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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손명숙 목사님께서 전해주십니다. 손명숙 목사님께서 이제 은퇴하실 연세가 되셔서 11월 마지막 주를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를 사임하고 한국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래서 오늘 고별 설교를 준비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큰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거룩한 주일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전서 디도서와 함께 보통 목회 서신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목회 서신은 목회자와 교회의 리더들에게 권면하고 당부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특히 디모데후서는 대사도 바울이 사역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사랑하는 아들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쓴 편지 글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쓴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유언 같은 그런 느낌이 있어서 디모데후서를 읽게 되면 굉장히 긴 여운이 남게 되면서 마음에 감동을 주는 글입니다.
저도 이제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오늘 그동안에 저의 사역을 간략히 정리하여서 설교라기보다는 간증 같은 은혜를 오늘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선교 여행 출발 시에 바나바의 조카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인지의 문제를 두고 바나바와 심히 다툰 후에 두 사람은 서로 갈라지게 되는데요. 그때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이때 디모데를 제자라고 부르는데요. 이 디모데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역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은 결코 결국 하나님께도 좋은 평가를 받고 칭찬을 받을 사람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디모데는 어머니가 유대인입니다. 아버지는 헬라인입니다. 그런데 유대법에 의하면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아버지가 헬라인이라도 디모데는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교 여행을 출발하면서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준 이후에 선교 여행을 출발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은 마가를 버리고 디모데를 선택한 모양새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바울이 친히 찾아가서 디모데를 택한 이후에 그는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사랑합니다. 그는 지난날 보았던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하며 그의 거짓없는 믿음으로 인해 디모데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이 눈물은 바울이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들고 오는 길에 밀레데오에서 일어났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만나고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거둬왔는데, 얼마나 바울이 바빴으면은 에베소에 들리지 못하고 에베소의 장로들과 성도들을 밀레도에 불러서 잠깐 얼굴을 본, 그때 그때 헤어지면서 교인들이 눈물을 흘렸는 그 사건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때 디모데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떠올리면 바울의 마음이 아프고 더 간절히 디모데가 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의 바울은 2차 투옥되어서 죽음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누가만 남아 있다 이렇게 4장 9절에서 11절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면은요. 대만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로니카로 갔고, 그리스계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렇게 다 떠나가고 누가 만나 이런 상황에서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합니다.
바울은 기도 중에도 디모데를 항상 기억했다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23절에 의하면 디모데에게 대한 당부 중에 건강을 염려하면서 너는 물만 마시지 말고 내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디모데는 육체적으로도 병약한 상태로 보이고 거기다 바울이 지금 갇혀 있어서 두려움에 빠진 듯합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두려움은 결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님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저 역시 두려움이 올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각적으로 물리칩니다. 저는 여기서 눈물에 대해서 이제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의 사역 중에서 세 번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장면들은 인간의 아픔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의 정을 보여주며 각각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은 누가복음 4장 19절에서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데요. 누가복음 4장 19절을 우리가 다 함께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에게는 눈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도 애통함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 사역의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저는 그저 흉내만 내었을 뿐인 저의 사역의 은혜를 함께 나누어보면요. 저는 지난날의 삶이 그러니까 신학하기 전에 지난날의 삶이 결코 만만치 않았고, 그 아픔을 안은 채 부름을 받다 보니 자연적 그런 성도들을 주목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눈물은 상실 아픔 또는 감동 환희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우리는 슬플 때도 울지만 기쁠 때도 웁니다. 그래서 눈물의 양면성이라고 볼 수 있겠죠.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과 아픔, 그 아픔이 회복 치유될 때의 감동과 환이 이런 것들은 나에게 보내준 사람들과 함께 나누게 된 큰 은혜였습니다.
그 자세한 이야기들은 여기서 다 나눌 수가 없고 이렇게 짧은 말씀으로 전하게 되는데요. 특히 눌린 자와 갇힌 자를 자유롭게 하신 주의 사역을 생각할 때 갇힌 청소년들을 위한 사역이 특별한 은혜로 제게 다가오는데요.
이 말씀은 제가 설교 중에 여러 번 전한 적이 있는데 그때가 저의 신학 학부 시절이었습니다. 학부 시절인데 그때 제가 예향회라는 모임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 예향회는 예수 향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임은 서울소년분류심사원에서 이루어지는 청소년 사역입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매주 수요일날 팀을 이루어서 이제 하는 사역이었는데요. 특히 시험 기간에는 이 팀 사역에 함께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생각하기를 우리가 신학 공부를 하는 이유는 결국 이런 일을 위해서 하는데 내가 공부보다는 그곳에 그 아이들을 가서 만나는 게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시험을 뒤로 미루고 뒤로 미루고 그 아이들을 만나러 달려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그 아이들이 지나고 보니 그 겪는 아픔이 너무 컸습니다. 거의 90% 정도가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었고 그래서 새벽마다 제가 그 아이들을 너무 위에서 너무 울어서 나중에 교회에서 어떤 소문이 났냐 하면은 그 당시 제가 남편에게도 가시고 이제 저 혼자 있었는데요.
