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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임정희
강호에 무수한 필부필남 가운데 고수만이 고수를 알아주고
호걸만이 영웅을 알아보는 법.
천하제일의 기녀 황진이를 백호 임제는 알아봤으나
당대 최고 풍류가 백호 임제를 세상은 알아보지 못했다.
미인은 박명이요 천재는 단명이라.
임제와 황진이는 둘 다 마흔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뜨니
그들이 한(恨)할 건 자신의 미색과 천재성이었으리라.
임제가 황진이를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39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청초 우거질 골에 누웠으니 살아생전 바랐던 진랑(황진이)과의 이루지 못한
조우의 아쉬움을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청초(靑 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 顔)은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난다.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서러하노라.
임제가 황진이 묘소를 찾아간 때는
임제가 평안도 도사로 발령을 받아 가던 중이었다.
신임 부임지를 향해 말머리를 잡고 개성을 지나던 중
풍류 여걸 황진이가 석 달 전에 죽었다는 말을 들은
임제는 말에서 내린다.
관복을 입은 채 저자거리로 가서
새우깡 한 봉지에 ‘처음처럼’ 한 병을 샀다.
그리고 곧장 황진이의 묘소로 향했다.
유언대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송도 대로변
어느 산기슭에 쓸쓸히 묻혀 있는
진이의 넋을 위로하며 신임 도사 임제는 잔을 치고 제문을 짓고
이루지 못한 인연을 탄식했다.
때는 당리당략을 앞세운 당파 싸움으로 서로 물고 뜯던 살벌한 시대.
조정은 동서로 갈라지고 남북으로 흩어지며
노소로 대립하며 서로 죽고 죽이며 으르렁거리던
진창 같은 세월이었으니 상대 당에서
임제의 이러한 파격을 두고 볼 리 없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자가 신임 부임지로 가던 도중
관복을 입고 기생 무덤에 엎드려 제를 지내고 술을 마셨으니
이보다 물고 뜯기에 더 좋은 구실이 어디 있으랴.
허나, 임제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고루한 관습의 속박, 혼란스런 현실을 개탄하던 그는
스스로 관복을 훌훌 벗어 던진다.
그러면서 그는 한 마디 했다.
“벼슬 좋아하는 너그들이나 다하거라"
그길로 그는 명산대천을 주유하며 소풍 온 듯 한 세상을 살았다.
당시 교우하며 지낸 이들 중에는 시인묵객은 물론 승려, 기생 등 신분을 초월했다.
기생 한우(寒羽)와 주고받은 화답 형식의 한우가(寒羽 歌)등
1천여 수의 시와 <남명소승南溟小乘>이라는 제주도 여행기,
의인화법으로 당대를 풍자한 <수성지 愁城誌>, <화사>, <원생몽유록>은
조선기행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고
<임백호집>, <부벽루상영록>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남겼다.
본관이 나주인 선생은 명종 4년(1549)에 전남 나주시 다시면 신풍리에서 태어났다.
집을 떠나 보은 속리산 기슭 종곡마을로 대곡(大谷) 성운(成運)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백호가 약간 덜 떨어진 충청감사의 아들에게
말오줌을 불로주라고 속여서 먹인 일화는 이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백호가 방문을 열어놓고 책을 읽고 읽는데
저 멀리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충청감사의 아들이 한패거리를 이끌고 속리산 구경을 온 것이었다.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한 백호가 읽던 책을 덮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지름길로 법주사를 찾아가 노승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잘 보이는 산봉우리에서 바둑을 두라고 하고
동자승에게는 푸른 옷을 입혀 그 곁에서 시중들도록 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산중턱에서 옥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감사의 아들이 법주사에 거의 이르렀는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들려오자 마중 나온 스님에게 물었다.
“저 피리소리는 어디서 누가 부는 것인고? 제법 그럴듯하구먼 그래!”
“아, 예. 이 산에는 옛날부터 이따금 신선이 찾아와
저렇게 피리를 불면서 놀다가 갑니다만 아무도 그 신선을 본 적은 없습니다요.”
“그래? 그렇다면 내 오늘 저 신선을 꼭 한번 만나보고야 말리라!”
