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110분… 예·복습까지 뚝딱
학생 주도적 '드릴형 수업' 도입… 수업시간에 궁금한 점 질문하고… 배운 내용 다 이해해야 '수업 끝'
"땡땡땡" 지난 7월말 경상남도 산청군 지리산 자락에 있는 지리산고등학교 3학년 교실. 5교시 수학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하지만 담당인 이상봉 교사는 교단에 서서 진도를 나가는 것 대신 학생들 주위를 맴돌며 모습을 지켜만 봤다. 신세음(18)양이 조용히 손을 들고 이항정리 문제를 물어보자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고 자세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곧이어 옆자리의 이명신(18)양과는 등비수열 문제를 놓고 풀이방식에 관해 서로 의견을 나눴다. 그렇게 이 교사는 20분간의 예습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강의를 시작했다. 이명신양은 "예습과 복습시간이 따로 있어 선생님께 자유롭게 질문을 하는 것으로 수업시간을 알차게 보낸다"고 말했다.
◆자기주도형 '드릴형 수업' 시도
고즈넉한 농가들 사이에 전교생 60여 명, 교사 15명으로 구성된 '미니학교' 지리산고가 새로운 방식의 교육실험을 진행중이다. 일명 '드릴형(thrill) 수업' 방식이다. 지리산고는 지난 5월부터 교육업체 비상에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무상으로 교재를 지원받아 수업 방식을 도입했다. '드릴형 수업'이란 예습과 강의, 문제풀이, 복습을 수업시간에 모두 진행하는 형태다. 총 110분은 예습(20분)-강의(30분)-휴식(10분)-문제풀이(20분)-첨삭 지도 및 복습(30분)으로 구성된다. 교사가 설명하고 학생은 듣기만 하는 일방적인 수업이 아니라 학생이 공부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교사가 도와주는 학생 주도적 수업 방식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현재는 고3 주요과목 위주로 진행하고 있지만, 앞으로 점점 교과 영역과 학년을 넓힐 계획이다.
박해성(55) 교장은 "낙오자 없는 교육을 추구하는 핀란드 교육에서 착안해 도입했다"고 말했다. 학교의 주인공은 학생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수업 역시 학생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평소 그의 소신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지리산 고교 설립자이기도 한 박 교장은 지난 2004년 돈 없는 학생들이 마음 편히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생각에서 폐교된 초등학교를 고쳐 지리산고를 만들었다. 대안교육 특성화 학교로 인정을 받은 지리산고는 교육청 지원과 개미 후원자들의 소액후원을 받아 운영된다. 재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3년 내내 무상 교육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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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고의 수학수업.
드릴형 수업을 놓고 처음에는 교사와 학생들 모두 거부감이 심했다. 교사는 50분이 아닌 100분간 수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학생들은 새로운 수업방식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교장의 확고한 의견에 모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곧 수업시간이 길어져 지루해하지 않을까 하던 걱정은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이상봉 교사의 얘기다.
"과거에는 예습하지 않거나 교과 내용이 너무 어려울 경우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드릴형 수업은 수업 시간 내 복습과 예습 시간이 있기 때문에 공부에 흥미가 없던 아이들도 수업에 참여하는 열의가 높아져요. 학생마다 자신의 실력에 따라 질문을 하기 때문에 맞춤형 수업도 가능하고요. 드릴형 수업을 진행한 지 3개월쯤밖에 안돼 아직 성적이 크게 상승했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지만, 평소 질문하지 않던 학생들의 질문이 많아졌고, 수업 때 조는 학생들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성공을 확신합니다."
지리산고의 명성을 듣고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3학년 원현지(18)양은 "평소 모르는 문제가 있어도 선생님께 질문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수업시간에 자유롭게 질문해서 좋다"고 말했다. 3학년 이세림(18)양은 "선생님과의 관계가 더 친밀해지는 것도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명예교수·외부강사도 수업 지원
같은 시간, 옆 강의실에서는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가 진행하는 논술 수업이 한창이었다. 30여명의 학생의 그의 강의를 토씨 하나 놓칠세라 경청하고 있었다. 서강대 국문학 김열규 명예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 그는 지난 3년간 매주 한 차례씩 지리산고에서 무료 논술강의를 한다. 글쓰기의 재미를 알게 됐다는 1학년 손민경(16)양은 "명성이 높은 교수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노년에 내가 가진 재능을 학생들을 위해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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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술수업 모습.
지리산고에는 김 교수를 비롯해 10여명의 외부 전문가들이 정규 수업 및 특강 형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어·영어·수학 심화 학습뿐 아니라 각종 제2외국어 수업·연극·태권도 등 다양한 방과 후 전문 프로그램을 실력 있는 외부강사들의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 학생들에게 최고의 강의를 제공하자는 박 교장의 의지에서 나온 결과다. 전문가를 직접 초빙하는 그는 삼고초려를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열성적이다. 3학년 이세림(18)양은 "지리산 골에 있지만 도심에서 사교육을 열심히 받는 학생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지리산고에서는 4학기 제 운영, 방학 동안 진행하는 멘토링 캠프, 다양한 방과 후 프로그램 등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지리산고의 노력 덕분에 열악한 환경에도 '산골의 특별한 학교'로 소문까지 날 정도로 인근지역에서는 유명해졌다. 입학 모집 시기에는 전국 각지에서까지 학생들이 몰려 경쟁률이 매년 점점 상승하는 추세다.
박 교장은 "학생들에게 좋은 일이라면 앞으로 어떤 방식도 과감하게 도입할 예정이다. 새로운 시도로 공교육의 주목받는 모델로 자리 매김하고 싶다"고 말했다.
입력 : 2010.08.11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