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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Poetry
일정한 형식에 의하여 통합된 언어의 울림, 운율, 조화 등의 음악적 요소와 언어에 대한 이미지 등 회화적 요소에 의해 독자의 감정이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학 작품의 한 형식. 하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는 시인도 많고, 비평가도 많다. 그 관점에 대해 동의하지 않은 일반인도 많다. 그래서 문학 이론서를 펼쳐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확실한 건 시의 정의에 대해 확실한 게 없다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문학 작품의 형식이기도 하며 소설이나 희곡, 수필과 함께 문학의 대표적인 장르 중 하나다.[1]
하지만 앞에서 말한 일정한 형식이란 부분은 현대 시에 와서 거의 파괴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자유시를 비롯해, 산문시, 시 작법(作法)의 하나인 자동기술법을 사용한 시를 보고 있으면 형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현대 예술이 대개 그렇듯이 사전 정보 없이 내용을 이해하기에 곤란하며 하나의 시를 가지고 내용 해석이 사람마다 달라지는 경우가 정상이다. 당신의 해석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국어능력시험 등에서 묻는 것은 당신의 해석이 아니라 출제자의 의도에 잘 부합하거나, 더 잘 알려진 해석쪽에 가깝다.
현대시는 분량이 짧아도 용서된다. 극단적인 경우로 쥘 르나르[2]의 '뱀'[3]이나 황지우 시인의 '묵념, 5분 27초'[4] 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에 시 혹은 수필을 쓰는 작문 숙제가 있다면 시를 택해서 간편하게 숙제를 해결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다만 감당이 안 될 뿐. 그렇기에 한국의 교육계에서는 에세이 형식의 작문을 요구하는 서구 교육에 비해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제대로 교육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오랜 떡밥이었다. 이 때문에 논술 시험 등의 대처 방안이 나왔으나 논술학원 등의 범람으로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다.[5]
참고로 한국엔 오로지 시를 쓰는 것만을 직업으로 삼는 전업 시인은 거의 없다. 이는 원고료 체계에서 비롯되는데 보통 원고료는 매수당으로 지급하는게 기본이다. 한번 실을 때마다 적게는 수 장에서 많게는 수십 장까지 나오는 산문에 비해 같은 노력을 들이고도 딸랑 한 장, 많아야 두 장 정도인 시의 원고료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그런고로 한국의 시인은 대부분 다른 직업을 겸업하고 있다.[6]
또한 이러한 점 때문에 적당히 명함에 한 마디 박아넣고 싶은 허영심 많은 사람들이 쉽게 손대는 장르이기도 하다. 소설은 양판소든 귀여니류든 어쨌거나 분량을 채워넣을 근성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기피 대상이다. 또 이를 이용해 이름없는 문예지나 출판사 등에서는 적당히 몇 줄 실어주거나 시집을 내주는 조건으로 돈을 받아내는 경우도 부지기수. 글러먹은 아저씨, 아줌마들 뿐만 아니라 대학 입학을 목표로 하는 문예특기생들 중에서도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
시에는 그 율격과 형식, 향유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하부 갈래가 있지만 2009년 현대의 대한민국 기준으로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현대 시조와 현대 시가 전부다. 본래는 음악이 시에 포함되지만 현재 음악의 기능은 대중 음악으로 사실상 분리된지 오래다. 다만 대중음악은 깊이 있고 아름다운 표현보다는 사람 귀에 잘 꽂히도록 직관적이고 쉬운 표현, 혹은 상업화의 결과로 이상한 외국어를 마구 쓰다 보니 수준이 낮아 보이는 것 뿐이다. 따라서 말하자면 현대적 시인의 범주에 싱어송라이터도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방향의 연구도 실제로 문학계에서는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것이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실제로 싱어송라이터를 자처하는 가수들의 가사를 글로 써 놓고 보면 시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만이 아니라 어떤 시험이든 언어영역이 포함된 경우, 수험생을 엿먹이는 부분 중 1위를 다툰다. 그야말로 시X 소리가 난다 그나마 소설이나 비문학은 읽고 대충 알아먹을 수는 있긴 한데, 시는 잘못 걸리면 얄짤없다. 만약 운이 없어 난해시가 걸릴 경우엔(특성상 잘 안 내지만), 굉장히 애를 먹을 수 있다.