감사의 아들이 큰소리치고는 피리소리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더니
과연 신선(?)들이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시중들던 동자가 신선들에게 아뢰었다.
“저기 속객(俗客)이 오고 있사옵니다.”
“어허, 기특하구나!
그렇다면 이 불로주를 속객에게 주고 속히 마시도록 하라.”
감사의 아들은 신선이 내린 불로주라는 말에 너무나 감격하여 단숨에 다 마셨는데,
그것은 사실은 백호가 미리 준비한 말오줌이었으니 맛이 괴상할 수밖에.
감사의 아들이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것을 몰래 숨어서 보고 있던 백호가
동자승을 시켜 시 한 수를 전해주게 했다.
감사의 아들이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붉은 띠를 두른 미소년이여 / 진세간에서 기특한 남아로다
한 병 술로 서로 전송하며 헤어지니 / 속리산 구름이 만리로구나.
대곡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백호는 늙은 스승을 하직하고 귀향길에 올랐다.
고향 회진으로 돌아온 백호는 벼슬길에 뜻이 없어
신걸산에 오르기도 하고 영산강변을 거닐기도 하고
벗들과 영모정(永慕亭)에서 술 마시고 시 읊고 거문고 뜯으며
풍류 속에서 즐거운 한 시절을 보냈다.
영모정은 백호의 중부 임복과 부친 임진 형제가
명종 11년(1556)에 선친인 귀래정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로서
백호는 자주 벗들과 이곳에서 어울렸다.
백호가 풍류를 즐기던 영모정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90번지에 있으며,
현재 지방기념물 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영모정 바로 아래에는 백호의 조부 귀래정의 유허비와 백호의 기념비가 서 있다.
남북을 오르내리며 방랑하던 백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29세 되던 선조 10년에 비로소 과거를 보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31세 때에는 고산찰방으로 짧은 벼슬살이의 첫발을 내디뎠다.
양사언, 허봉, 차천로 같은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듬해 봄에는 북도평사로 부임했는데,
묘향산으로 서산대사(西山大師)를 찾아가 만난 것도,
소설 <원생몽유록(元生夢遊綠)>을 지은 것도 바로 그해였다.
백호는 풍류남아로서 시만 잘 읊은 것이 아니라
<원생몽유록>을 비롯하여 <수성지>, <화사>등 세 편의 한문소설도 남겼다.
특히 <수성지>는 그의 후학으로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이 ‘천지간의 대작’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선조 16년(1583), 35세 때 평안도 도사를 지냈지만,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치 않아 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고루한 선비들의 평판에 기죽을 백호가 아니었다.
예부터 남남북녀라고 했고, 그 가운데서도 평양은 색향으로 이름난 고장이 아니던가.
평양에서 백호는 감칠맛나고 시정 넘치는 풍류 일화를 많이 남겼다.
특히 평양 명기 일지매(一枝梅)와 한우(寒雨)와의 로맨스가 대표적이다.
백호가 평안도 도사직을 마치고 한우와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밤이 깊어가자 취흥에 시흥이 겹친 백호가 이렇게 시조 한 수를 읊었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그러자 한우가 망설이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화답했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풍류장부와 풍류기생의 정염이 이와 같이 상통했으니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일지매와의 사연은 평양 근무 시절이 아니라
백호가 서울로 돌아온 뒤의 일이다.
일지매는 재색을 겸비한 당시 평양 제일의 명기였다.
그러나 절개 굳고 자부심 강해 웬만한 사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벼슬이 종2품 당상관인 평안감사의 유혹과 위협에도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어느날 서울의 백호에게 절친한 벗인 평안감사가 편지를 보냈는데
안부 끝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나도 일지매를 수청들게 하는데 실패했으니 자네가 와서 한 번 꺾어보지 않겠는가?’
백호가 편지를 받고 며칠 뒤
남루를 걸친 초라한 행색의 생선장수로 변장하여 평양에 이르렀다.
드높은 명성과는 달리 일지매의 집은 검소한 초가였다.
백호가 싱싱한 숭어를 사라고 외치자
마침 사군자를 치고 있던 일지매가 생선장수치고는
낭랑한 목소리에 마음이 끌려
계집종을 시켜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런데 싱싱한 생선이라는 것이 한 물간 숭어 다섯 마리였다.
