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 이자성은 우봉(牛峰) 사람이니 부친 이공정(公靖)은 병부상서(兵部尙書)이었다. 이자성은 성질이 강렬하고 용력이 있으며 활도 잘 쏘았다.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고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상장군으로 되었다. 고종 18년에 몽고 원수 살례탑이 군대를 동원하여 침입하여 왔을 때 왕이 장수에게 명령을 내려서 3군을 거느리고 방어하라 하였는데 아군은 동선역(洞仙驛)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침 해가 저물었고 척후병의 보고에도 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3군이 말안장을 해제하고 휴식하고 있었다. 이때에 어떤 자가 산 위에서 “몽고군이 온다”고 소리치니 온 군대가 크게 놀라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몽고병 8천여 명이 돌입하므로 이자성과 장군 이승자(李承子), 노단(盧坦) 등 5∼6명이 항전하였다. 이자성은 적의 화살에 명중되었고 노탄은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졌는데 어떤 군인의 구호를 받아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이때 3군이 점차 모여 들어서 적과 싸웠으므로 몽고병이 약간 물러갔다가 다시 와서 우리측 우군을 공격하였다. 산원(散員) 이지무(李之茂), 이인식(李仁式) 등 4∼5명이 항전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산(馬山) 지방에서 초적(草賊)질하다가 종군한 자 두 사람이 활을 쏘는 족족 적군을 맞혀서 쓰러뜨리므로 관군이 이긴 기세를 타서 진격하여 적을 물리쳤다. 이듬 해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는데 어사대(御史台)의 관노(官奴) 이통(李通)이 개성이 공허한 기회를 타서 경기 근처 지방의 좀도적과 성내의 노예들을 불러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유수 병마사(留守兵馬使)를 축출하고 3군을 편성한 후 각처의 절에 공문을 보내 중들을 모집하고 공사(公私)의 재물과 양곡을 약탈하였다. 왕이 이자성을 후군 진장(陣將)으로, 추밀부사(樞密副使) 조염경(趙廉卿)을 중군 진장으로, 상장군 최근(崔瑾)을 우군 진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적들이 3군이 강화로부터 온다는 말을 듣고 임진강에서 방어하고 있었다. 3군이 승천부(昇天府)의 동교(東郊)에서 접전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별장(別將) 이보(李甫)와 정복수(鄭福綏)는 야별초(夜別抄)를 인솔하고 먼저 개성에 이르니 적이 성문을 닫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보가 거짓말로 적군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이 벌써 관군을 쳐부수고 돌아오는 길이니 빨리 성문을 열라!”고 하니 문지기가 곧이 듣고 즉시 문을 열었다. 이보와 정복수 등이 문지기를 죽이고 군대를 데리고 이롱의 집으로 달려가서 가족을 죽였다. 이자성 등이 뒤미처 오니 적의 괴수는 할 수 없이 도망쳐서 은피하였다. 나머지 일당은 모조리 붙잡아 처단하였다. 당초에 충주(忠州) 부사(副使) 우종주(于宗柱)가 문서 처리에 있어서 판관(判官) 유홍익(庾洪翼)과 의견 충돌이 생겼는데 몽고 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수비하는 문제를 토의할 때에도 또 의견을 달리하였다. 그래서 우종주는 양반 별초를 영솔하고 유홍익은 노예와 잡류(雜類)로 편성된 별초를 통솔하게 되었으면서도 서로 시기하고 있었다. 그리다가 몽고 병이 침공하게 되자 우종주, 유홍익과 양반 별초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갔으나 오직 노군과 잡류 별초가 합력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몽고 병이 물러간 후에 우종주 등이 돌아와서 관가와 사가에서 사용하던 은그릇을 검사하였는데 노예군들은 은그릇(銀器)이 부족한 것을 몽고 군이 가져간 것이라고 말하였더니 호장(戶長) 광립(光立) 등이 비밀리에 노군의 두목을 암살할 계획을 꾸몄다. 노군(奴軍)들이 이것을 알고 말하기를 “몽고 병이 오면 모두 도망쳐 숨고 성을 수비하려 하지 않던 자들이 이제 와서 몽고병이 약탈하여 간 것을 도리어 우리들에게 그 죄를 덮어 씌워 죽이려 하는가? 이렇게 된 바에야 어찌 먼저 손을 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례에 회장한다고 속이고 소라를 불어 동류를 소집하였다. 먼저 수모자의 집으로 몰려 가서 집에 불을 질러 태워 버리고 무릇 평소에 호강으로 지내면서 그들에게 불만을 산 자에 대하여는 남김없이 잡아 죽였다. 일변 고을 안에 명령하기를 “만일 수모자를 숨기는 자가 있으면 그 가족을 멸살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혹 숨겨 두었던 것이 발각되면 부인과 소아까지 모두 살해를 당하였다. 왕이 또 이자성 등으로 하여금 3군을 영솔하고 토벌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3군이 달천(達川)에 이르렀으나 물이 깊어서 건너가지 못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다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노군의 괴수 몇 사람이 개울 건너편에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수모자를 죽이고 항복하려 하노라”고 하였으므로 이자성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된다면 너희들은 반드시 다 죽이지는 아니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의 괴수들이 성 안으로 돌아가서 주모자인 중우본(牛本)의 머리를 베어 왔다. 관군이 2일간 유하고 있는 사이에 노군의 건장하고 용맹한 자는 모두 도망가서 숨었으며 관군은 입성하여 그 잔당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노획한 재물과 우마(牛馬) 등을 가져다가 바쳤다. 또 이듬해에 이자성을 중군 병마사로 임명하여 용문창(龍門倉)의 반란군을 토벌하고 그의 괴수 거복(居卜)과 왕심(往心) 등을 붙잡아 죽였으며 또 동경의 반적 최산(崔山)과 이유(李儒)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또 이자성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더니 이자성이 군대를 인솔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음질하여 영주성(永州城)을 점령하고 적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적은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날짜를 정하고 모이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각 고을에서는 듣지 않고 있다가 이자성이 영주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안정되었다. 적들은 이자성의 군대가 원거리에서 급히 왔으므로 관군의 피로한 짬을 타서 공격하려고 영주(永州)의 남쪽 교외에 집결하였다. 관군이 성에 올라 이것을 바라보고 이자성에게 말하기를 “아군은 더위를 무릅쓰고 먼 곳에서 왔고 적의 기세는 왕성하고 날카로워서 당하기 어려우니 성문을 닫고 며칠간 대원들을 휴식시킨 후에 전투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자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무릇 피곤한 군대가 휴식하면 더욱 게을러지는 법이다. 만약 여러 날 끌고 지구전으로 들어가면 적이 우리의 실정도 알게 되어 다른 사변이 생길지도 모르니 그저 급히 공격함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문을 열고 빨리 나가서 적이 포진하지 못한 때를 타서 공격하니 적군이 대패하여 적의 시체가 수십 리에 덮였다. 적의 괴수 최산 등 수십 명을 죽였다. 그리고 이자성이 영을 내리기를 “협박에 못이겨 따른 자의 죄는 다스리지 말라!”고 하니 주민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자성이 동경을 평정하고 돌아온 후 장령과 병사들이 날마다 그 집에 모여 왔다. 그래서 혹 세도 잡은 대관에게 시기를 받을까 염려하여 거짓 병을 청탁하고 객을 사절하며 문을 닫고 출입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미래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일렀다. 38년(1251년)에 문하 평장사(門下平章事)로 있다가 죽으니 왕이 몹시 애도하였으며 시호를 의렬(義烈)이라고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