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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10
자손들이 복 받게 하라
오늘은 가정의 달 5월의 첫 주일을 맞아서 가정에 대해서 같이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보통 우리가 '가정'이라고 할 때, 그 범주 안에는 부모님이 계시고 또 자녀들이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아직 자녀를 두시지 않은 분들의 가정은 가정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가정'하면 부모와 자녀가 한데 어우러져 사는 공간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된 가정에서 자녀가 훌륭하게 자란다는 것은 이만 저만한 복이 아닙니다. 어린이 주일인 오늘, 저는 '자손들이 복 받게 하라'는 제목 하에 부모로 인하여 자녀가 크게 복을 받았던 내용을 본문을 토대로 해서 같이 나누어보기를 원합니다.
가나안 땅에 입성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지역의 원주민들을 다 정벌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불러 그들이 차지한 땅을 제비뽑아 나두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일의 시작은 15장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거기를 보면 누가 제일 먼저 제비를 뽑아 기업을 차지하느냐 하면- 유다 자손이 제일 먼저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런 일을 보면서 우리는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지게됩니다.
사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장자 우대주의 사회였기에 장자 르우벤 자손이 당연히 먼저 제비를 뽑아야 하는데 이러한 전통을 깨고 유다 자손이 먼저 제비를 뽑아 기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 해답은 창49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49장에서 야곱이 임종을 목전에 두고 자손들을 축복하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때 야곱이 소위 '서열적 축복'을 함으로 '장자 우선주의'라는 그 전통이 깨어진 것입니다. 즉, "르우벤은 장자였으나 그는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 반면, "유다는 형제 중의 찬송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했던 것인데- 바로 이렇게 야곱의 예언대로 가나안에서 새로 정착하면서 기업을 얻는데 유다 자손이 제일 먼저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 다음으로는 누가 제비를 뽑습니까?
그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 소개되는데- 본문에서는 요셉 자손이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셉은 11번째 아들입니다. 따라서 그 서열상으로 하면 11번째에 제비를 뽑아야 합니다. 세상 표현을 빌리자면 아주 새까만 동생이요, 아직 머리에 쇠똥도 안 벗겨진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 자손은 유다 자손을 제외한 모든 지파들을 제치고 유다 지파를 이어 두 번째로 제비를 뽑아서 기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보면- 다른 지파는 한 기업을 얻었으나 요셉 자손은 두 기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들인 에브라임과 므나세가 각각 한 기업씩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지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일이 요셉 자손들에게 벌어졌습니다. 지금 열 두 지파가 기업을 분배받는 마당이라-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삼촌들과 같은 위치에 끼일 수 없는데도 그들이 각각 한 기업씩을 차지하게 된 것은 과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 제비뽑아 얻은 땅은 가나안 중앙지대로 토질이 매우 양호한 지역이었습니다. 동으로는 요단강에 이를 수 있었고, 서로는 지중해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농사와 교역에 두루 용이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으로는 단과 베냐민 지파, 북으로는 아셀, 스불론, 잇사갈 지파와 경계를 했습니다. 이렇게 요셉 자손이 중앙에 기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창49; 22절의 에언대로 된 것입니다. 거기를 보면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요셉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다른 지파에게도 도움을 주며 살 것을 예언한 것으로,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애굽에서 성취되었고, 또한 가나안 땅에서도 이 예언 성취를 위하여 중앙에 터를 잡았던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 외에도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의 넓은 지역을 이미 얻고 있었습니다. 이것 또한 이미 창세기48장에서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한대로 되어진 것인데- 창48: 22을 보면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네 형제보다 더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면- 저는 여기서 자녀들이 축복 기도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게됩니다. 그리고 야곱의 기도는 제사장적인 기도였다는 사실과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기도가 바로 이런 기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기도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 하도록 목사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적인 기도는 목사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여러분들 자신도 자녀를 위하여 드릴 수 있는 기도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벧전2: 9절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 말씀 중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 드리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위해 이 권한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나는 일들을 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왜 그런 문제들이 일어나던가요?
