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록으로 본 정치․문화적 사례
연혁에서 기록된 내용 중에 중국과의 교류 가운데 교역이라고 하나 약소국으로서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꾸준히 사신을 보내어 왔던 선물 사례로서 고려중기 학자요 정치가였던 김부식의 삼국사기원문기록이 중요하므로 자료적 근거가 문서상으로 보존된 내용을 원문을 발췌하였고(三國時代), 다음은 고려말 안축선생의 삼탄시(高麗時代)와 조선중엽 문민공 신제 주세붕 선생의 치적을 가삼재배의 시각에서 삼조(三祖)를 통해 다루어 보았다(李朝時代).
(三國時代) 신라성덕왕때 하정사를 보내어 선물한 것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 전략적 교린행위의 한 단면으로서 이후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웃나라와의 외교적인 부분가운데서 당시 인삼이 삽입된 것은 시대상황을 살펴보는 귀한 자료다.
가. 신라시대(서기 734년)성덕왕이 하정사 김충신으로 하여금 당나라 현종에게 선물(인삼200근 외)을 바친 내용
【삼국사기 번역문】-아래원문
ㆍ신라 성덕왕 33년(서기 734년) 봄 정월, 왕은 백관에 분부하여 상주할 때는 북문으로 출입하게 되었다.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좌령군위원외장군 김충신이 당제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받들고자 하는 진지(進旨)는 신이 옥절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 군사를 내어 말갈을 토벌하려는 것이오며, 또 유사시에는 신이 스스로 성지를 받들며 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옵니다. 그러하오나 그 때를 다하여 교체할 사람인 김효방이 죽어서 마침 신이 그대로 숙위로 머물게 되었습니다. 신의 본국에서는 신이 오랜 세월 천정(天庭)에 머물게 됨을 염려하여 종질 지렴을 보내어 신과 교대하려고 여기에 왔사오니 신은 돌아가는 것이 합당합니다. 전일에 받은 분부를 생각하여 밤낮으로 잊지 못하옵는 것은 폐하께서 앞서 마련하신 본국왕 흥광에게 영해군대사의 직을 더 주시고 대장기를 주시어 흉적을 토벌하게 하셨으나 황제의 권위가 재림하시어 비록 먼 곳이라도 오히려 가까워지며 또 군령(君令)이 있사온데, 신이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으리오. 오랑캐들이 벌써부터 그들의 허물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흉악한 그 근원을 제거하려면 오직 근본을 쇄신하여 바로 잡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까닭에 군사를 출동함에는 세 가지의 빠른 것보다도 의리가 소중하고 고귀합니다. 적의 우환된 짓을 놓아두면 그것은 영원히 후대에까지 영향이 미치게 되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이번 신이 귀국함에 있어서 부사의 직을 신에게 주시어 장차 하늘의 뜻을 후예들에게 선포케 하시옵소서. 이것은 다만 병사를 익진케 할 뿐 아니라, 또 무인들의 사기를 굳세게 하여 기어이 그 소혈을 뒤덮어 엎지러서 황폐한 곳을 인정하게 할 것이오니 이 신의 적은 정성을 성취하게하여 주시오면 나라에 크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신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첩서를 대궐에 올리며 털끝만한 공이라도 이루어 우로의 혜택에 보답하는 것이 소망이오니 폐하는 소신의 이 뜻을 헤아려 주십시요’라고 했는데 당제는 곧 허락했다. 여름 4월, 대신 김단갈단을 당에 보내어 하정의 예를 했다. 당제는 내전에 잔치를 베풀고 그를 초지하여 인견한 후 위위소경의 벼슬을 주고, 배란포ㆍ평만은대ㆍ명주 60필을 하사하였다. 앞서 왕질 지렴을 보내어 사은할 적에 작은 말2필, 개 3마리, 금 5백 냥, 은 20냥, 포목 60필, 우황20냥, 인삼 2백 근, 두발 1백 냥, 해표피 16장 등을 바쳤는데, 지렴에게 홍로소경원외의 벼슬을 주었다.
