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의령군 정곡(正谷)면 석곡(石谷)리, 두메산골이다. 골짜기 곡(谷) 자가 두 개다. 우리 마을과 이병철 생가는 2킬로쯤 떨어져 있다. 생가 뒷산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끝자락에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이 바위를 만지면 큰 제물을 얻는다는 입소문이 퍼져 각처의 경제인들이 줄을 잇는다. 얼마나 만졌으면 바위가 몽돌처럼 반질반질하다. 나도 많이 만져 보았지만, 성심이 부족한 탓인지 재물과는 거리가 멀다. 자고로 큰 재물은 하늘의 운이 따라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삼성상회라는 조그만 가게가, 대 재벌의 모태가 될 줄은 그 누가 알았으랴.
60여 년 전에 그곳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때만 하여도 춘궁기(春窮期)가 있었다. 봄이면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꽃을 피우지만, 농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도시락도 꽁보리밥에 시어빠진 김치가 전부였다. 몇몇 잘사는 집 아이들은 하얀 쌀밥에 고소한 멸치볶음을 싸 와 맛있게 먹는 걸 보면 군침이 돌았다. 한 젓가락 얻어먹을까 하고 눈치를 주어도 못본체 한다.
되돌아보면 초등학교 시절에 재미있는 추억이 많다. 졸업할 때까지 줄곧 한 반에서 공부하고 싸움질을, 했다. 특히 여학생 수가 적어 이뿐이, 쟁탈전이 심했다.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은 순아. 학교 뒷동네에 살고 있는 착하고 이쁜 아이였는데 성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를 못했다. 대구 제일모직에 다닌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차마 찾아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맘속으로 그리워할 수밖에. 그러던 중에 안부를 전할 기회가 생겼다. 졸업 후 20년이 지날 무렵 동기동창회 결성안내문을 동창들에게 띄웠다. 순아한테는 별도로 손편지를 써서 보냈다. “동창회 때 꼭 와 달라고” 그때 나는 이미 결혼하여 아내와 아이도 있었는데 왜 그렇게 순아가 보고 싶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 나도 모르게 순아란 아이가 동심 속으로 들어와 풋풋한 향수를 뿌린 것이 아닐까 싶다.
동창회 날이 다가왔다. 과연 순아가 올까 안 올까 얼마나 예뻐졌을까 궁금해진다. 드디어 학교 운동장에서 그토록 보고파 했던 순아를 만난다. 20년 만이다. 그녀를 맞이하는 순간, 맙소사,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그 옛날 그렇게 참했던 아이가 굵은 몸통을 좌우로 흔들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가볍게 악수만 하고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내, 니 땜에 왔다아이가.“ 하며 반갑게 대한다.” “오랜만이네, 반갑다.”라고 인사하며 웃어 주었지만 무너져버린 내 마음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순간, 순아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여자의 직감으로 구겨진 내 표정을 어찌 놓쳤겠는가.
처음 만난 동창회에 이십여 명이 모였다. 여학생은 고작 대여섯 명 정도였다. 모두가 결혼을, 하여 도회지에 살고 있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결혼까지 하였으니 못하는 말이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밤새 소주잔으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나는 순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도 못했다. 이 모든 것이, 풋풋한 동심의 순수함으로, 다가가지 못한 내 탓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순아한테 너무 미안하다.
다음날 오후 헤어질 시간, “순아야 잘 가라"하고 작별의 악수를 나누는데 폐부를 찌르는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 “니, 내보고 많이 실말했제, 말 안 해도 내 다 안다.”
가슴이 뜨끔했다. 순간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주지 못한 내가 너무 미웠다. 때늦은 후회지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평생 살아오는 동안 외양보다 속 깊은 여자가 좋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순아를 다시 만나면 이 교훈을 함께 나누며 천진했던 동심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리라.
졸업 후 60년이 지난 지금, 순아와 나는 좋은 친구로 살아 남아있다. 이제는 서슴없이 손을 잡고 황톳길을 걸어도 부끄럽지 않은 초등학교 동창생,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동심의 추억 속에서 사심 없는 우정을 노래하고 싶다.
“순아야 잘 있제. 내년 봄 동창회 때 꼭 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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