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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삶
C. S. 루이스
[PART 1]
이토록 소중한 독서라니!
독서라는 예술, 그 희열
1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우리는 자신의 눈과 상상력과 마음으로만 아니라,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상상력으로 생각하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기를 원한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단자의 신세로 만족하지 않고 바깥세상으로 난 창을 갈구한다. 로고스(우주의 이치)로서의 문학은 일련의 창이자 심지어 문이다. 훌륭한 작품을 읽고 나면 자신이 밖으로 나왔다거나 관점에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는 느낌이 든다. 타인이라는 단자의 껍질을 뚫고 그 안이 어떠한지를 알아냈다는 뜻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자아를 벗어나 타인 안에 들어간다. 도덕면에서도 정의나 자비를 실천하려면 매번 타인의 입장에 되어 자신의 경쟁 심리를 초월해야 한다. 또 무엇이든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주관적 사실을 버리고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아를 지키고 더 강화하려는 일차적 충동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아를 벗어버리고 그 편협성을 바로잡아 의로움을 치유하려는 이차적 충동도 함께 갖고 있다. 바로 사랑, 덕행, 지식 추구, 예술 감상 등을 통해서 우리는 이 일을 한다. 이 과정은 자아의 확장이나 자아의 일시적 소멸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오래된 역설이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신념 속에 즐거이 들어간다. 그 신념이 설령 허위인 듯 여겨질지라도 말이다. 또 우리는 타인의 열정 속에도 들어간다. 크리스토퍼 말로나 토마스 칼라일의 열정이 때로 그러하듯, 우리가 보기에 부패한 열정일지라도 말이다. 또 우리는 타인의 상상 속에도 들어간다. 그 상상이 전혀 현실성이 없어 보이더라도 말이다.
단순이 타인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이 보는 것을 우리도 보기 위해서다. 거대한 극장에서 잠시나마 타인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다. 타인의 안경을 쓰되 그 안경에 비치는 모든 통찰이나 기쁨이나 공포나 경이나 흥취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따라서 시에 표현해 놓은 감정이 정말 시인 자신이 실제로 느낀 것인지, 아니면 상상에서 나온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우리도 같이 실감하도록 하는 시인의 능력이다.
문학 덕분에 우리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도 다른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만큼 그 간접 경험이 안겨 주는 가치 역시 모두 같지 않다.
2. 나는 진정한 독서가일까?
• 읽은 책은 다시 읽는 일이 즐겁다면
다수의 사람들은 무엇이든 절대 두 번 읽지 않는다. 독서하지 않는 사람의 확실한 징표는 이미 읽은 책이다 라는 말을 결론 삼아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읽지 않겠노라 거부 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우리도 다 알거니와, 그들은 특정 소설에 대한 기억이 어찌나 희미한지, 도서관에 서서 30분간 책을 훑어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전에 읽었던 책을 밀쳐 낸다. 그들에게는 죽은 책이다. ~~~반면에 명작을 읽은 사람들은 똑같은 작품을 평생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도 읽는다.
• 독서 활동을 그 자체로 매우 중시한다면
다수의 사람들은 독서를 별로 중시하지는 않는다. 궁여지책으로 책을 잡고 잇다가 다른 소일거리가 생기면 기다렸다는 듯이 책을 내던진다. 독서가는 책 읽을 시간과 조용한 환경을 늘 찾는다. 그것도 온 심혈을 기울여 찾는다.
• 내 삶을 뒤바꿔 놓은 책들을 따로 꼽을 수 있다면
독서가에게는 어떤 문학 작품을 처음 읽는 순간이 사랑이나 신앙이나 사별의 경험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중대사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의식이 송두리째 바뀌어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책을 읽어도 이런 징후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 읽은 내용을 계속 반추하고 떠올린다면
몇몇 소수의 사람은 읽은 내용을 늘 또렷이 기억하는 반면 다수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독서 행위가 서로 다른 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전자는 좋아하는 행이나 연을 혼자서 읊조린다. 책 속 장면과 등장인물이 그들에게 일종의 표상이 되어, 이를 기준으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거나 정리한다. 그 책과 관련한 이야기를 서로 자주 길게 나눈다. 반면에 후자는 읽은 내용을 생각하거나 입에 올리는 법이 거의 없다.
