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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사(文士)는 모두 시문으로 업을 삼았었는데 오직 문충공(文忠公)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처음으로 성리(性理)의 학문을 창시하였다. 국조에 이르러서는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매헌(梅軒) 권우(權遇) 형제가 경학에 밝았으며, 또 문장에도 능하였다. 권근은 사서오경의 구결(口訣)을 정하고, 또 천견록(淺見錄),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을 저술하여서 경(經)을 우익(羽翼)한 공이 적지 않았다.그 뒤에 성균관 교육을 맡았던 사람은 황현(黃鉉),윤상(尹祥),김구(金鉤),김말(金末),김반(金泮)이었다. 황현의 학문은 듣지 못했고 윤상이 경학에 가장 정밀하고 글을 지을줄 알았다. 김구와 김말도 모두 정밀했으나 김말은 고루함을 면치 못하였는데, 당시의 의논은 서로 우열을 양보하지 않아 다투기를 그만두지 않았고, 가르침을 받는 자도 역시 양편을 취하였다.두 사람이 모두 세조(世祖)의 지우를 받아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김반은 대사성이 되었다가 늙어서 치사하고 마침내는 고향에서 굶어 죽었다. 또 그 다음으로 공기(孔頎),정자영(鄭自英),구종직(丘從直),유희익(兪希益),유진(兪鎭)이 있었는데 공기는 익살스럽고 이야기하는 데는 능하였으나, 글짓기에는 비록 짤막한 편지나마 한 마디의 사연도 만들지 못하였다.일찍이 남의 편지를 받았으나 답서를 쓸 줄 모르므로 생원 김순명(金順命)이 마침 옆에 있다가 보고서, 공기가 말하는대로 답서를 적었는데 말뜻이 매우 알맞았다. 공기가 탄복하면서, “자네의 학문이 나한테서 나왔는데, 자네는 잘 이용하지만, 나는 이용하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푸른 물감이 쪽에서 나왔지만 쪽보다도 더 푸르다는 말[靑出於藍]과 같구나.” 하였다.정자영은 다만 오경(五經)만 아는 것이 아니라, 또한 여러 사서(史書)도 넓게 섭렵하였고 벼슬은 판서까지 하였다. 구종직은 용모가 기이하고 컸으므로, 세조에게 발탁되어 마침내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유희익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고, 유진은 더구나 고집불통이었다. 근래에 노자형(盧自亨),이문흥(李文興)이 오랫동안 학관(學官)으로 있었는데, 성종(成宗)이 그들의 나이가 많은 것을 우대하여 마침내 당상관으로 올렸으며, 모두 고향으로 물러가서 죽었다.
● 김종직(金宗直)은 학문하는 사람이 아니고 평생사업이 다만 문장(文章)하는 데에만 있었다. 김굉필(金宏弼)은 실천하는 데에는 비록 독실하였으나, 학문을 닦는 공부에는 극진하지 못한 듯하다.
● 조광조(趙光祖)는 천품이 매우 뛰어났으나, 학력은 심오한 데에 이르지 못한 듯하다. 그가 소격서(昭格署)를 논한 한 가지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군신의 의리에 어찌 이같이 할 수 있으랴. 이것은 정암(靜庵)이 조금 지나친 곳이 있기 때문이다.
● 이언적(李彦迪)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함과 실천함이 모두 극치에 도달하였다. 만년에 와서는 학문이 더욱 고명하고 덕행이 더욱 높았으니 회재(晦齋.이언적)의 학문이 마땅히 동방의 제일이다.
● 서경덕(徐敬德)은 ‘기(氣)’를 논하는 데에는 정밀하여 여지가 없었으나, ‘이(理)’에는 투철하지 못하였다. ‘기’를 주장함이 너무 지나쳐서, 혹 ‘이’가 ‘기’로 된다고 인식하기도 하였으나, 우리 동방에서 이보다 앞서 이기의 학설 이론을 세워 저술한 것이 이에 이른 이가 없었으니, 이기를 발명한 것은 이 사람이 처음이었다. 다만 말을 할 때에 자부심이 너무 지나친 것은 그가 학문상에 얻은 바가 깊지 못하기 때문인 듯하다.
