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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받을 복(시편 1:1-6)
우리들이 새해에 제일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는 ‘복 받으세요.’입니다.복 받기 원하는 것은 동서고금과 나이와 상관없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복 받는 것, 잘 되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특히 한국 사람들은 복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한국 사람들의 집 안에 복(福)자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구나 방석에 복(福)자가 있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숟가락에도 복(福)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한국 사람들이 예전부터 좋아했던 다섯 가지 복이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의 복을 흔히 오복(五福)이라고 하는데
그 오복에 대해서 중국의 고전 “서경”의 “홍범편”에 이렇게 나옵니다.
“五福(오복)은 一曰壽(일왈수)요 二曰富(이왈부)요
三曰康寧(삼왈강녕)이오 四曰攸好德(사왈유호덕)이오
五曰考終命(오왈고종명)이니라.”
즉 오복은 첫째가 수(壽)인데 이 복은 오래 사는 복을 말합니다.
둘째는 부(富)로 오래 살면서도 또한 물질이 넉넉한 복입니다.
셋째는 강녕(康寧)입니다. 강녕은 건강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조상이나 동양 사람들은 물질이 넉넉하게 살면서도 건강하게 사는 것을 원했습니다.
넷째는 유호덕(攸好德)입니다. 이 복은 덕 있는 삶을 말합니다.
네 번째 복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그리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신들만을 위해서 장수와 부귀영화의 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덕을 베풀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고종명(考終命)으로 평안하게 죽는 것, 요즘 말로 하면 Well-dying입니다.
“9988234”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안에 죽(4)자는 말입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복은 연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며 덕을 베푸는 후덕한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의 죽음은 분명히 편안할 것입니다.
바로 이 다섯 가지가 우리 조상들과 동양 사람들이 바라던 세상적인 복입니다.
비록 이 오복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복이기는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 이런 복이 임하면 나쁘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기독 신자들은 이런 세상적인 복을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바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세상의 복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민수기 6장 24-26절이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이스라엘 가정을 다니며
이 말씀대로 축복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복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지켜주시는 복’입니다.
두 번째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복’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은혜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복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가정의 평강, 마음의 평강의 복’입니다.
이 복은 가정의 평강, 마음의 평강과 같은 내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말합니다.
시편 23편 5절에 다윗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다윗의 눈앞에는 원수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상을 차려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주는 평강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눈앞의 원수를 보며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상을 받고 기뻐하는 평강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 평강의 복은 다른 모든 복을 누리게 하는 매개의 복이기도 합니다.
몇 백억의 재산을 갖고 있어도 우리의 마음이 늘 불안하면 그 복들을 다 누릴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肉膳)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의 복을 우선시 해야 합니다.
새해에 신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복은 세상적인 오복(五福)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돌봄, 은혜 그리고 평강의 복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어떻게 해야 이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 시편 1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원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시편 1편을 통하여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믿음의 처신을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믿음의 처신’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처신(處身)의 뜻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져야 할 몸가짐이나 행동을 말하는 데
그렇다면 믿음의 처신은 신자들의 믿음 생활에 있어서 가져야 할
몸가짐이나 행동을 말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처신을 잘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이웃에게 덕을 끼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편 1:1의 말씀에 그 믿음의 처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예전 번역인 개역한글판으로 이 말씀을 보면, ‘악인들의 꾀를 쫓지 아니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는 것,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것,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은 모두 처신의 내용들입니다.
즉, 신자는 믿음 생활에 있어서 쫓을 것을 쫓아야 하고
서 있을 곳에 서 있어야 하며, 앉을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처신을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반면에, 복 없는 사람은 쫓지 말아야 할 것을 쫓고,
앉지 말아야 할 자리에 앉고, 서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1절 말씀을 반대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복 없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쫓고
죄인들의 길에 서 있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두면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과 사귀면 나쁜 것에 물들기 쉬움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공자는 “심성이 고운 사람과 더불어 살면,
그 방에 화사하게 핀 아름다운 난초가 들어오는 것 같아서
그 향이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방안에 가득한 것과 같고,
마음이 곱지 않은 사람과 더불어 살면,
생선 썩는 비린내가 들어오는 것 같아서 그 비린내가 보이지는 않지만,
내 몸에도 배어 있어 밖에 나가도 내 몸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말했습니다.
즉, 붉은 물감을 가슴에 품고 살면 그 사람의 옷도 붉어지고,
검은 물감을 가슴에 품고 살면 그 사람의 옷도 검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앉을 자리와
어울리는 사람을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공자의 말도 결국 처신을 잘하라는 이야기 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 처신, 특히 믿음의 처신은 중요합니다.
근묵자흑이란 말처럼 먹을 가까이두면 자신도 검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자라고 하더라도 처신을 잘 못하여
죄인의 길에 서거나, 죄인의 자리에 앉을 때 결국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몇년 전 제가 벤쿠버에서 목회를 할 때에 저는 갑작스럽게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머님의 부음을 들은 그 날이 마침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라
한국 가는 비행기 티켓이 없었습니다.
