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하우스 6회 (2~5화). 휴(이름)! 왜 5개 국어로 횡설수설하니?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휴가 미국에서 돌아왔다. 불안한 기분으로 “잘 다녀왔느냐?” 인사를 했는데 그 꼬맹이는 날 보자마자 너무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그리곤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선물 가져왔다며 시커먼 배낭 속에 머리를 넣고 한참 뒤지더니 빨간 표지의 책 한 권을 불쑥 내밀었다. 나는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Oh, I’m sorry. I didn’t prepare yours yet.”
“괜찮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피곤하다며 배낭을 들고 까만 바바리를 질질 끌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쓰러져 잤다. 그가 준 책은 미국 인디언 사진첩이었다. 이상하긴 하지만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는데 그 생각은 다음 날 다시 180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명랑하고 예의 바른 아그네스와 달리 휴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신경 증세를 보였다. 도대체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계속 집안을 빙빙 돌아다니는가 하면, 자기 물건을 거실과 주방 등 공용 공간에 늘어놓기 일쑤여서 테이블 위, 컴퓨터 책상, 소파 위에는 항상 휴가 보던 책, 수첩, 양말, 필기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모두 바쁜 아침에 휴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도대체 안에서 뭘 하는지 한 시간을 기다려도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거실 TV는 결국 그의 컴퓨터 모니터가 되어버렸다. 거실은 그의 전용 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배운 지 몇 달 되지 않은 휴의 한국어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중국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설명하는 바람에 황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같은 아시아라고 중국어와 일본어라면 한국에서도 다 통하는 줄 알았던 걸까.
게다가 휴는 고등학교 때 루마니아에 1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간 적이 있기 때문에 종종 루마니아 말까지 중얼거렸다. 그리하여 그의 입에서는 평소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와 루마니아어가 동시에 튀어나왔고, 흥분하거나 화가 나면 오직 영어만 사용했기에 결론적으로 총 5개 언어를 짬뽕으로 사용해서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취미가 언어를 배우는 것이라니 할 말은 없지만 도무지 휴와 대화를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휴! 부탁이 있는데, 나한테 말할 때는 한 번에 한 가지 언어만 써. 특히 집에서는 한국어와 영어만 써주면 좋겠어.”
휴는 “알았어요. 누나…”라고 착하게 대답해놓고는 곧 잊어버리고 다시 5개 국어로 중얼거렸다. 글자 그대로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였다. 휴가 오고 나서는 내 맘이 도무지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멈출 줄 모르는 엄청난 학구열이었다. 책을 온 집안에 널어놓기는 해도 그만큼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내가 모르는 한자를 사용할 때도 많았고, 사람 이름을 쓸 때나 한자어로 된 말이 나올 때는 보통 한자로 적었다. 휴의 한자 실력은 항상 옥편을 들고 다녔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느 날 나는 그 녀석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휴, What brings you to Korea?”
“음…. 일본으로 가려고 루마니아에서 일본어 공부했는데 일본에서 입국이 안 됐거든요. 한국인이랑 채팅하다 한국 애가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해서 한국어 공부 두 달 하고 왔어요.”
허걱! 두 달 공부한 한국어라. 그는 한국어로 횡설수설하며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영어를 곁들여서 설명해 주었다.
“Why have your entry to Japan been refused?”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폭탄이 터졌거든요. 근데 그걸 내가 한 거라고 애들이 ‘왕따’ 시켜서 루마니아로 전학갔잖아요. 그때 병원에서 치료받은 경력 때문에 일본에서 거부당했어요.”
순간 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휴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누나, 그거 진짜 내가 터뜨린 거 아니에요.”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얼버무리지만 아무래도 수상하다. 게다가 일본에서 거부당하면 한국으로 올 수 있는 거구나. 하여간 요주의 인물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내가 자기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생각했는지 술술 자기 가족사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집 정말 힘들어요. 누나가 마약 복용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언제 죽을지 몰라요. 누나 죽으면 어떡해요.”
