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을 상상하게 하는 힘
전태일 열사의 일대기를 각색한 만화 《태일이》를 그린 최호철 화백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항상 온갖 굵기의 연필꾸러미와 엽서 두 장 크기의 두꺼운 스케치북을 가방에 넣어 둘러메고 다닙니다. 사진가 목에 카메라가 매달려 있듯이, 그는 언제든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더운 날, 서울 홍익대 앞 허름한 식당에서 최 화백과 같이 돌솥우동을 먹고 있었습니다. 우동 몇 가락을 먹는데, 그가 갑자기 눈을 반짝거리더니 잽싸게 연필을 꺼내고 스케치북을 펼쳤습니다. 건너편에 앉은 중년 아저씨를 스케치하더군요. 최 화백은 아저씨가 자리를 뜨기 전에 눈과 손을 바지런히 움직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저도 젓가락질을 멈추고 그가 다 그릴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예술가의 번득이는 창작 현장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해지더군요.
글의 감동은 언제 밀려오는가
그가 그림을 다 그리고 연필을 가방에 넣는 순간, 제가 말했습니다. “최 화백님, 저도 그렇게 하나 그려주세요.” 돌아온 답. “아무나 안 그립니다!”
그 단호한 목소리를 들으며 알았습니다. 제 얼굴은 그림으로 그릴 만큼 특색이 없다는 것을. ‘아무나 안 그린다’는 말을 곱씹게 되더군요. 비록 제 얼굴이 배우 한석규 씨를 빼닮긴 했습니다만, 화가에게는 어떤 감정의 격동도 일으키지 못하는 얼굴이었나 봅니다.
최 화백의 작품집 <을지로순환성VR>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다니면서 전철 안, 전철역 주변의 여러 풍경과 사람들 모습이 세밀화로 그려졌습니다. 다양한 표정과 자세, 삶의 굴곡을 가진 수십 명의 사람이 한 화면에 빼꼭히 담겼습니다. 식당에서 본 것처럼, 그의 그물에 걸린 인물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작품을 완성해나갔을 겁니다. 그들은 마치 대하소설의 등장인물처럼 고유한 독특한 이력을 지닌 듯했습니다.
화가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이유는 글이란 것도 사람들에게 감정의 격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정보 전달이 목적인 글도 있지만, 우리가 쓰려는 건 감동이 있는 글이다.
감동은 글로 보여주는 장면에 공감할 때 밀려옵니다. 공감은 남의 감정이나 생각을 자신도 똑같이 느낄 때 생깁니다. 공감을 얻으려면 독자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을 자극해야 합니다. 상상력은 독자의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실감 나게 떠올라야 꿈틀거립니다. 사실을 말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생김새에 대한 실마리
‘다시 가고 싶은 장소’를 주제로 장면을 제시하는 글을 쓴다고 해보죠. ‘학교 가는 길’을 쓴 혜욱 님의 글을 읽어봅시다.
그리움을 안고 살아도 가볼 용기가 나지 않는 곳이 있다. 도봉산 봉우리 중 선인봉이 가장 잘 보이는 그 아래, 태어나 처음으로 다닌 학교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내게 초등하교 입학은 굉장한 기대와 떨림, 그리고 설렘이었다. 집 근처에는 초등학교가 없어서 50분을 걸어가야만 했지만, 학교 가는 길에는 흥미로운 곳이 많아 지루하지 않았다.
집에서 30분쯤 걸어가다 보면 무당이 사는 집이 있었다.‘무당은 정말 귀신과 얘기를 할까?’라는 호기심에 그곳을 지날 때마다 흘깃 기웃거렸고 하굣길에 운이 좋으면 굿을 하는 장면을 구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당과 눈이 마주칠 때면 제일 먼저 도망쳣다. 무서워서.
무당집에서 15분쯤 걸어가면 이번엔 맑고 넓은 개울가가 나온다. 아마 도봉산 중턱에서부터 흐르는 물줄기일 것이다. 거기에는 징검다리가 있어서 느린 스텝을 밝으며 춤을 추듯 징검다리를 건넜고, 하굣길에는 친구들과 물장난을 하며 노느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훨씬 더 길고 길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마지막으로 미로의 골목이 기다리고 있었다. 골목 속에 또 다른 골목이 연달아 있어 친구들과 서로 다른 길로 가면서 누가 먼저 빠져나오는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골목을 벗어나면 드디어 학교 정문이 나왔다. 학교 뒤에는 도봉산이 병풍처럼 서서 사계절의 그림을 멋들어지게 그려 주었다. 1학년의 눈에 학교 운동장은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이보다 더 넓은 운동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에 60명이 넘는 인원에 아침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있을 정도로 학생이 많았지만, 과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오히려 친구가 많아서 좋다고 생각했었다. 늘 몸이 약해서 어쩌다 학교에 나가도 모두가 반갑게 맞아준, 고마운 이들이 있는 학교를 멀다는 이유로 4학년 때 억지로 전학을 가야만 했던, 언제나 그리웠던 곳. 언젠가 한 번쯤은 꼭 가보리라는 생각과 동시에 차마 갈 수가 없는 곳.