3. 동화 아이들만의 책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동화 못지않게 툴스토이와 제인 오스틴과 앤서니 트롤롭의 소설도 즐겨 읽는다. 지금의 나는 동화를 읽을 때도 소설을 읽을 때만큼 성ㅈ아해 있다. 얼리 적보다 지금 동화를 더 잘 즐기기 때문이다
4. 문학은 시간 여행
문학수업을 하는 참 목표는 학생에게 모든 시대와 실존까지는 몰라도 그중 태반을 유람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편협한 관점을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정신현상학을 제대로 배우면서 다양한 인간상에 눈뜨는 것이다. 역사만으로는 안된다. 역사는 과거를 주로 이차 문헌으로 공부하기 때문이다. 몇 년씩 역사를 공부하고도 결국 앵글로 색슨족 백작이나 기사, 18세기 지방의 대지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모를 수도 있다.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진면목은 거의 문학에서만 볼 수 있다.
5. 동화, 현실 세계에 새로운 차원의 깊이를 더하다
6. 고서를 읽어야 한다
어떤 주제든 고서는 전문가만 읽고 아마추어는 현대서적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영문학 교수로 일하면서 늘 보면 플라톤 철학을 배우겠다는 학생도 정작 도서관 서가에서 번역판으로라도 플라톤의 향연을 뽑아 읽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보다 열 배나 더 두껍고 따분한 현대 서적을 읽는데, 온통 무슨무슨 주의와 그 사조가 끼친 영향을 기술한 내용일 뿐 실제로 플라톤이 한 말은 가뭄에 콩 나듯이 나온다. 겸손에서 비롯된 과오라 그나마 정감이 간다.
아무리 무지한 학생도 플라톤의 말을 다는 몰라도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지만, 플라톤 철학을 다룬 일부 현대 서적은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다.
현대 서적을 선호하고 고서를 꺼리는 오류가 가장 성행하는 분야는 신학이다. 기독교 평신도들이 모여 공부하는 소그룹을 들여다보면, 거의 단언컨대 누가나 바울이나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나 리처드 후커나 조셉 버틀러가 아니라 니콜라이 베르다예프나 자크 마리탱이나 라인홀드 니버나 도로시 세이어즈나 심지어 C. S. 루이스를 공부한다. 내가 보기에 본말이 전도되었다. 물론 나도 작가인지라 일반 독자들이 요즘 책들도 읽기를 바란다. 하지만 신서나 고서 가운데 하나만 읽어야 한다면 고서를 권하고 싶다. 신서는 아직 시험 단계며, 이는 아마추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고금의 rloehrry 사상 전체를 기준으로 검증 과정이 필요하며, 이면에 숨은 의미까지 모두 밝혀져야 한다. 대개 신서는 상당수의 다른 현대 서적들의 내용을 모르고는 다 이해할 수 없다.
7. 이야기에서 기현상이 담당하는 역할
8. 책의 바다에서 성장하다
1) 끝없는 책의 선물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은 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과도 같다. 나는 그 집의 긴 복도, 햇빛이 비쳐 드는 빈방들, 위층 실내를 감싸는 정적, 혼자 탐험하던 다락들, 멀리 물탱크와 수도관에서 흐르던 돌돌 물소리, 기왓장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 등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그리고 끝없이 많은 책들이 만들어 낸 산물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읽는 책마다 모두 가져와서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다락에 내 어깨 높이로 쌓여 있던 책. 비가 영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오후 시간이면 나는 책장에서 줄줄이 책을 꺼내 읽었다.
