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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중국의 전사(戰史)
상·서주의 전사(戰史)
상(商 : B.C.1520∼B.C.1030) 및 서주(西周 : B.C.1030∼B.C.722) 시대의 군대는 전차를 주력으로 삼았고, 여기에 보병이 따랐다.
전차는 네 마리의 말이 옆으로 늘어서서 끌며, 세 명의 전사가 탄다. 전차 승차부의 폭은 130∼160cm이며, 깊이는 80∼100cm이다. 전차의 차륜은 스포크(spoke)를 사용함으로써 높은 기동성을 가지고 있다. 전차의 재질은 목재였고 전차를 끄는 말은 부분적으로 가죽 마갑을 입혀서 방호했다.
이 시기의 전사가 사용하던 무기는 대체로 청동제이며, 원거리용 투척 병기로는 활(弓), 장병기(긴 병기)로는 과(戈), 모(矛), 도끼[斧], 월(鉞), 극(戟), 수(殳)가 있었고, 근접전용 단병기로는 칼[刀]1), 검(劍), 비수가 있었다.
과(戈)는 긴 대나무나 나무 자루에 청동 날을 거의 수직으로 부착한 병기로, 전차전이 발달하면서 주요 병기가 된다. 자루 길이는 짧은 것이 1m, 긴 것은 3m에 이른다. 이 병기는 두 손으로 들고 적을 찌르거나, 걸어채어 베는 데 사용한다. 전차전에서는 전차가 스쳐지나갈 때 사용하는데, 전차전이 사라지면서 과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모(矛)는 긴 대나무나 나무 자루 끝에 청동제 양날을 부착한 병기로, 2∼3m나 되는 긴 자루는 전차에 타는 전사의 주요 장비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그보다 짧은 것은 보병의 주요 장비였다. 모의 사용법은 끝에 달린 날로 적을 찌르는 것이다. 이 병기는 더욱 발달하여 마침내 창이 된다.
도끼[斧]와 월(鉞)은 현재 사용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나무 자루에 폭이 넓고 두꺼운 날을 부착했다. 도끼와 월은 쪼개고 자르는 병기로서, 한 손 또는 두 손으로 잡고 사용한다. 이 병기는 상대(商代)에는 널리 사용되었지만 주대(周代)에는 단순한 제기2)로 물러난다.
극(戟)은 과와 모를 합친 듯한 병기로, 모처럼 자루 끝에 날을 달고 과처럼 자루에 청동 날을 수직으로 부착한다. 이 병기는 그 생김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과와 모의 사용법을 두루 응용할 수 있다. 극은 전차전의 주요한 병기였지만 보병들도 사용했다.
수(殳)는 나무 곤봉을 말한다. 가장 초기의 수는 단순히 나무를 깎아 만든 무기였다. 나중에 타격을 가하는 부분에 금속을 보강한 것도 등장한다. 사용법은 한 손 또는 두 손으로 쥐고 적을 가격하는 것이다. 단순한 병기지만 이런 종류의 타격 병기는 적에게 제대로 명중하면 갑옷을 입어도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나중에 이는 장(杖), 곤(棍), 봉(棒)이라 불리는 병기로 발달한다.
검은 근접전용 양날 병기다. 청동으로 만들며, 찌르기나 절단하는 데 사용한다. 다만 이 시대에는 길이 30cm 전후여서, 전차 위에서는 적을 해치지 못하는 보조적인 병기였다. 비수는 단검으로, 주로 찌르기에 사용한다.
칼[刀]은 근접전용 외날 병기다. 청동으로 만들며 베는 데 사용되며, 검과 마찬가지로 전차전 전성기에는 보조적인 병기였다.
활[弓]은 화살을 쏘는 병기로서, 이 시대의 화살에는 청동 촉을 달았다. 활과 화살의 재질은 나무나 대나무였다.
전차에 타는 세 명의 전사 가운데 한 명은 기수로서 전차를 몰고, 나머지 두 명이 전투 요원으로 귀족이나 상급 평민이었다. 기수를 중심으로 오른쪽 전사는 과, 모, 극 등을 들고, 왼쪽 전사는 활로 싸우며, 가운데 기수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 검이나 칼을 들었다. 전차에 타는 전사의 방어구로서 상대(商代)에는 청동제 투구와 가죽제 갑옷을, 주대(周代)에는 청동제 투구와 갑옷을 입었다.
보병은 방패를 들고 앞에서 말한 병기 가운데 하나를 장비한다. 보병에는 갑주(甲胄)를 입는 병사와 입지 않는 병사가 있고, 전자는 후자에 비해 신분이 높은 자였다. 방패는 원형이나 장방형이 사용된다. 주요 재질은 가죽, 나무, 등나무로 짠 것으로, 드물게는 청동이 사용되기도 했다.
