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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대장(서은철 목사)
흥왕하는 한해가 되게 하라. 행19:8-20
주신 말씀 눅19:8-20을 중심으로 [흥왕하는 한 해가 되게 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기 원합니다.
본문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핵심으로서 바울이 삼년동안 머물렀던 에베소사역을 통해 에베소 오순절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성령강림 사건 후 두란노 사역을 통해 많은 사역자들을 양성하고 에베소 40만 시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 하는 놀라운 사건의 기록입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의 선교는 일차적으로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에베소 유대인 회당에서의 복음 증거는 석 달 만에 중단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비난하면 다투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나, 새로운 곳 두란노서원에서 2 년 동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 한 복음 증거는 큰 성공을 거두어 에베소는 물론 그 주변지역에까지 복음이 확산되는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의 사역 성공을 본 받아 우리도 동일한 복음이 흥왕하는 큰 은혜를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천국의 빛과 능력으로 복음이 흥왕하는 한 해를 만들 수 있나요?
첫째로 은혜를 사모하라(8-9)
바울이 에베소의 회당에 들어가 3개월 동안 가르쳤으나 마음의 굳어 순종치않고 무리 앞에서 복음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비방하고 배척한 [어떤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사도바울은 복음을 강론하며 권면했기에 잘못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으세요]라고 권면한 후에 반응이 없으면 [그만두라]고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세히 풀어 가르치고 정성으로 권하기 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젓을 떼고 나면 정신없이 먹으려고 하던 아이들이 밥을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단계가 있잖아요. 그러면 엄마나 할머니가 어떻게 하나요?
이리 달래고 저리달래보고 마치 무슨 벼슬이라 하는 것처럼 한 숟가락 먹으면 잘했다고 칭찬하고 박수쳐주고 맛있게 먹는 시범도 보이고 별짓을 다 합니다.
정말 비위가 상해 나를 위해서 한 번도 안 해 본 아양이나 달래기 등을 하는데 그 자식 사랑하니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쇼를 다하잖아요.
히4: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사람만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될 줄 믿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이라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9절에서 복음을 배척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만나자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기까지 결코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이 있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복음에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치 않으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과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베푸신 최고의 이적이며 은혜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복음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 덕분이지 나의 판단력과 이성과 지식이나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에 응답하며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같은 10kg의 돌을 지고는 한 시간도 못 걷는데, 12kg 짜리 우는 아들을 업고 하루 종일 견디는 것은 어머니와 아들간에 사랑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어 크신 사랑의 힘 어머니의 사랑의 힘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과 관계되는 모든 일에서 거룩한 감동과 은혜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거부감이 생기고 잘못된 일이 발견되고 트집거리가 눈에 보이고 비방하게 되지만, 택함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같은 말씀을 들었음에도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기쁨과 감격에 젖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장난꾸러기 아들을 보고 저 개구쟁이 오늘은 무슨 사고를 치려는가 하지만 어머니는[ 그 녀석 똑똑하고 힘 있고 지칠 줄 모르는 저 활력은 바로 장군감이야!]하며 만족해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범죄자들을 보고 귀찮고 무섭고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연민의 정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가난한 자, 병든자 , 외로운 자, 외국인 노동자, 탈북이주 새터민들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신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감동이 되고 눈물이 나고 불쌍히 여겨주시라고 기도가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입에서 찬송을 읇조리고 있나요?
배고픈 자를 보면 내 지갑을 열어 먹을 것을 사주고 와야 마음이 평안하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 자녀 삼아 주셨음을 확신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은혜를 베푸시고, 내가 하나님 주신 성령의 감동으로 은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하며,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가 많은 교회가 성장하고 흥왕하는 교회가 될줄 믿습니다.
어떻게 천국의 빛과 능력으로 복음이 흥왕하는 한 해를 만들 수 있나요?
둘째로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이 임하기를 사모하라(10-13)
10절에서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강론하므로 아시아에 사는 자가 다 복음을 들었다 합니다.
이때 바울이 복음을 전하므로 생긴 교회들을 보면 계시록의 일곱교회, 갈라디아교회, 본도교회, 아시아교회, 밤빌리아교회, 비시디아교회, 갑바도기아교회등등 수천개의 교회입니다.