2) 어느 젊은 학자의 이상적인 하루
3) 책의 몸통까지 사랑하다
9. 제일 좋아하는 작가를 처음 만난 순간
10. 영화가 때로 책을 망쳐 놓는 이유
일전에 라이더 해거드의 소설 <솔로몬왕의 보물>을 영화화한 작품을 보았다. 오점이 많았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만 짚으려 한다. 책 결말부에서 석조 방에 갇힌 채 그 나라의 미라 왕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기다린다. 그런데 영화 제작자는 그 상황이 지루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그래서 대신 지하 화산을 폭발 시킨 뒤 한술 더 떠서 지진까지 나게 했다. 그를 탓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원작의 그 장면이 영화에 맞지 않아, 영화 예술의 원칙대로 고치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작을 망쳐야만 각색이 가능했다면 애초에 그 소설을 택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책을 망쳐 놓은 영화 였다.
11. 단어를 죽이는 법
단어를 죽이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가장 흔한 것 가운데 하나는 부풀리기다. 우리에게 :아주“ 대신 ”지독하게“를, ”큰“ 대신 ”엄청난“을, ”잔인성” 대신 “가학성”을, “탐탁지 않은” 대신 “상상도 못할”을 쓰도록 가르친 사람들은 모두 단어를 죽였다. 또 하나는 지나치게 장황한 말투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단어로 남발한다는 뜻이다. 왜 중요한지 말해 줄 생각도 없으면서 무조건 “중요하다”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가 그 예다.
단어를 죽이는 가장 큰 원인은 대다수 사람이 그 단어로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기보다 찬반을 표현하려는 욕심이 단연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어는 점점 묘사에서 멀어져 평가에 가까워진다.
12. 천사의 나락에서 단어를 구하라
“신사”의 의미가 분명하면 아무개는 신사라는 말로 충분하다. 그런데 “정말 신사”. “찬 신사”, “진정한 의미의 신사”로 말이 불어나기 시작하면 단어의 수명이 거의 다한 것이다. 대다수 사람이 그냥 사실을 묘사하기보다 호불호를 피력하려는 욕심이 더 많은 한, 이는 언어의 보편 진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13. J. R. R. 톨킨의 위업
1) <호빗> 서평
<호빗>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는 사뭇 다르지만 교수의 작품 활동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둘 다 몇 손가락 안에 들만한 부류의 책이라는 것인데, 그 부류에 속하는 책들은 우리를 각각의 세계로 불러들인다는 점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2) <반지의 제왕> 시리즈 서평
이 책은 마른하늘에 번쩍이는 번개와도 같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한 노래>가 그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서 단연 독보적이고 예측을 불허하는 책이다. 낭만주의라면 배격하는 이 시대에 갑자기 영웅 소설이 찬란하고 유창하고 호기롭게 복고했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별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야 이 복고가 한없는 안도감과 더불어 꽤 중요하다. 하지만 <오디세이>와 그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웅소설 자체의 역사로 보자면, 이는 복고가 아니라 발전이나 혁명이다. 신대륙 정복이다.
14. 영웅 무용담과 실제 역사를 혼동하는 위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tfl제 역사를 들여다보면 비루하고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가득하다. 영웅담은 전형으로 굳어지면 잘못된 인상을 주기 때문에, 대개 진지한 역사 비평의 대상이다. 그래서 찬란한 과거에 기초한 애국심은 실상을 파헤치려는 이들에게 좋은 과녁이 된다. 많이 알수록 애국심이 붕괴되어 환멸과 냉소로 변하거나, 그대로 유지하려면 억지로 눈을 감아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누가 영웅담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영웅담이 많은 중요한 순간에 많은 사람의 행동을, 그 덕분이 아니었을 경우보다 훨씬 나아지게 한 것만은 분명하니 말이다.
15. 두 가지 여행법. 두 가지 독서법
Part 2
삶이 피어나는 독서의 자리로
• 단어의 조합 시어의 매력
일부 단어의 조합에서(의미와는 거의 별개로) 음악 같은 전율이 전해져 올 수 있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이는 내가 자네에게 부단히 가르치는 시어의 매력이 분명히 자네에게도 느껴지기 때문이지. 물론 이는 시를 감상하기 위함인데, 이미 자네도 시를 꽤 감상하고 있으니 모든 좋은 시라고 말해야겠군.