휴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했다. 그리고 하는 말. “누나가 스무 살 때 낳은 애기를 두고 죽으면….” 헉. 경악하고 있는 나에게 그는 계속 말한다. “아버지 여자 친구가 있는데요. 정말 나빠요. 항상 누나랑 나에게 소리 지르고 쥐어박고 그랬어요.”
아아, 정말 가여운 아이다. 맞아, 화목한 가정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지. 휴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난 내가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고 휴에 대해 조금은 마음을 열게 되었다. 물론 정상적인 녀석은 아니지만 아닌 게 아니라 착한 구석도 있는 녀석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할 줄 아는 유일한 한국 음식인 계란말이를 해서 식탁에 놓아두고 갈 때도 있고, 내가 도움을 줄 때는 성의 표시로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도 한다.
연세어학당에 다녀와서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며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말을 붙이는 게 때로는 동생 같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 일본인 반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오면 나는 친누나처럼 김치전이며 파전을 만들어주고 과일도 깎아주며 진짜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나는 밥을 하면 아그네스와 휴를 불러 함께 먹자고 한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우유와 치즈도 먹지 않는 완전 채식주의자인 데다 입맛이 까다로워서 자기가 구입한 재료로만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주로 휴하고 같이 먹게 된다. 그런데 요 녀석은 내 음식은 꼬박꼬박 받아먹으면서 자기 음식은 방에 숨어서 몰래 먹는다.
어쩌다 휴의 방문을 노크하면 깜짝 놀란 얼굴로 후다닥 뭔가를 치운 뒤 문을 열고 나오는 녀석. 난 그 녀석의 등 뒤에서 급하게 감추느라 제대로 숨기지 못한 삼각김밥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또 휴는 오렌지 주스를 좋아하면서도 내가 볼 때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 간혹 부엌에서 그 녀석이 주스를 급하게 마시고 있는데 내가 들어서면 어찌나 화들짝 놀라는지. 그럴 때 휴는 엄청난 고뇌의 빛을 띠고서 내게 묻는다. “누나…주스…마시겠어요…?”
아마도 그전에 살던 한국 가정에서 음식은 나눠 먹어야 한다고 가르쳤나 보다. 여하튼 마지못해 주스를 권할 때의 그 녀석 표정은 정말 가관이다. 과연 이 또라이 녀석과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까?
글로벌 하우스 6회 (2~6화) 호주 출신 아그네스에게 겨울은 괴로워
나보다 여덟 살 아래인 아그네스는 170 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명랑하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다. 간혹 한국사람들이 러시아 여자로 착각하고 말을 걸어오면 그녀는 일부러 프랑스어를 한단다. 그러면 사람들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는다나.
아그네스는 완벽한 채식주의자로 우유와 달걀, 치즈조차 먹지 않는다. 처음에 아그네스가 자신을 베지테리안이라고 소개했을 때 나는 그게 뭔지 몰랐었다. 베지테리안이 뭔지 안 다음에는 채소만 먹고도 저렇게 키가 훤칠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아그네스가 우리 집에 왔을 때가 12월이니까 추운 겨울이었는데, 그 겨울이 아그네스가 한국에서 처음 맞는 겨울이었다. 아그네스는 호주에서 겨울에도 점퍼 안에 반팔을 입고 다닌다며, 물이 얼어버릴 정도의 추위는 처음이라고 했다. 당연히 눈이 내려 언 길을 걷는 것이 아그네스에게는 곤욕이었다.
“새봄, 어떡해? How?” 아그네스가 겁을 집어먹고 얼음 위를 걷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소리치면 나는 그냥 조심조심 얼음 위를 걸으면서 “이렇게…”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빙판 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한국의 빙판길은 아그네스에게 어려웠다.