‘애걔~ 이게 개울이야? 미로 골목은 무슨~! 어머, 운동장이 뭐 이렇게 코딱지만 해? 이렇게 작은 교실에서 어떻게 60명이 넘는 아이들이 공부를 했대?…’라는 말로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와 비슷한 풍경이라 믿고 있는 기억과 마음에게 그 세월을 얼룩지게 만들까 봐. 두려움, 용기 없음에 어쩌면 그곳은 영원히 가지 못하는 곳이 될지도 모르겠다.
50분이나 걸리는 초등학교 가는 길에 흥미로운 곳이 많아 기억에 남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무당집, 개울, 미로를 닮은 골목, 학교 정경을 순차적으로 제시했습니다. 등굣길 여정을 쓰므로 글감이 나열되는 걸 피할 수는 없지만, 각 대상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 더 좋았을 겁니다.
무당집에 대한 기술을 보죠. “집에서 30분쯤 걸어가다 보면 무당이 사는 집이 있었다. ‘무당은 정말 귀신과 얘기할까?’라는 호기심에 그곳을 지잘 때만다 기웃거렸고, 하굣길에 운이 좋으면 굿하는 장면을 구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당과 눈이 마주칠 때면 무서워서 제일 먼저 도망쳤다.”
자, 여기서 중요한 걸 놓쳤습니다. 바로 ‘무당집’ 자체입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무당집이 기억난다면, 그건 글쓴이에게 중요한 글감이었겠죠. 그런데 ‘무당이 사는 집이 있었다’ ‘지날 때마다 기웃거렸다’ ‘굿하는 장면을 구경하기도 했다’고만 하면, 독자는 그 집을 실감 나게 떠올리지 못합니다. ‘대나무 깃대에 붉은 깃발과 하얀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거나 ‘흰색 여닫이문에는 붉은 글씨로’ ‘만자 만卍’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는 식의 서술로 독자가 무당집 생김새를 상상하게 해야 합니다. 그걸 실마리 삼아 그 집에 얽힌 사건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개울가’나 ‘골목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했다고 말하기 전에 그곳이 어떻게 생겼다는 걸 먼저 알려줘야 독자도 그곳에서 함께 물장난도 치고, 미로를 닮은 골목에서 친구들과 빨리 빠져나오기 시합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문장에서 장면을 떠올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을 사로잡은 글감에 대해서는 장면을 보여줘야 합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는 친구가 ‘그는 눈이 둘 있고, 코가 하나 있고, 입이 하나 있었다’라고 설명한다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헛웃음이 나오죠. ‘그는 잘 생겼다’라는 문장도 비슷합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실핏줄이 보이는 그의 뺨은 그가 이 추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순수함을 옹호하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는 식으로요.
글의 정서가 느껴지도록
저는 글의 주제보다는 글의 정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이 따뜻한가 차가운가. 긍정적인가 비관적인가, 기쁜가 슬픈가, 경쾌한가 무거운가, 격정적인가 차분한가, 화려한가 담백한가 하는 느낌 말입니다. 그런 정서를 갖게 하려면, 독자를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됩니다. 머릿속에서 뭔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식당에 가득 앉은 손님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 하나를 찾아 그 사람만 그리듯이 글도 그래야 합니다. 독자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려면 주제와 직접 관련 있는 캐릭터를 장면 속에 등장시켜야 합니다. 저처럼 평면적인 얼굴은 그림의 대상으로 포착되기 어렵습니다.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군중 속에 있는 사람 중 하나일 뿐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과 사건이 다른 가람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죠.
영화의 주인공은 1명(또는 2명)이듯이, 글에서도 하나의 캐릭터가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조연입니다. 조연은 주인공이 주제를 향해 달려가도록 돕는 역할을 하죠. 주제를 드러내지 못하는 건 과감이 지우거나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글감을 여러 개 떠올렸다고 그것들이 모두 같은 무게를 차지하면 안 됩니다. 나를 사로잡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보여줄 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를 쓴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영어로)여섯 단어로만 된 소설 한 편을 쓸 수 있는지 지인들과 내기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는 내기에서 이겨 판돈을 다 챙겨갔죠. 그가 쓴 여섯 단어짜리 소설을 한번 보죠.
