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 윤5월 9일 갑인 3번째기사 1770년
운남군 진이 사릉에 비각이 없는 일로 상소하다
운남군(雲南君) 이진(李榗)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동서 각릉(各陵)에 비(碑)를 후일에 세운 것은, 곧 우리 성상(聖上)께서 즉위(卽位)하신 뒤에 처음으로 시행한 바인데,
사릉(思陵)156) 에 있어서는 유독 비석이 없으니, 후일 설치할 때에 어찌하여 이 일에는 미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장릉(莊陵)157) 에는 어필(御筆)의 비석이 있다고 하는데,
장릉과 사릉 두 능은 의리(義理)에 있어 다름이 없습니다.
선조(先朝)의 어제시(御製詩)에 이르기를, ‘능명(陵名)을 추상(追上)하니 곧 장릉과 사릉인데,
묘도(墓道)의 석물(石物)은 모두 후릉(厚陵)158) ·경릉(敬陵)159) 의 의식에 따랐네.[陵名追上卽莊思 象設皆從厚敬儀]’라 하였고,
어주(御註)에 이르기를, ‘석물(石物)의 체제는 후릉에 따르고, 수효는 경릉에 따랐다.’ 하였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우리 성고(聖考)께서 정축년160) 에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특명하신 성전(盛典)은 만세(萬世)에 내세울 만한 일이요, 그 높이 받드는 의식에 있어서도 두 능에 차이가 없음은 곧 이 어제시에서 성의(聖意)의 소재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더구나 후릉과 경릉의 비석도 성상께서 을해년161) 에 뒤따라 세우셨으나, 유독 사릉에만 지금까지 빠졌습니다. 원하건대 미처 시행하지 못한 성전을 속히 거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정릉(貞陵)162) 에 비각(碑閣)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상고하여 아뢰라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정릉에 비를 세운 사실이 없고, 지장(誌狀)에 먼저 기재하라고 특명하였다고 한다. 어찌 다만 정릉과 사릉뿐이겠는가? 공릉(恭陵)163) ·순릉(順陵)164) ·온릉(溫陵)165) 의 경우 모두 지장에는 기재되었으나, 비는 세우지 않았는데, 이것이 어찌 다만 세울 겨를이 없어서 그러하였겠는가? 일의 체통이 매우 그렇지 않으니, 의조(儀曹)166) 로 하여금 먼저 동쪽의 두 능과, 다음에 서쪽의 세 능에 곧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7책 114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55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註 156]사릉(思陵) : 단종 비(端宗妃) 정순 왕후(定順王后)의 능.
[註 157]장릉(莊陵) : 단종(端宗)의 능.
[註 158]후릉(厚陵) : 정종(定宗)과 그 비 정안 왕후(定安王后)의 능.
[註 159]경릉(敬陵) : 덕종(德宗)과 그 비의 능.
[註 160]정축년 : 1697 숙종 23년.
[註 161]을해년 : 1755 영조 31년.
[註 162]정릉(貞陵) : 태조(太祖)의 계비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능.
[註 163]공릉(恭陵) : 예종 비(睿宗妃) 장순 왕후(章順王后)의 능.
[註 164]순릉(順陵) : 성종 비(成宗妃) 공혜 왕후(恭惠王后)의 능.
[註 165]온릉(溫陵) : 중종 비(中宗妃)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능.
[註 166]의조(儀曹) : 예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