바울이 두란노에서 복음을 증거 하였는데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바울이 주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사람들이 직접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의 입은 주님의 입을 대신하여 주의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입을 대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의 말씀만 가감 없이 증거 해야지 자기의 자랑이나 공로를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참된 복음만을 중심으로 전해야지 인간의 생각이나 자기중심으로 말씀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자신의 생각이나 말은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 가감없이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말씀을 같은 사람이 들어도 은혜가 되는 사람이 있고 은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복음 전하는 자의 인격과 삶이 그 말씀에 능력이 되고 신뢰성을 주기 때문입니다.
11-12절에서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가더라 합니다.
바울의 대단한 능력이라고하며 우리 목사님도 우리 장로님도 권사님도 저런 능력이 있으면 교회가 금방 부흥 할 텐데...하는 생각을 하신 분 없으시죠?
헛된 것입니다. 현신애, 김계화,GMS.문선명, 박태선... 수 없이 많은 분들이 허망함을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런 허망한 것을 바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겠죠.
왜 하나님은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에서는 이런 기적을 일으키지 않다가 에베소에서만 놀라운 이적을 행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에베소에서 바울이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신 것은 에베소의 경우 우상이 너무 강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진리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복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적이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축소되었거나 목회자가 신령하지 않아서라고 지레 짐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적은 기적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 기독교신앙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단들도 병 고침을 통해 얼마든지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기적을 추구하다보면 그릇된 길로도 갈 수 있습니다.
사탄도 불완전하지만 이적을 행할 수 있고 귀신의 장난일 수 있기에 기적적인 일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단정하고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적적 사건의 기록은 주님의 약속의 성취로써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과 이적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하는 것이요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라 말씀한 것처럼 제자들은 놀라운 능력과 권세를 받은 자들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때와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적은 우리의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말씀보다 이적을 앞세우지도 말고 무시하지도 말고 더욱 뜨겁게 기도하고 스스로 정결하게 함으로 과거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오늘 이 시대에 밝히 드러나게 될 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13절은 진정한 능력자는 성도라고 말씀합니다.
행8장에서 사마리아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의 성령을 돈주고 살려고 합니다.
본문 13절에서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며 귀신을 쫓으려고
합니다.
당시 마술사들이 사도들을 통해 나타나는 이적과 능력들을 보고 부러워하며 앞 다투어 모방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능력을 흉내내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하노니 귀신님 좀 나가주실래요]라 합니다.
우리 무당들이 노잣돈을 주고 제물을 주고 달래고 얼리며 푸닥거리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할 것입니다.
짝퉁은 진품을 만나면 꼼짝 못합니다.
마치 도둑이 경찰을 만나면 줄행랑치듯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믿을 때 진정한 능력자가 됩니다.
호랑이를 만나면 강아지가 꼬리를 내리고 오줌을 질질 쌉니다.
상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그와 동등한 능력과 수준을 갖춘자 뿐입니다.
마술사들은 바울의 진면목 즉 자기들과 달리 눈속임이 아니라 진짜임을 알고 부러워하고 배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능력은 참되고 올바른 초자연적 능력으로 궁극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참 사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성도들이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천사들도 사모하는 영원한 말씀을 주시고 , 세상의 마술사들도 부러워하는 하늘의 능력과 권세를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이 알지도 감당하지도 못하는 각종 성령의 은사들을 넘치도록 부어주시어 진정한 능력자 되었음을 깨닫고 이를 통해 참다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어떻게 천국의 빛과 능력으로 복음이 흥왕하는 한 해를 만들 수 있나요?