춘추·전국 시대의 전사(戰史)
춘추 시대(B.C.722∼B.C.480) 및 전국 시대(B.C.480∼B.C.221)의 군대에서도 전차대는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공성전이나 평탄하지 않은 지형에서는 점차 보병이 주력이 되었으며, 마침내 보병은 군대의 주력을 차지하게 된다. 기병은 본래 북방 유목민족이 사용하던 것으로, 전국 시대에 조(趙)의 무령왕3)이 '호복기사(胡服騎射)'를 채택하면서 중국에 기병이 도입되었다. 춘추 시대 말기, 남방의 오(吳)와 월(越)나라에서는 보병이 중심이었고 수군도 편성되어 있었다.
이 시대의 전사가 사용한 병기에는 이전부터 이용하던 청동기뿐만 아니라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다만 당시 철기는 청동기를 완전히 대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청동기 제조 기술은 이 시기에 정점에 달하여 검날에 녹을 방지하는 처리4)까지 했다.
<그림 1> 전국 시대의 노와 극
원거리용 투척병기로서는 기왕에 이용하던 활에다 전국 시대에는 노(弩)가 발명되었다(〈그림 1〉). 활은 보병, 전차병, 기병들도 사용했다. 노는 화살을 더욱 멀리 쏘며 살상력을 더욱 강화한 투척병기로서 보병이 장비했다. 활 부분과 거기에 직각으로 부착되어 손으로 받쳐드는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사격하는 방아쇠나 조준기 등 기계적인 구조가 장착되어 있다.
노에는 화살을 손으로만 장탄하는 것과, 발을 사용해서 장탄하는 것이 있다. 노는 진로를 쉽게 바꾸지 못하는 전차에게는 결정적인 위협이 되었다. 다만 노는 연속 발사 능력이 없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백병전용 병기에는 장병기로서 과, 모, 극, 수가 있고, 근접전용 단병기로서는 검, 비수가 사용되었다. 검은 꾸준히 발달하여 주요 병기가 된다. 춘추 시대, 남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그 지형 때문에 전차대가 발달하지 않고 보병이 군대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들이 장비한 단병기가 검이었으므로 제조법이 매우 발달하여 뛰어난 검이 많이 생산되었다. 이들의 검은 청동제라는 재질의 제약도 있어서 대체로 길이 50cm 정도가 중심이었다. 전국 시대로 들어서자 보병의 진보와 함께 검이 주요 병기가 되었다. 견고한 청동을 날로 하고 무른 청동을 칼몸으로 한 검이 제조되었는데, 이것은 길이가 80∼90cm나 되었다. 철제 검은 1m 정도가 표준이었으며, 그보다 긴 검도 만들어졌다. 너무 긴 검은 허리에 꽂으면 행군에 방해가 되고 쉽게 뽑지 못하므로 칼집을 등에 지고 뽑았다. 비수는 이 시대에 주로 암살용으로 쓰였다. 삶은 생선 속에 비수를 감추어 암살을 시도했던 예도 있다.
전사의 방어구는 청동제 갑옷이 중심을 이루며, 가죽제는 보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철제 투구와 갑옷도 출현했으며, 갑옷은 주로 청동, 철, 가죽의 장방형 조각들을 가죽끈으로 엮어서 만들었다. 또 나무나 가죽으로 만든 갑옷도 사용되었다.
진·한의 전사(戰史)
진(秦 : B.C.221∼B.C.207)은 춘추, 전국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대를 통일한 나라다. 그러나 진은 단명으로 끝나고 이를 대신하여 전한(前漢 : B.C.202∼9)이 건국되었다. 신(新 : 9∼23)에 의하여 한때 중단되기는 하지만 한은 후한(後漢 : 25∼220)으로 이어진다. 이 시대의 제철 기술은 풀무 사용, 탄소를 철에 함유시켜 강철을 만드는 기술의 발명으로 크게 진보했다. 때문에 철제 무기나 갑주가 널리 보급되고, 청동제 병기는 진대(秦代)를 끝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진·한 시대에 기병이 발달하여 전차를 대신하여 군대의 중추가 되었다. 이는 북방의 강대한 기마민족인 흉노에 대항하려는 것이었다. 전한의 무제 시절에 한은 전장에 10만 기병을 파견할 수 있을 정도로 기병을 육성했다. 또 후한의 광무제는 전장에서 북방 유목민족인 오환(烏桓)의 정예 기병(돌기, 突騎)을 전장에서 선봉대로 삼아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시대의 기병(〈그림 2〉)은 안장 얹은 말을 타고 철제 갑주를 착용했으나 아직 등자와 마갑은 출현하지 않았다. 기사술(騎射術), 즉 마상에서 활과 노를 쏘는 기술이 중시되었으며, 한나라 기병의 최대 무기는 마상에서 사격이 가능한 노(손으로 화살을 잴 수 있는)나 활이었다.
