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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381m), 수암산(280m) - 충남 홍성, 예산
☞ 산행일자 : 2021. 3. 13.(맑음)
☞ 산행경로 : 자연휴양림~용봉산~노적봉~악귀봉~병풍바위~수암산~세심천
☞ 산행거리 : 약 10.5km (도상거리 9.8km)
☞ 산행시간 : 약 5시간 23분
홍성8경 중 제1경으로 '남한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용봉산은
해발 381m의 높지 않은 산으로 수석전시장에 온 듯한
갖가지 기암괴석들이 산객을 맞아준다.
용봉산은 산세가 용의 형상과 봉황의 머리를 닮은 데에서 유래했으며
고려시대에는 북산(北山),
조선시대에는 8개의 산봉우리로 형색을 갖췄다고 해 팔봉산(八峰山)이라 불렀다.
일제시대때 홍성군 지역에 있는 산줄기는 용봉산,
예산군지역에 있는 산줄기는 수암산으로 바뀌었다.
들머리에서 용봉산을 올려다보고..
좌측봉우리가 최영장군 활터
용봉산자연휴양림안으로..
입장료가 있다 1,000원
휴양림안으로 들어서면 화장실이 있는 넓다란 공터가 나오고
잠시 돌계단을 올라서면 정상으로 곧바로 가는 길과
좌측의 최영장군활터길로 갈린다.
활터를 거쳐 정상으로 갈 예정이기에 좌측길로...
곧바로 가파른 오름길이 시작되고...
등로엔 진달래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한고비 올라서서 돌아보니
충남도청이 있는 내포신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거북바위
영락없는 거북의 모양인데 아무런 표지판도 없다..
다른 곳엔 수없이 이름표를 갖다 붙여 놓았더만...
최영장군활터 능선의 바위도 멋지기만 하고...
악귀봉 정상의 산객들이 보인다..
흔들바위
흔들어 봤지만 예상대로 꿈적도 하지 않는다..
병풍바위뒤로 가야할 수암산도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들머리인 자연휴양림이 내려다 보이고..
멋진 조망터인데...
시원하게 시야가 트이기는 하지만 자욱한 미세먼지탓에
뿌옇게만 보이는 하늘이 답답하기만 하다...
바위가 있는 곳에 소나무가 없으면 운치가 반감하는 법..
금북정맥이 지나는 백월산도 보이고..
최영장군 활터
최영 장군이 소년시절에 애마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내기를 했다고 한다.
화살을 쏘아서 말이 빨리 가면 큰 상을 내리고,
화살이 빠르면 말 너의 목을 치겠다는 내기였다.
말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년 최영은 말을 타고 건너편 남동쪽 5km 지점의
홍성읍에 있는 은행정 방향으로 화살을 쏘았다.
동시에 말과 함께 바람처럼 달렸다.
최영이 말과 함께 단숨에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화살은 보이지 않았다.
최영은 약속대로 사랑하는 애마의 목을 칼로 내리치는 순간
화살이 피융하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최영은 자신의 경거망동을 크게 후회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자고 약속했던 애마를 그 자리에 묻어주었다.
지금도 홍성읍 국도변 은행정 옆에 "금마총"이라고 부르는 말 무덤이 있다.
정상으로 가면서 최영장군활터 능선의 멋진 바위를 당겨보고..
돌아본 최영장군활터...
용봉산 정상부...
최영장군활터능선의 멋진 바위군...
정상갈림길...
좌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있는 정상에 갔다가 우측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정상에 도착하니 많은 산객들이 인증샷을 하느라 한참을 기다렸다.
용봉산의 유래
산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암괴석이 금강산과 비슷하다 하여 소금강이라고도 하는 용봉산
지금의 용봉산은 고려시대에는 북산, 조선시대에는 팔봉산이라 불렀다.
일제시대 때 홍성군 지역에 있는 산줄기는 용봉산,
예산군 지역에 있는 산줄기는 수암산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용봉사'와 '수암사'라는 절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봉산은 골짜기마다 문화재와 보물이 산재해 있으며,
다양한 전설이 곳곳에 전해진다.
예로부터 땅에서 사는 온갖 짐승과 새의 무리는 봉황이 지배하였고,
산 아래로는 물고기를 비롯한 물속의 모든 것들은
용의 지배를 받으며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로 하늘의 부름을 받아 승천하면서 산의 형상이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용봉산(龍鳳山)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정상에서본 덕숭산과 가야산...