● 조식(曺植)은 견해가 실상 장주(莊周.장자)의 사상과 같았다. 임훈(林薰)이 이황(李滉)에게 말하기를, “남명(南冥)이 제자를 시켜서 음부(淫婦)의 집을 헌 것은 매우 부당하다. 나 홀로 고사리나 캐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니, 이황이 말하기를, “그 말이 매우 적당하다.” 하였다.
● 정지운(鄭之雲)은 자품이 매우 뛰어났으나, 다만 학문의 본원(本源)에는 소루하였다. 이황이 지운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정이(靜而)가 소루한 곳은 너무 소루하여서 세속의 비웃음과 지목을 받았으나, 좋은 곳은 매우 좋아서 우리들이 미치기 어렵다.” 하였다.
● 기대승(奇大升) 과 이정(李楨)은 태도가 독실하고 정중하여 인(仁)에 가까웠으나, 옛 것에 따르고 규범만을 지켰으며 학문상의 큰 강령에는 투철하지 못하였다. 조식은 남화(南華.장자의 별칭)의 학설을 주장하였으며, 노수신(盧守愼)은 상산(象山. 송나라 陸九淵)의 견해를 고수하였다.
● 정암(靜庵)과 화담(花潭.서경덕)은 학문상으로 스스로 깨우친 맛이 많았고, 퇴계는 모방한 맛이 많았다. 정암은 재질이 영특스럽고 뛰어나서 학(學),도(道)의 전체를 바라보기는 하였으나 완전히 깨우치지 못한 점이 조금씩 있었다. 또 주자(朱子)의 학설을 깊이 믿지 못하여 이(理)와 기(氣)가 한 가지라고 보는 병통에 조금 빠졌다. 퇴계는 주자의 학설을 깊이 믿어 정밀하고 자상하게 한데다가 공부를 하기도 또한 깊었으니, 도(道)의 전체에 본 것이 없다고 할수 없다. 그러나 환하게 깨달아 활연히 관통한 곳에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이와 기가 서로 발(發)한다.”, “이가 발하면 기가 따른다.”는 등의 학설은 도리어 지견(知見)에 누가 되었다. 화담은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으나, 독실하고 정중함이 부족하여 글을 읽거나 이치를 궁구함에 있어 문자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의 의사를 많이 나타내었다.이와 기가 서로 분리하지 않는 미묘한 곳을 환하게 보았으니, 딴 사람이 글을 읽어 모방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그러므로 “담일(湛一)하고 청허(淸虛)한 기가 물건마다 없는 데가 없다.”고 하여, 스스로 천고의 성인들도 성현도 다 전하지 못하였던 묘리를 터득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위에 다시,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 일절(一節)과 선성성(善成性)하는 이치는 물마다 없는 데가 없으나 담일(湛一)하고 청허(淸虛)한 기는 있지 않는 데가 많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는 변함이 없으나 기는 변한다.원기(元氣)는 생기면 자꾸 나서 쉬지 않아, 먼저 간 기는 지나가고 오는 기는 계속하여, 지나간 기는 벌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화담은, 한 기가 언제나 존재하여 지나간 것이 없어지지 않고 다음에 오는 것이 계속하는 것도 아니라 하였으니, 이것은 화담이 기를 이라고 해도 된다고 인정한 병통이다.퇴계는 옛 사람을 본뜬 것이 많았던 까닭에, 그의 학설은 구애되었으나 삼갔고, 화담은 스스로 깨침이 많았던 까닭에 그의 말은 자유스러웠고 거리낌이 없었다. 조심한 까닭에 실수가 적었고, 거리낌이 없는 까닭에 실수가 많았으니, 차라리 퇴계처럼 모방은 할지언정, 화담처럼 스스로 깨친 것은 본받지 말 것이다.