- 친구 아서 그리브즈에게 보낸 편지. 1916년 3월 21일
• 진실성과 글쓰기 재능
존 번연이 글을 잘 쓴 이유를 그가 진ㅅ리하고 솔직한 사람으로서 문학적 허세를 부리지 않고 생각대로만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틀림없이 번연 자신은 그렇게 설명했겠지만, 그것은 말이 안 된다. 글재주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말이 진실하고 솔직해도 손에 펜만 들었다 하면 진부한 상투어가 쏱아져 나온다. 여기 충격적 사실이 있다. 진실하지 않고는 글을 잘 쓰기가 치명적으로 어려울 수 있지만, 진실성 자체는 누구에게도 좋은 작업을 가르친 적이 없다. 진실성은 문학적 재능이 아니라 도덕적 덕목이다. 진실성에 대한 보상을 바랄곳은 내세이지 문단이 아니다.
• 문체의 위력
어떤 생각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며, 문체는 주어진 생각을 가장 아름다운 단어와 운율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때에 이른 아침에 나타나는 별자리들이 음악 활동에 동참하며 천사의 영들이 큰 소리로 만족감을 증언했다”라는 표현과 “그때에 새벽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라는 표현은 확연히 다르다.
[Review]
독서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이 그럭저럭 꽤 오래되었다. 흥미나 어떤 느낌만을 목적으로 하는 독서가 아니고 미련스럽게 작은 문장 하나도 세심하게 대하며 컴퓨터 자판으로 메모하며 읽었다. 이렇게 하기까지에는, 이 책에서 C.S. 루이스가 말했듯이 “타인이 보는 것을 나도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을 살아가지만, 또 다른 공간, 마음의 공간도 함께 살아간다. 그 공간은 누리는 방법에 따라 각자가 다르다. 늘 곁에 있는 공간은 익숙하여 습관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내면의 감흥을 불러올 수 없게 만든다. 어떤 이들은 이유가 우리의 생각을 일으키는 뇌의 기능이 변하지 않는 상황은 안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새로운 환경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것이다. 영화나 연극을 보고 음악을 듣는 것은 모두 자아의 껍질을 벗어나서 새로운 환경, 즉 타인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로인해 우리 삶의 공간은 제한된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무한한 세계 속으로 확장된다. 그중에서 독서는 타인의 내밀한 감정까지도 탐색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아를 지키고 더 강화하려는 일차적 충동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아를 벗어버리고 그 편협성을 바로잡아 의로움을 치유하려는 이차적 충동도 함께 갖고 있다.”(본문)
이 책의 저자, C. S. 루이스는 이 책에서 매일 일고여덟 시간 책을 탐독하던 사람이었다. 그것도 같은 책을, 평생을 두고 열 번, 스무 번 읽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동안 C. S. 루이스의 에세이나 편지 등에서 독서와 관련된 내용을 발췌 , 엮은 책으로 독서의 방법과 책의 선택 등 많은 교훈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부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 몇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곁에 두고 생각날 때 반복해서 읽고 싶은 책이다.■
(본문)
“우리는 타인의 신념 속에 즐거이 들어간다. 그 신념이 설령 허위인 듯 여겨질지라도 말이다. 또 우리는 타인의 열정 속에도 들어간다. 크리스토퍼 말로나 토마스 칼라일의 열정이 때로 그러하듯, 우리가 보기에 부패한 열정일지라도 말이다. 또 우리는 타인의 상상 속에도 들어간다. 그 상상이 전혀 현실성이 없어 보이더라도 말이다. ”
“몇몇 소수의 사람은 읽은 내용을 늘 또렷이 기억하는 반면 다수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독서 행위가 서로 다른 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전자는 좋아하는 행이나 연을 혼자서 읊조린다. 책 속 장면과 등장인물이 그들에게 일종의 표상이 되어, 이를 기준으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거나 정리한다. 그 책과 관련한 이야기를 서로 자주 길게 나눈다. 반면에 후자는 읽은 내용을 생각하거나 입에 올리는 법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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