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가까운 걸작. 전쟁술의 찬란한 컬렉션.
이 싸움이 시작하기전, 한신은 모든 면에서 적에게 단 한가지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진을 시작했을 당시 3만에 불과하던 병력과 호왈 20만을 일컫던 조나라의 병력 차이는 조나라의 병력을 절반으로만 잡아도 3배는 차이가 났으며, 군대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정예병력이 이탈하는 바람에 우위를 가질 수 없었다. 한신조차도 배수지전에서 싸운 병사들을 시정잡배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지리적인 면에서는 정형관이라는 요지를 장악하고 있는 진여를 무너뜨리기 힘들었으며, 지키는 입장인 조나라군에 비해 원정군인 한신은 계속해서 전투를 치르고 이동하느라 여러가지로 힘이 든 상태였다. 그러나 결과는 한나라의 완벽한 승리였다.
주목할 점은 이 전투에서 한신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투의 기본등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이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불리한 전력으로 적에게 승부를 건 일부터 해서 강을 등 뒤에 두고 진을 치는 배수진, 병력의 집중은 커녕 전투 직전에 조참을 파견한 일에서부터 경기병대의 파견 했던 일, 또 적군이 공격을 퍼붓을 수도 있는 판국에 1만여 병력을 앞질러 보내 진을 만들게 했던 일 등, 거의 객기에 가까워 보였던 행적들이 있다.
그러나 대단한것은 이러한 작전들이 될대로 되라고 질러보는 정도가 아니라, 적의 생각을 완전히 계산하고 벌인 작전 이라는 점에 있다. 한신이 한 군리에게 '적이 공격해 오지 않을 이유' 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한신은 적의 행동을 모두 예측한 상황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부대의 분할과 배수진, 이후 기습과 섬멸에서 '되면 좋고 아니면 끝장' 이라는 식으로 질러 보고 마는 순간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부 한신의 손에 짜여진 각본에 따라 순서대로 진행되었을 뿐이다.
패배를 당한 조나라군은 한신의 리얼한 연기에 당해 예비대를 잔뜩 남겨두지 않고 진격했다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막장 짓을 한것도 없다. 특별히 이상한 짓을 하다 망한것도 아닌 정석대로 압도적인 대군을 이용해 한신을 공격했고, 한군이 물러나자 도망갈 곳도 없는 한군을 정석대로 밀어부쳤을 뿐이다. 그런데 전형적으로 공격을 하다보니 대패를 당했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즐기는 유학자라 정면 승부를 했다는 진여에 대한 사서의 묘사가 병맛스럽기는 하나, 딱히 수비대신 전투를 선택한 진여가 정말 개막장짓을 한것도 아니었다. 이좌거의 계략대로 한군을 말려죽이는 작전으로 나갔다면 거의 무조건 이기거나 한신을 퇴각시켰을 가능성이 높긴 하나, 그냥 싸운다쳐도 조나라가 한군에 밀리는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병력, 질, 지리적 요견 등 모든 면에서 나으면 나았지 부족한 부분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수비전을 택했는데 생각만큼 쉽게 진행되지 않고 전투가 질질 이어지게 된다면, 한신도 괴롭겠지만 딱히 기반이 견고하가도 하기도 힘든 혼란기의 조나라 역시 썩 좋을것도 없었을 것이다. 거의 조나라 왕이나 다름없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조왕이 아니라 조왕 조헐의 신하였던 진여의 입지에도 문제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
진여의 문제라고 한다면 한신과 싸웠다는 자체보다는 한신과 싸우게 했던 자만심이 문제였을 것이다. 한신의 병력이 형편없고 원정군이라 지쳤을것이라고만 여기며 싸움에 나섰고, 1만 부대가 따로 움직일 때도 대장인 한신이 달아날까만을 염려하며 한번에 적의 대장을 물리치기 위해 싸움을 걸지 않았다. 또한 적의 기상천외한 배수진에 대해서도 조나라군은 비웃기만 할뿐이었다. 이렇게 적을 과소평가하고 방심만 하고 있었으니 한군의 경기병들이 정형관을 급습할때 이를 방비할 마땅한 수비병이 안보였다는 점도 이해가 갈만 하다.
한신의 대단한 점은, 적의 이러한 방심, 그리고 그 방심을 불러일으킨 자신의 열세를 오히려 무기로 사용해서 대역전을 일구웠다는 점에 있다.
삼십육계(三十六計) 중에서는 패전계(敗戰計)라고 할만하다. 만일 한신의 군대가 더 강력했다면 일부러 수비작전 대신 정면승부를 하러 나오지도 않았을테고, 배수진을 꾸리기 위해 1만명의 부대가 움직였을 때 조군이 그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도 않았을 테고, 적을 섬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정형관을 그렇게 비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신은 오히려 병력이 열세하고 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전투였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마지막 국면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도 포위 작전을 벌이며 적을 섬멸했다. 심지어 저수 강가에서 진여를 죽이고 조헐을 양국까지 추격해서 죽임으로써승리를 이용하는 완성하는 추격전까지 벌이며 할 수 있는 모든것을 다 했다. 그야말로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국면을 만든 블록버스터 급 작품이었으며,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첫댓글 이런것을 보면서 생각하는건데 요즘이야 뭐라고 할까 전적이라는게 데이터나 기록으로 많이 남고 심지어는 영상으로 남아있어서 상대의 패턴이나 수준을 알수있어서 그것에 대비해고 역이용할수있다지만 이 시대에서는 솔직히 상대를 직접 보지도 그렇다고 엄청난 양의 전적을 기록해놔서 그걸 볼수있는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상세하게 적 장수의 패턴이나 수준을 마치 독심술처럼 알고 작전을 펼쳤을까요? 이런 작전을 짰다는게 진짜 엄청난 배짱이나 자신감이 아니면 확실한 명장이 될수없겠구나 라고 생각하게되네요..진짜 이 전투에서 한신의 생각이 하나라도 틀렸다면 한신 자신의 목숨이 위험했을경우였을텐데....
아무래도 옛날이다보니, 지연, 학연, 혈연 등의 인맥 등을 동원해서 정보를 캐낸게 아닐까요. 같은 동향 사람이라든지 동문수학한 사이라든지, 혈연 관계게 있는 친족,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진영에도 있을 수 있고,
또 자기 부하들도 그쪽과 연이 닿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므로 그들을 통해 평소의 성격이라든지 전투 선호 방식 등을 듣고 그걸 토대로 작전을 짰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요즘보다 유동성이 적은 사회이다보니 좀 이름난 사람이면 그 고장에서 좀 날린다는 명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테고요.
"정형전투"가 초한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볼 수 있군요.
삽화와 지도 덕분에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