캐나다 항공사에 사정을 설명했더니 어머님의 사망진단서를 첨부하면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하기에
제가 빨리 일 처리를 하여 간신히 티켓을 받아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탄 비행기는 그리 크지 않아 좌석 배열이 세 좌석씩 세 그룹으로 되어 있었는데,
저는 가운데에 있는 세 좌석 중에 왼쪽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가운데에는 빅토리아에서 공부하는 체격이 큰 학생이 앉았고,
맨 오른쪽 자리에는 캘거리에 사는 저보다 나이 많은 분이 앉으셨습니다.
비행하는 동안 제 옆에 앉은 학생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학생이 저에게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온유한 카리스마가 느껴집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기에 매우 마음이 흐뭇해졌습니다.
그러다가 그 학생이 저에게
“선생님, 제가 많이 불편해서 그런데 자리 좀 바꿔 줄 수 없을까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들은 저에 대한 칭찬 때문에 기분이 좋아 흔쾌히 자리를 바꿔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맨 오른쪽에 앉아 있던 캘거리에 사시는 저보다 나이 많은 어른은
나중에 알았는데 술을 무척 좋아하는 분이셨습니다.
이분은 기내 서비스로 와인을 제공하자 계속 달라고 하면서
술을 마시는데 혼자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도 술을 권유하고 그 주위에 있는 학생들에게 술을 마시라고 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이 어느 학생에게 자꾸 술을 강요하니까
그 학생도 귀찮은지 한 잔 받아 마셨는데
비행기 승무원이 그것을 보더니 그 학생에게 학생증을 보자고 했습니다.
그 학생이 16살인 것을 그 승무원이 알자
제 옆에 앉은 그 분에게
“당신은 미성년자에게 술을 먹인 것이기에 법을 어긴 것”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술을 요구해도 줄 수 없고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경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앉은 그 분은 한동안은 가만히 있더니 조금 후에
저에게 부탁하기를 술을 대신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하도 그분이 저를 귀찮게 하고
통사정을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와인 한 병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시킨 그 술을 다 마시더니 또 한 병을 주문해달라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시켜 주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그 분이 비행기 안에서 면세로 술 4병을 샀는데
승무원이 한 사람이 한 병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하자
또 이분이 저에게 제발 2병만 대신 들고 들어가 달라고
얼마나 떼를 쓰던지 결국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비행기로 12시간을 가는데 이런 사람을 만났으니 여러모로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이런 동반자는 처신을 너무 못하는 사람이기에 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이 비즈니스를 하는데,
바이어를 대접하기 위해서 룸살롱 같은 곳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룸살롱의 직원에게 “아저씨 교회다니죠?”
라는 말을 듣고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를 뛰쳐나왔습니다.
성도는 이 일화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아무리 자신을
위해서 필요해도 하나님께서 뜻하지 않는 곳에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새해에는 믿음의 처신을 잘하여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우리가 되어야 겠습니다.
둘째,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시편 1장 3절을 보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나무는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장소에 뿌리 박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결국 누군가에 의해서 심겨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묘목을 갖다 심었던지
아니면 척박한 땅에 있는 나무를 옮겨서 이 시냇가에 심은 것입니다.
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영적으로 사람을 비유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척박한 땅에서 자란 우리들을
하나님의 큰 계획을 가지시고 시냇가로 옮겨 심은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때마다 수분을 잘 공급받기 때문에
영양분이 풍부하여 무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초대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냈던 백낙준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백낙준 박사는 교육부 장관을 지냈으며 정부 수립 이후 한국 교육의 기틀을 잡은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낙준 박사의 고향은 평양 정주입니다.
백낙준 박사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백낙준 박사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백낙준 박사는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따라서
알렌 맥퀸이라는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알렌 맥퀸 선교사는 개척한 교회가 건물이 변변치 않자
새로 예배당을 짓기로 하고 건축을 시작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금이 부족하여 교회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알렌 맥퀸 선교사는 자신을 파송한 본국에 돌아가 모금을 하려고 하였지만 본국으로 돌아가기서 모금활동을 하려면 몇 달의 시간이 더 소요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낙준 박사의 어머니는 이 상황을 보고 자신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을 팔아 교회를 짓는데 헌금했습니다.
자신 앞에 전답을 판 돈을 가져온 백낙준 박사의
어머니를 보고 알렌 맥퀸 선교사는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전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시면 성도님께서는 어디에서 사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자 백낙준 박사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사찰로 일하며 교회에서 살면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백낙준 박사와 어머니는 어머니의 결단에 따라
그 뒤에 새로 지은 교회에서 먹고 자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알렌 맥퀸 선교사는 백낙준 박사의 어머니의 헌신에
감격하여 그 헌신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알렌 맥퀸 선교사는 당시에는 어렸던 백낙준 박사를
어머니의 헌신에 대한 보답으로 유학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고 중국에 파송되어있던 선교사에게
백낙준 박사를 보냈습니다. 백낙준 박사는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역시 알렌 맥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예일 대학교에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백낙준 박사는 많은 노력 끝에 예일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귀국한
백낙준 박사는 우리나라 교육부 장관을 지내며 한국
교육의 기틀을 놓고,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믿음과 헌신이 백낙준 박사의
삶 전체에 놀라운 축복의 터를 닦은 것입니다.
