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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5 장
토닥토닥 (1)
(롬8:7-11)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한국에 와서 “다큐멘터리 동행”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유익하게 보고 있다. -> 우리 사회의 가장 힘들게 살아가는 1%에 해당하는 극빈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취재해서 보여주는 내용.
△ 조그만 승용차 안에서 열여섯 살인 장남을 비롯한 여덟 식구가 숙식하는 가정 △ 사업 실패로 영하 날씨에도 고3 수험생인 딸과 두 살짜리 젖먹이와 함께 공원 화장실에서 노숙하는 40대 가장의 이야기 △ 가난이 싫어서 가출한 엄마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학교도 제대로 못가고 정신지체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아빠를 돕는 아홉 살짜리 아이, △ IMF 경제위기 때 서울역으로 내몰린 6천 명의 노숙자 △ 당뇨합병증인 간경화로 이미 복수가 남산만큼 찬 아빠를 위해서 뒷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연탄이 다 떨어진 비닐 하우스 방을 따듯하게 데우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의 모습 △ 아이 둘이 그런 아빠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겠다고 구청에서 나눠준 식권을 자기들이 안 먹고 아빠가 좋아하는 것을 시켜서 도시락 통에 그대로 쌓아놓은 채 자기들은 찌꺼기만 먹고 아빠에게 그 음식을 드리는 모습
-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용하다 싶을 만큼 처절한 사연을 갖고 있다. /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가족 간의 사랑과 신뢰였다. /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자식만큼은 굶거나 얼어 죽게 하지 않겠다는 아빠와 엄마의 사랑 / 그러한 사랑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감사와 성숙한 성장, 이러한 것이 그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한 것들이 그들을 웃게 하는 것이었다.
- 반면에 자기 몸 하나 살아 보겠다고 가족들 전부를 버리고 도망가는 부모 같지 않은 부모의 모습도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부모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망가져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 대견한 것은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도 열심히 살더라는 것이다.
- 전자의 아이들과 후자의 아이들이 하는 열심의 질이 다르다. / 전자의 아이들은 자기들을 위해 몸이 부서질 정도로 고생하는 부모에 대한 감사의 열심을 부리는 반면, / 후자의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열심을 부린다. // 전자의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들을 그냥 버리고 그들만의 안위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면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 고통을 감수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 그 어린아이들도 부모가 자기들을 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알고 있다. // 후자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자식도 초개(草芥)처럼 버리는 악한 부모의 그림자 안에서 오직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 그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아버지를 알고 그분의 사랑을 아는 하늘 자녀들의 모습을 보는 동시에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그분의 사랑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어라고 몸을 굴러대야 하는 율법주의 신앙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한쪽은 사랑에 반응하는 현실이고 다른 한쪽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 오늘날 교회의 신앙이 거의 후자에 가깝다. 하나님의 사랑은 알지도 못하고 그냥 버림받은 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와 자원과 능력을 발휘하며 불태우며 안간힘을 쓴다. / 둘 다 똑같이 가난하고 똑같이 어렵다. / 그런데 한쪽에는 부모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감사가 있다. / 그런 가정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웃음꽃이 핀다. 오히려 어떨 때는 그게 부러울 때가 있기도 할 정도이다. / 세 살짜리 아이가 온종일 삶은 달걀 하나밖에 먹일 수 없는 그 엄마의 미안한 마음을 헤아려서 배가 고픈데도 엄마한테 배고프다는 말을 안 한다. 카메라 감독이 넌지시 “너 진짜 배 안고파?”라고 물어보니 아이가 그때야 배는 고프지만 엄마가 나한테 미안할까 봐 배고프다는 소리를 안 한다고 한다. 불과 세 살짜리 여자아이가 말이다. 그것을 보면서 그 아이의 양식은 다른 게 아니라 엄마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삶은 달걀 500개보다 더 그 아이를 배부르게 하는 건 엄마의 사랑인 것이다.
- 홀로 고생하는 아빠를 돕기 위해서 주말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전교 1등 여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를 공부하게 하는 건 어떤 족집게 과외나 고급 일대일 과외도 아닌 아빠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라고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 부모의 사랑이 빠진 냉기만 흐르는 가정은 너무나 춥고 어둡다. 그러한 냉기를 뚫고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족들의 모습 속에서는 섬뜩한 살기까지 느껴진다.