【원문】
三十三年 春正月 敎百官 親入北門奏對 入唐宿衛左領軍衛員外將軍金忠信上表曰 『臣所奉進止 令臣執節 本國發兵馬 討除靺鞨 有事續奏者 臣自奉聖旨 誓將致命 當此之時 爲替人金孝方身亡 便留臣宿衛 臣本國王 以臣久侍天庭 遣使從姪志廉代臣 今已到訖 臣卽合還 每思前所奉進止 29) 無忘夙夜 陛下先有制 加本國王興光寧海軍大使 錫之旌節 以討凶殘 皇威載臨 雖遠猶近 君則有命 臣敢不祗 蠢爾夷 計已悔禍 然除惡務本 布憲惟新 故出師 義貴乎三捷縱敵 患貽於數代 伏望 陛下因臣還國 以副使假臣 盡將天旨 再宣殊裔 豈惟 30)斯怒益振 固亦武夫作氣 必傾其巢穴 靜此荒隅 遂夷臣之小誠 爲國家之大利 臣等復乘滄海 獻捷丹 毛髮之功 答雨露之施 臣所望也 伏惟 陛下圖之』 帝許焉 夏四月 遣大臣金端竭 31)丹 入唐賀正 帝宴見於內殿 授衛尉少卿 賜緋袍․平漫銀帶及絹六十匹 先時遣王姪志廉謝恩 獻小馬兩匹 狗三頭 金五百兩 銀二十兩 布六十匹 牛黃二十兩 人蔘二百斤 頭髮一百兩 海豹皮一十六張 及是授志廉鴻少卿員外置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1075(문종 29)~1151(의종 5)
고려 중기의 유학자·역사가·정치가 경주세력을 대표했으며, 서경 천도를 주장한 묘청(妙淸)의 난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현존하는 역사서로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신라왕실의 후예로 증조부 위영(魏英)이 신라가 망할 무렵 고려 태조에게 귀의,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이 되었다. 그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은 아버지 좌간의대부 근(覲) 때부터였다. 부식은 고려 중기 정계에서 활약한 부필(富弼)·부일(富佾)의 동생이며, 부의(富儀)의 형이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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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時代)
근재 안축선생의 삼탄시는 순흥출신 안축선생의 시문으로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목숨을 걸고 써서 기록해두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과다한 인삼공납의 민폐가 얼마나 심했던가? 이조왕조에 들어와서도 징삼제도(懲蔘制度)의 불만이 없었던 적이 없다.
강계부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정든 고향 땅을 도망가는 사례가 늘어 2만여 명이 떠나 고을이 비어있다는 비장한 글은을 남긴다. 귀한 인삼에 효능이 탁월한 것이 수난의 이유이다. 신이 준 귀한 선물로 인해 선량한 민초들이 곤역을 겪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만 있었을까, 불법채취나 불법재배, 불법 상거래로 인삼의 역사는 힘 있는 자에 의해 어쩌면 득보다 실이 많았던 안타까운 과정을 밟아왔다. 근재 안축선생의 삼탄시야 말로 인삼의 신성함과 동시에 당시에 정치적 상황을 잘 알려주는 역사적 고귀한 문헌이 아닐 수 없다.
나. 인삼을 한탄하다 인삼공물이 폐해가 많으므로 이렇게 말함 (蔘歎 蔘貢多弊故云 )
근재 안축선생의 삼탄시(蔘歎詩)
神農著書論草名(신농저서논초명) : 신농씨가 지은 책에 풀이름을 논하기를
草中羅參藥最精(초중나삼약최정) : 풀 중에 나삼(羅蔘)이 약으로 가장 좋다네.
