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14cm, 높이 37cm, 너비 6cm의 청석 선바위가 봉화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한 점의 화려함도, 눈에 띄는 특별한 조형미도 없는 이 돌은 그저 묵묵히 자신을 드러냅니다. ‘돌삐’라 불러도 좋을, 평범한 외관 속에 담긴 이야기는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나는 이 돌을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문득 손에 넣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딛는 게 쉽지 않았던 길. 그 길 위에서 손에 쥔 이 돌은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내 행적의 증거요, 흐르는 물결과 함께 쌓여간 시간의 조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돌은 마치 오랜 세월의 흔적과 내 과거를 품고 있는 듯,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 모습은 말이 없지만, 무언가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혹여 옛날이라면, 이 돌에는 누군가가 정성껏 글씨를 새겨 넣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글씨는 길을 찾는 나그네에게 방향을 일러주는 이정표가 되었을 테지요. 나는 상상 속에서 그려봅니다. 이 돌이 길 위에 세워지고, 지나가는 이들이 잠시 멈추어 눈길을 두는 모습을. 누군가는 이 돌 앞에서 방향을 확인하고 떠나며, 또 누군가는 돌아오는 길에 이 돌을 발견하고 안도감을 느꼈겠지요.
그러다 문득, ‘이정표’라는 단어가 내 안에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떠남과 돌아옴이 교차하는 어떤 장면, 익숙한 듯 낯선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칩니다. 잠시 그 장면이 전생의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들다가, 이내 깨닫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릴 적 보았던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 속 장면이었습니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기억과 꿈이 뒤엉킨 기분이 나를 휘감습니다.
과거의 기억이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왜곡되고, 허구와 진실이 뒤섞여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게 됩니다. 나는 이 돌을 바라보며 그 옛날 낙동강 봉화의 강가를 떠올립니다. 그곳에서 본 강물의 반짝임, 물결 위로 지나던 바람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 장면조차 정말로 있었던 사실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환영인지 헷갈립니다.
선바위는 지금 이곳에서 묵묵히 서 있습니다. 말없이 그러나 강렬히. 그것은 내가 떠나온 길과 돌아갈 길을 모두 품은 채, 그 자체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상징이 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머뭅니다. 이 돌 앞에서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의 이 모든 것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듭니다.
선바위는 그 자리에 서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아득한 과거를 헤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내가 품고 있는 상처와 바람, 그리움과 회한을 담아낸 거울 같습니다. 이 돌은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 자체로 의미가 됩니다. 바람과 물결, 떠오르던 태양과 지던 달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지금까지 서 있는 이 돌이, 나와 세상을 잇는 무언의 언어가 됩니다.
나는 이 선바위를 통해 다시금 느낍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것이 만든 감정과 마음은 여전히 선명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야말로 내가 떠나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비추는 나의 이정표가 됩니다.
첫댓글 선 바위는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바라보는 이의 마음은 제각각이겠군요.봉화 분천 산타 마을에 갔을때 '돌삐' 비슷한 돌을 만났습니다.조팝님의 수석 사랑을 잠시 떠올렸답니다.바라볼수록 정이 가는 이정표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