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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43)
- 남을 비판하지 말라 -
마태복음 7장 1-5절/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후 이제 7장에 이르러서 남을 비판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언뜻 보면 예수께서 남을 비판하지 말 것을 말씀하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에 있게 하신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이르러서는 앞에서 하신 말씀과 전혀 상관이 없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앞에서 하신 말씀의 내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에 있는 사실로 말미암아서 그렇지 않음에 있는 다른 사람들, 곧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 의를 행함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을 것이어서 이로 인하여 자기의 옳음을 피력하는 일로 자기들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비판하는 일에 있을 수 있게 될 것이기에 이 문제를 예수께서는 다루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며 무엇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시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이 시작되고 있습니다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시면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어서 본문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자기 의에 있는 것에서 남을 비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반하여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있는 제자들이 그들이 따르며 섬기는 주님으로부터 입게 될 은혜를 암시해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어서 예수께서 남을 비판하는 것을 좋지 못한 것이니까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좋지 않은 일을 하지 말라는 만류하는 것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1절에서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남을 판단<정죄/심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정죄/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비판하다’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비판하다’란 뜻 외에도 ‘비난하다’, ‘벌하다’, ‘정죄하다’, ‘판결하다’, ‘판단하다’, ‘고소하다’, ‘심문하다’, ‘결정하다’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문맥적 의미에서 볼 때는 ‘판단하다’, '정죄하다‘, ’심판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말성경 - 한글개역(개정)성경 - 에서 ’비판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을 때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뜻은 남을 판단/심판/정죄하지 말라는 의도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이신 것의 이해에 의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2절에서의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에서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란 ’헤아림‘이 ’저울질‘ 당함에 있는, 또는 ’되질‘ 당함에 있는 것에서 ’심판‘을 뜻하고 있는 것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을 따름에 있는 제자들에게 무엇 때문에 “남을 비판<판단>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인지요. 그것은 “그러면 너희도 비판<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남을 비판함으로 해서 남으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는 유일한 분은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리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비판 - 판단/정죄/심판 - 을 받지 않을 것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비판, 곧 판단/정죄/심판 받을 요인을 제거하여 없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인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는 ‘눈에 있는 티’를 제거하실 것이며, 눈에 보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이 눈에 있는 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눈에 보이는 티보다 깊이 있으며 더욱 큰 ‘마음에 깊이 박혀 있는 들보’를 제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제자들의 ‘눈에 있는 티’와 ‘마음에 있는 들보’를 제거하여 비판받을 것이 없게 하시는 것은 그들을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에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함은 사람들을 ‘자기 의’에 두게 하여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기 의를 행함으로 그 의의 대조와 비교에 서로를 있게 함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그래서 정죄하고, 그래서 심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게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남을 비판함으로 그들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음에 있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은 자신들만 심판의 불이 행해지는 지옥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남들도 자신들과 함께 지옥에 들어가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주가 되신 예수님이 그들의 티/눈을 제거하실 것이므로 아무에게도 비판 받을 것이 없게 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의 주가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또한 남을 판단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서 남을 판단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자들을 들어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에 있습니다. 이것으로 자신들을 배척하며 대적하는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으며 배척을 당함에 있을 것입니다만, 이로 인해서 그들을 비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구함에 있어온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전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척을 받는 것은 24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내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전혀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을 구원할 자가 오실 것을 하나님께서 아들로 보내셔서 하실 것이란 기대에 있어오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와서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죠. 선지자 엘리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일을 할 것으로 알고 그 기다림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서 혹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 엘리야가 온 것은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가졌습니다(참조. 말 4:5-6). 사실 예수님은 옛선지자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진 분으로 많은 사람을 그들의 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눅 1:16-17). 그러나 이처럼 선지자 엘리야로 오실 분은 단지 엘리야와 같은 한 사람으로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서 오실 것이었습니다. 이 분에 의해서 있게 될 새로운 일입니다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단지 옛선지자 엘리야 그 선지자로서만 예수님을 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서는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신다는 것으로 배척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한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전파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지닌 거룩함을 알지를 못하고 따라서 그 거룩함을 보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행해오고 있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계명을 좇아 하나님이 내신 율법을 따르지 않는 것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곳곳에서 율법에서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고 있는 본의를 증거하심으로 인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부터 율법 파괴자로 인식하고서 예수님을 비판하며 죽일 음모를 가지며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는 일을 하며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하여 죽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박해는 예수님이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던 일을 따라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게 될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서는 그 누구도 그 누구를 비판할 입장에 있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부르심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그 유대인들의 사고(思考)에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는 은혜를 입게 해주시고 남의 눈에 있는 티<죄>을 비판하는 자기 의에 있게 하는 그들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들보<죄>를 없애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그들의 마음에 자리할 것이므로, 그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자리하고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은 남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의 오심이 있으며,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능력으로 그들을 붙드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되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를 전파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을 비판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남을 비판하는 것이 옳지 않으며 나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서 보게 되는 그들이 하는 말에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제자들에게 있는 말은 남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는 없는, 그래서 그들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말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게 될 것을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의 주가 되셔서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에 있게 하시기 때문에, 이제 그들에게는 남을 비판하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구함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말하는 것에 있게 될 것이며, 이는 장차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온 세상에 주가 되심에서 그 옳음이 입증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구원의 능력을 말하는 것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서의 이러한 이해에 의해서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서 역사하고 있는데 따라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도록 합니다.