셋째로 천국의 빛과 능력으로 흥왕하게 하라. (14-20)
14-16절은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악귀에게 망신당하는 내용입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은 바울과 예수의 이름을 빌어 악귀를 쫓아내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 대제사장이라는 자가 개인적인 축재와 이득을 위해 주술적 축귀 행위를 일삼는 무당이 되었다는 것은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타락 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15절에서 [너희는 누구냐]라는 말은 ύμΐς δε τίνες έστε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라는 말로 너는 짝퉁이다는 것을 내가 안다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써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축귀의 능력을 행하던 자인데 이들 스게와의 아들들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축귀를 행하려는 그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명령한다고 무조건 예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믿음에 기초해서만 사단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악귀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 올라 눌러 이기니]라는 말은 귀신이 일곱 명의 스게와의 아들에게 들어가 그들로 옷을 벗기고 수치를 당하게 하며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도망하게 함으로 귀신에게 눌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제사장을 귀신이 제압하므로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러워 더 이상 제사장의 권위를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바울의 선교단이 복음을 가르쳤고 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고 , 수 많은 이적과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였지만, 이들은 회개하거나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스게와의 아들 사건으로 인하여 바울의 두난노 사역에 더욱 관심이 높아졌고, 자연스럽게 바울을 존경하게 되었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높이다는 μεγαλύνω;메갈뤼노는 위대하다고 생각하다, 위대하게 만들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당시 축사시 사용한 이름이 귀신을 제압하면 그 이름은 모든 축사자들이 널리 사용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쳤는데,
제사장 스게와의 아들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으려다 대망신당한 사건은 이러한 통념이 깨지는 것으로 바울의 사역과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이 크게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바울이 축사시 사용하는 예수의 이름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한자들에게만 능력과 권능과 은혜를 주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그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아야 합니다.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지식대로 예수님을 믿는 참 믿음으로 모두 구원으로 나아가야 하며 복음을 전한 자마다 구원에 이르게 해야 될 줄 믿습니다.
18-19절에서 곧 많은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믿고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는가하면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마술책들을 가져다가 태웠습니다. 은 오만 은 140명 노동자의 일 년 연봉입니다.
계산을 잘못하지 않았다면 노동자의 일 년 연봉 3천 만 원 일 때 420 억 원 어치의 책을 불살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이 세상 권력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입니다.
하늘의 권세와 능력, 천국의 진리와 빛은 이처럼 어두움을 몰아내고 썩은 것을 불태워버리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런 것을 파사현정 (破邪顯正) 이라 합니다.
곧 사악하고 거짓된 모든 것이 깨어지고 올바른 빛과 진리가 드러나는 통쾌한 모습입니다.
우리나라가 정말 썩고 부패해가는 이때에 교회가 사도행전의 교회처럼 복음의 참 빛을 비춰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고 천국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찬란하게 비추고 있나요?
사회로부터 교회가 개혁의 대상으로 지탄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의 부끄럽고 나약한 모습으로 인해 ,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행하지 못해서 사회가 어두워지고 썩어져 가고 있어도 선뜻 빛이 소금이 되지 못합니다.
20절에서 에베소 교회는 거대한 성장을 거둡니다.
에베소 교회의 절반 이상이 예수를 믿는 놀라운 일이 현실화 된 것입니다.
놀라운 교회 성장의 비결은 바울의 말씀의 능력입니까?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얹기만 해도 병이 낫는 능력 때문입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기존성도들의 회개와 자복이 폭발적인 교회성장의 기촉제가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의 직접적인 요인은 누가가 증거하는 것처럼 기존 성도들의 회개와 영적 각성을 통해 예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은 목회자의 설교와 역량과 불신세상의 회개가 영향을 미치지만, 보다 직접적인 요인은 숨긴 죄들을 깊이 참회하고 생생히 살아있는 성도로 소성할 때 교회의 성장은 촉발될 줄 믿으시기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온갖 미신과 우상숭배, 마술 등 더러운 영들로 가득찬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천국의 빛과 능력을 비추심으로써 이 모든 것들을 몰아내는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어떻게 천국의 빛과 능력으로 복음이 흥왕하는 한 해를 만들 수 있나요?
첫째로 은혜를 사모하라(8-9)
둘째로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이 임하기를 사모하라(10-13)
셋째로 천국의 빛과 능력으로 흥왕하게 하라. (14-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의 나약하고 해이한 모습을 반성하고 미스바에서와 같은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복음의 빛과 성령의 능력을 비춤으로써 이 시대를 덮고 있는 모든 어둠과 죄악이 물러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교회가 부흥성장하고 성도의 영적 수준이 향상되는 귀한 한해를 만들어가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