팝니다: 아기 신발, 한 번도 안 신었음.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어떤가요? ‘상상력’이 자극되나요? 슬픔의 감정이 밀려오나요? 한 문장인데도 독자는 나머지 공백을 상상력으로 채웁니다. 감정이입을 잘하는 사람은 눈물이 날지도 모릅니다. 기쁨과 기대의 대상이던 아이에게 어떤 비극적 상황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게 되죠. 출산 중에 아이가 잘못됐을 수도 있고, 교통사고로 산모와 아이가 모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마디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건 글쓰기의 달인의 경지이고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은 당장 저렇게까지는 못 씁니다. 그 수준에 도달하려 꾸준히 애쓸 뿐입니다. 조금 긴 글을 보죠. 여러분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그려지는지 생각하며 읽어보세요.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있었다. (중략) 아직 살아 있는 나는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마지막 망막의 기능으로 아직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죽어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 줌의 공기나 바람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서웠다. 그와 나는 마지막 시선을 교환하면서 작별했고, 차가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기도 할 것이었다. 다 똑같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그 무서움은 공유되는 것이 아니고 각각 저마다의 몫일 뿐이다.
나는 춥고 어두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할 일이 무섭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의 무사한 하루하루에 안도한다.
―김훈, 〈무사한 나날들〉, 《바다의 기별》, 생각나무, 2008년 32~33쪽
이 글은 죽음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을 기술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다른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그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글쓰기로 넘어가봅시다. 다음 두 글을 비교해 보세요.
① 우리 집 강아지 미르가 자기 집에서 죽어 있었다.
② 동그란 회색 방갈로 모양의 개집, 미르는 낮잠을 늘어지게 자듯이 네 다리를 쭉 뻗고 죽어 있었다. 미처 누울 자리를 덜 찾아간 듯, 머리를 어두운 방 깊숙이 밀어넣고는 엉덩이를 밖으로 내밀고 납작하게 누워 있었다.
두 글은 모두 강아지가 죽은 장면을 썼지만, 드러내는 감각은 다릅니다. ①의 문장은 글쓴이의 강아지가 죽었다는 정보만 전달할 뿐입니다. 이에 비해 ②의 문장은 독자의 머릿속에 강아지가 어떤 자세로 죽어 있는지 하나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게다가 ‘미처 누울 자리를 덜 찾아간 듯’이나 ‘납작하게 누워 있었다’와 같은 표현으로 강아지의 죽음을 대하는 글쓴이의 비극적 감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루는 글감은 대부분 ‘흔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도 겉보기엔 다 흔하디흔합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게 ‘일상’이고, 흔히 벌어지는 일이라 ‘일상다반사’입니다. 반려동물의 죽음도 ‘흔한’ 일입니다. 우리가 쓰는 문장도 ‘흔한’ 문장입니다. 흔한 것일수록 장면을 실감 나게 그려내지 않으면, 독자는 그 흔한 이야기를 정보 처리하듯 순식간에 지나쳐버립니다. ‘아버지의 구두가 낡았다’는 문장은 정보만 전달할 뿐이지만, ‘아버지의 구두 뒷굽은 닳아서 엄지손가락을 넣어도 될 정도였다’고 하면, 독자는 머릿속에서 낡은 구두 뒷굽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모습을 상상할 겁니다. 멋진 문장을 쓰라는 게 아닙니다. 장면을 상상하게 하는 글을 쓰라는 말입니다.
‘낯섦’은 흔한 것에서 발견한다
얼굴을 특이하게 만든답시고 입을 둘로 늘리거나 눈을 하나로 합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얼굴은 다 엇비슷하지만, 그 속에 독특함이 있습니다. 최호철 화백이 좀 더 애정 어린 눈으로 제 얼굴을 쳐다봤다면, 제 아랫입술 오른쪽에 검푸르게 튀어나온 점을 볼 수도 있고, 쳐 가닥 나지도 않는 수염 가운데 뜨문뜨문 돋아난 흰 털에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내 글이 다루는 대상은 흔한 것이지만, 그 속에서 독특한 면을 보여줘야 합니다. 흔한 것 속에 독특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흔한 것 속에 독특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인상 깊은 장면을 멈춘 듯이 세밀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낯섦은 흔한 것에서 발견합니다. 흔한 것 속에서 낯선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장면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면 감정이 요동치는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김진해, 『쓰는 몸으로 살기』, 한겨레출판,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