그밖의 장병기로는 극, 모가 있고, 단병기로는 칼, 검을 장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병이 발전함에 따라 춘추·전국 시대를 주름잡았던 검이 퇴조하여 의식용 도구로 물러나게 된다. 그를 대신하여 외날의 칼이 단병기의 주역이 된다. 검은 전투에서 휘두르다 적의 병기와 부딪히면 그 구조상 칼보다 부러지기가 쉬웠던 것이다. 오히려 검은 끝을 뾰족하게 한 양날 병기이므로 찌르는 데 적합하다. 검의 강도를 키우면 잘 부러지지 않게 할 수도 있지만 양날이라는 구조 때문에 가장 두툼한 중앙부를 더 두텁게 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에 반해 칼은 외날이므로 칼등의 두께를 충분히 늘릴 수가 있었고, 베는 데 적합한 병기로서 전장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그림 2> 전한의 기병
보병은 기병과 같은 장비를 들고 있다. 다만 그들은 기병이 사용하지 못하는, 발로 장탄하는 노를 사용했다. 이러한 강력한 노는 기병이 사용하는 활이나 노보다 사정 거리가 길고 또 장갑에 대해서도 관통력이 높았으므로 보병이 기병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화살을 장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노의 최대 약점이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를 든 전사들의 집중 사격 전술이 개발되고, 실제로 이 전술로 흉노나 강5)의 기병을 격파한 사례가 남아 있다. 또 백병전 병기로 무장한 보병은 보통 방패를 들고 싸웠다. 한군(漢軍) 병사 전체의 4할이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삼국 시대의 전사(戰史)
한 제국이 붕괴하자 중국은 기나긴 분열과 혼란의 시대로 들어선다. 그 최초의 시대는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위(221∼264), 오(222∼280), 촉(221∼264) 세 나라가 다투던 시대다.
이 시대의 군대는 기병과, 육군 및 수군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각 나라는 자기 영토에 따라 서로 능한 분야가 달랐다. 위는 북방에 영토를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두 나라에 비해 기병이 발달했다. 오는 최강의 수군을 보유했고, 촉은 주위가 산과 고원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보병이 발달했다. 또 후한 말 가장 유력한 제후였던 원소는 공손찬군을 괴멸시킬 때 지하 갱도를 파고 적을 공격하는 부대 등 공성전을 전문으로 훈련한 공병을 야전에도 투입했다.
전사들이 사용한 병기로는 극, 모, 칼, 창, 활, 노가 일반적이었다. 한편 특수한 장비로 포(砲)가 있다. 발석거(發石車)라고도 하고 벽력거(霹靂車)라고도 했던 이 포는 일종의 투석기로서, 이동을 위해 수레를 사용했다. 이 포는 조조6)와 원소7)가 겨뤘던 관도(官渡)의 전투(200년)에서 처음 등장했다. 원소군이 토산 위에 높은 대를 쌓고 그곳에서 사격을 하자, 이에 고심하던 조조가 이를 제조하여 원소군의 높은 대를 파괴했던 것이다. 그 사격음이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리므로 벽력거(벽력은 천둥을 말함)라고도 불렀다. 본래 이 병기는 공성전에서 사용되는 것이었다.
삼국 시대는 후한의 제강법을 이어받아 병기가 크게 발전했다. 그 최대의 공로자는 촉의 제갈량8)이다. 그가 거느린 직인들이 노, 칼, 창, 갑주 등을 개량했는데, 그 높은 수준은 다음 시대인 진(晉)이나 남북조 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갈량이 개량한 병기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원계노(元戒弩)라 불리는 연노(連弩)였다. 이는 한 번에 열 대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노로서, 발사 속도가 느린 노의 결점을 보완한 것이다. 또 화살촉을 철로 만들어 그 위력을 높였다. 후세의 그림에 따르면 이는 동시에 화살을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연발할 수 있는 노였다. 이 무기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촉의 남중(촉의 남부 지방) 출신의 부대가 사용했다. 또 제갈량은 나무나 대나무 자루에 철제 날을 부착해서 사용했다. 이것을 최초의 창으로 보는 문헌도 있지만, 창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칼은 검을 대신하여 군대의 가장 주요한 장비가 되었다. 위·오·촉 삼국 모두 우수한 검을 제조하고 있었다.
촉에서 제갈량이 수하의 포원9)에게 명하여 사곡(斜谷)에서 칼 3천 자루를 만들게 했는데, 그것이 너무나 정교해서 신도(神刀)라 불렸다. 이밖에도 칼이 수천 자루 단위로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시대의 갑옷은 기본적으로 비늘 모양의 작은 철판 조각을 연결해서 만든 것이다. 다만 칼날에 사용되는 강철보다는 강도가 낮은 강철이 사용되었다. 제갈량이 제조한 갑옷은 우수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다음 시대인 진이나 남북조의 우수한 갑옷도 이것을 계승했다고 한다.