- 이러한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 중요한 건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이들의 가정 속에서는 그것이 그들을 묶는 힘이 되고, 다른 가정에서는 살기로 변한다. /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우리의 희로애락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흐르는 사랑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이 역사를 경험하게 하시면서 바로 그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그것에 감사와 찬송으로 반응하는 아들과의 관계를 가르치기 원하신다. / 진짜 너희들을 행복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오라는 것. 거기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행복과 기쁨과 안식이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기 원하신다.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부적인 현상이나 환경 또는 상황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올바른 사랑의 관계이다. / 진짜 행복, 진짜 기쁨은 한마음, 그 마음에서 주어지는 영적 생명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형인 세상 속에서 가르치고자 하신다. /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그분의 사랑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세상에서 너무 행복하면 안 된다. / 내가 볼 때 이 세상의 보편적 현실은 “다큐멘터리 동행”이라는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하위 1% 극빈자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 이 세상은 하늘의 풍요를 담을 그릇이 못 된다. / 성경은 이 세상의 현실을 눈멀고 귀먹고 가난하고 병들고 어둡고 황량하고 고통과 슬픔과 눈물이 가득한 곳이라고 묘사한다. / 나중에 하나님나라가 오면 그것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것들로 가득 찬 곳이 바로 세상이다. 심지어 이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으로 번영과 성숙과 발전을 추구하고 성취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 풍요는 아니다.
“너희가 부요하다고 하나 실상은 벌거벗었고 가난한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하나님의 일침 -> 이 세상이 부요라고 풍요라고 자랑하는 것은 사실 가난이다. / 이 세상은 하늘의 행복과 기쁨, 안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못 된다. 그것은 진짜 행복이 아니다. /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그걸 알려주고 싶어 하신다. / 환경이나 상황, 외적 성취 정도에 따라 발생하는 행복이나 기쁨, 만족 같은 것은 사실 허상이며 안개 같은 것이다. / 어찌 보면 그건 진짜 행복과 진짜 기쁨을 호도하기 위한 미혹에 가까운 것이다. / 진짜 행복과 기쁨을 기대하지 않게 만드는 상황이나 환경에서 오는 절망이나 좌절이나 고통 등도 사실은 진짜 절망이나 진짜 고통을 호도하기 위한 가짜이다.
진짜 행복, 진짜 기쁨, 진짜 안식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과 사랑을 알아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다. 그게 하늘의 행복, 하늘의 기쁨이다. /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상황이나 현실, 거기에서 오는 어떤 감정적인 흐름이 아니다.
- 우리는 그런 것에 휘둘리고 있다. /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진짜 불행이나 고통이나 절망은 그런 가난과 질병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께 버림받고 그분의 사랑이 없는 곳에서 영원을 살아야 하는 영적인 것인데도, 이 세상 아담들은 육적 환경과 육적 성숙, 육적 실패와 육적 성취가 주는 그런 감정 따위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
- 진짜 가치는 세상의 세계관으로 판단하는 외적인 성공과 실패, 번영과 퇴보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현상들 속에 심겨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계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다. 그것으로 슬퍼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관심이 없다.
-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꿈틀대는 사랑과 희망의 모습이 당사자들이나 그 삶을 접하게 된 누군가에게 진리의 일면을 교훈해 주고 있다면 그 삶이 그저 가난하고 초라한 삶이라고 판단하면 되는가? -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가난이 죄란다. 진짜 가난은 죄인가?”
- 가난이 진짜 죄인가? 그게 정말 죄이며 악인가? 가난은 꼭 어두운 것이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그러한 삶 자체를 누군가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한 도구로 쓰시는 것이라면 그게 진짜 가치 없는 것일까?
- 이 세상의 삶은 찰나라고 한다. 그런데 그 찰나의 삶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면 그것이 진짜 가치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속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래도 ‘왜 나야’ 하는 그런 불만은 있을 수 있다. 물론 당사자들은 힘들 것이다.