一根三技開五葉(일군삼기개오엽) : 한 뿌리 세 가지에 다섯 잎이 피고
理人神效難具評(이인신효난구평) : 사람 낫는 신기한 효험 다 말하기 어려워
年年貢獻聖天子(연연공헌성천자) : 해마다 원(元)나라 천자에게 공물로 바치니
藥局老 皆歎驚(약국노 계탄경) : 약국의 노련한 의원들이 모두가 탄식하네
船車商坫競求買(선차상점경구매) : 배와 수레로 장사치들 다투어 사들여서
轉賣 遠方 不輕(전매 원방 불경) : 먼 지방에 팔아넘기니 값이 싸지지 않네
從此官家利己利(종차관가이기이) : 이로부터 관(官에)서도 그 이문을 탐내니
歲收編民有期精(세수편민유기정) : 해마다 백성에게 거두는 기한을 정했네
物之貴者本自貴(물지귀자분자귀) : 귀한 물건은 본래부터 스스로 귀한 것
非如凡草賤生成(비여범초천생성) : 뭇 풀이 천하게 자라는 것과는 아주 다르 다네
坊民採掘編山谷(방민채굴편산곡) : 백성들이 삼을 캐려 산골을 두루 다니며
天 萬索得一巠(천 만색득일경) : 천 번 찾고 만 번 찾아 한 줄기 얻네
何曾計一足銖兩(하중계일목수양) : 어찌하면 날짜에 맞추어 근수를 채울 건가
農衣弊盡披奏荊(농의폐진죄주형) : 베잠방이 가시에 찟겨 다 해어졌네
是時秋禾臥風雨(시시추화와풍우) : 때는 가을이라 벼는 비바람에 쓰러져도
畏吏督納忘私營(외이독납망사영) : 독촉하는 관리 두려워 내 농사일 잊네
歸來對妾苦悲泣(귀래대첩고비읍) : 돌아와서 아내 보며 괴롭게 슬피우니
己有棄土流亡淸(기유기토유망청) : 이미 땅을 버렸으니 떠나야할 심정이네
乾坤生物賦藥性(건곤생물부약성) : 천지가 만물을 낼 제약성을 준 것은
本以至仁濟群生(본이지인제군생) : 본래 지극한 사랑으로 생명을 구제 하라
生民一病出於藥(생민일병출어약) : 백성의 한 가지 병이 약 때문에 생긴다면
理藥之藥其誰行(이약지약기수행) : 약을 다스리는 약은 그 누가 만들겠는가
有能移根種遠方(유능이근종원방) : 이 뿌리 옮겨서 먼 곳에 심을 수 있다면
活根無種非所爭(활근무종비소쟁) : 뿌리 뽑고 종자 없애기는 다툴 일 아니지
吾民寧作至愚民(오민영작지우민) : 우리 백성 차라리 어리석은 백성 되어도
不須益智多聰明(불수익지다총명) : 슬기를 더하여 더욱 총명할 것은 없네
근재 안축 선생 서기 1287(충렬왕 13)~1348(충목왕 4)
고려말의 문신. 고향 죽계(竹溪)를 세력기반으로 하여 중앙으로 진출한 신흥유학자(新興儒學者)로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사헌규정(司憲糾正)을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 원(元)의 제과(制科)에도 급제해 개주판관(蓋州判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 성균학정(成均學正)을 거쳐 충혜왕(忠惠王) 때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되었다. 이때 충군애민(忠軍愛民)의 뜻이 담긴 문집 〈관동와주 關東瓦注〉를 남겼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판전교(判典校)·지전법사(知典法事) 재직시 파면당했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었으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감찰대부(監察大夫)에 등용되었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내고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 행정에 참여했다.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다시 편찬했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關東別曲〉·〈죽계별곡 竹溪別曲〉을 지었고 문집에 〈근재집〉이 있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진 뒤 죽어 순흥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公)이다.※두 번째 싯귀에 羅蔘(풍기삼)이 가장 좋다고 표현한 내용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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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時代)
신제 주세붕선생의 업적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과 선생의 목민관으로 서 업적 그리고 자료정황으로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정치적 상황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공삼폐단이 컷지만 지방수령으로 인삼의 최대 자생지인 소백산 아래 풍기군수로 4년이란 긴 기간 재 임하면서 선정을 베풀 수 있었음은 탁월한 정치력과 지혜로움이 계 셨음이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선생께서 찬한 선정비문에서 보 는 바와 같이 매우 훌륭한 지방관이었으며 그 위대한 업적을 사실대 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이른바 인삼재배의 권장(勸獎)이었다.