물론 목사가 잘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목사가 하는 일을 보고는 "왜 목사만 그러느냐?" 나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주장하면서 "나도 제사장이다"라고 이 벧전2: 9절을 들고 나와서는 목사의 강도권과 치리권에 도전을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들고 나오면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동일한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니 할말이 없어요. 그러나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도 좋은데- 그 말씀을 옳지 못한 일, 분란을 일으키는 일에 적용시키지 말고 오히려 좋은 일, 축복하는 일에 그 말씀을 적용시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이웃을 위하여 축복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자녀들을 축복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먼저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 애들을 위하여 축복하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애들이 뭔가를 좀 잘못하면 혼내는 것부터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혼을 내면서 바로 고치려고 했습니다. 며칠 전에도 엉덩이를 수 차례 때리고 또 파스도 발라주고- 소위 병주고 약주는 그런 일을 했습니다. 물론 이런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제는 방법을 달리 하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문제가 발생하여 혼내는 것보다,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는 면에서 자꾸 축복하는데 주력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축복한대로 애들이 복을 누리면- 어디 제가 야단치고 혼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가 자녀들을 축복하면서 생활해보십시다. 일단 아침에 일어나시면 자녀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에도 손 얹어 기도하고 재우고. 그렇게 한번 해보십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한 숙제라 생각하시고 말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에게 믿음도 들어가고 또 믿음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자손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녀들이 복 받도록 하는 또 다른 비결은 부모들이 바른 믿음으로 서서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요셉 자손들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말씀을 드렸듯이 야곱이 요셉을 축복한 대로 지금 요셉 자손이 그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어떻게 야곱의 그러한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는 그야말로 믿음을 바탕으로 성실과 인내로 생활했기에 그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차 들여다봅니다만, 그의 생애는 어릴 때부터 험난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꿈을 가진 소년 요셉은 17세의 나이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과 음모에 의해 인신 매매를 당하여 애굽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요셉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한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도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깨닫고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실과 인내로 움직였습니다. 그런 요셉을 향해 성경은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다"고 두 번이나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 요셉을 하나님은 바로 앞에 서게 하셔서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게 했으며, 천하의 흉년을 타개하고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초청하여 봉양하게 했습니다. 이런 일이 훗날 임종을 앞둔 야곱에게 요셉을 마음껏 축복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도 48: 20절의 내용처럼 축복을 했기에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처럼 요셉의 자손들이 기업을 나누는데 이들 두 지파가 삼촌들의 위치에 서서 따로 기업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요셉의 후광을 입었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또 한가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우리들의 자손이 나로 인하여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들 스스로가 믿음을 바탕으로 성실과 인내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조상들의 삶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입니다. 죄인들의 삶의 영향이 삼사 대까지 이르며, 의인들의 삶의 영향이 천대까지 미친다고 하는데- 이 말은 조상들의 삶이 후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므로 부모 된 자들은 자손들이 복 받도록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요셉은 바로 그렇게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르우벤을 보십시오. 그는 장자였음에도 그의 장자자리를 유다에게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왜 입니까? 창49: 4절에서 그가 불신의 행위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범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창35자: 22절을 참고하면 서모 빌하와 통간했다는 말입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작은 어머니와 간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적으로 살았기에 자기의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자손들의 복줄까지 막았습니다. 우리는 사건은 조금씩 달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범죄하며 불신앙적으로 살았던 것을 성경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아간, 에서, 솔로몬 등등...
그럼 왜 르우벤은 그렇게 불신앙적으로 행동을 해서 자손들의 복까지 가로막았습니까? 이유는 믿음에서 이탈해갔기 때문입니다. 그가 복은 받았는데 신앙관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당시에 장자로 태어난다는 것이 이만 저만한 복이 아닙니다. 그 복을 끝까지 누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면 자기도 복되고 그 후손들도 볼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관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타락하고 범죄하는 자리로 빠져들어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손해보고 자손들에게까지 그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는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에서 떠날 때에는 그 복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럼 우리의 믿음을 잘 관리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여러 면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성경을 읽는다던가. 기도생활을 열심히 한다던가. 예배생활에 열심을 내며, 주일 성수를 하는 것 등등... 다 좋고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전도가 자기 신앙을 관리하는 비결이다'라는 말씀을 강조하기 원합니다. 왜냐구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3주간에 걸쳐서 전도대회를 실시합니다. 두 가지 의미를 이 전도대회에 부여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자기 신앙관리가 전도생활을 통하여 이루어지느냐 않느냐를 test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 케임브리지에 계시는 분들 중에서 신앙생활을 하시지 않고 계시는 분들이 상당히 눈에 띄는데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이런 고백을 하실 것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신앙이 안 자라지?' '나는 뭔가 좀 확실히 믿어보고 싶은데 왜 안되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한번 용기를 내어 전도해보십시오. 그냥 전도하라고 하니 아무에게나 '너 교회 한번 와볼래?' 이렇게 하는 것 말고- 정말 진지하게 '그래, 아무개를 이번에 전도하자!' 이렇게 생각하고는 열정을 갖고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자고 하고, 찾아가고 하는 열심을 낸다면 그 전도는 상당한 효과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렇게 전도하고도 그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도를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한 걸음 더 가까이 주님 곁으로 나아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다른 사람을 구원시킬 수 있어서 좋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더 신앙으로 무장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실시하는 총력 전도대회의 기회를 '내 신앙을 관리하는 절호의 찬스'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교회를 부흥케 합니다.
자기 신앙을 돈독하게 만듭니다.
이런 것 보시고 좋아하실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선은 전도하시는 분들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지체들이 같이 기뻐합니다. 목사도 기쁩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주님 품으로 돌아와서 구원을 얻게 되면- 가장 좋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잔치를 배설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어떻게 읽으시는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 내용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마다 천국에서 그런 잔치를 배설하시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본문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3주 동안에 우리로 인하여 수십 번의 잔치가 천국에서 배설되도록 해드려 보십시다.
이제 말씀을 접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요셉처럼 신실하게 살아 자녀들이 복 받게 하는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줄 가장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야곱은 요셉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일반적인 룰을 깨고 11번째의 요셉을 두 번째로 축복했고, 나아가 요셉의 두 아들들까지 축복을 했습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야곱이 축복한 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심할 것은 그렇게 복 받은 자들이 그 복을 잘 간수할 수 있도록 또한 가르쳐야합니다.
왜입니까? 그렇게 복을 받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보십시오. 나중에는 그들이 타락해 갔습니다. 큰 유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실까지를 염두에 두면서 일차적으로는 자녀들이 복받도록 내가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며, 나아가 나로 인해 복을 받은 자손들이 또한 신실하게 믿음으로 서 있음으로 그 복을 믿음 안에서 누리며, 또 그들이 그들 자손에게 복을 유업으로 물러주는 역사를 되풀이 하도록 하는 그런 역사를 일으키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교훈까지 가르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