10여년 전 금북정맥할 때가 아스라히 떠오른다..
용봉산 정상에서 노적봉가는 길에 멋진 조망바위..
건너편의 노적봉과 악귀봉도 조금 당겨본다..
노적봉의 노점상도 보이고...
사자바위 능선
노적봉에서 하드 하나 물고 잠시 쉬어간다..
노점상 옆엔 버스킹을 하는 사람도 보이지만
산객들의 관심은 온통 노점상에게만 쏠린 것 같다...
세운지 얼마되지 않을 것 같은 정상석이 반기고..
개인적으로 커다란 바위덩어리의 정상석보다는
이런 작은 정상석이 더 정감이 간다..
정상에 커다란 정상석을 세우는 곳은 우리나라뿐이 아닌지???
노적봉에서는 우회길도 있지만 그냥 바윗길로 가는 것도 괜찮다..
용봉산(노적봉)의 명물.. 옆으로 크는 소나무
보기엔 그냥 나무가지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수령이 1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노적봉에서 본 악귀봉
좌측에 두꺼비바위가 보이는 전망대가 있었는데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솟대바위
행운바위
임간휴게소 갈림길...
악귀봉에서 본 노적봉과 용봉산
우측뒤로 백월산이 보이고..
악귀봉
뒷쪽에 두꺼비바위가 보이는 전망대가 있었는데
모르고 악귀봉으로 곧바로 오르는 바람에 가 보지를 못했다...
악귀봉정상에 있는 물개바위
악귀봉..
악귀봉과 건너편 암봉을 이어주는 다리도 있고..
두꺼비바위 암릉
두꺼비바위는 끝부분에 있는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잘 보이지가 않는다..
악귀봉 아래에 전망대에서는 두꺼비바위가 보이는데 몰라서 가보지를 못했다.
용봉저수지와 뒤로 서원산이 보이고
삽살개바위
조금 떨어져서 보니 잘 모르겠더니 가까이서 보니
앞발을 들고 있은 모습과 귀 모양이 삽살개를 닮았다..
악귀봉을 내려서면서 가야할 병풍바위를 당겨보고...
악귀봉을 내려서면 등로는 거의 육산으로 바뀌고...
정자도 보인다...
정자에서 본 악귀봉의 암봉...
병풍바위가 훨씬 가까워졌다..
윗가루실갈림길...
용바위
어디로봐야 용의 모습이 보일까하여
이리저리 둘러봐도 용의모습은 잘 보이지가 않는다.
용의 모습이던 아니던 멋진 기암인 건 확실한 것 같다..
용바위에서 우측으로 300m쯤 떨어져있는 병풍바위에 다녀오기로 한다..
뒤로 지나온 용봉산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병풍바위의 암릉들...
넓다란 반석인 병풍바위에서 한동안 쉼을 하고...
의자바위 뒤로 용봉사가 내려다 보인다...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암릉위에 올라가보고..
병풍바위에서 내포신도시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내남바위
뒤로 수암산이 보인다...
능선좌측의 바위가 용바위...
충남도청과 내포신도시
병풍바위에서 돌아와 잠시후 전망대에도 올라가보고..
수암산으로 가는 길은 대체적으로 육산이지만
군데군데 전설을 간직한 멋진 기암들이 자리잡고 있다.
장군바위와 수암산을 바라보고..
뫼넘이고개
뫼넘이고개를 지키고 있는 수암여장군..
대장군은 어디가고???
장군바위...
연인바위
먼 옛날 한 고릉에 한 아이를 둔 부부가 화목하게 살고 있었다.
이 가족은 가끔씩 산을 넘어 수덕사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고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는데 어느 날부터 이 부부가 병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치료를 받아보고 기도도 드렸지만 부부의 건강은 날로 악화돠었고
아직 많이 어렸던 아이를 걱정했다.
부부는 고민 끝에 아이를 수덕사의 스님에게 부처님의 제자로 키워주길 부탁드렸고
아이는 수덕사에서 키워지게 되었다.
