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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나는 물을 붓고 끈을 잡아당겼더니 말대로 따듯한 음식이 만들어졌다. 발전기는 누군든 가지고 있고, 지식만 있다면 여기저기 부품을 뜯어와(물론 상대적으로 멀쩡한 걸로.) 간이 발전기 따위를 만들어 전기로 물을 끓이거나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따듯한 음식을 먹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다.
그 말은 보통 안전한 곳에서 헬멧을 벗고 공기를 마시며 먹는다는 의미였으니까. 냄새가 배거나(차라리 그걸 선호하기도 하거나 아예 신경쓰지도 않지만.)하는 걸 걱정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쩝쩝쩝.. 꿀꺽 꿀꺽.. 후릅..
여기 저기서 먹는 소리가 바빴다. 대부분 음식을 다른 사람과, 혹은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먹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눈치를 보거나 묘하게 어색한 모습들이 있었지만 마르크스 총경은 아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으흠. 다들 우리가 동쪽으로 움직일 거라는 건 알테지?”
본론이 나왔다. 몇몇 바보들은 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지만 몇몇은 이 자리가 함의하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마시는 이 공기.. 꽤 신선하지? 당연히 그럴 수밖에. 본부 뒷편의 산소 공장에서 그대로 얻어오는 거거든.”
경찰청 건물 뒷편의 건물은 원래 그렇지 않았을 법한 철제 구조물이 있었는데, 출입이 엄금된 구역 중 하나였다. 어느 집단이든, 심지어 개인의 가정에서조차 산소를 생산하는 식물의 위치는 아주 중요하게 관리되고 보관된다. 에반젤린. 그의 여동생 역시 비닐하우스를 실수로라도 건드리는 걸 정말 싫어한다. 진실로, 한스는 하우스의 비닐을 마지막으로 만져본 게 년 단위로 세어야할 것이다.
그 말인즉슨, 그가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거나, 권한이 없음에도 묵인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걸 이제 막 불러온 이들에게 밝혀도 될 정도로.
“어떤 이들은 우리를 강경파라고 부르지만 우리 생각은 좀 다르다네. 우린 현실주의자야.”
바닥을 박박 긁어 먹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권위가 느껴졌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고. 사람 숫자에서 나오는 인당 생산량과 인당 소비량을 고려해보자는 의미야. 우리 위대한 브뤼너 치안감께선 모두를 구원하시고 싶어하시지. 아마 종교적 성인이 되어 죽고난 뒤에도 잊혀지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 하지만 우리 현실주의자들은 그런 것보다 당장의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적인 대응책과 해결법을 고민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람은 많은데 유지할 방법이 없어지고 있다는 거지.”
마르크스는 숫자를 기반으로 주장을 전개했다. 베를린 내의 인구는 약 12만명으로 추정된다. 본래 약 400만명에 가까운 인구였음을 고려하면 절망적인 숫자다. 베를린 내의 12만명. 그리고 실제 베를린 경찰청이 파악하고 있는 인구는 그 절반인 6만명이고,그들이 실제 영향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는 인구는 2만명이 조금 넘는다.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짧지만 그 두배는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이 12만명 중 2만명을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경찰청은 이미 포화 상태야. 미래에 써야할 물자를 쟁겨놓는 대신 불쌍하고 나약한 ‘인민’들을 위해 베푸는 거지. 경찰청의 영향력을 위해서 구휼하며 우리 편으로 삼는다는데.. 글쎄. 그럴 필요가 있나? 힘이 있고 자원이 있다면 사람들은 모이기 마련인데. 영향력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선별하는 것으로 충분히 얻을 수 있거든.”
한번 구휼을 받으면 그것만 바라 보게 된다. 스스로 얻는 것보다 남이 주는 걸 받아 먹는 게 훨씬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노력 없이 성과를 얻으니까. 그러나 그게 반복되면 당연스러운 규칙처럼 여겨지고, 상대가 더 이상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설령 그것이 정당한 이유라 하더라도 그간의 고마움을 느끼는 것보다 정해진 규칙을 어긴 것처럼 여긴다. 배신이나 기만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걸 이용한다면, 적당한 자원을 동원하여 사람들이 애걸하게 만들 수 있다. 모두가 자원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서 공짜로 주는 물자는 달고도 달다. 오직 경계심 깊은 이들만이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공짜 물자라는 은혜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낮출 것이고 약간의 조건만으로도 의도에 맞게 움직이는 게 가능해진다.
