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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가운데 밭을 가로지르는 길이 놓여 있고 그 위로 말 한 마리가 끄는 마차가 외롭게 가고 있다.
커다란 마차 바퀴 위에 놓여진 것은 관처럼 보인다.
말은 힘겨운지 고개를 늘어뜨린 채 걸어가고 있다.
마차는 시골의 이층집을 지나 사람들이 사는 공간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그림의 상단, 밭이 이어진 끝에는 멀리 기차가 달리고 있다. 증기 기관차가 길게 객차들을 매달고 연기를 내뿜으며 마차와 정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빈센트 반 고흐가 제 죽음을 예견하고 그렸다는 이 그림은 인간의 삶과는 무심한 듯 흐르는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밭의 농부는 외로운 마차에 잠깐의 관심이라도 줄듯하지만 일에 몰두해있다.
삶은 어쨌든 계속되고 있는 것이고 운명을 다 하면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는 투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기차 역시 밭 사이에 놓인 길 위의 마차를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게 내달린다. 그림에서 보이는 마차와 기차의 바퀴 간격은 같다.기차의 바퀴 폭은 마차에서 왔기 때문이다. 같은 폭을 가진 바퀴 위에서 하나는 이제 사라져 가려 하고 있고 하나는 새 시대의 주인이 되고 있다.
회화는 시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예술 분야라고 한다. 서양 미술에서는 19세기 말까지 살롱(Salon)과 아카데미(academy)가 그 기준을 제시했다.
살롱이 가지고 있는 소재와 작법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화가들이 준수했다. 미술관과 평론가들은 더욱더 표준을 강화하여 가이드라인을 정교화시켰다. 화가는 현실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 현실적으로 대상을 그려내야 했다. 주름진 옷, 물결의 움직임,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비례를 보여주는 인체 등. 섬세한 현실의 모사는 살롱의 주요 선택 기준이었다. 여기에 완벽한 구도와 색채를 구현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색채는 인간의 눈에 비친 자연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어야 했다. 작품의 소재 또한 신화와 고전, 역사적 사건, 종교, 정물, 풍경 등 신과 인간과 자연의 영역을 엄숙하게 다뤘다.
그런데 전통적 미술 흐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학의 발달과 철도의 등장으로 인간을 둘러싼 것들이 정신없이 변화하고 시간의 개념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둘러싼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그중에서도 회화에 영향을 미친 것은 시간 포착기계였던 사진기의 등장이다.
인간은 30분의 1초나 250분의 1초라는 짧은 시간을 잡아낼 수 있는 기계를 갖게 되자 순간의 빛을 잡아버렸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제 화가들은 모두 굶어 죽을 거라고 했다. 어떤 화가보다도 더 사실적으로 순간을 포착하는 기계 문명 앞에, 미술계 질서가 무너졌다.
사진의 등장으로 회화가 사라질 거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 흐름을 타고 있던 화가들이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형식들을 자의적이고 낡은 것으로 간주하고 또 다른 회화의 지평을 연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회 변화와 그것이 가져다준 인간의 의식 구조 변화에 대해 눈을 떴다.
인간이 인식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인간의 의식은 인식을 어떻게 재구성하는가?
두 눈으로 본 것이 사실인가? 믿을 수 있는가?
근대 화가들은 현실과 인식이 과거 살롱의 주인들이나 평론가들이 보듯 단단히 결합하여 있는 게 아니라고 봤다.
현실과 인식 사이의 균열이 만들어놓은 틈 사이로 새로운 빛을 보고 그 빛이 시간에 따라 춤추는 것을 포착한 사람들이 '인상파'였다.
인상파 화가들은 익숙했던 세계와는 질이 다른 세계가 출현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세계를 '본'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이어지는 '물음'들이 나온다.
과거의 낡은 것들은 정당한 것인가?
낡은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이행기에 필요한 행동은 무엇인가? 이미 무너지고 있는 질서를 옹호하는 아카데미와 살롱의 권력자들은 인상파의 무례한 도전을 진압하려고 했지만 이미 시간을 담은 열차는 떠난 뒤였다. 인간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색채를 띠고 있다. 모든 대상은 인간의 망막이 인식하는 색채라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이 자명한 색의 세계에서는 어떤 질문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대상을 사진기로 촬영하려고 하면 색채로 구현되는 세계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색채가 아닌 다른 것을 봐야 한다. 필름을 장착한 사진가가 봐야 할 것은 광도의 세계이다.
즉 색이 아니라 빛을 봐야 한다.
빛은 색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도 하다.
색채를 보아야 하지만 색채를 보아서는 안 되는 것에서 새로운 빛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인상파들은 이 빛의 영역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인상파가 이전과는 다른 소재들 - 풍기 문란하거나, 씨를 뿌리는 농민이나 일하는 노동자들, 피곤함에 지친 채 여행하는 사람들 -을 다루게 되는 데 이것은 새로운 눈으로 대상을 현상해 일반인들의 낡은 의식을 바꾸는 도우미가 된다.
인상파 화가들이 도입한 빛의 현상 장치에 리얼리즘(사실주의)이란 상표가 달렸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인간이 걸어 나와 본 최초의 빛이 사랑하고 노동하는 리얼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인상파가 일으킨 혁명은 빛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때의 자연은 재구성된 자연, 규격화된 자연, 학계가 제시한 '자연스러움'의 기호들을 벗겨 버리고 화가의 눈으로 다시 본 자연이다.
삶의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느낀 화가의 눈에 비친 들판을 달리는 기차는 꽤 이질적인 대상이었다.
막 인류에게 등장한 철도는 고흐에게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질적인 존재였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거대한 쇳덩어리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한없이 왜소해 보인다.
궤도 위에 올라탄 철마가 커다란 기적으로 포효하고 달리기 시작한 뒤에는 인간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길을 비켜줘야만 한다.
기계 문명의 새로운 시대를 연 쇠로 된 괴물을 화폭에 담으면서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던 화가의 심정은 어땠을까?
-프레시안 기사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