삼국 시대(200~280) 위·촉·오 삼국이 천하를 놓고 다툰 이 시대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무대로서, 조조, 유비, 관우, 장비, 손권, 제갈량, 주유, 육손, 사마의, 여포, 원소, 공손찬 등 수많은 영웅, 호걸, 지장들에 의해 장식되었다. 『삼국지연의』의 무대가 되는 시대는 황건의 난이 발생한 후한 중평(中平) 원년(184년)부터 진(晉)이 오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태강(太康) 원년(280년)까지의 전란의 시대였다. |
진·남북조의 전사(戰史)
진·남북조 시대는 혼란의 시대였다. 삼국으로 분열된 중국은 일시적으로 서진(265∼317)으로 재통일되지만, 내전(팔왕의 난, 300년)과 기근, 북방과 서방의 기마민족(5호(五胡))의 유입은 중국을 다시 분열의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동진(317∼420) 시대에 북중국(화북)은 5호의 국가가 잇달아 일어나고 쓰러져 간다(5호 16국). 북조(북중국을 지배) 때는 북위(386∼535), 동위(534∼543), 서위(535∼554), 북제(550∼577), 북주(557∼581)가 있고, 남조에는 송(420∼479), 남제(472∼502), 양(502∼557), 진(557∼587)의 여러 나라가 있다. 전쟁이 끊일 새 없이 계속되어 화폐 경제가 완전히 붕괴한 시대였지만, 이 혼란의 시대에도 무기만은 착실하게 발전해 간다.
병기의 진보는 과학 기술의 진보와 밀접하게 결부된다. 관강법(灌鋼法)과 횡법강(橫法鋼)의 발명으로 대표되는 제강 기술의 발전은 질 높은 철강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했다. 이리하여 보다 질 높은 철강이 병기의 재료로 사용되어 병기의 성능을 높여 간다. 연단술(煉丹術=연금술)의 발달은 마침내 화약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마구(馬具) 분야에서는 등자가 이 시대에 사용되기 시작된다. 등자의 사용으로 기병은 승마나 하마(下馬)가 더 쉬워지고 마상의 자세를 안정시킬 수 있게 되었다. 또 기병의 약점인 말을 방어하기 위해 말의 전신을 가리는 마갑이 제조되고 중장기병(〈그림 3〉)이 출현했다. 이때 돌격과 백병전을 주요 전법으로 하며 돌격력을 중시하는 중장기병과, 기사(騎射)를 주요 전법으로 하고 기동력을 중시하는 경장기병의 역할이 나누어진다. 이 시대에 중국에 대량으로 흘러들어온 기마민족은 모두 기병전에 능했으며, 기마민족이 건국한 5호 16국이나 북조의 군대는 모두 기병이 중심을 이룬다.
<그림 3> 중장기병과 보병
이 시대의 전사가 사용하던 병기는 극, 모, 창, 칼, 노, 활 등이다. 보통 중장기병은 장병기인 극, 모, 창을 들거나 칼과 방패를 들고, 경장기병은 활, 노, 칼, 방패를 들었으며, 보병은 방패와 노, 모, 칼을 들거나 방패와 활, 노를 들게 된다. 갑옷도 크게 진보하여 철제 양당개(兩當鎧), 명광개(明光鎧)와 같은 신식 갑옷을 입었다. 전 시대까지 장병기의 주역이었던 극은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장갑이 진보한 결과 극의 효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양날 모는 찌르기 전용 무기였으므로 여전히 유효해서 많이 사용되었다. 또 북방의 기마민족이 모를 애호했다는 사정도 있어서 장비의 개혁은 주로 기병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마침내 보병도 모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수·당의 전사(戰史)
분열되어 혼란에 빠져 있던 중국은 수(隋 : 581∼618)에 의해 통일되었다. 수는 양제(煬帝)의 실정과 이로 인해 중국 전역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으로 멸망한다. 그리하여 새로 당(唐 : 618∼906년)이 일어나 중국은 오랜 안정기를 맞이한다.
수·당의 전사(〈그림 4〉)는 장병기인 창과 장도(長刀)를 주로 사용했고, 단병기로는 칼이 주류를 이루었다. 여기에 추(錘), 간(鐗), 봉(棒), 편(鞭) 등의 병기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 타격 병기다.
<그림 4> 당의 기병과 수의 명광개, 수의 병사는 쌍추를 들고 있다
추(錘)는 오이처럼 생긴 철제나 목제 머리에 자루를 단 것이고, 편(鞭)은 마디 있는 대나무 같은 쇠막대이며, 간(鐗)은 각진 철봉에 손잡이를 단 무기다.