예수께서는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남을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지요. 남을 비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으려면 그 자신이 남을 비판하는 그 비판을 받을 것이 없는 흠이 없는 자여야 하며 결점이 없는 자여야 합니다. 그렇게 거룩한 자여야 하는데, 그러한 분으로서는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며 율법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율법과 관련한 계명들을 만들어 준수하며 성전생활을 하고, 구제, 기도, 금식의 여러 경건한 모습에 있으며 이를 의롭게 여기고 ‘자기 의’로 삼고서 백성들에게도 이를 따를 것을 요구하며 자신들과 같이 되도록 강요하는 의무와 책임을 그들의 두 어깨에 짊어지우고 여기에 미치지 못하면 눈에 있는 티에 불과한 부족함과 모자람을 비판합니다만, 여기에는 백성들의 머리 위에 앉아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심인 커다란 들보가 마음에 차지하고 있으며, 백성들의 가산을 탐내는 욕심인 커다란 들보가 마음에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남을 비판 하는 것에 있는 것은, 그렇게 비판을 함으로써 온전하지 못한 그가 그 온전하지 못한 자신을 감추고서 남을 비판함에 있는 그 자신의 죄로 인해서 비판을 받는 대상이 됩니다. 이는 자신 외의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비판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온전하여 비판할 것이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습니다. 그 분, 곧 온전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온전하지 못하면서 온전한 듯 위선에 있는 그의 위선은 여실히 드러나게 되며, 이 위선에 의하여 가져온 그의 외식된 행위는 정죄 받고 심판 받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탓하고,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주겠다고 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태를 빼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남을 비판한 대로 그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하는 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헤아린 - 저울질하는 - 대로 그 또한 헤아림을 당하는 것에서 그가 한 행위대로 그대로 되갚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한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부른 제자들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태를 빼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에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또한 위선에 있어온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온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으시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게 하셨으며, 하나님의 의에 그들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로서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눈에 있는 티’, ‘눈(마음)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 없애주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구속의 길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순종으로 가십니다.
주 예수님에 의해서 자신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있는, 자신들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빼낼 수 없는 들보를 날마다 빼냄을 받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매일 매일 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을 주께서 하심을 그렇게 날마다 겪으며, 기쁨과 감사로 찬양하며 기도함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남의 ‘눈에 있는 티’가 보입니다. 예전엔 그 티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 티를 가지고 있는 자를 아예 매장시키려는 듯 덤벼들었는데, 자신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있는 들보가 빠져나간 자리에 채워지는 주 예수님 안에서 공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넘쳐흘러 내립니다. 예수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겨우 일백 데나리온 빚진 종을 탕감해 주지 않는 사람의 무자비함에 대한 비유를 말씀 하셨었지요. 과연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무거운 악한 죄의 들보 덩어리가 빠져나간 우리의 마음 자리에서는 채워진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됩니다. 그의 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되는지를 말입니다. 그의 ‘눈에 있는 티’가 있던 그 죄가 어떻게 제거되고 그 자리에 그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가득히 고여 있는지를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에 있게 하심으로 이를 말하는 있는 자에 있게 하셨습니다. 해서 말이죠. 남을 비판하는 말에 있어옴으로써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단 한 마디도 해오지 못했던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며 이를 말함에 있으면 말이죠. 이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우리 믿음의 주님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하는 자는 다만 주님만을 자랑함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