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여행자들의 코스는 자카르타 - 족자카르타 혹은 자카르타 - 반둥 - 족자카르타 정도 된다는데, 그리고 우리도 족자카르타는 어차피 갈 거지만, 한번에 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기차를 타고 8시간 걸린다니 그보다는 우리의 기존 여행 패턴대로 중간 도시를 잘라 잘라 가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1차 후보가 남쪽 해변 도시인 팡안다란(빵안다란.Pangandaran)이었다. 해변보다도 그 근처 치줄랑(Cijulang)에 있다는 바디 래프팅으로 유명한 계곡에 마음이 더 끌렸다.
2023.12.26
반둥의 제2 터미널인 치차흠(찌짜흠 Cicaheum)에 도착한 시간이 8시 20분쯤이었는데 이미 9시 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으니 기타를 들고 노래를 하는 버스커가 눈에 띄었다. 버스 안에서 버스킹이라~~ 특이한 문화가 있나 보다 하며 한 번은 잔돈을 쥐어 줬는데 잠시 후에 다른 가수가 또 올라온다. 수금하고 내려가면 또 올라오고, 버스가 출발한 다음에도 노래를 부르다가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고... 뭐야? 그러고보니 한둘 빼고는 노래 실력도 형편없잖아? 이건 버스킹이 아니라 구걸이네. 이후에 다른 버스에서도 혹은 음식점 앞에서도 많은 베짱이(옆지기의 표현)들을 마주쳤다. 문화는 문화인 듯. 자주 보니 눈쌀이 찌푸려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냥 손내밀고 돈 달라는 것보다는 나은 것도 같고 가끔은 노래를 제대로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비슷한 문화일까? 혼잡한 거리에서 차량 통행을 정리해 주고 운전자들에게서 잔돈을 받는 사람들도 많이 봤는데 동전까지 주고받는 걸 보면 이들도 자원봉사와 구걸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가 인도네시아에는 순수한(?) 거지가 거의 없었다. 60일 동안 동안 만났던 순수한 거지는 우붓 중심가 길모퉁이에 앉아 손을 벌리던 할머니와 다음 날 할머니 대신에 앉아 있던 다른 여자 딱 두 명뿐이었다.
버스가 동네마다 멈춰가며 먼 거리를 천천히 달리니 지루하기는 했지만, 차 안에서 망고도 사 먹고 중간에 휴게소에서 내려 컵라면도 사 먹고 창밖 경치 구경도 하고 가끔 졸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2시쯤 되어 팡안다란에 도착했다.
예약해 둔 숙소는 걸어갈 수 없는 거리, 버스는 없을테니 당연히 택시를 불러야지. 그런데 바로 오겠다던 고젝 기사가 오다가 말고 엉뚱한 쪽에 멈춰 있다. 왜 안오냐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길이 막힌다며 취소를 하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고젝 초보, 7분 이상 기다리면 페널티 없이 취소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고 결정적으로 취소 버튼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찾기 어렵게 맨 아래로 내려가야 있더구만). 나 취소할 줄 모른다, 당신이 취소해라 (배째라) 하고는 다른 그랩을 호출했다. 이번에도 꽤 오래 기다리기는 했지만 문제 없이 숙소를 향하여 출발했는데 잠시 후에 고젝앱으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당신을 찾을 수 없다, 뭔 소리야? 취소한 거 아니었어? 이번엔 전화다. 나 벌써 차 타고 가는 중이다. 이제 와서 왜 그래?
친절한 기사가 숙소 들어가는 골목을 찾지 못해서 왔다갔다 하다가 (우리는 여기서 내려주면 걸어가겠다고 했지만) 끝내 작은 골목 안에 있는 숙소까지 데려다 주고 갔다. 그런데 잠시 후에 고젝앱이 띵똥 거리더니 동시에 두 건의 청구가 들어왔다. 금액도 같고 시간도 같고 기사 이름과 얼굴만 다르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람? 두 기사의 사진을 비교해 보며 가짜라고 생각되는 기사에게 별점 하나를 줬더니 사유를 적으라는 메뉴가 뜬다. 나는 이 사람 차를 탄 적이 없다-고 적었다. 얼마 후에 결제 하나가 취소되었다는 메시지가 왔다.