칼에는 장병기인 장도와 한 손으로 다루는 칼이 있다. 장병기인 장도에는 종래와 같은 외날형뿐만 아니라 양날의 맥도(陌刀)도 출현한다. 맥도는 전문 부대가 편성될 만큼 많이 사용되었다. 이 맥도는 실은 검이 변화한 것으로, 한대(漢代)에 사용된, 말을 베기 위한 검이 그 뿌리라고 한다. 맥도는 송에서는 도도(掉刀)라 불리는 칼로 변해 간다. 편수도 중에서는 횡도(橫刀)라 불리는 칼이 전사의 기본 장비가 되어 간다. 멀리 쏘는 병기로는 활, 노가 사용되었다. 기병은 활, 자루가 긴 창, 칼을 장비하고, 보병은 장병기를 들거나 활, 노를 장비한다. 당의 제도에서는 전군의 1할에게 노, 1할에게 봉, 3할에게 활, 1할에게 창, 1할에게 방패, 8할에게 칼이 지급되었다.
당의 전사는 전군의 약 6할이 갑옷을 입고 있다. 갑옷에는 명광갑(明光甲), 광요갑(光要甲), 세린갑(細鱗甲), 산문갑(山文甲), 오추갑(烏錘甲), 쇄자갑(鎖子甲)과 같은 철제 갑옷이나 가죽제 갑옷이 있다. 또 천이나 종이로 만든 갑옷도 있었지만, 실전에 그리 유효하지 않았다.
수·당의 전사 가운데 부병 제도10)에 의해 징병된 병사는 활 1개에 화살 30대, 횡도 1개, 짐 운반용 말, 의류, 당장 먹을 식료를 스스로 부담했다. 당은 갑주, 노, 모 등의 강력한 무기를 사유하는 것을 법률로 금했으므로 국가가 직접 갑주와 강력한 병기를 공급했다. 부병의 병사는 소속된 군부에 의해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았다.
송의 전사(戰史)
당이 멸망한 뒤 5대 10국(후양, 후당, 후진, 후한, 후주 : 907∼960)의 분열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을 다시 통일한 것은 북송(960∼1125)이었다. 북송은 금에 패망하여 중국 북부는 금의 영토가 되며, 살아남은 황족은 남부에서 남송(1127∼1279)을 건국한다.
이 시대에 군대의 중심은 보병이었다. 기병을 육성하기에는 군마가 부족했고 말의 체격도 왜소했으므로 북방의 기마민족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북송의 명장 적청11)이나 남송의 명장 악비12)의 수하 기병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만한 활약을 보여준 기병이 없었다. 북송 시대에는 마군(馬軍 : 기병대)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어도 열에 서넛은 말이 없었다. 게다가 남송이 되자 말 부족은 더욱 심각해진다. 기병, 보병 외에 남송에서는 강력한 수군도 편성되어 있었다. 송의 군대는 숫자는 많아도 실제 전력은 형편없이 약한 군대였다. 특히 가장 우수해야 할 금군(禁軍 : 근위군)의 수준 저하는 군대 전체를 허약하게 만들었다. 다만 예외가 있었으니, 송 건국 당시의 군대와 지방군은 강력했다.
원거리용 투척 병기로는 활과 노가 사용되었다. 기병은 활을 사용하고, 보병은 대개 활과 노를 사용했다. 노는 송나라 전사의 주력 장비로서, 적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강력한 병기였다. 신비궁(神臂弓)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1008년 이굉(李宏)이 발명된 노로서, 혼자서 조작할 수 있고 사정거리는 대략 370m이며 관통력이 강했다. 남송 초기에 한세충13)이 제조하게 한 극적궁(克敵弓)은 더욱 강력해서 전사 혼자서 조작이 가능하고 사정거리는 대략 550m이며 성능은 갑옷 두 장을 뚫었고 철제 마갑을 입힌 말도 한 번에 쓰러뜨릴 수 있었다. 또 상자노(床子弩)라는 대형 노가 사용되었다. 이는 여러 병사가 조작하는 노인데, 화살을 한 대가 아니라 10대를 동시에 발사하고 최대 사정거리는 대략 1km였다. 상자노는 수송이 곤란하므로 성의 방어용으로 이용되었으며, 야전에서 사용된 예도 있다. 이렇게 강력한 노도 발사 속도가 느리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 5> 송의 무기
①질려골타(蒺藜骨朶), ②산두골타(蒜頭骨朶), ③철간(鐵鐗), ④철편(鐵鞭), ⑤낭아봉(狼牙棒), ⑥구봉(鉤棒), ⑦도도(掉刀), ⑧도도(掉刀), ⑨도끼, ⑩도끼, ⑪도끼, ⑫단구창(單鉤槍), ⑬쌍구창(雙鉤槍)
백병전 병기(〈그림 5〉)로는 도끼, 칼, 창, 편, 간, 봉, 골타(骨朶) 등이 사용되었다. 이들 병기는 일반적으로 중장기병에 대항해야 했으므로 예리한 날보다는 타격력을 중시했다. 도끼는 노와 나란히 적을 떨게 하는 병기였다. 자루가 긴 도끼는 중장기병에게 매우 효과적이었다. 무거운 도끼는 장갑을 갖춘 기병이라도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 칼은 중장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무겁고 긴 마찰도(麻扎刀), 횡도 등이 많이 사용되었다. 편, 간, 봉, 골타 등 타격 병기는 이미 당대(唐代)에 출현했지만, 이 시대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모두 타격 병기이므로 도끼와 마찬가지 이유로 중장기병에게 효과적이었다.
