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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제자의 비전
32: 11-14
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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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기 원하는 인간에게 부부의 화목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와 같은 부부의 행복은 궁궐 같은 대 저택에서 동거한다고 저절로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에서 살든지 서로 신뢰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전제 될 때 비로소 부부의 행복은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부부가 서로를 불신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호화로운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만 행복한 부부일 뿐 본인들은 사는 것이 죽음처럼 고통스럽게 느낄 뿐입니다.
인간이 바라는 행복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신뢰와 사랑을 상실했기 때문에 부귀와 권세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으신 소원이 바로 인간이 행복하게 살며 또한 다른 사람까지 행복하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기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 받기를 원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내게 먼저 복을 주시기를 원하셨고, 나만 복 받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까지 행복하게 되는 복단지가 되기 위해 인간의 삶의 터전까지 축복하신 분이십니다.
(창 1: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육신의 부모도 자기 자식의 불행을 원치 않는데 하물며 인간을 유일하게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만물을 영장이 되게 하셨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인간이 불행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그 분의 존재를 무시한 채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오만 방자한 삶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축복의 통로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불신앙의 행위가 전혀 죄 인줄 깨닫지 못한 채 오히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며 당당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하는 배은망덕한 행위요 불행을 더욱 자초하는 근본원인입니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지는 인간을 지으실 때부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축복은 단지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번성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배제된 인간은 짐승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더라면 그 같은 축복을 오늘날까지 계속 유지하며 지상 낙원 에덴동산에서 고통과 죽음을 모른 채 영생 복락을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욕심을 부리고 바람이 나서 마귀의 말을 좇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한 결과 인간이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고통과 죽음이 찾아옴으로 고통과 저주가 인간에게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 위에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해로 인해 계속되는 이상기후 천재지변과 같은 것들입니다.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1. 아브라함과 열두 지파의 비전
하나님은 본래 인류의 조상 아담과 약속하셨던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시는 일방적인 언약을 새롭게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약속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는 축복을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시려고 택하시고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 26: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하지만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성경에서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조건이 없이 일방적인 주권으로 선택하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아브라함 한 사람, 이스라엘 한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로 말미암아 세계 만민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축복을 회복하는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마치 국가 대표 선수처럼 세계 만민을 대표하는 축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들이 잘 믿어야만 만민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 만민이 복을 받는 근원이 되게 하시려고 먼저 400년간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신 후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 시내 산으로 인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로 삼으시고 시내 산으로 불러 올리셔서 이스라엘 민족과 세계 만민이 복을 받는 축복의 법을 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시고 사십 일 동안 머물면서 십계명과 성막 설계도와 제사의 법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한 달이 지나도록 모세가 하산을 하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요하며 모세의 형 아론을 들볶기 시작하였습니다.
(출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 동생 모세의 참모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오늘 성경 본문에서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론은 백성들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요구하는 대로금 고리를 빼어 모은 것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인도할 신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마치 하나님에게 하듯 번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드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광란의 종교 행위를 하게 하였습니다.
(출 32: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손으로 만든 금송아지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그 같은 광경을 시내 산에서 내려다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시고 분노하셨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참다못해 이스라엘 백성을 당장 멸하시고 모세를 새로운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출 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출 32: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그와 같은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멸망의 위기인 반면 모세에게는 두 번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좋아하거나 응하지 않고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염려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크게 범죄한 것을 생각하면 멸망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본 애굽 사람들이나 이방 사람들이 보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멸망시키기 위해 한 것이라고 비웃고 조롱할 것을 염려하며 이스라엘을 멸하지 마실 것을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출 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2) 아브라함과의 축복의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멸하시는 대신 모세와 그 후손을 번성케 하여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에 대해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절하고 동족의 구원을 위해 중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삼대를 통해서 약속하신 축복의 언약을 상기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멸하지 마실 것을 탄원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출 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같은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얼마나 동족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인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제일주의로 살고, 나만 잘살기 바라지 말고 이웃이 잘되고, 동족이 잘되고, 세계가 잘되는 것을 더 원하는 삶을 살아가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나도 잘되는 풍성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 11: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신 11: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하나님은 모세의 탄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대신 징계의 차원으로 끝내시고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열두 지파의 비전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열두 지파를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주셔서 육십만을 이루고 또 육십만을 허락하셔서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지상에서 유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주권이 성립되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국가를 세우신 것입니다.
(신 18:5)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으로 영영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수 23:4)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지는 편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뽑아 너희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이것이 바로 믿음의 한 사람을 통해서 열두 지파를 이루어 사단의 영지를 정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원초적인 G12 비전인 것입니다.