여기서 잠시 숙소 얘기. 구글 지도에서도 아고다에서도 마땅한(싸고 좋은 ^^) 숙소를 찾기 어려워서 예약을 못 하고 있다가, 어제서야 부킹닷컴을 통헤서 JM 홈스테이를 예약했다. 구글 평점이 무려 5.0이었다. (리뷰어가 36명이니 제법 맏을 만하지 않은가?) 가격은 조식도 없이 5만원이니 이번 여행 중 최고 수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많이도 받는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평소에도 3만원대, 홈스테이 치고는 비싼 편이다. 그런데도 평점이?) 그런데 도착해 보니 생각보다 방이 작다. 그리고 방에 아무 것도 없다. 냉장고나 드라이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의자도 탁자도 옷장도 아니 옷걸이도 없는 썰렁한 방이다. 침대 하나 정수기 하나, 거울 하나, 끝!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가 없는 사람이 운영하는 듯하다. 벽에 옷걸이 몇 개 박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도 신축이라 깨끗하고 침대도 괜찮은 편,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고젝 기사란다. 차를 잘 타고 갔으면서 왜 안 탔다고 했냐며 항의를 한다. 니가 차 막힌다고 취소하고서 태웠다고 거짓말 하는 거잖아? 했더니 자기는 취소한 적이 없고 우리를 태워 홈스테이까지 데려다 줬다고 우긴다. 아, 우리가 사람을 혼동한 걸까? 급기야 기사가 호텔로 찾아왔고, 얼굴을 보니 이 기사가 맞는다. 에구, 미안해요. 우리가 착각했네요. 이 기사는 잘못이 없고 내가 사람을 착각한 것이라고 고젝 고객센터로 메시지를 보냈고, 기사는 오해가 풀렸다며 웃으며 돌아갔다.
그럼 다른 기사가 사기친 거군! 다시 별점을 하나만 주고, 사기꾼이라고 사유를 적었더니 얼마 후에 그 기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자기를 바람맞혔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이 기사가 맨 처음에 연결되었던 기사라고 생각하고 오래 기다려도 니가 안 와서 새로 호출을 했을 뿐이라고 했는데, 이 기사는 콜 잡고 바로 갔는데 내가 없더라고 주장한다. 알고 보니 이 기사는 그 기사가 아니다. 이 기사 덕분에 알게 된 고젝 시스템에 의하면, 기사가 취소하면 자동으로 호출이 복원되어 다른 기사들에게 노출된다. 이 제3의 기사는 단지 호출이 보이길래 잡았을 뿐이고, 현장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더라는 얘기다. 그래서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지만 무시당하고 결국 허탕을 쳤다는 것,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군. 바람 맞힌 건 미안하다. 나는 취소하면 자동으로 호출이 뜨는지 몰랐다. 일단 사과를 하고, 그렇지만 안 태운 사람을 태웠다고 돈을 청구한 건 더 큰 잘못이잖나? 기사도 홧김에 그랬다며 미안하다고 인정을 하고 통화를 끝냈다.
이 과정에서 두 건의 그랩 결제가 모두 환불 처리가 되었다. 이건 아닌데? 내가 이득을 보려고 시작한 일이 아닌데, 하루에 기사 두 명을 저격하고 차비도 안 냈으니, 본의 아니게 진상 고객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차비라 해봤자 2천원 정돈데 애초에 그걸 환불 받겠다고 이의를 제기한 게 쪼잔한 일이었을지도)
2023.12.27
그런데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숙소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으려고 기다리는데 어제 호텔로 데려다 준 기사가 쳐들어 왔다. 왜, 또? 나 때문에 일주일 영업 정지를 맞았다는 것이다. 빨리 풀어달라고 하는데, 내 잘못이 있으니 (어제부터) 열심히 협조하고는 있지만 고젝앱에 (기사 잘못이 없다고 정지를 풀어 달라는 탄원) 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올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기사가 고젝 사무실에 아는 직원이 있다며 전화를 걸어 나를 바꿔주기도 하고 내 전화기를 달라고 해서 고젝앱에 직접 탄원하는 글을 쓰기도 하고 어쩌고 하더니 두 시간 만에 드디어 징계가 풀렸다. 어이구 다행일세.
이것도 인연인데, 더구나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오늘 찌줄랑(치줄랑. Cijulang) 그린캐년을 갔다오자고 제안했다. (오늘은 바다 구경이나 하고 그린캐년은 내일 갈 계획이었는데 즉석에서 변경한 것) 기사도 (자기 밥벌이니 당연히?) 좋다고 해서 가격 얘기도 하지 않고 그냥 출발했다. 이틀 동안 나름 신뢰가 쌓인 거지.
팡안다란을 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그린캐년의 바디래프팅이라 기대가 컸는데, 계곡의 경치도 구명조끼만 입고 물살을 따라 내려가는 액티비티도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옆지기도 지금까지 가본 곳 중 최고라며 흡족해 했다.