중국인은 화약을 발명14)했을 뿐만 아니라 화약을 사용한 병기도 중국에서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송대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화기가 사용된 시대다. 이 시기의 화기는 공성전이나 수성전에서 많이 사용되었지만, 야전에서도 사용되었다. 화기에는 연소제(燃燒製) 화기, 폭발제 화기가 있었다. 나중에 화기의 주류가 되는 투사제 화기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연소제 화기에는 화전(火箭), 화창(火槍), 화구(火球)가 있다. 화전은 소이탄(燒夷彈)으로서, 화약을 채운 통이나 구(球)를 화살에 장착한 것으로, 활이나 노, 특히 대형 상자노로 발사되었다. 화창은 화염 방사기로, 보통 창끝에 화약을 채운 통을 부착한다. 특히 이화창(梨花槍)이 유명한데, 화염을 방사한 뒤에는 창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화구는 화약을 종이나 천으로 싸서 공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손으로 던지거나 투석기로 발사했다. 화구는 연소, 독한 연기, 연막의 효과가 있다. 폭발제 화기에는 철화포(鐵火炮)가 있는데, 이는 금의 진천뢰(震天雷)와 같은 것이므로 다음 항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송대의 전사가 걸치는 갑옷은 화기가 발달할 즈음 최고 수준에 달해 있었다. 보병의 갑옷은 중장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점차 중장화되어, 철갑 중에는 30kg이나 되는 것도 등장했다. 송군이 자고(柘皐) 전투(1141년)에서 승리했을 때도 병기를 포함한 중장비 때문에 추격을 하지 못했다. 갑옷의 재질은 철, 가죽, 종이다. 마갑은 기병이 중시되지 않았으므로 철제는 없어지고 가죽제만 제조되었다.
방패는, 보병은 장방형의 대형 방패를 이용하고, 기병은 원형 방패를 이용한다. 재질은 나무, 대나무, 가죽인데, 나무를 가죽으로 싼 것이 표준이었다.
요·금·서하·원의 전사(戰史)
이 항목에서 다룰 나라들, 즉 요(遼 : 907∼1125), 서하(西夏 : 990∼1227), 금(金 : 1115∼1234), 원(元 : 1260∼1368)의 공통점은 군대의 주력이 강력한 기병이었다는 것, 그리고 송의 적이었다는 것이다. 송은 이들 국가의 기병과 대등하게 싸울 만한 기병을,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거의 양성하지 못했다.
요는 북방의 강력한 유목민족인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군대의 중심은 기병이다. 요의 기병은 높은 기동성을 가지며, 마상에서 사격하는 데 능했다. 기병은 말 세마리, 전사와 말은 철갑을 두르고, 활 4개에 화살 4백 대, 장창, 단창, 골타, 도끼 등을 표준장비로 갖추었다.
서하는 중국 서부의 탕구트족이 건설한 나라로, 말의 산지나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군대를 길러낼 수 있었다. 서하의 기병은 철갑과 마갑을 장비한 중장기병이 있어서 흔히 '철기(鐵騎)'라 불린다. 또 전사는 보병이라도 반드시 낙타 한 마리씩 가지고 있었다. 기병의 표준장비는 말 1마리, 낙타 5마리, 전사와 말은 철갑을 두르고, 활 1개에 화살 5백 대, 창, 곤봉 등이었다. 서하의 중장기병이 입은 갑주는 강노가 아니면 뚫지 못할 만큼 단단했다. 서하군 중에는 낙타 위에서 소형 투석기[旋風砲]로 주먹만한 돌멩이를 사격하는 포병대도 있었다.