손 집사가 새벽마다 새벽기도회 때 많이 울더라 이런 소문이 났어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때 그렇게 눈물로서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쳤던 그 아이들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할까 이렇게 궁금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가 있었겠지 이렇게 믿을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니까 그네들에게 준 은혜가 내가 보다도 제가 그 아이들에게 준 은혜보다도 오히려 제가 받은 은혜가 더 컸습니다. 그래서 그 사역 이후 저는 전적인 후원에 의해 신대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사역하는 중에도 저의 연약함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열정에 새롭게 불을 붙여주셔서 가야 할 길을 가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8절 말씀에 보면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요. 저는 말씀을 읽으면서 고난받는 게 누가 받는 걸 좋아하겠습니까?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고난을 받으라고 단호히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다는 그런 경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바리스탄 장로교회 오기 전에 예전 한국교회에서 11년간의 사역을 했는데요. 그 지난 교회 11년의 사역은 기쁨도 컸지만 그만큼 고난도 컸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지나간 교회 역사를 다 지우고 새롭게 새 시대를 여는 그런 아픔이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의 그 어려움과 혼란은 제가 그걸 눈으로 다 보고 다 겪었는데요. 어쨌든 그 고난이 있는 현장으로 약한 나를 부르심에는 9절 말씀을 적용하고 싶습니다.
9절 말씀을 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오, 오직 자기의 뜻과 영혼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렇게 거룩한 소명으로 나를 부르심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존재로 생각하면은 너무도 보잘것없는 보잘것없으나 오직 당신의 뜻과 영혼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함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약한 자를 들어서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제 나이 50에 신학을 시작할 때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이 있죠.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린다. 우리가 이런 말을 주로 쓰는데 제 주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정말 너무 많이 말리면서 우려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1차적인 사역을 마치고 또 파리에 와서 사실 저는 파리에 온 동기가 제 딸이 주전으로 와서 근무하는 바람에 그때는 딸이 이제 살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렇게 따라왔다가 결국에는 바리스난 장로교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파리 선한 장로교회 사역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저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너무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불러서 다시 나를 사용하여 주신다는데 대한 감사가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사역의 장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종 성원용 담임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는데요. 제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연하는 것은 그 일이 인간의 뜻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일 것이다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더 열심히 일을 하지 못한 게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고요. 그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제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파리 선한장로교회를 이제 몸은 떠나 있어도 기도로서 함께 동역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쉬움을 중에도 그래도 아쉬움 중에도 그래도 위안이 되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 11절 말씀에 있습니다. 제게 그래도 그렇게 제가 제대로 사역을 못해서 정말 힘들고 괴로운 마음이 들 때 11절 말씀에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선한 교회 사역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누렸습니다. 부족하지만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한 것은 저에게 교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성경 단톡방을 이끌어오면서 그동안 형편과 사정상 신학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 일년에 성경도 일독도 하지 못한 부끄러운 그런 저였었는데 그런데 정말 말씀을 마음껏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로 기도할 때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최상의 것을 주신다는 기도를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지금 그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그 시간은 정말 제 인생 최상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특히 올해 2024년에는 특별히 말씀을 읽다가 막히는 부분을 뚫어보기를 작정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다 보면 막혀서 이해가 안 되고 어려운 부분이 있죠. 그래서 그런 부분을 좀 뚫어보자 이러면서 거의 그 일은 이제 오전에 거의 주석 주석과 보도 자료를 통해서 이제 말씀을 깊이 이제 공부하게 저 개인적으로 공부하게 됐는데요. 그 일은 오전 반나절이 거의 다 가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데 저만 은혜를 받았는지 아니면 함께한 그 성경 단톡방에 여러분들도 은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정말 영적으로 육적으로 회복과 간긍케 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영적으로는 관계 되었다는 것을 제가 증명해 보일 도리가 없고요. 육적으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은 제가 1년 8개월간 파리 순환 장로교회 사역을 했는데 한 번도 감기를 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강건하다는 말을 할 때 영육이 강건하다고 표현하죠. 그래서 영혼이 강건하다. 영혼이 강하면 육신도 강건하고 또 육신이 강건하면 영혼도 강건하고 제가 얼마 전에 이 어깨가 너무 심하게 아파서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몸이 아프면 영혼도 강건할 수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어쨌든 감기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라데팡스에 사는데요. 라데팡스는 어떻습니까? 빌딩의 숲을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빌딩의 숲을이 있는데 라데팡스 건물의 숲 사이 햇빛이 비치고 건너편 카페에서 저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들을 멀리 창 밖으로 바라보면서 말씀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그래서 어느 곳에 있든지 제가 이 라디팡스를 파리를 떠나서도 어느 있든지 그런 귀한 시간이 이어지게 되는 이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또 원하고 바라기는 저와 함께 말씀 읽기를 한 모든 분들이 동일한 은혜를 누렸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간증에 가까운 말씀을 마치면서 저의 닉네임은 주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어떻습니까? 심부름꾼 저 너무 마음에 들더라고요. 근데 이 주님의 심부름꾼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냐 하면은 예전에 제가 눈부시게 푸르른 젊은 날에 여러분 모두 젊은 분들은 지금 눈부시게 푸르른 날입니다. 지나고 보면 이제 그리운 때 그는 눈부시게 푸르른 날에 교회 회복에 시를 솟었는데 너무 오래돼서 이제 기억이 안 나요 안 나고 이제 마지막 소절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있는데 주님의 주의 심부름꾼 되는 그날에 그분의 사랑이 온 누리의 햇살처럼 바람처럼 이런 구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고 보니까 신학교 부름을 받았을 때 내가 그때 주님의 심부름꾼 된다는 얘기를 그때 왜 했었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사역이 저의 사역이 어떤 것도 제 것이 없고 저는 오직 그분의 심부름을 충실히 한 날들이 되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서 61장 말씀의 은혜 속으로 여러분 모두를 초대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사야서 61장 말씀 1절에서 3절 말씀을 다 같이 힘을 주어서 큰 소리로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절 말씀 시작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물은 시온넷을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죄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시니라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