碑文 중간에 興利革獘(흥리혁폐)라는 글이 삽입되는데 이 뜻은 인삼 재배를 지혜롭게 권장하여 백성들을 흥하게 하여 이를 앞세워 페습 을 개혁해서 군민들이 공경하고 추앙을 받는다(一境愛載, 誠感心化) 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국법이 인정되지 않은 시대에 문적(文籍)으로 남길 수 없음을 중앙고위관직과 단양군수를 엮임 하셨던 서부동 출 신인 금계황준량선생께서 우회적으로 찬(撰)해 주셨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며 오늘날 구전(口傳)되어 옴은 선인들의 슬기로운 자산이다.
다. 신제 주세붕선생의 업적
비문위치 : 풍기읍사무소내(성내 1리)
(군수주공선정비 번역문)- 원문아래
상략(上略) 신축(辛丑)에 군수로 부임하자 연 2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는데 생명의 구함이 많았음으로 행정(行政)실적이 가장 뛰어났다 하여 벼슬을 올려 받았고 을사(乙巳)년 겨울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다.
공(公)은 천품(天稟)이 너그럽고 어질며 학행이 순수하고 익숙하여 정치를 함에 노인을 공경하고 착한 일을 존대하여 가르침을 앞세우고 형벌을 뒤로하고 용서를 미루어 은혜를 베풀고 이(利)를 앞세우는 폐습을 개혁하니 군민들이 애경(愛敬)하며 추앙(推仰)하여 지성에 감동해서변화됨으로 백성들이 효제(孝悌)를 흥기하여 풍속이 순후해 졌으며 향교를 이건(移建)하고 문성공(文成公)사당을 세워서 교(敎)를 진흥시킨 공이 더욱 많았다. 부로(父老)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 개국 이래 군주로 온 사람이 이런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이는 지금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가 되어 있다.
※ 군수주공선정비(君守周公善政碑) 公諱, 世鵬, 字景遊, 辛丑, 出守歲連世大飢, 全活甚多 以治最贈秩 乙巳冬 召爲國子司成 公資稟寬仁學行純熱, 爲政敬老尊賢, 先敎後 純推恕施恩, 興利革獘一境愛載, 誠感心化 人興孝悌, 俗歸純厚至於新先成廟, 立文成祠, 振起斯文, 尤有功焉父勞言自 國朝來典成者莫能及, 今爲承政院都承旨 가정(嘉情)28년 (1549) 黃俊良撰
※ 문민공주선생송덕비(文敏公周先生頌德碑)
위치 : 풍기인삼협동조합내(서부3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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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인삼(人蔘)의 종주국(宗主國)으로 조선하면 곧 인삼을 연상(聯想)케 하나 산삼(山蔘)에만 의존(依存)하여 오다가 조선 중종(朝鮮中宗)때에 문민공 신재 주세붕 선생(文敏公愼齊 周世鵬先生)이 풍기군수로 재임 중(서기1541~1545년)에 당시 국민의 징삼(徵蔘)의무(義務)를 덜어주기 위(爲)하여 삼 재배법(蔘栽培法)을 개발보급(開發普及)한 것이며, 그 기원(起源)으로서 현재는 국내수요(國內需要)외에도 세계각국(世界各國)으로 수출(輸出)되어 농작물 중에서 적은 면적(面積)으로 가장 많은 외화획득(外貨獲得)을 하고 있는 천혜(天惠)의 자원(資源)으로 생약재(生藥材)로 인류보건(人類保健)에 크게 기여(寄與)하고 있다. 선생의 본관(本貫)은 상주(尙州), 자(字)는 경유(景遊), 호(號)는 신재(愼齋)요 부는 참판공(參判公) 문보(文補), 모는 정부인(貞夫人) 창원황씨(昌原黃氏)이며 성종(成宗) 26년 10월 25일 출생. 