<그림 6> 진천뢰
금은 반농 반수렵민이던 여진족이 건설한 나라로, 병사와 말이 모두 갑옷을 두른 강력한 중장기병이 군대의 주력이었다. 다만 금의 기병이 사용한 활과 화살은 성능이 떨어져서 중갑을 장비한 송의 보병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기병 외에 공성전에 능한 보병대도 편성되어 있었다. 금은 화약 제조법과 화기 사용법을 중국을 침공하고 나서야 배웠다. 금군이 사용한 화기로는 비화창(飛火槍)이라는 화염방사기와 진천뢰라는 작렬탄이 유명하다(〈그림 6〉). 진천뢰는 금에서 발명한 작렬탄으로, 주철 용기에 화약을 채우고 도화선을 달아놓은 것이다. 이 병기는 야전뿐만 아니라 공성전과 수성전에도 사용된다. 공격할 때는 도화선에 불을 붙여 손으로 던지거나 포(砲 : 화약을 사용하지 않는 투석기)로 던진다. 폭발력이 매우 강해서 사람을 살상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커다란 소리와 연기로 적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남송이나 원에서는 철화포라 불렸으며, 몽골이 일본을 침공할 때도 사용했다.
원은 유목민족인 몽골족이 건국한 나라로, 경장기병과 중장기병이 모두 강력했다. 몽골병은 사격에 매우 능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활은 철제 갑주를 관통할 만큼 우수한 합성궁(서양의 컴포지트 보우(Composite bow)와 같은)이었다. 초기의 몽골 기병은 가죽 갑옷을 입고 주로 활로 싸웠으며, 백병전 병기로 검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검을 사용해야 하는 백병전은 가능한 한 회피했다. 또 백병전에도 사용 가능한 투창도 장비하고 있었다.
원의 전사들은 정복한 나라들의 무기들을 받아들였으므로 그들의 장비는 매우 진보된 것이었다. 게다가 정복된 나라들의 군대도 그 수하에 두고 공성전 때 공병이나 포병으로 동원했으며, 수군이나 해군을 편성하기도 했다. 원군은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포의 사용법을, 금과 송으로부터는 화기 사용법을 배웠다. 원은 회회포(回回砲, 또는 양양포(襄陽砲))로 대표되는, 화약을 사용하지 않는 투석기인 '포(砲)'를 잘 활용했다. 투석기의 탄환에는 돌처럼 폭발하지 않는 탄환, 화약을 사용하여 소이 효과를 가진 화구, 진천뢰로 대표되는 작렬탄이 사용되었다. 마침내 원대(元代)의 중반에 현대 화기의 선조격인 '포(炮)'가 제조되었다. 이는 금속 통에 화약과 탄환을 장탄하는 투척성 화기인데, 이것은 대개 기동성이 없었으므로 주로 공성전에서 사용되었다.
명의 전사(戰史)
화기가 발달하자 병사들의 병기나 장비도 큰 영향을 받았다. 명대(1368∼1644)를 통해서 전사들의 병기는 점차 화기로 교체되었다. 명대 말기에는 정규군 장비의 약 절반이 화기가 되었다.
명의 정규군 신기영15)의 전사는 화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부대였다. 명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병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기병을 가지고 있었다. 또 기병을 막기 위해 전차를 사용했다. 이 전차는 주(周)의 전차와 달리 이동하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병의 돌격을 가로막는 임시 성벽으로 사용되며, 전차 안에 화기를 장비하여 싸울 수도 있었다.
명의 전사들이 이용하던 화기는 더욱 발달된 것으로서, 투척성 무기가 주력이 되었다.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 화창, 화총, 화포, 화전, 지뢰, 수뢰가 사용되었다. 화총, 화포는 원대에 사용된 것을 계승하여 더욱 개량한 것이다. 대형 화포는 차에 싣고 운반했다. 초기 화포의 탄환은 돌이나 철이었으며, 15세기에는 작렬탄이 사용되었다. 소형 총은 금속관에 화약과 탄환을 채워서 쏘는 것으로, 현대 소총의 선조격에 해당한다.
명의 전사는 화기 외에 창, 장도, 칼, 마차(馬叉), 당(鏜), 파(鈀), 산(鏟), 도끼, 활, 노, 다양한 봉, 편, 간, 낭선(狼筅), 표창을 사용했다. 명대의 칼은 기존의 칼과는 달리 일본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실제로 일본도처럼 생겼다. 또 일본도를 수입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마차, 당, 파, 산 등의 병기는 명대에 사용되기 시작한 장병기다. 창처럼 찌르는 병기이며, 그 구조상 방어력이 높은 병기로서, 적의 병기를 낚아채는 데도 유리하다. 낭선도 명대 특유의 병기다. 마디와 잎새가 많이 달린 대나무를 이용하며, 그 끝에 철제 날을 달아 창처럼 이용했다. 이 무기는 방어성이 높은 병기로, 굳이 대나무 잎을 없애지 않았기 때문에 잘 절단당하지 않고, 또 잎이 적의 공격을 방해했다. 다만 이 병기는 행동할 때 방해가 된다는 약점이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는 30kg이나 되는 중갑을 많이 사용했지만, 화기가 발달함에 따라 기동성을 중시하여 가볍고 유연한 갑옷이 주류로 자리잡는다. 또한 많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갑옷의 재료도 면을 사용하게 되었다. 기병도 점차 경장기병이 주류가 되는데, 이는 중장기병의 갑옷도 화기 앞에서는 점차 효력을 잃어갔기 때문이다.