그 뒤로도 부부의 건강은 악화되어 더 이상 수덕사를 찾아갈 기력도 없어지자
매일같이 수암산에 올라 수덕사를 보며 아이를 그렸고
부부는 그 자리에서 한 날 한 시에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부처님은 이들을 돌로 만들어 아이를 볼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장군바위
예로부터 내려오는 설화에 의하면 임금의 신임을 받아오던 장군이
적군들이 쳐들어와 전투를 위해 가던 중 이 산길을 지나게 되었다.
이 곳에서 적군과 맞닥뜨리게 된 장군은 열심히 싸웠으나
적군의 군사력에 밀려 전멸하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장군은 큰 상처를 입고 한계를 느껴 그 자리에서
적군이 지나갈 수 없게라도 하고자 하는 마음에
자신의 발을 검으로 박아 그 길을 막았다고 한다.
장군이 마지막까지 싸우는 동안 본부로 연락을 취할 수 있었고
시간을 벌어준 탓에 지원군의 빠른 대비로 적군들은 전투에서 패하였고
점차 나라의 안정세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장군이 자신을 희생했던 이 자리에 큰 바위가 자리 잡았다고 전해진다.
산신령과 의자바위
전해 내려오는 설화에 의하면, 이 고을에는 죽마고우 사내 아이 둘이 살았는데,
심성이 고운 아이와 성질이 고약한 아이였다고 한다.
어느 날 심성이 고운 아이는 부모님의 병환을 걱정하며 산에 나무를 하러 왔다가
이 바위에서 쉬고 있을 때 산신령이 나타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부모님의 병환을 걱정하자 산신령은 심성이 고운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어
부모의 병환이 완쾌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질이 고약한 아이도 나무를 하러 왔다가
이 바위에 앉아 산신령에게 소원을 빌었다.
순간 산신령이 나타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성질이 고약한 아이는 온갖 금은보화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산신령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며 집에 가보라고 했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보니 집에는 세상 온갖 벌레들이 가득하였다.
그 아이는 헛된 욕심을 낸 것을 후회하며 다시 산에 올라왔지만
그 자리에는 산신령이 아닌 바위만이 존재했다고 한다.
합장바위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마을에는 멀리 옆 마을로 장사를 다니던 부모님을 둔
사이좋은 오누이가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자주 집을 비우셨기에 둘은 서로 의지하며 우애좋게 지냈고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아이들은 마을 앞에 나가
부모님을 기다리기도 했다.
어느 날 부모님은 얼른 돌아온다고 말하며 길을 떠났다.
그러나 금방 돌아오실 거라 생각했는데 평소보다 늦으시는 부모님 생각에
아이들은 용기를 내어 조금 더 나가 보기로 했고
오누이는 산길까지 오르게 되었다.
밤이 늦어지면서 산은 추워졌고 짐승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오누이는 겁을 먹고 나무 아래로 숨어들었고,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오누이는 서로 마주보고 다독여 주었다.
그때 오누의 냄새를 맡은 짐승들이 다가왔고,
그자리에는 오누이는 간곳없이 바위가 합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도상의 수암산..
삼각점이 있다.
오형제바위
시대는 알 수 없지만 옛날부터 내려오는 설화에 의하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오형제가 행복하게 살고 있던 집에
아버지가 조정에서 바른 말을 하다가 역적의 누명을 쓰고
그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죽게 되고,
그 원수를 갚겠다고 어머니는 한양으로 떠난 후
살길이 막막한 오형제가 10년 후를 기약하며 뿔뿔이 흩어져 살게되었다.
장남은 자기 집이 내려다 보이는 수암산에 초막을 짓고
어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중
아버지를 역적으로 누명 씌어 죽인 원수의 첩이 되어 어머니가 돌아왔다.
장남은 흩어진지 8년만에 형제들에게 연락을 하여,
오형제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죽이고, 관헌의 눈을 피해 장남의 초막으로 피했으나
이미 관헌들이 포박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
오형제는 동시에 스스로 자결을 하였으며,
관헌들이 발길을 돌리는 순간 억수 같은 비를 만나 엎드려 있다가
주위가 조용해져 고개를 들어보니 초막과 오형제의 주검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그곳에는 오형제를 닮은 다섯개의 바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원한을 갚아 드리고 죽은 다섯 아들의 넋이 바위가 되었다하여,
사람들은 오형제 바위라 불렀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오형제가 바위가 되는 순간 구렁이로 변해,
바위가 보이는 강뚝 아래에서 천하게 살다가 여러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다고 한다.
