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이 말은 부처님이 열반을 3개월 전 남긴 말씀이다.
초기경전 <대반열반경-D16)>, 전륜성왕사자후경(-D26), 혹은 <자신을 섬으로 삼음 경(S22:43)> 등에 나오는 말이다.
초기경전인 <대반열반경>은 빠알리어 남방경전 <디가니까야(Digha Nikaya)>에 실려 있는 <마하빠리닛바나 수탄타(Mahāparinibbāna Suttanta)>를 말한다.
그리고 한역된 소승 <대반열반경>으로는 <장아함경> 속에 실려 있는 <유행경(遊行經)>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에는 몇 가지 이역본이 있다.
• 법현(法顯)이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 서진(西晋)의 학승 백법조(白法祖)가 번역한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 구마라습 번역의 <불유교경(佛遺敎經)> 등이 있다.
이 <대반열반경>은 석존이 열반할 때를 전후한 사정을 전하고 있는데, 비교적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해 기록돼 있다. 여기서는 석존 입멸 후 교단의 의지처가 ‘법(法, dharma)’과 ‘자신’에 있음을 밝혀 법과 율을 중심으로 교단을 운영할 것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이 80세가 되던 해였는데, 열반에 들기 3개월 전 벨루와(Beluva)라는 마을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부처님이 심한 병에 걸려 있었다. 부처님은 그때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질병을 극복하지 않고 죽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기와 결단으로 모든 고통을 참고 병을 이겨냈다. 그러나 부처님 몸은 여전히 허약했다. 그래서 거처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때 부처님 곁에서 늘 정성으로 시봉을 하던 제자 아난다(Ananda)는 부처님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온통 눈물에 젖어 흐느끼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면, 이제는 누가 우리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십니까?”라고 했다. 그 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승단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나는 감추어진 것과 드러난 것을 구분치 않고 진리(法)를 가르쳤다. 진리에 관해서 사권(師拳; 스승의 주먹 - 스승의 숨겨둔 진리) 같은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왜 승단이 누구에 의해 지도돼야 하는가? 아난아, 나도 이제 80 노인이다. 낡은 수레는 다시 수리돼야 갈 수 있듯이 여래의 몸도 그러하다.
그러니 네 자신을 등불(혹은 섬, 의지처)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또한 내가 가르친 법을 등불로 삼아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을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로 번역하기도 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자는 와서 보라’고 하는 가르침이고, -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넘기지 않고 과보가 있는 성질의 것이며, 열반에 잘 인도하는 성질의 것이다. 또한 지혜 있는 사람은 스스로 알 수 있는 성질을 가진 진리이다.
부처님께서 “스스로를 등불삼고 스스로를 의지하라[자등명 자귀의(自燈明 自歸依)].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법등명 법귀의(法燈明 法歸依)]”라고 하신 말씀을 줄여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라 하기도 하고, ‘자귀의 법귀의(自歸依法歸依)’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된 것은, 빠알리어 dipa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섬(洲)이고, 다른 하나의 등불이다. dipa를 섬으로도 옮기느냐 등불로 옮기느냐 하는 것이다. 대체로 북방 대승불교에서는 등불로 옮겼고,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섬으로 옮겼다.
그래서 빠알리 원어 “atta-dīpa, dhamma dīpa”를 중국에서는 주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 했다. 하지만 한역경전 가운데서도 등불 대신 ‘섬(洲)’이라고 한 번역본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사실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번역은 언어학적으로는 오역이다. 빠알리 원어 “atta-dīpa, dhamma dīpa”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자주 법주(自洲 法洲)”이다. 스스로를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아라가 정확한 번역이다. ‘섬’을 의미하는 dīpa를 ‘등(燈)’ 혹은 ‘등불’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한역경전 가운데서도 ‘주(洲)’라고 정확한 번역을 하고 있는 역본이 없지는 않다.“ <조성택 교수>
그래서 자신을 등불로 삼고라는 말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라는 말로 번역돼야 한다. 그래서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고[自歸依], 남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고[法歸依],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라고 하나 자귀의 법귀의(自歸依法歸依)라고 하나 뜻은 같다.