백낙준 박사는 가난했던 100년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낙준 박사가 척박한 한국 땅에서 그 능력을 다 펼쳐보지도 못하고
사그라들지 않도록 백낙준 박사를 미국이라는
시냇가에 옮겨 심으셨고, 백낙준 박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그 삶을 통해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
주변에 사는 동물들, 길을 지나는 나그네들이 와서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이웃에게 유익을 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를 더욱 축복하십니다.
마치 백낙준 박사의 어머니가 헌신 했을 때,
그 아들이 하나님께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처럼
주변 사람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더욱 큰 결실을 맺도록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은 우리에게 능력으로서 다가옵니다.
그리고 “능력”이라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또는 능력을 주시고 난 뒤에,
우리가 그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사용하는가를 살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받은 복이 주변 이웃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은 복에 복을 더하십니다.
헤르만 헷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이 단편소설의 내용을 보면,
아우구스투스라는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신이 나타나서 소원 하나를 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신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누구에게나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앞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게 해주십시오.’
신이 그 소원을 들어주어서 그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들에게 사랑만 받고 사랑을 줄줄 모를 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교만하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그 교만으로 인해 주위에 몰렸던 사람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에게도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의 주변에 몰렸던 사람들이 떠나게 되자 그는 고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슬퍼하던 어느 날 밤 그에게 신이 나타나서 소원을 하나 더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그때부터 아우구스투스가 사랑을 베풀기 시작하자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베풀줄 모르면 외롭고 고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외로움과 고독이 심해지면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여배우였던 마릴린 먼로가 서른여덟의 나이에 자살했습니다.
그녀의 자살 동기가 분분하였는데
마릴린 먼로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조 디마지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녀가 뭘 위하여 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이것을 위하여 살아야 할 대상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군가에게 베풀며 살아야 하는데
그런 대상이 없으면 절대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한국 가수 중에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김장훈 씨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가수를 활동하면서 그동안 총 거의 100억을 기부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연예인이었지만
‘어떻게 인생을 보람 있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김장훈 씨의 인생이 이처럼 베푸는 삶이기에 진정한 행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신자는 누군가를 위해 살때 행복합니다.
신앙생활 가운데에서도 남에게 유익을 줄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에게 복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시편 1장 6절을 보면,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믿는 신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의인들의 길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 중에 어느 부부가 참 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부인의 얼굴을 보면 늘 행복해 보이기에 그래서 제가 남편 집사님에게
“정말 부인께서 얼굴도 예쁘시고 마음씨도 좋으시네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목사님, 한 달만 제 아내 데리고 살아보세요.
그러면 제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는 아내 되는 여자 집사님에게
“집사님 좋은 남편 데리고 사셔서 얼마나 좋으세요.”라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 집사님도 역시 “목사님 일주일만 데리고 살아보세요.”라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 가정을 칭찬하지만
정작 남편과 부인이 서로를 ‘지옥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렇게 부부가 서로 인정을 안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내와 남편이 서로 인정 안 해주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해도 그것은 공허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참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하나님께 ‘어떻습니까’ 라고 물어봤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한 달만 데리고 살아 봐”라는 답변이 나온다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늘 겉모습만 바라볼 때가 많고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믿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의 비유가 잘 나타난 본문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주인이 여행을 가면서 여러 하인들에게 맡긴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하인들은 재산을 더욱 증식시켜
주인에게 기쁨을 주고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면서 그들에게 받은 것에 배를 주었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를 받은 이는 재산을 땅속에 감추어 두어
고스란히 받은 돈을 돌려주려다 오히려 있던 것도 빼앗겼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러자 있던 것도 빼앗겼습니다.
시편 1:6에 나와 있는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고 할 때에
'인정하다'의 히브리어는 '야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야다'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가장 흔한 의미는 '알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그 모든 형편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 즉 알고 있다면 우리에게 복이 임합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형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편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셔서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면 이런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또 인정하다의 '야다'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부부 사이에만 가능합니다.
부부는 몰랐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 깊은 관계를 맺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우리와 하나님이 마치 부부 사이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야다'는 하나님과 끊임없는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에녹은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동행의 의미는 하나님과 끊임없는 인격적인 만남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에녹이 받은 복은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나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 즉 하나님이 그 사람의 모든 형편을 알고 있고
또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과 끊임없는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성도가 축복을 받습니다.
이렇게 신자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때 진정한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노력하는 사람은
첫째로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도
성실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안 보이는
것까지 보십니다. 또 둘째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노력하는 사람은 그 행동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새해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려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 은밀한 때에도 성실하고,
그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해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믿는 신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신자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때 진정한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복을
누리시는 우리가 되어야 겠습니다.
새해에는 믿음의 처신을 잘하시고,
남에게 주는 유익을 누리시고
하나님께 인정받아 하나님의 큰 복을 누리시는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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