퍼블릭 그룹 투어도 있고 프라이빗 투어도 있고 래프팅 없이 보트 유람만 하는 투어도 있고, 요금 체계가 조금 복잡한 것 같던데, 기사가 데리고 간 사무실에서 800리부를 주고 전용 보트, 지프 차, 가이드, 점심 식사 포함하는 프라이빗 투어로 결제했다. 5명 프라이밋 투어가 1,100리부라던데 800이면 좋은 가격 맞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만족도가 컸기에 요금에 불만은 없다.
텐션이 넘치는 가이드 아저씨가 내 전화기를 챙겨 가더니 원투쓰리, 나이스, 원투쓰리, 베리 나이스를 연발하며 사진을 엄청 찍어댔다. 오죽했으면 투어 중간에 배터리가 아웃되어 옆지기 전화기로 대체해야 했다. 그래서 사진 잘 찍나보다 하고 기대를 했는데, 결과는 그냥 사진이 너무 많아 정리가 힘들겠다는 느낌, 잘 찍은 사진은 몇 개 없다. 그래도 열심이 찍어댄 성의가 고마워서 팁을 50리부씩이나 드렸다.
단촐하지만 분위기도 맛도 나쁘지 않은 점심을 먹고, 고젝 기사를 다시 만나 팡안다란으로 돌아왔다. 얼마 주면 되겠냐고 물어보니 고젝앱을 열고 왕복 요금을 조회해서 보여준다. 260리부라고 나와 있길래 300 리부를 주었다. 고생하셨구려.
많은 관광객들(자카르타와 반둥에서도 그랬지만 극소수 서양인을 빼면 대부분 인도네시아 사람이다. )과 함께 일몰을 즐기고 숙소로 돌아오다가 Labbaik Chicken에서 치킨과 비프를 테이크아웃.
2023.12.28
바디래프팅도 했고 멋진 일몰도 구경했으니 팡안다란에서의 미션은 모두 클리어한 셈, 오늘은 그냥 쉬면 된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동네 구경도 할 겸 현금인출기를 찾아 돌아다니는데 의외로 찾기가 어려웠다. 바닷가에는 관광객이 많던데 어째 현금인출기가 귀할까? 구글 지도에 의지해서 하나 찾아내기는 했는데 마침 고장이다.
조금 돌아다녔다고 땀이 쏟아진다. 에어컨 있는 까페나 찾아 보자고! 어제 바닷가에서 보았던 배 모양의 멋진 까페가 생각나서 찾아갔더니 호텔 부속 건물이다. 4층에 에어컨 설치된 식당이 있는데 손님이 하나도 없고 에어컨도 켜지 않았다. 5층에 올라가니 어서오라고 인사를 하는데 여기는 에어컨이 아예 없다. 바깥쪽에 테이블이 있어 나가 보니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분다. 높은 곳이라서? 뜨거운 거리를 헤매느니 여기서 쉬기로 하자. 음료 한 잔씩 시켜 놓고 두 시간을 앉아 있다가 점심을 시켜 먹고 또 두 시간... 그런데 그 동안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다.
2023.12.29
오늘은 이동일, 푸르워케르토로 떠나는 날이다. 푸르워케르토는 왜 가냐고? 아직도 족자카르타는 너무나 멀고 지도에서 찾아보니 중간에 그런 도시가 있었기 때문에. 거기까지도 직접 가는 버스는 없어서 중간에 있는 도시인 반자르(Banjar)까지 가서 갈아타야 한다.
터미널 가려고 고젝카를 불렀는데, 호츨에 응답한 기사의 이름이 낯익다. 문제의 세 번째 기사다. 이것도 묘한 인연이네. 아님 이 동네 고젝 기사가 몇 명 안 되나? 차를 타고서 '나 알죠?' 물어보니 안단다. 서로 가볍게 사과를 하고 징계는 안 받았어요? 물어 보니 하루 정지를 받고 쉬었다고 한다. 그랩 기사의 삶이 팍팍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뭐 일단은 착하게 삽시다. 20리부를 팁으로 주고 내렸다. (택시 요금은 18.5 리부)
우리가 반둥에서 반자르를 거쳐(터미널은 들르지 않았던 듯) 여기까지 왔으니 반자르로 가는 대형 버스가 있을 만도 하건만, 터미너에서는 에어컨 없는 중형 버스밖에 없다며 밀어부친다. 여기 올 땐 빅 버스 타고 왔는데? 노 빅 버스 히어. 반자르에서 갈아탄 차도 에어컨 없는 중형 버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버스가 차 문을 열고 달린 덕분에 업청 덥지는 않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