유년시(幼年時)부터 효우(孝友)에 지극(至極)하였으며, 18세에 향시(鄕試)에서 장원(壯元)하고 28세에 사마(司馬) 및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로 사가(賜暇) 호당(湖當)을 거쳐 각 요직(要職)을 역임하고, 47세에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권학유례(勸學諭禮)하니 군민이 감화(感化)되었고, 익년(翌年) 국내 처음으로 백운동 현 소수서원(白雲洞 現 紹修書院)을 세워 양사(養士)하였으며 기민(飢民) 구휼(救恤)하고 구황농법(救荒農法)을 지도(指導)하며 당시 주민의 가장 큰 고민(苦悶)이며 지방관(地方官)과 조정(朝廷)의 난제(難題)로 중국과의 교린상(交隣上) 필수품(必須品)이던 산삼(山蔘) 징납(徵納)을 대체(代替)할 삼재배법(蔘栽培法)을 개발보급(開發普及)함으로 흥리혁폐(興利革弊)를 감행(敢行)하였음은 모험적(冒險的)인 위국충성(爲國忠誠)으로서 초범(超凡)의 치적(治績)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은 다시 직제학, 도승지, 호조참판(直提學, 都承旨, 戶曹參判)을 역임, 55세에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여 해주에도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창건(創建)하였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동지경연(同知經筵)등을 역임하다가 명종(明宗) 9년 7월 2일 60세로 生을 마쳤다. 선생은 성리학(性理學)의 탐구(探究)와 경, 의(敬, 義)를 신조(信條)로 하여 사치를 버리고 실천(實踐)에 힘쓰고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3년 수려(守廬)하였다. 중종, 인종, 명종(中宗, 仁宗, 明宗) 3조(朝)의 신신(藎臣)이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청렴강직(淸廉剛直)한 당대(當代)의 유종(儒宗)으로 천고(千古)에게는 귀하고 거의 없는 산삼을 의무적(義務的)으로 매년 많은 양을 공납(貢納)하여야만 하는 기록(記錄) 하지 못할 갖은 고생(苦生)을 다 하였으나 이 고충(苦衷)을 해소(解消)하고 재배삼을 보화로 돌려주신 인삼재배의 원조(元祖) 문민공주선생(文敏公周先生)에게 감사(感謝)하며 천하(天下)에 선생의 빛난 업적(業績)을 밝히고 길이 찬송(讚頌)하여 삼의 본고장(本故庄)에 지역민(地域民)의 성(誠)을 모아 이 비(碑)를 세운다. 다시 새겨 선생의 높은 뜻은 온 누리에 배움의 길을 열어 놓았고 선생의 끼친 업적은 온 겨레의 삶을 도왔도다. 소백산 도솔봉(도率峰)의 외외(巍巍)한 모습, 선생의 덕(德) 혜(惠)를 우러러 상징(象徵)하여라. 백약(百藥)의 양초(洋醋), 이재 상막(床幕)에 아아 하니 선생의 넋이 오늘도 어려 계신 듯 여기 이 비(碑)에 뭇사람의 정성(精誠)을 새겨 담아 길이길이 선생의 공덕(功德)을 추모(追慕)하노라. 서기 1985년 10월 일
안동전매지청장(安東專賣支廳長) 정용팔(鄭鏞八) 근찬(謹撰)
풍기인삼경작조합(豊基人蔘耕作組合) 건립(建立)
신재 주세붕군수 연산원년(서기1495년)명종9년(서기1554년)
경남 협천군 천곡리 탄생 7세때 부를 따라 함안군 칠원면 무릉리로 이주 본관 尙州 자는 景遊 호는 愼齊다. 18세에 향시에 장원, 28세 사미시합격, 별시문과 급제하였으며 주요벼슬로는 검열, 수찬, 전적, 곤양군수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정랑, 교리, 염정을 거쳐 다시 풍기군수가 되었다. 또 응교 시강, 도승지, 호조참판을 역임하고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내직해서 대사성 중추부, 성균관경연, 의금부 동지로서 60세를 1기로 일생을 마감. 삼 십 여 년간 관로에 나가 중종. 인종, 명종 3조를 모심. 저서로 무릉잡고, 신제전서, 죽계지, 동국명신언행록, 순흥읍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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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 중에서 '삼탄시'의 구절중 藥局老皆歎驚(약국노계탄경),轉賣遠方不輕(전매원방불경),天 萬索得一巠(천만색득일경)을 藥局老醫皆歎驚(약국노의계탄경),轉賣遠方價不輕(전매원방가불경),千搜萬索得一莖(천수만색득일경)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