그런 식으로 적당한 양의 물자를 푸는 것만으로도 더 많은 이들을 다룰 수 있다. 10명분 물자를 공짜로 뿌리는데 모일 땐 몇명이 올까?
“사람은 많고, 자원은 부족하지. 아 물론 브뤼너 치안감께서 잘못하셨다는 건 아니야. 그냥 다르게 생각해보자는 거지. 이미 뿌린 물자는 많고.. 그 혜택을 본 사람들도 많지. 더 나은 대우를 위해서든.. 먹은 물자가 심리적 장벽을 허물었든, 경찰청에 투신하는 이들도 많아졌고 말이야. 덕분에 병력도 행정력도 일진보 했으니 브뤼너 치안감의 공 아니겠나.”
어쩐지 비꼬는 것처럼도 들렸다. 듣기 나름이지만.
“여튼, 물자가 필요한데 이런 시대에 생산이라는 건 제한적이잖은가? 물조차 부족해서 이젠 저 동쪽에서 이 썩은 내 나는 똥물을 사마셔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언제 포화 상태에 이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찌해야겠는가. 답은 정해져 있지. 동쪽으로 나아가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물자를 얻어내는 거야. 물론 사람보단 물자가 더 중요하지. 우리는 적들과 잘 싸우기만 하면 되고 말이야.”
죽이고 빼앗으라. 죽으며 덜 먹어라. 자원을 목적으로, 살인을 수단으로 삼는 폭력 경제다. 적당한 균형이 맞을 때 살인은 줄어든다. 자원이 늘어나면 덩치를 불리고, 자원이 부족하면 더 죽인다. 그렇게 적정 수준의 균형을 살인으로 찾아낸다. 간단한 경제학적 원리다.
“우리가 동쪽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나 다름없지. 지옥이 되어버린 서쪽은 갈 수 없네. 그곳에 발이 빠지면 못 빠져나올 걸.”
서쪽의 정보는 차단되어 있다. 소문만 무성할 뿐. 가서 돌아온 자도, 밖으로 나온 자도 없다. 누군가는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새로 세웠다고도 하고, 무인기와 A.I 병기가 아직도 국경에서 작동하고 있다고도 말한다. 증거는 없다.
“동쪽으로 나아가서.. 인재와 물자를 얻어내는 거야. 그렇게 집단을 유지시키고 독일을 복구하는 거지. 이게 내 청사진이라네. 칸 녀석과는 다르지.”
칸. 강경파 간부. 말이 안 통하는 꼴통. 한스가 그에 대해 질문했다. 아마 칸에 대해 아는 자들을 추려내기 위해 던진 말일 수도 있다.
“칸.. 총경님은 어떤 관점이십니까?”
마르크스는 입가를 슥 닦으며 눈만 치떠서 한스를 바라보았다. 가벼운 행동이었지만 기분 나빠하는 것인지, 건방지다고 느끼는 것인지, 경계하는 것인지 여러 해석을 유도하는 행동이었다.
“놈은 그냥 살인을 좋아한다고나 할까? 물론 그런 정신병자는 아니지. 하지만 폭력을 쓰며 적들을 짓밟으며 승리 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것만은 확실해. 그래서 계속 싸우고 싶어하고 이기고 싶어하지. 뭐, 이런 세상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다 보면 자기 나름대로 스스로의 의미와 쓸모를 찾고자 하지 않겠나? 자존감이라고 하나? 그런 거지. 칸 총경은 승리를 통해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다네. 그래서 위험한 거고.”
목적이 스스로의 성취감 뿐이며 그 방법이 전투와 승리 뿐이라면, 끝 없는 소모전만 발생한다. 성취감을 얻고자 하는 욕구는 끝이 없고, 뚜렷한 조직적 목적이 없다면 그저 이기기 위한 자기만족의 전투만 해야 한다는 의미다. 즉, 항구적이지도 않고 발전적인 면도 없다. 그저 죽기 전까지 싸움만 잘할 뿐.
“아, 그러고보니 자네가 그 녀석 아랫놈에게 잡혀 왔다지? 그럼 궁금해할 법도 하겠군.”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마르크스를 보며 한스는 어느덧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주장은 꽤 논리적이었고, 그럴듯 했다.