● 영남(嶺南)에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맥(文脈)이 자못 달랐다. 퇴계의 문하에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이 명망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출입하면서부터는 다시는 학문을 강론하지 않았다. 덕계(德溪) 오건(吳健)은 학문과 행실이 최고였으며 두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였으나, 일찍 죽어서 전해진 것이 없고 월천(月川) 조목(趙穆)은 한가롭게 시골에 물러와서 오래오래 살았으나, 선비들이 심복하지 않았으니, 또한 제자도 없었다.남명의 수제자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이 우두머리가 되었지마는, 명망이 모두 정인홍(鄭仁弘)에 미치지 못하였고, 양강(兩岡.한강과 동강)은 퇴계도 겸해서 받들었으므로 인홍과는 조금 달랐다. 인홍이 죽음을 당한 뒤에 영남 하도(下道)에는 학문이 없었고, 오직 한강만이 흠이 없는 사람이 되었으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그의 수제자였는데, 현광이 죽은 뒤에는 학문을 계술(繼述)한 자가 없어서 영남의 학문이 여기에서 끊어졌다. 註: 여헌(旅軒.張顯光)의 이후는 미수(眉叟.許穆), 성호(星湖.李瀷), 순암(順菴.安正福), 하려(下廬.黃悳吉), 성재(性齋.許傳)로 이어졌다.
● 호남(湖南)은 상도(上道)에는 일재(一齋) 이항(李恒)이 있었고, 하도(下道)에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있었는데, 대승은 일찍 죽어서 학문을 강론하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으며, 일재는 제자는 많았으나 오직 김천일(金千鎰)만이 절의로 저명하였을 뿐 학문은 전함이 없었다. 정여립(鄭汝立)이 그 뒤에 나와서 이발(李潑),정개청(鄭介淸)과 함께 상응창화(相應唱和)하여 온 도(道)에 기세를 부렸으나 정여립이 반역하게 되니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호남 풍속이 경박하여 본래부터 유술(儒術)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여립이 패망하니, 사람들이 학문하다가 죽게 된 일의 처음 시작이라고 하여 호남의 학문은 이로부터 없어졌다.
● 서류(庶流)로서 학문한 사람은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척약재(惕若齋) 김근공(金謹恭),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정산(鼎山) 박동(朴洞)이었고, 천인(賤人)으로서 학문이 있는 사람은 고청(孤靑) 서기(徐起),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이었다. 익필은 타고난 자질이 투철하고 총명하여 정미한 이치를 분석하고, 시사(詩詞)도 뛰어나게 묘하여서 세상에 많이 전송되었으며, 배우는 자도 역시 많이 그를 따랐다. 다만 그 집안이 대대로 흠이 있었으나 덮어 감추기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몸이 천한 무리에 있으면서 함부로 잘난 체하였다.안씨(安氏)의 자손이 송사(訟事)를 일으키니, 귀봉이 형제의 가족 백여 명과 함께 망명,도주하여 숨었으므로 선조(宣祖)가 명하여 잡아서 희천(熙川)에 귀양보내었다. 왜란을 만나서 석방되었으나, 오히려 큰 소리와 거리낌없는 이야기로 당시의 일을 비난하고 나무라니 그가 이르는 곳마다 문간에 신발이 가득하였다.
