 '굿모닝' 했다.
할머니가 큰소리로 답했다.
"씨래기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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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꽃 붉은 여름/ 김석문
가마솥 찜통 더위
놀아나는 삼복마당
포도에 튀는 열기
온몸을 삶아대고
죽어라 우는 매미에
배롱꽃술 더욱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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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꽃/ 손형섭
가을이 데리고 온 사색의 억새꽃이
긴 허리 휘어잡고 바람에 흔들리며
강변에
은빛 윤슬로
반짝이며 서있다
바람이 꺾다 만 억새꽃 그대들아
억세게 피워내며 지난날 그리움을
한지창
물드는 가을빛
빗자루로 쓸고 있다
모질던 지난날을 맨몸으로 견딘 억새
한 줄기 바람 끝에 넘어지고 쓰러지며
쓸쓸한
강언덕에서
그리움을 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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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노래/ 신서영
안테나 같은 두 눈
작은 미풍에도 깜짝 놀라 숨 죽이고
빛조차 느낄 수 없는 촉수
웅숭 깊은 풀잎 따라 휘뜰휘뜰 길을 간다
애당초 등짐 진 달팽이에겐
급한 일도 서두르는 일도 사치
낮과 밤을 잇는 긴 자욱을 남기며
허기진 노 저어간다
하늘에 올라 별이 되고 싶은 염원 하나
빈 껍질 속에 담은 채
바람도 솔래솔래 등 밀어 주는데
땀으로 길게 남긴 자욱 위로
눈물 한 방울 떨구고…
마지막 숨 쉴 때까지
오로지 당신을 만날 수만 있다면
온전한 밀대 하나로
침묵처럼 울음의 바다를
노래가 되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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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
통화/ 강만
마음이 한 곳으로만 흐르는 날
망설임이 전화를 한다
잘 있냐고
밥은 묵었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그 바닷가에도 시방 비가 오냐고
그럼 잘 있으라고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바위처럼 가슴 복판에 묻어두고
사막의 모래알 같은
영혼 없는 토막말 몇 마디로
통화를 끝낸다
화악 필려오는
폭풍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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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름돌/ 서석조
1.
동자꽃 진홍 딛고 새벽이 열려온다
감나무 우듬지에 천국 소리 귀 달고
안주할 지상이려나 뭇 새 날리는 마을
지리산 청왕봉, 이 높이를 능가하랴
구름도 머물러라 추를 달고 흐르는 물
낮기만 낮기만 하여 홰를 치는 새벽이니
2.
깻잎 콩잎 눌러 절여 일 년쯤에 제맛 났지
끓어 뛰는 불량기를 눅여놓던 밥상머리
다소곳 세월을 여민 어머니 그 손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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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비빔밥/ 오종희
경상도 고추장에 전라도 찰보리로
충청도 참기름에 강원도 고사리로
돌솥에 가득 담아서 비벼대는 한통속
이쪽으로 비비고 저쪽으로 비벼도
나물에 고추장과 참기름 따로 노는
저마다 입맛이 다른 여의도 비빔밥
세상에 유일하게 비빔밥 먹는 나라
섞음의 메뉴 공학 구수한 맛의 비법
우리 것 심오한 맛을 여의도에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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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종복
새까만 눈동자에 연지 찍은 복숭아 볼
보일 듯 그 미소에 이 가슴은 방아 찧고
남몰래
두근거리는
마음 하나 꼭 쥔다
쥔 손을 놓을까 봐 안타까움, 더 크지만
눈길이 너무 멀어 애태움이 전부인데
정말로
그 눈길 오면
어찌할까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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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임재우
무쇠 솥 모자 쓰고
타닥타닥 불의 노래
깻단도 가랑잎도
짚검불도 솔가지도
포옹한 뜨거운 정열
부뚜막은 땀 흘린다
어둠 속 별빛 내려
지휘자 부지깽이
밥상머리 헤엄칠
생선들 눕혀지고
출출한 시커면 밤이면
군고구마 잠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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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이 오면/ 정해자
구월이 오는 소리 모르고 넘어갔네
낭만도 잊은 채로 세월만 보내고서
마음의 창 열고 보니 물들어간 낙엽들
청춘의 신록 속에 파뿌리 자리 잡고
쓸쓸한 기억들도 풍파와 어우러져
너울춤 추고 나서야 서녘하늘 물이 든다
한 자락 그리움들 밧줄로 엮어내머
처마 밑 문설주에 걸어둔 문발 사이
추억의 그림자들도 신명나게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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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이여울
불안과 두려움으로
저녁이 캄캄하게 뒤범벅될수록
손잡고 걸어간다
세상은
온통 그들의 함성
뒤틀린 이정표에 따라
억지와 오기로 짜 맞춘
거짓에 화상 입고
불신으로 얼룩진
하염없이 짓누르는 기억들
몸부림칠수록 들러붙는
울음과 어둠에 발목 적시며
먼 길 돌아와
켜켜이 쌓여 있는 저민 가슴에
거미줄처럼 그물 짠다
푸른 연대가 환하고 따스한
초록의 손으로
서로 보듬고
담 기어오르는
담쟁이처럼
때론 적막에 붙잡혀
봄의 뒤축이 해져도
말없이 참다운 길 찾아
마음 비우고
헹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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