‘흠.. 곤란한데. 양다리는 좋지 않아.’
중간 다리로 애용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특수한 위치는 만들기도 어렵고 유지하긴 더 어렵다. 언젠가 둘 모두를 적으로 만들 개연성이 훨씬 높다. 버리기에 너무 좋은 명분을 주게 된다는 점 역시.
‘하지만 타협 가능해.’
그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득이 있었다.
“하여튼간에.. 앞으로 자주 모여서 우리들의 미래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으면 좋겠군. 조직은 반드시 비전이 있어야 해. 암, 그렇고 말고. 무엇을 하느냐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할 수 있잖나? 그럼 각자 할 일이 생기는 거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보다 쓸데 없는 짓이라도 하는 게 나아.”
꼰대 특유의 장광설. 물어본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헤어진 뒤 다음 회합 일자를 알려주었다. 아마 한스는 참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마르크스 총경은 그를 눈여겨 보는듯 했다.
-…이게 앞으로 곤란해질 일이 되지 말아야 할텐데..
-예? 뭐라고요?
한스의 혼잣말에 되물어본 코흐에게 한스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아무 것도. 그나저나 그 친구가 뭘 했다고?
-아, 그 친구가 첫 작전 때 오줌 싸면서 징징 짜댔는데, 눈을 닦을 수 없으니 앞도 제대로 못 보고 다른 동료들 손 잡고 본부로 복귀했었는데.. 그놈이 징징 짰던 이유가..
코흐는 여러 대원들의 이야기를 했었고, 누구와 누구의 관계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했다. 한스가 그러길 원했고, 코흐는 정치적 감각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짚어 냈을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공기 좀 사러가야겠군. 같이 가자고.
-예, 경위님.
한스와 코흐는 같이 보급소를 향했다. 브라흐는 자리에 없었지만 그의 부하 대원이 그들에게 공기통을 판매했다.
-5.56mm 20발입니다.
공기통 80L 충전에 5.56mm 20발. 이게 그나마 대원 할인가다. 심지어 경위 할인까지 붙어서. 그러나 합리적인 걸 넘어 마음에 드는 가격대였다. 그가 그로벨 영감에게 60L 공기통 충전하는데 얼마나 내었던가.
-여기 물가는 마음에 드는군.
-그래서 계속 돈 벌 구석을 찾아야 하죠. 총알이 아니더라도 뭐든 가치가 있는 건 죄다 긁어 모아야 숨 쉬고 사니 말입니다.
그런 세상이다. 산소 구할 구석이 없으면 죽을 걸 알면서 자리에 누워야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산소증으로 정신을 잃고 죽으면 고통도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이들의 보금자리만 전문적으로 터는 놈들도 많은데, 그런 스캐빈저와 강도는 특별히 구분되는 직종은 아니다. 그들 스스로는 언제나 자신을 디거Digger나 회수자라고 부르지만 사람이 사는지 아닌지 구분도 안 하고 쳐들어가서 없으면 긁어오고, 있으면 죽인 뒤 긁어오는 놈들이다.
-뭐, 우리가 먹고 사는 것도 그런 더러운 짓을 하는 놈들 덕분이라는 불편한 진실 속에서 연명하는 거지.
-그렇기야 하죠.
-음?
한스의 바이저 너머로 아는 뒷모습이 보였다.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뮈텔 정보과장을 본 것 같았다. 그 매끄러운듯 딱딱한 걸음걸이..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됐어. 가는 김에 요깃거리나 사자고. 내가 할인 더 받으니 내가 사지.
-앗, 감사합니다.
어차피 이곳에 정착할 생각은 없다. 게다가 보금자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버는 돈이 있다면 굳이 아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스는 본부 너머로 한 귀퉁이가 뒤어나온 철제 구조물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푸르른 것들이 산다. 축축하고, 적당히 차가우며, 생명력 있는 것. 살아 있음을 가장 환상적으로 드러내는 생물. 이제 밖에서 볼 수 없는 것들. 유일한 혈육이 기르고 돌보는 것들. 잘 있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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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속도가 느린 대신 전개라도 (전작들보단)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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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빠른 전개 좋습니다 우히히히히히
뚱땡이 친구 나름대로 계산은 좀 해본 모양이군요. 그래봤자 ㅇ론적 배경 부족한 건 달라지지 않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