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명회>- 강화도 전등사, 교동도 화개정원, 향교, 대교, 24년 춘절행사 - 02,
>
핸드폰 보기보다는 인터넷 PC로 보면 크고 웅장한 모습에 기절하지 않도록 하세요,
>
|
강화섬 교동도 화개정원,
1950년 6,25 전쟁이 후 시간이 멈춘 강화 섬 교동도, 시대상을 반영한 역사와 고향을 떠난 그리움의 ‘켜’를 품은 섬… 아름다운 자연과 수려한 경관을 간직한 화개산… 희망과 평화를 염원하고 아픔을 치유하는 정원, ‘화개정원’입니다. 화개정원의 시작 교동대교 개통 이후, 교동지역 (도서·접경지역) 주민들의 관광자원 개발요구도가 높아지게 되면서 화개산 일대 관광자원화 사업이 추진되었고, 연산군 유배지를 포함한 화개산 일대에 화개정원과 화개산 전망대를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화개산 전망대(강화군의 군조인 ‘저어새’의 눈과 부리를 형상화 하였고 손에 닿을 것 같이 가깝지만 갈 수 없는 북녘을 향한 ‘飛上’ 화개산 전망대 4,973㎡를 컨셉화 하였다. |
>
조선 10대 연산군 이모저모 사진전과 개요,
>
[연산군 유배지(燕山君流配地)] 연산군이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였던 곳. 묘도 있었으나 이장(경기도, 현재 서울 도봉구) 관련 역사를 다룬 문화관과 모형 유배지를 복원하였다.
연산군 유배지, 연산군 유배기간: 1506년 9월 6일 ~ 11월 8일, 1986년 4월 1일 강화군의 향토유적 제 28호 연산군 적거지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연산군이 최후를 맞은 위리안치 유배지로 전해오는 연산군 유배지는 위리안치 상황과 소달구지를 타고 유배 온 연산군 모습 등을 재현해 놓은 전시관이 있고
전시관에서 유배형의 종류, 교동도 유배 역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중략: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에 병으로 죽었다. 겨우 31세였다. 연산군은 왕의 묘호(廟號)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의 폐출은 모든 양반에게 인심을 잃으면 왕도 쫓겨날수 있다는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연산군의 죽음 이후 그의 식솔들 역시 궁에서 쫓겨나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다.
연산군의 묘는 서울시 방학동에 위치한다.
>
화개정원 이모저모 사진전과 개요,
|
화개정원은 약 18만 본의 다양한 수목과 관목류, 초화류가 식재되어 있으며, 2023년 4월 24일 인천 최초로 지방정원으로 등록됐다. 물의 정원, 역사·문화의 정원, 추억의 정원, 평화의 정원, 치유의 정원의 5색 테마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교동도의 역사와 자연을 담은 정원]이라는 컨셉을 갖고 있다.
화개산 전망대는 전국최대규모의 스카이워크형 전망대로 7km 떨어져 있는 북한 황해도 연백평야와 강화군의 다도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특히 스카이워크형 전망대는 바닥 부분이 투명하여 아찔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전망대는 강화군의 군조인 [저어새]를 형상화하여 디자인되었다. 저어새의 특징인 부리와 눈이 북한 쪽을 바라보고 있어 [손에 닿을 것 같이 가깝지만 갈 수 없는 북녘을 향한 비상]이라는 컨셉을 갖고 있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 한문희총대장 - |
>
교동도에 가장 높은 교동도의 진산으로 주민들의 신앙같은 산이다.
>
화개산(花蓋山259m)~교동도(喬桐島),
교동도는 고려시대부터 왕족들의 유배지였으며, 특히 연산군의 유배지로 유명합니다.
화개산(259m)은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북한령 연백평야가 지척인 관계로 주민들의 사랑이 넘치는 산입니다.
명칭은 ‘산정의 형태가 솥뚜껑을 덮어 놓은 것’ 같다 하였고 화개산 산정에는 `화개산259m, 표시석이 정상을 지키고 있으며
100여명이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눌 잔디 공간과 사방팔방으로 조망되는 막힘없는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으며 100미터 거리에 옛 봉수대 터가 있습니다.
정원내 전망대에서 잠깐 10분정도면 다녀올 수 있는데 아쉽게도 화개정원을 이용하여 나갈 수 없도록 높은 철조망이 성역으로 가로 막혀 있어
옥의 티로 여겨집니다. 화개산을 오르는 방법은 화개정원 구역이 아닌 교동향교 주차장에서~화개사~화개산 약30~40분소요를 이용해야 합니다. 참고 바랍니다.
