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22,1-2.9ㄱ.10-13.15-18; 로마 8,31ㄴ-34; 마르 9,2-10
+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어요? 우수가 지나고 봄이 오는 줄 알았더니 비가 자주 오면서 쌀쌀한 한 주였는데요,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사순 제2주일인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주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해마다 사순 제2주일에는, 주님 부활을 앞당겨 체험하는 거룩한 변모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저는 사제품을 받은 이듬해, ‘성소 계발 담당 사제’로 발령을 받아 교구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요, 어느 날 권민자 수녀님의 ‘예수마음기도’라는 피정 프로그램에 대한 소식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의 40일 피정 후기를 읽었습니다. 글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났구나!”
형님의 단순한 글 안에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진솔한 고백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도 하느님 만나고 싶어서 신학교 간 건데, 나는 하느님을 만났던가?’하고 스스로 물어보았습니다. 몇 차례의 체험은 있었지만,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만났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나도 하느님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마구 일었습니다.
그해 여름에, 경기도 파주로 4박 5일 피정을 갔습니다. 함께 피정한 평신도 형제자매님들이 각기 나름의 체험을 하셨는데, 저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명색이 신부인데, 이렇게 피정을 마쳐도 되나, 부끄러웠습니다. 이듬해 8박 9일 피정을 갔습니다. 이때도 큰 느낌은 없었고, 다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배운 것 같습니다.
이듬해 40일 피정을 갔습니다. 이 40일 피정을 계기로 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작년 사순 특강 첫 번째 시간에 말씀을 드렸고, 아직 유튜브에 영상이 올라 있는데요, 궁금하시면 유튜브에서 ‘노은동성당’으로 검색해서 찾아보셔도 좋겠습니다.
https://youtu.be/k3CwDoolEUU?si=_Oe6aSqa7I8ISP81
요약하자면, 제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간 후 10년 가까이 가족들에게 많은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과연 하느님께서 이렇게 어려운 조건에서 저를 사제로 부르셨을까’, ‘혹시 제가 저의 욕심 때문에 신학교에 들어가고선, 그것이 하느님 뜻이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저를 정말로 사제로 부르셨고, 저를 사제로 부르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신다면 저를 ‘아들’이라고 불러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아무런 응답 없이 하루가 지나갔는데, 잠자기 전 마지막으로 제게 주어진 성경 말씀을 폈더니, 주님의 거룩한 변모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17,5) 이 말씀 앞에서, 정말 뼛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울었고, 지금도 이 말씀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 말씀에 저항하고 있는 우리 내면의 바리사이와의 싸움입니다. ‘너는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내 안에서 나를 다그치고 훈계하는 존재가 예수님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그는 예수님이 아니라 나의 내면 안에 있는 바리사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변호하러 오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보다 더 엄한 잣대로 나를 심판하고 단죄하려 하는 나 자신으로부터 예수님은 나를 변호하고 계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듯 내 옆에 있는 사람 역시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이라 부르는 것은 신앙 고백입니다. 당신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가 같은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나의 형제자매들이 많기에 우리는 사회 복지와 사회교리를 실천합니다.
저는 제가 받은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여러분께 전해드리고 싶은데요, 그래서 3월 9일과 23일, 권민자 수녀님을 모시고 “예수 마음 기도 피정”을 본당에서 실시합니다. 이 피정은, 단순한 기도를 반복하는 그리스도교 전통 위에서,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얘기하듯 하느님께 솔직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주님 안에서 치유와 위로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도와드리는 피정입니다.
물론, 제가 처음에 그러했듯이 큰 느낌이 없으실 수도 있지만, 기도의 원리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후손들’이라는 복수형이 아니라 ‘후손’이라는 단수가 쓰인 것에 주목한 사람이 있는데,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서(3장 16절)에서 말합니다. “많은 사람을 뜻하는 ‘후손들에게’가 아니라, 한 사람을 뜻하는 ‘너의 후손에게’라고 하셨습니다. 이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교부들은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이사악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작년 사순 특강 세 번째 시간에 말씀드린 바 있는데요,
https://youtu.be/4eJa2DMLUxc?si=awKo2lwoqODaMts_
자신을 사를 장작을 짊어지고 모리야 산을 오르는 이사악의 모습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것을, 교부들은 발견했던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인간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당신이 모르시는 고통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의 이사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면, 복음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당신처럼 빛나는 존재가 될 것임을, 즉 부활할 것임을 당신 모습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상징인 모세와 엘리야는, 산 위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사람들이고,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던 인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신 것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제자이기 때문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야고보는 가장 먼저 순교할 제자이기 때문에, 세 제자를 데리고 가서 당신의 참모습을 보여주셨다고 해석합니다.
우리도 삶에서 주님을 본받아 거룩하게 변모할 시간이 올까요.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도 거룩하게 변모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원망했던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무의미한 일이란 하나도 없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전에 거룩한 변모의 은총을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것을 미리 앞당겨 체험할 은총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신 것처럼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주시는 주님 말씀을 흘려듣지 말고 마음에 깊이 간직해야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
https://youtu.be/fRL447oDId4?si=GuEqqPArFk85vYzK
바버, 하느님의 어린 양 (현을 위한 아다지오의 성악 편곡), Vlaams Radiokoor 연주
지오반니 벨리니, 주님의 거룩한 변모 (1490년 경)
첫댓글 신부님, 뼛속 깊이 하느님을 만나셨음을 축하드리며 은혜를 주신 임마누엘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드립니다. 저도 언젠가 하느님을 신부님처럼 뼛속 깊이 만나게 될수있기를 사모해봅니다.^^
감사드립니다~ 저도 기도드릴게요~^^
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