2.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비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것이 한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나라를 건설하신 궁극적인 목적도 이스라엘 한 나라만 복 받는 민족이 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명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범죄 하다가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백년이라고 하는 긴 시간을 침묵하며 기다리시다가 마침내 G12 열두 제자의 비전을 이루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시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바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시는 중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후에 제일 중요하게 여기신 일이 바로 갈릴리로 가셔서 열두 제자를 택하여 세우신 일입니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혼자서도 인류를 다 구원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시지 않고 열두 제자들과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열두 제자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구원사역을 하신 후 때가 되자 열두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시던 구원사역을 대행할 것을 명령하신 후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부족하고 모자라 보였던 제자들이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제자를 삼아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을 때 예수님이 하실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삼천 성도 오천 성도인 것입니다.
숫자만 많이 모인 것이 아니라 그 모임위에 살아있는 예배가 있었고 성경 공부가 있었고 전도가 있었고 양육이 있었고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핍박자들이 감동을 하고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지고 예루살렘 교회는 불신자들에게마저 칭찬을 받는 이상적인 교회로 부흥하고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G12 열두 제자의 비전인 것입니다. 그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예루살렘 교회만이 아니라 지상 교회가 수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순결해지고 부흥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교회도 때로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불 꺼진 등대처럼 세인들에게 짓밟히고 무시를 당하고 비난꺼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가 바로 교회가 외부로부터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평안한 가운데 부패해지고 세속화되어 진 중세교회 시대요, 현대 교회의 일면입니다.
현대 교회 속에 불꽃처럼 타오르던 신앙의 열정은 사그라지고 기도의 소리가 줄어들고 전도의 입이 벙어리가 되고 하늘에 소망대신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탐하고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로 변질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예배, 하늘 보좌를 두드리는 기도,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선행, 죄인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하는 회개, 불길 같은 성령의 역사, 영혼을 사랑하는 구령심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과연 그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 주신 열두 지파의 비전이며, 예수님이 영적 불모지인 이 땅에 푸른 계절이 오도록 만드는 작업을 위해 사용하셨던 G12 열두 제자의 비전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썽을 부리지 않는 아이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말썽꾸러기 아이가 아이를 낳을 수 없고, 말썽꾸러기 아이가 아이를 키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썽꾸러기가 점점 자라 철이 들고 어른이 되면 자기보다 더 예쁘고 똑똑한 아이를 낳아 키우는 부모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원리를 통해서 인류를 번성시키셨습니다.
두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다가 결혼을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그 사랑이 식어지기 쉬울 때가 되면 하나님은 어린아이를 그 가정에 선물로 주시고, 그 아이를 키우느라고 하기 싫은 일도 하고 뼈 빠지게 돈도 벌고 하면서 나이를 먹어갑니다. 실컷 고생을 하다가 늙어 인생의 허무감을 느끼게 될 때면 장가가고 시집간 자녀들이 아이를 낳아 손자 손녀를 낳아 데리고 오게 되면 자식을 키울 때보다 더 귀엽고 사랑스러움에 마음이 녹아집니다. 그러면서 자손이 번성하는 것입니다. 만일 해산의 아픔만이라면 누가 자식을 낳아 키우겠습니까?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로 있을 때는 예수를 왜 믿는지 이해가 가질 않지만 예수님을 믿고 첫 은혜를 받고나면 세상에서 주예수보다 더 귀한 분이 없어서 직장을 뒤엎고 고생하는 가족을 마다하고 신학을 하고 선교사가 되기도 할 정도로 복음의 가치와 능력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조가 더해지면 아무리 좋은 설교도 오래 들으면 지루하고 졸립니다. 직분자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애쓰지만 막상 되고 나면 시들해져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땅에 파묻어 두고 주일 낮 한 시간만 겨우 얼굴을 내밀고 갑니다.
그렇게 평생을 신앙 생활하다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면 거기서 무슨 상급과 무슨 축복과 무슨 기쁨과 보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 두 사람 전도를 하고 그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사랑으로 그 제자들을 섬기고 사랑하면서 기도하고 믿음을 키우는 일에 노심초사하면서 바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돈 생기지 않는 주일이 제일 바쁘고 피곤하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시간이 흘러 내 제자가 세례를 받게 되고 직분자가 되고 어떤 제자는 나보다 더 성장 속도가 빨라 앞질러가지만 그것이 시기 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키우는 부모처럼 보람과 기쁨과 감사한 마음이 넘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2006년 새해에 온 성도들이 G12 열두 제자의 비전과 꿈을 이루기 위해 제자가 되고 제자를 삼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육신보다 더 고귀한 영적 생명을 낳고 키워 나 한 사람이 열두 제자를, 그 열두 제자가 144명을 그 144명이 1728명의 손자를 낳는 축복을 체험하는 믿음의 조상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