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4년(신라 신덕왕 3년) 보양국사가 창건 임진왜란 때 소실 후 사명대사 중창 조선 경종때 승려만 5백여명인 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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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가 임진왜란 후 원래 통도사에 모셔진 진신사리 2과중 1과를 용연사에 분과해 왔다. 사진은 돌계단 위에 적멸보궁이 위용을 자랑한다.
| 2010년 대구지역의 최고 ‘아름다운 거리’로 달성군 옥포면 용연사 벚꽃길이 선정됐다. 용연사 벚꽃길은 40년이 넘은 벚꽃 가로수가 1㎞ 정도 이어져 관람객들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겨울의 찬기운이 가시지 않은 2월 23일에 찾은 용연사에는 아쉽게도 화려한 풍광을 볼 수 없었다. 용연사 종무소측에 물어보니 1달 정도는 더 기다려야 벚꽃의 장관을 상춘할 수 있다고 했다. 용연사는 벚꽃길도 유명하지만, 실은 우리나라 8대 적멸보궁 중 하나로 더 이름난 도량이다.
용연사를 오르려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이 일주문이다. 크기는 크지 않지만, 공포의 화려한 장식이 돋보인다. 극락교를 건너 경내로 들어섰다. 사천왕문을 지나 보광루를 지나면 널찍한 마당에 주불전인 극락전과 함께 여러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고려시대 조성된 3층석탑 뒤편으로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을 이고 있는 극락전이 있다. 내부에는 영조 때 조성된 후불탱화와 삼장탱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20여년 전 도난당했다고 한다. 후불탱화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빈궁 조씨가 세자의 삼년상을 마치고 시주해 만든 불화인데,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여간 씁쓸한 게 아니다.
사력을 살펴보면 용연사는 914년(신라 신덕왕 3년) 보양 국사(寶壤國師)가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 사명대사의 명으로 중창됐다. 또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후 원래 통도사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 2과 중 1과를 용연사에 분과해 왔다. 적멸보궁 사찰이 된 연유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통도사의 사리를 탈취한다. 사명대사가 설득해 반환받게 되는데, 이 사리의 처분을 위해 스승인 서산대사를 찾아가자 한 개의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안치하고, 나머지 하나는 다시 통도사에 안치하고자 했다. 하지만,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사명대사마저 입적하게 되자, 제자인 청진이 두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사리 한 과는 통도사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하나는 용연사에 모시게 되니 바로 이것이 용연사 석조계단이다.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같은 계단형 사리탑으로 보물 539호로 지정돼 있다.
부처님 사리가 안치된 석조계단 앞에는 적멸보궁이 자리한다. 진신사리는 부처님과 동일하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불상이 조성될 때까지는 유일무이하며 경건한 숭배대상이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과 동일한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사리가 안치됐기 때문에 전각중 유일하게 불상이 없다. 진신사리가 있는 방향으로 창이 나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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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사 전경. 극락전과 3층석탑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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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단 위로 석종을 올려놓은 듯한데, 기단에는 각 면에 2구씩 팔부중신을 새겼다. 도드라지게 표현된 팔부중신의 모습은 옷자락과 무기, 구름이 한데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예전에는 사리탑 사방에 사천왕상이 한 구씩 있었는데 도난 위험 때문에 극락전에 갖다 놓았단다. 적멸보궁서 내려오는 길 우측에는 이곳서 수행한 선지식들의 부도가 가지런히 정열해 있다. 부도가 많이 모여있어 부도밭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곳 용연사에는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길가여서 ‘밭’이라는 표현이 조금은 어색하다. 그래서인지 경건함보다는 남달리 친근함이 느껴진다.