아그네스는 그해 겨울 내내 빙판에서 넘어져 몇 번이나 발을 삐었는지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아그네스는 활동적이고 레저를 좋아해서 주말마다 스키며 스노보드 타는 걸 즐겼다는 것이다. 빙판길은 지나가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눈밭에서는 그렇게 씽씽 달리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갔다.
한번은 추위를 타는 아그네스에게 전기담요를 사용하라고 준 적이 있는데, 아그네스는 “새봄, 어릴 적 TV에서 봤는데, 전기장판에서 잠을 자다 감전돼서 새까맣게 변한 여자를 봤어”라며 굉장히 전기장판을 깔고 자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그런 아그네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난 오래전부터 전기담요를 깔고 잤는데 아무 문제 없었으며, 네가 본 것은 아마 코미디 프로그램일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도 아그네스는 못 미더운 표정으로 “그래? 그럼 아주 추울 때만 사용할게”라고 했다. 한국에서 첫 겨울을 나는 아그네스의 난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새봄, 어떡해? 네 세탁기 이상해!” 세탁기 앞에서 나를 부르기에 가봤더니 아그네스는 확 줄어 아동복처럼 작아진 스웨터를 흔들어 보였다.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할 울 소재 옷을 그냥 세탁기에 돌렸으니 당연히 쪼그라들 수밖에.
“아그네스, 울 소재 옷은 드라이클리닝을 해야지 절대 세탁기로 물빨래하면 안 돼”라고 설명해 주려고 했으나 당최 영어가 안 돼서 나는 옷 안의 라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물세탁이 안 된다는 그림이 있으면 세탁기에 넣지 말라고 했다. “그래? 울 소재를 입어봤어야 말이지.” 그녀는 멋쩍어하며 말했다. “푸하하. 그런데 이 옷 너무 웃기지 않아?”
그녀는 언제 울상이 됐냐 싶게 웃음을 터뜨리며 난쟁이 옷같이 되어버린 자기 옷을 거울 앞에서 대보면서 꼬마 흉내를 내며 장난을 쳤다. 말도 잘 안 통하고 전혀 다른 문화끼리 만났지만 아그네스와 나는 아주 잘 지냈다. 같이 쇼핑을 하거나 잡지를 보며 남자 모델을 평가하기도 하고, 컴퓨터 노래방도 같이 하고, 비디오 가게에 같이 가서 비디오를 빌려다 밤을 세워 보면서 말이다.
아그네스와 나의 대화는 주로 미래와 일, 꿈에 대한 열정 같은 것이었다. 서로 자신의 미래 계획과 이상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조언도 해주고 계획을 다듬는 데 아이디어도 주곤 했다. 우리는 미래 계획을 착실하게 세워 그것을 실천해가는 서로를 높이 평가했고 좋아했다.
첫 룸메이트로 아그네스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내가 “아그네스와 살게 된 건 정말 행운이야”라고 말하면 아그네스 역시 “I like you very much.”라고 대답했다. 말은 완벽하지 않지만 마음만은 완벽하게 통한 것일까.
처음 한 달 동안은 서로 어색하고 말이 통하지 않아서 깊은 우정을 나누기는 어려울 것 같았는데 같이 살면서 마음이 통하니 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서로 못 알아들어 번거롭더라도 컴퓨터 사전을 이용할 때가 많았지만 조금 느리긴 해도 의미는 다 통했다. 그럴 때 아그네스는 “새봄, 영어 공부 좀 열심히 해” 하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고 나는 “무슨 소리, 한국어 가르쳐줄게. 한국어 쓰자” 하고 맞받아친다.
서로 말이 유창하게 통하지는 않지만 아직까지 아그네스와 나 사이에 통하지 않는 말은 없다. 역시 사람과 사람이 통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말이 아니라 서로를 얼마나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가 아닐까.
*** 오전에 글을 쓰려고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자주 회원가입을 하란다. 전에는 잘 풀렸는데 오늘은 풀리지 않아 글을 못 올렸습니다. 총무와 통화하고 풀려 이렇게 늦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