- 인생이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먼지에 불과했던 어떤 존재의 삶이 하나님의 진리 계시에 사용된 것 자체가 영광일 것이다. / 어떤 처지에서든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 것은 분명 영광이다. 어떤 이들은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삶이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끝을 보여주는 역할로 쓰임을 받는다면, 우리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불공평해 누구는 저렇게 살게 하고 누구는 이렇게 살게 하고”라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 현상계의 모든 현상과 사물은 단지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 모든 것은 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심지어 죄와 악, 가난과 어둠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사용될 때 그 자체로 가치를 발휘한다. 죄밖에 없는 세상에서 하늘의 의를 무엇으로 가르치나?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 세상에 의가 없다. / 의가 없는 세상에서 하늘의 의를 무엇으로 가르치나? ->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서 그것이 아닌 것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
- 생명은 예수 안에만 있다. -> 생명이 없는 이 세상에서 생명을 가르칠 수 있는 건 선악의 열매를 먼저 주어 그것이 아닌 것을 생명이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다.
- 교회에서 우리가 말씀을 통해, 율법을 통해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은 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 그걸 가르쳐주지 않고 무조건 죄짓지 말라고만 하면 어떻게 하나? / 죄가 뭔지를 알아야 의를 알고 생명을 아는데 무조건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성숙해야 한다고, 성화되어야 한다고만 가르치면 어떻게 그들이 생명과 의를 알겠는가.
- 오늘날 기독교의 목적과 가르침, 그것도 온전한 교회의 가르침은 전부 거기에 머물러 있다. 율법도 성전도 죄도 악도 예수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서 하늘의 묵시를 계시하는 데 사용되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 죄가 아니고 율법이 아니고서 여러분이 어떻게 알 수 있나? 그것은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착해지라고 하고, 언제나 먼저 그리 살아 보라고 해보라. 그것은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라 종교의 목적이다. 아담들의 목적일 뿐이다. 인간 보편의 자존심 챙기기. / 진리 안에서 그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읽어낼 때 비로소 그것은 가치를 갖게 된다.
- 어거스틴이 “오 거룩한 죄여”라고 하였다. 내가 “죄” 없이 어떻게 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알 수 있겠는가? / 예) 하나님이 진리의 차서를 담아 이스라엘에게 주신 성전을 통해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보고 깨닫는 이에게 그 성전은 가치 있는 선물이다.
- 선지자들이 꼭 성전 마당에서 설교를 한다. “이거 아니야, 언제 하나님이 이런 제사 드리라고 했니?” / 그들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었다. / 율법에도 분명히 거기서 제사를 드리라 했는데 선지자들은 “아니야, 하나님이 그 말한 거 아니야. 사실 하나님의 진의는 그게 아니었단다”라고 이야기했다. / 그에게 그 성전은 진리이다. 그 성전을 진리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옛 성전은 죄이다. 거기서 안 나오면 죽는다.
- 하나님은 그들이 성전에서 행하는 일을 악이라고 하셨다. 그것을 찔레요, 가시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 말을 듣고 거기서 나오라고 하셨다. / 어떤 이들은 성전 안에 들어가서 진리를 누린다. /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살려주는 산 돌이 되는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거친 돌, 멸망시키는 돌이 된다.
- 직역: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멸망시키는 돌이 된다. 그 예수는 곧 성경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성경이 생명의 책(단수)이 되는데 계시록 20장에서 보듯이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의 책이다. /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몰몬경 같은 다른 책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보는 성경을 의미한다. 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그 책들은 바로 성경이다. / 어떤 이들에게는 성경이 66권이 된다. 책들. (복수) /
- 어떤 이들에게 “이거 다 그 얘기네, 단어도 다 그 이야기고 심지어 문자 하나가 그 복음만, 그 진리만 이야기하고 있잖아”라고 하면 그 책은 단수이고 생명이다. /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면서 그러한 세상 속 부유함이 진짜 부요함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을 통하여 배운 자주장사 루디아나 마가 같은 사람들에게 그 부, 재물은 복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부와 재물에 모든 것을 의존하려고 했던 어리석은 부자에게 그 재물은 악이다. 그 자체가 저주이다. / 가난하고 부유한 게 문제가 아니다. 이왕이면 열심히 일해서 부자로 살라. 청빈은 무슨 청빈인가? 이왕이면 능력 키워서 잘 벌어서 살라. 그건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은 진리를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