신라시대에는 비슬산 일대에 산재한 암자가 3천여 개소에 이르렀을 정도로 이 일대는 불국토였다고 한다. 이 가운데 지금도 남아있는 옥포면 반송리 용연사를 으뜸으로 쳤다. 용연사는 보양 대사의 창건 기록만 있고 고려시대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1419년(조선 세종 1년) 천일(天日)이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다. 1603년(선조 36년) 탄옥`경천 등이 사명대사의 명으로 중창했다. 1621년(광해군 13년) 범종각을 지었고 1650년(효종 1년)에 다시 법당과 요사채 등이 불에 탔다.
1653년에는 홍묵이 대웅전을 지었고 승안이 명부전을 건립했다. 이어 1655년 희감과 홍묵이 함허당과 관정료를 세웠고 이듬해 청진이 관음전을 지었다. 1658년에는 도행이 명월당을, 그 이듬해엔 학신이 향로전을, 1660년(현종 1)에는 일순이 약사전을 차례로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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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에서 바라본 석조 계단 사리탑
| 1670년 천왕문 앞의 석교가 완성됐고, 1673년에는 자진이 세존부도와 비석을 세웠다. 1722년(경종 2년)에는 대웅전과 종각을 수리했는데, 당시 절 규모는 2백수십 칸에 이르렀으며 거주하는 승려만 500여 명에 이르렀다 한다. 현존하는 건물은 극락전, 적멸보궁, 나한전을 비롯해 사명당, 보광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39호인 석조계단과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4~7(보물 제961-3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1813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호인 삼층석탑, 극락전, 부도군 등이 있다.
유정당 5월 완공… 정신 문화 체험 공간 활용
용연사 주지 활중 스님
“지난해 8월 문화체험관인 ‘유정당’ 건립 불사 기공식을 봉행했습니다. 유정당은 임진왜란 때 3만 승병을 일으켜 왜군을 격퇴시킨 사명대사의 혼이 담긴 곳입니다. 현재 경내에 건립되는 유정당도 이런 유지를 받들어 사명대사인 유정(惟政)의 호를 따서 명명했으며, 향후 지역민과 내방객들을 위한 역사 및 정신문화 체험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입니다.”
용연사 주지 활중 스님은 올 5월 완공 예정인 유정당 불사에 대해 먼저 말머리를 풀었다. 유정당은 군비 등 19억원의 예산을 들여 1층에는 최신 시설을 갖춘 공양실(275.94㎡), 2층에는 참선 수행, 불교대학, 템플스테이 등으로 활용할 설법전(198.09㎡)을 갖추는 등 연면적 474㎡ 규모의 전통 목구조 와가 형태로 조성된다.
활중 스님은 “3월부터는 가족법회를 개설하고, 지난해 9월부터 시작된 불교대학을 활성화시키는 등 신도 교육과 신행 도량으로서 거듭나기 위해 진력을 다할 것입니다.”
주요 성보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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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문화재청은 지난해 1월 28일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을 보물로 지정했다. 문화재청은 “보물 제1813호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은 발원문을 통해 정확한 제작연대(1665)와 제작자(도우)를 알 수 있는 작품으로 당당한 불신(佛身), 강직한 선묘(線描) 등에서 17세기 대표적인 조각승 도우의 양식적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중수개금기(重修改金記)까지 포함하고 있어 불상의 개금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삼층석탑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되었다. 하기단부(下基壇部)를 보수하였으며, 단탑 기단에 탑신과 옥개를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한 삼층석탑으로 노반이 남아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의 보수 때 새로운 석재로 대치되었고 면석은 탱주(撑柱) 1개와 우주(隅柱) 2개씩을 각출하였으며, 갑석(甲石)은 부연과 2단의 괴임을 각출하였고 상면을 외연쪽으로 경사지웠다. 옥개는 4단의 받침과 2단의 괴임을 조각했다. 초층기단에 갑석 상면이 경사를 이루고 옥개 받침이 4단이라는 것과 옥개의 낙수면이 짧고 기단부의 폭이 짧은 것, 추녀가 얇은 데 비하여 받침이 높은 형식 등은 신라 석탑에서 변질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이 3.2m의 화강암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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