그리고 여기서 섬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다 가운데 있는 섬(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난 섬’이라는 개념인데, 홍수가 났을 때, 육지 가운데 물에 잠기지 않는 곳을 ‘피난 섬’이라 했다. 인도에는 큰 강이 많고, 곧잘 심한 폭우가 쏟아지므로, 강이 범람을 하면 사방이 물에 잠겨버려서, 그럴 때 물이 빠질 때까지 잠시 육지 섬(洲)에 피난을 해야 한다. 이런 일이 인도에선 자주 일어나서 ‘피난 섬’ 개념이 확실하다. 여기서 섬이란 바로 ‘피난 섬(洲)’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번역할 때도 섬 도(島)자를 쓰지 않고 섬 주(洲)자를 쓴다. 그래서 자신을 등불로 삼고라는 말을 자신을 섬으로 삼고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러나저러나 뜻은 같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나약해 질 때, 도저히 앞에 닥친 난관을 헤쳐 나가기 힘들 때,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때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의지할 만한 대상은 본래 없다. 모든 현상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 끊임없이 상호의존적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따라서 절대 불변의 어떤 실체, 혹은 (신과 같은)의지처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피난처(섬)나 귀의처로 삼아야 하며, 법을 섬이나 귀의처로 삼아야지 별도의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법에 귀의하라’는 말을 단순히 ‘부처님 가르침’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손가락에 의지하는 것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달(등불)을 봐야 한다. 여기서 달은 진리의 깨달음이요, 곧 등불이다. 이것이 법이다. 그러므로 법에 의지하라는 말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깨달아야 하는 진리, 모두를 말한다. 그것이 우리의 등불이자 안전한 섬이요 귀의처이다. 그 외에 어떠한 것도 안전한 섬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에게 귀의하라’는 말은 도과를 성취해, 더 이상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안전한 섬을 확보하라는 말이다. 즉, 진리를 깨달아 진리에 안주하라는 말이므로 결국 법에 의지하라는 말과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불교의 교리는 논리적인 추론에 의해서, ― 쉽게 얘기하면 머리를 굴려서 결과를 도출해내는 철학이 아니다. 몸과 마음으로 얻은 경험, 즉 체험에 의해서 실증한 진실이다. 이것은 스스로 수행을 통해 경험해야 한다.
서양철학에서 진리는 보편적인 것이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지만, 불교에서 진리(법)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오직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고, 스스로 안전한 의지처를 확보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 자신에게서 의지처를 구하고 섬을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자귀의 법귀의’를 이해하고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는 상응부경전의 <자주품(自洲品)>에서 제시했다. 도를 행하는데 도움을 주는 서른일곱 가지 방법 ―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이라 했다. 그 중에서도 사념처관(四念處觀 Catusati-paṭṭhānas) 수행을 우선해야 한다고 했다. 이 사념처관(身⋅受⋅心⋅法)의 수행을 통해 스스로 아라한과 혹은 열반을 증득해 가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은 연기(緣起)이다. 모든 것이 연관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낮이 없으면 밤도 없고, 선이 없이 악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악함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그런 구분이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신(神)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이 있기에 신이라고 불릴 수 있다. 신 역시도 인간과 연관돼 존재하는 것일 뿐 자신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과 구분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과 악에 관해 볼 때, 선함이라는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악함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즉, 먼저 악함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규정을 먼저 지어 놓고 그것과 반대되는 개념을 선함이라고 하게 된다. 즉, 구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된다. 대개 사람들이 이렇게 구분함에 있어서, 선함과 악함이란 것이 개별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절대 선, 절대 악 같은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연기에 의해 이렇게 생기는 것임을 바르게 알고 보면, 악함이란 선함에 의지해 생기는 것이고, 선함 역시 악함에 의지해 생기는 것으로 원래 선함과 원래 악함이란 없다. 처음부터 악함이란 개념은 없다고 한다면 자연히 선함도 소멸하게 된다.
이런 논리적 원리는 삶과 죽음에도 적용된다. 살고 죽는 것 역시 이와 같은 개념이다. 연기로 보면 삶이란 죽음이 있기에 존재하며 죽음 역시 삶이라 불리는 것이 있어 구분되는 것이다.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불릴 수는 없다. 죽음만 따로 있을 수 없으며 삶만 따로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하나의 에너지 장(場)과도 같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연관돼 움직이는 하나의 '장(場)'과 같아 어떤 것도 움켜쥐고 있을 수 없다. 모두 제행무상(諸行無常)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보는 시각이 열릴 때, 거기에는 본래 태어남도 어떤 구분도 없음을 알게 된다. 태어남이 없으니 죽음도 없음을 알게 되는 시각,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여기엔 그 어떤 특정하게 혼자 존재하는 '신(神)' 같은 개념이 들어올 수 없다.
불교에서 '신(神)'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으로 영원히 스스로 홀로 존재하는 개념을 거부하는 이유는 신 역시도 '연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기'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신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말했듯 만물은 연기에 의해 생성소멸 되며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 제법이 이러한 연기로 존재하므로 원래부터 선하다거나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라고 하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즉, 카스트제도에서 말하는 신분제는 불교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또한 연기에 의해 보면, 어떤 일의 결과는 어떤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원인 없이 결과는 있을 수 없다.
어떤 결과의 원인은 모두 어떤 행동을 한 자신에게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지금 순간 어떤 결심이나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를 바꿀 수가 있다. 모든 일의 중심에는 바로 자신의 마음상태와 행동이 있다. 부처님의 깨달으신 바도 역시 마음상태를 바꿈으로 해서 고통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특정한 개념에 집착해온 마음의 상태를 벗어남으로써 수많은 고통스런 어떤 개념적인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자신의 마음의 종교이며 자신의 마음 밖 어떤 것에 의해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하는 종교가 아니다. 결코 타자인 신에 의해 자신의 삶을 지배당하면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반열반에 드실 마지막 순간에도 제자들에게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 하라고 하신 것이다.
‘나’ 아닌 다른 것에 기대지 말라는 말이다. 내가 법을 전해 주었으니까 그 법에 의지하고 너 자신에 의지하라는 말이다. 여기엔 자기 자신을 신뢰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자귀의 법귀의(自歸依法歸依)>|작성자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