오형제바위에서 본 내포신도시..
할매바위
먼 옛날 한 고을에 어릴 때 부모를 여읜 손자를 홀로 키우던 할머니가 있었다.
비록 일찍이 자식, 며느리를 잃었지만 손자는 세상에 둘도 없이 애지중지 키웠다.
시간이 흐르고 손자는 장성하여 세상을 궁금해하는 나이가 되었고,
손자는 멀리 바다로 나가 세상을 알아보겠다고 하며 집을 나섰다고 한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큰 폭풍이 바다와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는데
그 뒤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손자가 걱정이 된 할머니는
매일 바다에 나가 바라보며 기다렸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손자가 타고 나갔던 배만이 돌아왔는데,
그 배에는 거북이가 있었다고 한다.
손자가 거북이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하게 된 할머니는
거북이를 데려와 정성껏 돌보았고,
거북이와의 생활이 익숙해질 때 즈음,
거북이는 세상 구경을 한다며 다시 집을 나가버렸다.
거북이가 보이지 않자 할머니는 수소문하며 거북이를 찾아다녔고
그렇게 산자락을 오르게 되었다.
오랜 기간 거북이를 찾느라 노쇠해진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고 한다.
풍차가 있는 전망대..
좌측부터 덕숭산과 가야산, 서원산
가야산은 가사봉과 원효봉이 겹쳐보인다.
거북이바위
먼 옛날 한 고을에 어릴 때 부모를 여읜 손자를 홀로 키우던 할머니가 있었다.
비록 일찍이 자식, 며느리를 잃었지만 손자는 세상에 둘도 없이 애지중지 키웠다.
시간이 흐르고 손자는 장성하여 세상을 궁금해하는 나이가 되었고,
손자는 멀리 바다로 나가 세상을 알아보겠다고 하며 집을 나섰다고 한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큰 폭풍이 바다와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는데
그 뒤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손자가 걱정이 된 할머니는
매일 바다에 나가 바라보며 기다렸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손자가 타고 나갔던 배만이 돌아왔는데,
그 배에는 거북이가 있었다고 한다.
손자가 거북이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하게 된 할머니는
거북이를 데려와 정성껏 돌보았고,
거북이와의 생활이 익숙해질 때 즈음, 거북이는 세상 굼금하다며 집을 나섰다.
온갖 세상 구경에 빠진 거북이는 할머니를 잊고 지내다가
문득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렸지만,
할머니의 죽음을 느끼게 된 거북이는
큰 슬픔에 빠져 후회하며 이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할매바위와 거북이바위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더 아쉬움을 남긴다.
수암산...
우측 사람들이 앉아있는 바위가 거북바위이다.
좌측은 덕산온천길으로 가는길, 우측의 세심천으로 간다..
수암산성
수암산성은 수암산의 정상부를 포함하여 북쪽과 서북쪽 지역을 감싸면서 만들었다.
성의 크기는 둘레가 약 540m이며,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다.
성벽은 대부분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는데, 서북쪽에서는 막돌을 쌓은 성벽을 잘 볼 수 있다.
성의 내부에는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약간의 평지가 있어
건물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로 판단되는 기와가 확인된다.
수암산성은 수암산의 제일 북쪽에 위치해 있어 전망이 좋으며,
북동쪽의 예당평야를 한 눈에 감시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좌측에 돌계단이 있는데 우측에 다시 계단길을 만들었다.
예산 삽교읍 석조보살입상
보물 제508호인 이 불상은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대표적인 불상으로,
수암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549cm 입상으로 두 개의 돌을 이어서 조각한 것이다.
거구이면서 볼륨없는 석주형의 형태나 소략한 묘사 등
고려시대에 조성된 충청도 지방 특유의 불상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머리에는 6각형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네모난 얼굴은 소박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귀는 큰 편이고, 신체는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간략한 선으로 천의를 표현하였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는 두 다리 사이로 길게 내려와서 대석까지 이르고 있다.
세심천에 도착하면서 산행을 마친다.
산행도
첫댓글 오랜만에 들어와보니 상준이가 다시 예전처럼 열심히 산에 오르는것 같아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친구야 힘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