“물이 간 숭어를 싱싱하다니, 어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
일지매의 핀잔에 백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에야 물이 좋았지요. 그런데 저녁이 되니 한물갔구먼요.
아, 사람도 늙으면 쪼그라드는데 그러지 말고 팔아주오.”
그런 수작 끝에 떼를 쓰다시피하여 그날 밤을 일지매네 문간방에서 보내게 되었다.
휘영청 달 밝은 5월.
춘정을 이기지 못한 일지매가 거문고를 뜯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간방 쪽에서 피리소리가 울려와 화음을 이루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깊은 밤중에 누가 저토록
절묘한 가락의 피리를 부는 것일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일지매가 일어나 피리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찾아가보니
거기에는 아까 그 생선장수만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일지매가 돌아서며 다시 한 수 읊었다.
-창가에는 복희씨 적처럼 달이 밝구나.-
그러자 문간방 쪽에서 이렇게 대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루에는 태고 적 바람이 맑도다.-
신기하게 생각한 일지매가 다시 한 구 읊었다.
-비단 이불을 누구와 더불어 덮을꼬.-
그러자 여전히 문간방에서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나그네 베갯머리 한 쪽이 비었네.-
어쩐지 수상하더라니!
일지매는 주저하지 않고 자는 척하는 백호에게 쫓아가
사정없이 잡아 일으켜 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공리공명과 부귀영화를 백안시하고 솔직담백하게
짧지만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진 천재적 풍류가객 백호 임제,
그는 정감어린 시어로만 시속풍정을 노래했을 뿐 아니라
남다른 우국충정으로 비분강개하는 시도 많이 남겼다.
백호는 별 볼 일없는 벼슬길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도 아니요,
흔해빠진 선비들처럼 음풍농월로 허송세월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나라와 겨레를 걱정한 고매한 인품의 우국지사였으며,
탁월한 문장가였는가 하면,
진정으로 풍류를 사랑한 멋쟁이였다.
평안도도사에 이어 예조정랑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온 백호는 얼마 뒤 사직하고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 팔도강산을 주유천하하기 시작했다.
벼슬살이를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된 동서당쟁이 점점 심해가는 꼴을 보고
벼슬길에 완전히 정이 떨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일세의 기남자,
때로는 다정다감한 시인,
때로는 천군만마를 호령할 만한 기백의 지사,
헛된 명리를 멀리하고 저자와 산수간을 넘나들던 백호 임제는
선조 20년(1587) 음력 8월 21일에 39세 한창나이로
짧지만 굵직했던 한 삶을 마치고 저세상으로 갔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은 백호가 임종하기 전
구슬피 우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꾸짖었다고 전한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황제를 칭하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우리나라만 예부터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처럼 누추한 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죽는다고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
백호의 묘는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기슭에 있다.
대장부들은 간 곳없고 졸장부들이 설치고 판치는 어지러운 세상에
백호 임제와 같은 일세의 풍류가객을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으랴
임제의 시 한 수를 더 감상하자.
열 다섯 아름다운 소녀 十五越溪女
수줍어 말도 못하고 헤어지곤 羞人無語別
돌아와 문 빗장 걸어두고서 歸來掩重門
배꽃 향해 달 보며 눈물 흘리네 泣向梨花月
예릿예릿한 열다섯 아름다운 소녀.
평소 연모하는 정인을 만난 것일까.
맘속에 끓어오르는 사모의 말 한 마디
연서 한 장 건네지 못하고 혼자 속앓이만 했나보다.
속만 태우다 돌아와 생각하니 스스로 한심스럽고 남사스러워.
그 속내 누구에게 들킬까 꼭꼭 단속한다는 것이
방문에 중문에 대문까지 걸어 잠그지나 않았을까?
그러나 아쉬운 맘 가눌 길 없어
타는 가슴 움켜잡고 달빛에 흐드러지게 핀 하얀 배꽃을 바라보며
속절없이 눈물지었겠지.
< 옮 겨 온 글 >
첫댓글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번 보았습니다. 틈나는대로 또 읽어보렵니다.
구하기어려운 자려여서 나도 몇번이고 읽었답니다.
감사드립니다^^ 귀한 자료 챙겨주신 선배님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