● “세상 사람의 상정(常情)으로 말하자면, 선비란 자는 진실로 얄미운 것입니다. 정치를 논하라면 멀리 당(唐),우(虞)의 고사를 인증하고, 임금에게 간하라면 어려운 일만을 권유하며, 벼슬로 얽어 매어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은총을 내려도 즐겨하지 아니하며, 오직 자신의 뜻대로만 행하고자 하니, 진실로 임용하기 어렵습니다. 그 중에는 혹 과격한 자도 있고 혹은 오활한 자도 있으며, 혹 명예를 좋아하는 자가 있어 그들이 조정 반열에 끼기도 하였으니, 어찌 전하께서 미워하지 않겠습니까.속된 선비는 당시의 논의에 순종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윗사람에게 거슬림이 없고 임금 섬기는 수단에만 익숙하여서, 오직 명하는 대로만 따릅니다. 때문에 잘못이 버릇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과격함을 일삼지 않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이런 것을 진실로 가까이하시고 신임합니다. 비록 그러하오나, 선비는 의(義)를 좋아하고 속된 무리는 이(利)를 좋아하니, 이를 좋아하면서 전하를 사랑하는 자가 있을 수 없으며, 의를 좋아하면서 전하를 잊어버리는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루 아침에 화란(禍亂)이 일어나면 앞장서서 전하를 구하고 의를 취하여 생명을 버리는 자는, 반드시 선비 중에서 나왔지 속된 무리 중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았습니다.아아, 의(義)를 좋아하는 자는 나라를 위하고, 이(利)를 좋아하는 자는 제 가정을 위하니, 나라를 위하는 것과 제 가정을 위하는 것을 분별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조정 신하로서 녹록하게 세파에만 따라 건의하는 바가 없고, 전하에게 허물이 있어도 감히 바로잡지 못하는 자는 대개 제 집만을 위하는 자는 그 이를 잃을까봐 두렵기 때문이며, 그 곧은 말과 낯빛으로 머뭇거리거나 흔들림이 없이 품은 생각을 반드시 아뢰는 자는 대개 나라를 위하는 자로서, 그 의(義)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오직 이것을 전하께서 밝게 분석하지 못하시면, 참소와 아첨은 그 틈을 잘 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가정만을 위하는 자는 은총과 발탁을 많이 받고, 나라를 위하는 자는 형벌과 죽음을 많이 당하니, 진실로 슬픈 일입니다.” 하였다.
● 효종(孝宗)이 일찍이 사대부들이 술을 좋아하고 쓸데없는 말을 함을 걱정하였다. 이후원(李厚源)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조광조(趙光祖)가 국사를 담당하니 사람들이 힘써 행실을 고치지 않는 이가 없고 이이(李珥),성혼(成渾)의 시대에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임금이 선비를 숭상한 효과가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 만약 덕을 쌓은 어진 선비가 조정에 있다면 어찌 감히 길거리에서 주정을 부리며 농지거리로 일을 삼는 폐가 이같을 것입니까.” 하였다.
● “후세의 선비가 당시의 소용에 어찌 모두 긴요하겠습니까. 금전과 곡식을 관장하게 하여도 나라의 쓰임새를 반드시 넉넉하게 못할 것이며, 갑옷과 무기를 다스리게 하여도 군정(軍政)을 반드시 훌륭하게 못할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경전(經傳)을 말하고 옛 것을 좋아하며, 명예와 행실을 힘써 닦는 선비가 조정에 많이 있으면, 벼슬아치가 공경하고 거리끼는 바가 있게 되며, 백성들이 보고 본받는 바가 있어서 세상의 도의와 풍속이 크게 무너지기에는 반드시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그것을 어찌 국가의 조그마한 도움이라고만 하겠습니까. 지나간 해에 두어 차례 천거하여서 몇 사람 등용되었으나, 고을 원이나 하급 벼슬을 담당한 데에 불과하였고, 대사헌이나 감사의 직책에는 마침내 등용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심이 옛날 같지 아니하고 세속 습관이 경박하기 때문이니, 표치(標置)가 조금만 달라도 지목하는 논의가 먼저 나오며, 더구나 조정에서 하는 짓이 시끄러워서 발붙이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거취를 경솔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지난번 서원리(徐元履),윤순거(尹舜擧),정양(鄭瀁)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천거를 받아서 벼슬길에 나왔으나, 나온 뒤에는 지위에 따라 직분에 봉공(奉公)하였으나, 다만 한산한 관직에만 있을 뿐 좋은 벼슬은 반드시 사양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지금 국사를 걱정하는 자는 반드시 붕당이라고 하지마는, 신은 도학이 쇠퇴하는 것이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진실로 바람처럼 고동시켜 도덕을 진작하셔서 이목을 조금 새롭게 함이 없으면 또한 무엇으로 이 위기를 구하시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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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긍익은 조선후기 대략 1770년대에 당시까지의 역사를 여러 서책등 전거(典據)들을 밝히며 기존의 역사기록들을 초출(抄出),인용하여 연려실기술을 지어 역사를 객관화 하려 노력하였다. 이것이 연려실기술 자체를 부정하거나 시비하지않는 이유일것같다. 상기 전재문에서는 편의상 연려실기술 출전을 표시하지 않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