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상 16:7)
가끔 목사님들과 설교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습니다. 지난 6월에는 부산 CTS 주관으로
열린 설교 세미나에 다녀왔고, 7월에는 부산장신대학교가 주관하는 설교 세미나에 참여했습니다.
말씀드리는 저나, 참여하신 모든 이가 늘 설교현장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기에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각자의 설교 스타일과 설교에 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두고 말할 때 어떤 이는 말투에 관심이 있습니다. 정확한 표준어로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심한 사투리가 더 인상적인 분이 있습니다. 빠르게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하는 이가 있습니다. 높은 톤으로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저음으로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책을
낭독하듯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차 한잔 나누며 친구와 말하듯이 하는 이가 있습니다. 긴장 된
태도로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여유로운 이가 있습니다. 한번 체질이 되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중이 듣기에 좋은 방향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조금 더 전문적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어떻게 읽고 묵상하는지, 받은
은혜를 어떻게 정리해 두었다가 꺼내서 사용하는지, 살은 어떻게 붙이는지, 참고하는 성경 주석은
무엇인지, 예화는 어디서 어떻게 수집하는지, 그리고 정리된 자료를 어떻게 설교 원고에 옮기는지,
글의 전개 순서는 어떻게 하는지, 서론 본론 결론의 방식이 좋은지, 아니면 기승전결의 방식이
좋은지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 원고를 보는 게 좋은지, 보지 않는 게 좋은지 등을
질문합니다.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상의 관심은 매우 중요하고 당연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학 교수님들께서 늘 강조하는 결론은 <설교자가 설교>라는 것입니다. 잘 준비된 원고나
유창한 말주변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입니다. 설교자가 설교라는 말은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인품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속사람이라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의 이새에게 보내 그의 자녀 중에서 사울 왕의 뒤를 이을
사람을 세우실 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중심이
곧 인격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격이란 캐릭터 (character)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철판에 못을 대고 망치로 내려쳐서 글이나
그림을 새기는 일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철판에 새겨진 글이나 그림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깊이 새겨져서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인품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그의 재주와 능력이 생각나기도 하지만,결국은 그의 인품이 기억날 것입니다.
그러나 인격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인품 개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속사람의 성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영성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속사람의 성숙 가능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비교적 동안이라고 자부하던 이들이 갑자기 늙어버린 모습을 볼 때 슬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설교자가 개발해야 할 것도 설교의 외적
측면이 아니라, 설교자의 속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인품이란 그리움을 잔뜩 머금은 고향과 같습니다. 정채봉 선생님의 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에는 자신을 낳고 겨우 스물한 살에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 엄마가 /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 아니 아니 아니 아니 /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 단 5분 /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 엄마! /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 숨겨놓은 세상사 중 /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 엉엉 울겠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땅의 여성들이 만들어 온 <엄마>라는 존재의 인품
때문입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보듬어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엄마들! 엄마라는 단어는 무한한
그리움과 용기의 원천입니다.
이 땅의 성도들이 만들어내는 그리움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 성도!>라고 할 때
누구나 느끼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인격적 향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오던 구한말에는 성도라는 단어가 신용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성도라고 하면 모르는
집에서도 재워주고, 심지어 노자까지 챙겨 주었다고 합니다. 엄마라는 단어가 사랑과 따스함을
느끼게 하듯, 성도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힘을 가졌습니다. <영락교회 성도!>라는 말이 힘이
있으면 좋겠습니다.감동의 힘, 신뢰의 힘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속사람의 변화와 성숙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김운성 위임목사님, 영락교회 발간 월간 ‘만남’ 22년 8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