최근에는 SNS를 통해서 시가 활성화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청년실업과 헬조선 논란, 사회 구석구석의 갑질 행태 등 한국 사회의 각박한 현실에서 시가 주는 특유의 치유 효과 때문인 듯으로 보인다. 이 분야에서는 하상욱이 유명하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내공이 부족한 자들이 덩달아서 이외수의 입을 틀어막은 걸작이나 블리치/시, 아프리카(시집), 싸이월드 허세처럼 중2병이 폼만 잔뜩 잡은 듯한 시를 양산하기도 하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걸 시라고 부르지 않고 포엠(poem)이라고 부른다.
사실 '시'라는 말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난해함'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고, 시에 대한 애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비중은 여타 문학 갈래에 대한 애호가들의 비중보다 압도적으로 떨어진다.[7]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통신 언어로 전달하기 용이하고, 소비 속도가 빠른 시가 최고의 문학이 될 거라 예상했으나, 예상과 달리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시 자체의 인기는 죽었을지라도, 다른 문학 장르와 쉽게 결합할 수 있는 시의 특성상 알게 모르게 우리가 많이 접하게 되는 장르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대중음악의 가사들은 수준이 높냐 낮냐와는 별개로 적지 않은 수가 그 자체로 운문이며,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성경의 욥기처럼 책 내용 대부분을 운문으로 채워넣어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특히 장르의 특성상 그 자체로 노랫말을 이루기에 음악과는 환상의 궁합을 가지고 있다.[8] 이를테면 성경의 시편과 중국의 시경은 시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대 이스라엘과 중국의 가요 모음집이기도 하다. 힙합의 경우는 사실상 시를 읊는 장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힙합 가수들은 반쯤은 시인이라고 봐도 된다. 이렇게 본다면 고대에서부터 이 난해한(?) 문학이 어째서 인류에게 꾸준히 사랑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문맹률이 높고 인쇄술의 발전이 더디었던 시대라면, 난해하다는 편견과는 반대로 시는 가장 대중에게 친화적인 문학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당신이 고대 그리스인이고, 대중들에게 그리스 신화를 가르치고 싶다고 생각해보자. 교육에는 당연히 교재가 필요하다. 현대인이라면 그 교재로는 '책'을 떠올릴 것지만,고대의 문맹들에게 '책'으로 교육을 한다는게 말이나 될까? 따라서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고자 한다면 책이 아니라 '구전'의 형태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산문은 구전으로 부적합하니, 그 자체로 운율을 갖추었기에 암송하기 쉬운 운문이야말로 제격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외우기 쉽게 멜로디를 붙이는 것도 산문보다는 운문이 상대적으로 쉽다. 실제 역사의 사례를 보자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암흑시대 동안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후대에 이르러서야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조선의 용비어천가 등 국가적 프로파간다들 역시 대중들이 암송하기 쉽도록 운문으로 작성되었다.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도 일단 가사 자체는 운문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본다면, 옛 사람들에게 시가 얼마나 대중에게 친화적인 장르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해율이 낮고 책을 구하기도 어려운 시대라면, 결국 암송하기 쉬운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암기하는 형태로 교육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9]
이러한 면모들에서 보자면, 미취학 아동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알파벳 노래를 부르고, 신부나 목사들이 성가(찬송가)를 부르고, 인기 가수들의 노래를 길거리에서 흥얼거리는 이상, 시라는 문학은 알게 모르게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음악을 제거했을때 시의 인기는 낮은 편이지만, 애초에 시는 음악과 결합해서 암송되던 장르이니 음악을 배제하고 시의 인기를 논하는 것은 굉장히 부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배우들의 상연을 빼놓고 희곡이라는 문학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듯, '음악'을 빼놓고 시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한 한국의 교육과정은 시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키우는 경향이 있는데, 대중들이 쉽게 흥얼거리라고 만들어진 장르를 '암호 해독'으로 전락시켜버리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산문에 비해 짧은 본문에서 어떻게든 변별력을 끌어올리려다보니 일어나는 현상인데, 때문에 입시 이외에서는 절대다수가 시를 외면하는 역효과만 가득 나오고 있다. [10]
결국 시의 가장 좋은 향유방법은,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에 따라 좋아하는 작품을 몇몇 외우거나 기억하다가 하나의 작품에 다양한 해석을 늘려가보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