>
▶교동향교(喬桐鄕校): 교동면 읍내리 148: 고려 인종(仁宗) 5년(1127년)에 창건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충렬왕(忠烈王) 12년(1286년)에 제거(提擧) 안유(安裕)가 왕을 따라 원(元)에 가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상을 처음 그려왔고,
김문연 등을 중원에 보내 선현과 72제자의 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각종 제기와 악기, 육경과 제자백가의 책, 역사서를 사들여 고려로 가지고 오게 했는데,
김문연 등은 서해 방면으로 귀국하면서 지금의 교동에 기착, 가지고 온 기물과 책들을 교동향교에 잠시 봉안하였다가 개경으로 이안하였다 한다.(참고바랍니다)
>>
>저어새를 상징한 화개정원입니다.
>
ㄷ대룡시장의 이모저모 사진전과 개요,
[대룡시장]은 황해도에서 교동도로 월남하였던 실향민들이 휴전 이후 북으로 갈 수 없게 되자, 황해 연백 연안시장을 본떠 만든 재래시장.
현재는 인구감소와 실향민 1세들의 대부분 작고로 그 자손들이 시장을 지켜가고 있다고. 예날 우리네 살아가던 모습과 옛 향수들이 그대로 전해지니 이발소, 만화방, 구멍가게,
다방, 극장, 놀이터, 소꿉놀이, 등등, 또한 1박 2일, 드라마 전설의 마녀, 장밋빛 연인들의 촬영지기도 하다. 거북당 빵집은 전설의 마녀 장면에도 나왔다.
|
교동도 대룡시장: 교동도에 하나밖에 없는 대룡시장은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의 모습을 재현한 골목시장이다. 규모로만 따지면 소읍보다도 작지만, 골목 곳곳에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벽화와 조형물, 오래된 간판의 모습들이 시골 풍경 그대로다. 400여m 짧은 골목에 있을 건 다 있다. 이발관과 미장원, 사진관과 전파사, 분식집과 통닭집, 시계점과 잡화점, 옷가게와 신발가게, 떡집과 분식집, 약방 등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길게 늘어서 있다. 외관은 물론 내부 모습도 1960~1970년대 시골 풍경 그대로여서 실향민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교동도에서는 유독 집마다 처마 밑에 제비집이 많다. 이러한 제비를 두고 실향민들은 그리운 고향에서 찾아온 반갑고 귀한 손님이라고 부른다. '평화와 통일'을 테마로 만든 교동제비집에서는 공연, 교육, 회의, 전시 활동 등을 위한 공간을 제공한다. 또, 야외무대와 갤러리도 있다. 이들의 활동에는 통일에 대한 염원과 고단한 실향민의 삶이 스며 있다. 교동이발관은 KBS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에서 은지원의 삭발 장면을 촬영했던 곳이다. 반듯하게 손으로 적은 철제 간판과 의자와 거울, 이발 기구들 모두가 예스럽게 보인다. 관광객들은 이곳에 들러 이발도 하고, 교동스튜디오에 들러 옛날 교복을 입고 흑백사진도 찍어 본다. 그리고 출출하면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떡집 좌판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가래떡을 사 먹기도 한다. 옛 향수를 느껴보기 위해서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대룡시장 탐방은 실향민의 삶의 체취를 공유하며, 옛 추억을 남겨보는 즐거움이 있다. 출처: 시솔길을 함께 걸어보실까요? |
>
교동도 교동대교,
교동대교(喬桐大橋): 인천시는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왕복 2차로의 교동 연륙교를 2008년 공사를 시작해 2014년 6월 완공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동대교는 길이2.11km 폭11.5m 왕복 2차선연륙교이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교동도가 교동대교 준공으로 인하여 모든 문화권이 달라지고 있으며
서울 인근의 명승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한없이 멀게 만 느껴졌던 교동도 이제 서광이 깃든 황금도이다. 이곳은 군사보호지역으로 군부대에서출입허가증을 교부 받아야 왕래할 수 있다.
>
심명회 2024년 강화도 춘절행사 협조에 감사드리고 친구들이 있어 행복한 여정이었습니다.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사초처럼 언제든 보고플 때 꺼내 볼수 있기에 입니다.
마음에 와 닿는다면 한 소절 이곳에 남겨두세요,
>
첫댓글 일행분들 대부분 화나신듯 총대장님 표정만 밝으셔서 보기좋아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