<그림 7>
<그림 8> 장창
<그림 9> 천자뢰포
<그림 10>
농민 반란군의 전사(戰史)
중국 역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왕조의 정치가 문란해지면 민중이 무기를 들고 봉기한다는 것이다. 진승·오광의 난 이후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그 지도자가 꼭 농민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반란 집단에 참가하는 자들은 궁지에 몰린 농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대다수 농민들은 농기구나 사냥 도구 등 성능이 그리 좋지 못한 병기를 긁어모아 반란에 참가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의 전사 (환상의 전사들, 2001. 2. 15., 이치카와 사다하루, 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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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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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1)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필명 엘리스 벨(Ellis Bell)로 출간한 유일한 소설이자 유작 소설이다.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 신부가 성공회 사제였던 가정환경상 에밀리는 어린시절을 사제관이 있던 영국 요크셔의 황량한 벌판에서 보내면서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길렀으며, 어른이 된 후 요크셔 벌판의 폐가(TopWithens)에서 영감을 얻어 《폭풍의 언덕》을 썼다. 캐서린(Catherine Earnshaw)과 히스클리프(Heathcliff)와의 불멸의 사랑을 우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난 게 장점이다. 출간당시에는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20세기에 토머스 몸 등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한국어판은 범우사 등의 문학전문출판사들에 의해서 역간되었다.
(2)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줄거리
1801년 황량한 벌판에 위치한 폭풍의 언덕에 세입자인 락우드씨가 찾아온다. 자신이 세든 집인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주인인 히드클리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거칠었고 잘 곳도 변변하지 못하여 감기에 걸려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과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가정부 넬리 딘에게 그동안 있었던 두 집안의 역사에 대해서 듣는다.
이야기 1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었던 언쇼는 리버풀에 갔다가 거지꼴을 한 소년을 데려온다. 가족들은 출신을 알 수 없는 소년에게 경계심을 갖고있었는데, 특히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한다. 죽은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줄 정도로 히스클리프를 편애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내 프랜시스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 힌들리는 결국 히드클리프를 머슴처럼 가혹하게 학대한다. 게다가 어린시절부터 같이 자랐던 친구이자 애인인 캐서린까지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아들인 에드거에게 사랑을 품자, 이에 상심한 히드클리프는 가출한다.
이야기 2
몇 년후 부자가 되어서 돌아온 히드클리프는 몸이 약했던 아내 프랜시스의 죽음이후 폐인이 된 힌들리를 도박으로 빈털털이로 만들어버린다. 알코올 중독으로 힌들리가 죽자, 그는 힌들리의 아들인 헤어턴에게 자신이 당한대로 앙갚음을 하여, 무식한 머슴으로 키운다. 새끼 뻐꾸기가 다른 새의 알들을 내치는 것처럼,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 머슴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애인을 뺏어간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해서 결혼한 뒤, 인권을 짓밟는다. 히드클리프와의 만남이후 결혼전부터 갖고 있던 정신착란이 심해져서 죽은 캐서린만 찾는 무관심과 학대를 견디지 못한 이사벨라는 런던으로 달아나서 아들을 낳는다. 한편 에드거는 죽은 아내가 남긴 외동딸 캐시를 곱게 키운다.
이야기 3
여동생이 병으로 죽자 에드거는 런던에 가서 조카를 몰래 데려오지만 12살의 철없는 꼬마 캐시의 말실수로 발각된다. 히드클리프가 아들을 데려갈 것이 분명하자, 에드거는 마지못해서 조카를 폭풍의 언덕에 데려다 준다. 까다롭고 버릇없는데다가 허약하기까지 한 아들이 마음에 들리 없었지만,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서린과 결혼시켜서 드러시크로스를 먹어치울 생각을 한다. 결국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시와 강제로 결혼시켜, 탐욕을 채운다. 딘은 셋방을 구해서 어릴적부터 모셔온 캐시 아가씨를 다시 모시고 싶어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이야기 4
1802년 친구의 초대를 받아서 가던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에 다시 온다. 전세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는데, 딘 아주머니는 히드클리프가 죽었다고 했다. 비가 몰아치는 날, 눈도 못 감고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어턴과 캐시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결혼을 앞두면서, 폭풍의 집과 드러시크로스저택의 불행한 역사는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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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2)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5)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다니엘디포우(Daniel Defoe)
(6) 파우스트 Faust / 괴테(Goethe)
(7)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8)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해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15) 크리스마스 선물 A Christmas Carol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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